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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레이지'에 도로 한 가운데서 주먹질

    로드레이지(노상 분노) 때문에 발생한 폭행사건이 백주 대낮 차도 한 복판에서 벌어진 모습이 동영상에 잡혔다. 이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로드레이지가 점차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로 풀이된다.    이 사건을 직접 촬영한 목격자인 가브리엘라 애탄시오는 13일 오후 3시경 채스워스 스트리트와 제네스타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이 지역은 그라나다 힐스 차터 고등학교가 위치한 곳에서 수 분 거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목격자는 가족과 함께 이 지역을 지나다 무슨 영문인지 알고 싶어 동영상을 찍게됐다고 밝혔다.    동영상에는 오토바이 운전자와 픽업트럭 차량에 타고 있던 남성이 서로 주먹질을 하며 싸우는 장면이 담겨 있다.    목격자는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혹시라도 총을 꺼내들지 않을까 두려웠다면서 샌퍼낸도 밸리 지역에서 운전하면 이런 종류의 로드레이지는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목격자는 자신이 촬영한 동영상을 LA 경찰국에 전달했으나 경찰에 정식으로 사건이 접수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경찰 측은 폭행에 연관된 사람 중 어느 한쪽이라도 사건에 대해 신고해야 하는데 그 어느 쪽도 신고한 사람이 없다고 밝혔다.  김병일 기자로드레이지 주먹질 오토바이 운전자 밸리 지역 la 경찰국

2023-06-14

노바크, 베트남 현지 기업과 자사 제품 총판계약 체결

        국내 오토바이 용품 브랜드 노바크(NOVAC· 대표 최재호)는 베트남 오토바이 용품 유통기업 ‘NP Workshop’(이하 NP 워크샵)과 베트남 현지 총판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NP 워크샵 총괄 매니저 응노하이퓌는 “베트남 내 한류 열풍으로 한국브랜드를 검토하던 중, 노바크 제품의 디자인과 품질력에 대한 강한 확신을 얻었다”며 “실제로 베트남 시장 내 시범 판매 결과, 긍정적인 소비자 피드백을 받는 등 성공 가능성을 확신해 이번 총판 계약을 먼저 제안하게 됐다”고 전했다.   NP 워크샵은 2018년도에 설립된 호치민 본사를 둔 오토바이 용품 기업이다. 오토바이 용품 판매부터 라이딩 투어 여행사업까지 비즈니스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수년 내 다낭, 하노이 등 현지 주요 도시로 매장 확장 계획을 갖고 있는 점이 현지 파트너사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바크는 향후 NP 워크샵과의 협업을 통해 현지 모토쇼 전시회 참가, 베트남 웹사이트 개설로 우수한 제품력을 알리고, 현지 소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채널을 늘려간다는 방침이다.   최재호 대표는 “오토바이 수요가 높은 국가인 베트남 시장 공략을 위해 오랜 시간 코트라(KOTRA)의 수출사업을 통해 파트너사 발굴 및 시장 개척을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며 “베트남 시장에서의 성공을 교두보로 삼아, 오토바이 수요가 높은 인근 아세안 지역 국가로 진출하는 등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토종 대표 오토바이 용품 브랜드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중 기자 (park.wonjun.ja@gmail.com)총판계약 베트남 베트남 오토바이 베트남 시장 노바크 제품

