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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아빠, 오빠, 자기야

‘오빠’라는 낱말이 한동안 한국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었다. 논쟁의 핵심은 오빠라는 호칭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 친오빠냐 남편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웠다. 우리말에 부부 사이의 호칭이 참으로 애매하고 느슨해서 생긴 희비극이었다.   지난 시절에는 남편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 한동안 유행했었는데, 이는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부르는 것인지 남편을 부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일본식 어법으로 알려진 말이므로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고 우리말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아빠’가 ‘자기’를 거쳐 ‘오빠’로 진화(?)한 모양이다. 요새 젊은 아내들 사이에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연애 시절에 부르던 호칭을 결혼 후에도 그냥 자연스럽게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호하게 말해서, 아빠건 오빠건 그건 명백한 ‘근친상간’이다. 그러니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세상이 된 셈이다.   보통은 ‘여보’, ‘당신’이 일반적 호칭이지만, 어쩐 일인지 안 쓰는 부부가 많은 모양이다. 특히, 신혼의 젊은 부부들은 매우 어색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개 씨, 아무개 아빠, 저기요, 이봐요, 나 좀 봐요 등으로 얼버무린다.   남편을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호칭어가 ‘여보’인데, 이 말이 부부간의 호칭어로 정착된 것은 뜻밖에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20세기 초, 중반에도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다.   한편, ‘오빠’라는 호칭은 조용필, 나훈아, 남진 같은 가수들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오빠부대’에서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지금을 K-팝 열풍 덕에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어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편이 오빠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럽게 알맞은 호칭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에 대해 우리말 전문가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해서, 전문가가 권하는 표준안 하나를 예로 살펴본다. (출처: 한국다문화사회연구소)   남편을 부르는 호칭 △신혼 초- 여보, ○○씨, 여봐요 △자녀가 있을 때- 여보, ○○ 아버지, ○○아빠 △장년, 노년- 여보, 영감, ○○할아버지   아내를 부르는 호칭 △신혼 초- 여보, ○○씨, 여봐요 △자녀가 있을 때- 여보, ○○엄마, ○○어머니 △장년, 노년- 여보, 임자, ○○엄마, ○○할머니   아무튼, 흔히 쓰는 자기, 오빠, 아저씨 등은 안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하나같은 주장이다.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자기 아내를 ‘와이프’라고 부르는 것을 흔히 보는데, 이런 호칭도 어딘가 어색하다.   이런 식의 문제에 부딪힐 때면 떠오르는 것이 우리말을 지극히 사랑한 선구자들이다. 백기완, 이어령, 소설가 김동성 같은 분들….   이어령 선생은 자신이 이룬 숱한 업적 중에서 가장 보람있게 여기는 일로 ‘갓길’이라는 낱말을 정착시킨 것을 꼽은 바 있다. 백기완 선생의 우리말 사랑은 참으로 지극하여, 글을 쓰고 말을 할 때도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등의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우리말 사랑은 김지하, 김민기, 전인권 등 많은 문화예술인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다.   우리 한글은 매우 과학적이어서 배우기 쉽다고 하는데, 사실은 깊이 들어갈수록 정말 어렵고 속 깊은 언어다. 호칭이나 존댓말 등도 그렇다. 잘 찾아보면, 부부간의 호칭도 아름답고 정겨운 순우리말이 있을 것 같은데….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아빠 오빠 아빠 오빠 아무개 아빠 우리말 전문가들

2024-11-21

[문예 마당] 슬픔과 함께 고향의 추억 속으로

어릴 적 친정아버지가 꾸민 서재에는 보물단지 책상 하나가 있었다. 큰오빠가 이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 연유로 고등학생이던 나의 두 사촌 오빠가 교대로 우리 집의 그 책상에서 공부하다 가는 날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 오빠의 아들들이었다. 그런데 큰집의 막내아들인 오빠는 서울대에 들어갔고 작은집의 오빠는 후기 대학에 합격했다. 최근 큰집 오빠의 부음을 작은집 올케로부터 들으며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올케는 남편이 장례식에서 서럽게 울더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고인이 된 오빠는 자기 형처럼 유명한 농대를 졸업했지만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잘 난체도 열등의식 같은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다.     큰 외갓집은 어머니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양자로 들어오신 삼촌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1928년은 딸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어머니는 그 삼촌과 공동명의로 논밭 조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있었지만 나는 큰 외사촌 언니와 오빠를 좋아했다. 시청 근처인 광산동에서 외삼촌은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오래 운영했다. 그리고 외삼촌 댁 이층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면 초중고생 사촌들이 모였다. 차례로 교자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오빠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유명회사에 지원했지만 잘 안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빠는 결국 외삼촌처럼 자전거 대리점을 양동 상가에 차렸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결혼했다. 올케는 우리 동네 이웃의 착한 딸이라며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당시 올케도 나처럼 교사여서  퇴근길에 오빠네 가게에 들러 올케랑 이야기도 종종 나누며 정도 들었다. “아가씨, 오셨수?”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고향에 가면 꼭 하루 자고 싶은 그 다정한 오빠와 올케네 집.     얼마 전 한국의 한 지인이 나에게 공진단을 보내준다기에 대신 그 오빠에게 선물해 달라고 했다. 오빠는 그때 간암 투병 중이어서 본인이 먹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공진단을 보내준 지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갔었다고 한다.     오빠의 병환 중에 가끔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최근 내가 병원에 다니느라 잠시 소홀했더니 그사이에 별세한 것이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잘 있냐, 애 아빠 잘 계시냐”고 말했던 오빠였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예쁜 동생아, 좋은 글 많이 써라”였다.  보고 싶은 오빠, 우리가 모르는 고민 다 떨구시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구려. 최미자 / 수필가문예 마당 고향 추억 어머니 오빠 막내아들인 오빠 오빠네 가게

2024-08-29

[문예 마당] 기다림

  요즘 들어 몇 가지 꼭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1주일에 서너번씩 공원에 가서 산책하는 일이다.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다. 나무들이 뿜어 내놓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내 몸의 나쁜 것들을 싹 씻어 낸 기분이다.  봄이 되면서 피기 시작한 꽃들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선화가 피고, 동백이 수줍게 피고, 튤립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군자란의 주황색 나팔꽃들은 어느 신부의 부케를 연상케 하고 연분홍 벚꽃은 새색시 얼굴처럼 쏙 내밀어 주위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어릴 때 집앞 강당에서 많이 보았던 박티나무는 밥풀 모양의 몽우리를 내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어느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이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병석에 누워있는 사촌 오빠다.       지난 늦가을에 한국에 여행 갔을 때 일이다. 가족 모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촌 오빠가 없었다. 몸이 안 좋아 연락만 했다는 것이다. 말이 사촌이지 어릴 때는 거의 같이 살았다. 방학이면 오빠는 도서관에 오듯이 책을 들고 우리 집에 와 공부를 했다. 그런 오빠를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오빠는 아침을 먹고 우리 집에 왔다. 사랑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점심때가 되면 조그마한 산 등을 내려가 자기 집(큰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온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 특히 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가곡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가고파’를 목청껏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고 난 후의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번 여행에서 우리 오빠와 사촌 오빠를  만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쓰고 싶어졌다.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일 가운데 하도 기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지나온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가난한 처지에서도 꿈을 이루신 분이셨다. 우리 자매들보다도 두 오빠는 더 열심히 들었고, 사촌 오빠는 종손답게 질문도 곧잘 해서 아버지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아버지는 두 오빠의 직업까지 정해놓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 주셨다. 다행히 두 오빠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정해 온 길을 착실히 걸어 꿈을 이뤄 가문을 빛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사촌 오빠 집에 병문안을 갔다.  듣기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빠는 운동도 좋아해서 젊었을 때 주말이면 테니스도 하고 나이 들어서는 골프도 쳤다.  원래 키가 훤칠한 호남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의 청백함은 그를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꼈다. 어떤 불의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던 오빠도 병마엔 어쩌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식사를 같이 못 해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그의 따뜻함에 사양 한번 못하고 말았다.     봄이 되면서 공원에 있는 모든 들풀까지도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못 보던 풀꽃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읊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풀꽃을 보니 조바심이 더 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에 오빠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빠는 그 옛날 우리 집 앞 강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빨강 동백을 기억할까? 꿈을 이루려 공부만 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숲 사이로 군데군데 놓여있는 벤치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곳에 앉아 그 옛날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일본 순사를 보기 좋게 혼내 주고 피신 다녔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다. 그 뒤로 오빠는 다행히 병의 원인을 찾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 기다려진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사촌 오빠 우리 오빠 고등학교 음악책

2024-05-30

[사진의 기억] ‘어린이’라고 쓰고 ‘희망’이라고 읽는다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 갔을까. 그 시절엔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딜 가나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새들의 합창 같았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를 때까지 해가 저물도록 뛰어노는 아이들로 골목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더구나 겨울방학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음박질치는 이 아이들의 해방된 장난기가 곧 온 동네를 활기차게 휘저을 것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시작되기 전까지 한 가정에 아이들 네댓 명은 보통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사오십 년, 혼자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언니, 오빠, 형, 누나라는 다정한 호칭은 무용해졌다. 아울러 과꽃이 피면 유난히 과꽃을 좋아하던 시집간 누나를 그리워하고, 뜸북새 울면 서울 가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오빠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과꽃’이나 ‘오빠 생각’ 같은 동요는 아주 오래전의 정서가 되었다. “둘만 낳자”가 “하나만”으로 바뀌고 농담처럼 “한 집 걸러 하나씩”이 회자 되더니 급기야 학교도 동네 골목도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출산의 서슬에 화들짝 놀라 “동생 낳아주기” 캠페인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엄청난 반전이다.   사실 아이들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서 비록 고난 속에서라도 꿈을 이루려고 애쓰는 자체가 자연스러운 삶인데, 우리가 편의적인 잣대로 너무 성급하게 다음 세대를 재단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완전히 뒤집힌 정책이 과거 우리의 결정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지 못했는가를 말해준다. 어린이가 희망인 이유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사라지면 학교도 사라지고 교사도 사라지고 꿈이 사라진다. 한겨울 추위에 가방도 없이 책보를 끼고 다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던 아이들. 지금 사진 속 이 아이들은 모두 어디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때 길 위에서 만난 거침없고 해맑던 아이들을 소환해본다. 김녕만 / 사진가사진의 기억 어린이 희망 동네 골목 오빠 생각 언니 오빠