2022-10-11

[시카고 사람들] ‘C&R Dental Lab’ 빈스 김 대표

블루밍데일 소재 ‘C&R Dental Lab’을 운영하며 치과 기공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빈스 김(56•사진) 대표   지난 1993년 아내와 함께 도미해 가족과 친척들이 있는 시카고에 정착했다. 세탁소, 태권도 사범 등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한 그가 치과기공사 일을 배우고 덴탈 랩에서 근무하던 중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그는 “그 동안 가격 덤핑 같은 중국의 위협적인 마케팅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 일의 마지막 공정은 사람 손이 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며 “정교하고 섬세한 수공 작업이 따르는 분야”라고 강조한다. 이어 “고객(치과의)들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20년 동안 쌓아 온 신용 덕분에 제품의 퀄러티를 중시하는 저만의 고객을 확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어린 시절 여의도 5∙16광장에서 펼쳐지던 오토바이 경기를 지켜보며 이를 동경했던 그는 지난 2010년 유명 오토바이 ‘할리 데이비슨’ 한인 바이커 동호회에 가입했다. 미국적인 할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함께 즐기며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고. 할리 바이커의 매력에 대해 그는 “남성미를 뿜어 내며 남자다운 특유의 엔진 소리를 듣고 달리는 해방감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시카고는 모든 면에서 무난하며 교육 수준이 높고, 다른 지역과 달리 큰 자연재해가 없는 곳으로 안정되고 차분한 분위기가 좋다”고 말한다.   김 대표는 최근 자신이 돌봐 준 조카, 스티브 김이 화제의 인물이 되면서 주위 사람들의 격려가 늘어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지난 7일 로스앤젤레스 커뮤니티 칼리지(LACC) 졸업식 연설에서 한국계 이민가정 학생 사례를 언급하며 시카고 출신 청년 스티브 김을 소개한 것이다. 당시 바이든 여사는 “마침내 스티브 김을 만났네요. 스티브는 미국에 보답하기 위해 해병대서 5년간 복무했으며,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힘든 시기를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이겨냈다”고 칭찬했다.   김 대표는 국민학교 4학년 시절부터 돌봐준 이모부와 이모에게 항상 감사한다는 스티브가 잘 성장해 줘 오히려 고맙다고 전했다.   아내(김영민)와의 사이에 조카 스티브(29)를 비롯 두 딸 카니(27)와 레이첼(21) 그리고 막내아들 이안(15)을 두고 있는 그는 성정하상 성당에 출석하며 블루밍데일에 거주하고 있다.     박우성 위원시카고 사람들 dental 빈스 dental lab 오토바이 경기 시카고 출신

2022-06-24

[김창준] 4·19 혁명 직후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19〉 손에 200불 쥐고 유학길 올라 영어 문제 극복하며 아르바이트로 버텨 '땀 흘려 일해야' 대가 삶의 기본 깨달아   군대에서 빨리 제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부패가 만연했고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더 오래 있어 봤자 안 좋은 것만 계속 볼 것 같았다.     당시 군대 의무복무기간은 36개월.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의병 제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대전에 있는 63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병명은 악성치질.   병원에서는 주말마다 외출증을 끊어주며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다. 주말에 배급되는 내 양식을 빼돌리기 위해 나를 내쫓는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군 고문관들로 구성된 병원 감사반이 들이닥쳤다. 계획이 틀어졌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만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급한 대로 치질 수술을 했다. 멀쩡한 생살을 찢고 꿰맨 것이다. 그런데 수술 후 처리를 잘못 했는지, 수술 부위가 감염돼 엄청난 고생을 했다.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를 했다.     치질 수술 부위는 계속 말썽을 일으켰다. 잘 걷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한동안 고생했다.   어쨌든 조기 제대를 했다. 미국 유학 시험 준비를 서둘렀다. 서울대 문리대 안에 있던 한국외국어학원(FLI)을 찾아가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FLI는 한국 정부에서 유학 준비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정식 영어교육기관이었다.     그날도 FLI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서울 효자동 전차 종점 부근에서 경찰이 길을 막았다. 경찰 어깨너머로 사람들 머리가 새카맣게 밀려들었다.   “이기붕을 죽이고 이승만은 물러가라.”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나도 겁에 질렸다. 몸을 웅크리고 뛰었다.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선거도 부정으로 얼룩졌다. 정권연장에 눈먼 이승만 정권은 부정선거를 저질러 학생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그날 내가 맞닥뜨린 것이 4·19 혁명이었다.     유학 시험은 국사 과목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석 달 만에 다시 치러 합격했다.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이승만 정부가 물러났다. 허정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사회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호적초본을 떼는 데도 양담배 한 통을 건네줘야 했다. 국방부에 출국증을 받으러 가니 담당 직원은 양복 한 벌을 요구했다.   모든 수속을 끝냈다. 미국에 가져갈 수 있는 한도액 200달러를 손에 쥐고 1961년 1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포벌판을 날아오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웅 나오셨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채피 대학이 있는 LA 인근 업랜드(Upland) 시에 방을 얻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도시였다. 미국에 도착하니 온갖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영어가 문제였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외국어학원에서 도대체 무얼 배운 것인가’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1961년 당시만 해도 남가주에는 아시안이 적었던 시절이다. 나는 세계 최빈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는 “파던(pardon: 뭐라고요)?”이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서머타임을 몰라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기다린 적도 있다. 친척도, 친구도, 돈도 없었다. 아파도 혼자였다. 미국 교회를 가려 해도 여의치 않았다. 잘 알아듣지도 못할뿐더러 일요일에도 일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할 때였다.   ‘내가 미쳤다고 왜 이 타지에 왔지?’ 미국에 온 지 2주도 안 돼 가난과 부패에 찌든 한국이 너무도 그리웠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뿐이었다.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주님, 제 옆에 바짝 붙어 지켜 주세요. 저 혼자서는 이 고난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말 자동차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자동차 살 돈이 없었던 나는 중고 오토바이 한 대를 샀다. 그걸 타고 동네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해 생활비를 벌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오토바이 운전 실력도 늘었다.   어느 날, 철길 근처에서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간 오토바이가 ‘붕’하고 높이 떠올랐다. ‘아, 기분 좋다’하고 생각한 순간 내 몸이 포물선을 그리며 오토바이에서 튕겨 나갔다. ‘쿵’하고 오토바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사고가 난 지 이틀이 지났다고 했다. 정신을 잃었을 뿐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원실을 나가려 하자 병원 관계자들이 들이닥쳤다. 병원비를 정산하라고 했다. 200달러 들고 와 방을 얻고 오토바이를 샀으니 무슨 돈이 남아 있겠는가. 들어놓은 보험도 하나 없었다.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병원 관계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란 점을 고려해 병원비의 4분의 1만 받고 나머지는 학교에서 받아갔다.   명동 암달러상한테 바꿔온 돈 200달러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일푼이 된 나는 방값이며 밥값을 버는 게 급선무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2개 이상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았지만, 새벽이면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일어났다.   병원 청소도 했다. 업랜드에 있는 샌안토니오 병원의 더러운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고 피고름 묻은 거즈가 가득한 쓰레기통을 치웠다. 서울이었다면 코를 틀어막고 도망갈 일이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뀌니 못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에서 누구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훗날 나는 샌안토니오 병원을 다시 찾았다. 그 병원에서 지역구 연방하원의원을 초청했다. 병원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나를 맞아주었다.   “저는 이 병원을 잘 압니다. 매일 밤 제가 청소하던 곳이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농담이 아닙니다. 30년 전 저는 이 병원의 청소부였습니다. 마룻바닥 닦는 일을 제일 많이 했지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손뼉 치며 환호했다.     미국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학교 수업도 따라가기 힘든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영어도 못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했다.   서울에서는 돈과 ‘백’에 의지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내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만 먹을 수 있었다. ‘1+1=2’라는 삶의 기본을 깨달아가는 날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지독하게 혐오하면서도 정작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아버지 힘을 빌려 손쉽게 모든 일을 해결했다.   미국에서 마음이 자유롭고 편안해진 이유. 그것은 나의 힘으로 뭔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미국 혁명 병원 감사반 중고 오토바이 부정선거 책임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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