2024-01-28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부조리와 반항

알베르 카뮈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백인이지만,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말할 때 ‘부조리’를 떠올린다. 부조리는 원래 ‘이치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카뮈의 부조리는 조금 다르다. 그의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은 아무런 목적 없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럼 살 필요가 없는 것인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소설 ‘이방인’은 1942년 작품이다. 그가 29세에 나온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한번은 들어 봤다는 첫구절은 이렇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나뉜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을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우연히 오랜만에 만난 여인과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본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잔다. 그는 건달에 포주였던 이웃남자와 친하게 지낸다. 이웃남자는 자신의 아랍인 여자친구가 외도를 한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폭행한다. 그리고 여자 친구의 오빠인 아랍인과 다툰다. 이때 우연히 싸움에 말려든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 오빠를 총으로 죽인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는 법정공방이다. 법정에서 뫼르소는 살인의 이유를 말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랍인 오빠가 칼을 빼들었기 때문에 총을 쏜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아랍인을 죽였다고 말한다. ‘아랍인이 빼든 칼에 비친 태양빛’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법원이나 교도소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당시에 프랑스인이 아랍인을 죽이는 것은 큰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은 그는 사형을 받는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감옥에 신부가 찾아온다. 그는 신을 부정하며 신부를 내쫓는다. 그리고 한숨 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평화를 얻는다. 자신의 삶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세상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과 자신의 동질감을 발견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 그리고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카뮈는 인생과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 한다. 계속되는 세계대전과 비이성적인 세상 속에서 당시의 젊은이가 부조리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부조리를 느끼는 인간은 결국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카뮈의 대답이 “반항하는 인간”이다. 카뮈 스스로가 가장 좋아했다는 1951년 작품, ‘반항하는 인간’에서 그는 부조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이야기 한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자살한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그저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부조리하고 의미 없는 세상에서도 운명에 도전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반항적인 반응이다. 누구에게 반항할 것인가? 그는 독재자와 이토록 무의미한 세상을 신이 만들었다면 신에게 반항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항할 것인가? 독재자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어린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세상을 만일 신이 만들었다면 신에게 반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신을 조롱하듯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의미를 찾으란다. 그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이렇게 바꾼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외롭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부조리 반항 아랍인 여자친구 아랍인 오빠 알베르 카뮈

2023-10-12

[삶의 뜨락에서] 공포심

사람은 누구나 공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용감한 장군이던가 아니면 생각을 많이 한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공포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정한 사물에 대해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유치원에 갈 나이쯤 되어서 친구였던 영숙이는 송충이를 많이 무서워 했습니다. 장난꾸러기인 사내아이가 송충이를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영숙이를 놀리면 금방 울음이 터지곤 했습니다.     저의 아내는 뱀을 무서워 합니다. 플로리다에는 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뱀이 치어 죽었거나 숲속에 있는 것을 보면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하고 며칠 동안은 그 근처에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여동생도 겁이 많습니다. 한국전쟁때 안성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시골의 화장실은 뒷간이라고 하여 마당을 건너 외양간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뒷간은 엉성하여 밑의 구멍이 보여서 잘못하면 빠질 것 같고 쥐가 드나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밤에 뒷간에 가려면 여간 고생스러워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을 상을 하고 나에게 동정을 구하여 따라가서 문밖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오빠 거기 있어 가지마”라는 말을 1분에 한 번은 합니다. “그래 나 여기 있다”라고 하면 “오빠 노래를 불러봐 그러면 거기 있는 줄 알게”라고 하여 나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한 서너 너덧번 부르면 동생은 일을 보았는지 말았는지 나와서 내 손을 잡고 “춥지? 들어가”라고 손을 끕니다. 아마 어두운 것이 무서웠겠지요.     모파상도 어두운 것이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임종 전에 “아 어둡다 어둡다 너무나 어둡다”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나는 무서운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의과대학 1학년에 제일 중요한 과목이 해부학입니다. 그런데 우리 해부학 교수님은 필기시험은 없고 실기 구두시험만 있습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실습실에 와서는 누구가 공부를 하고 있는가 체크를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의 눈도장이 찍힌 사람만 패스를 시켰습니다. 나도 실습을 하는데 어느 가을밤이었습니다. 실습실에 한 대여섯명이 같이 실습을 하다가 그들은 커피 한잔 마시고 온다고 나가고 나만 실습실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습니다. 방에는 16구의 시체와 나혼자만 남았습니다. 나는 일어설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 얼어붙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그 시간이 한 시간도 넘었을 것 같은데 아마 2~3분밖에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박수연 교수님이 전등을 들고 들어오시자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교수님이 보시니 나의 얼굴이 흰 종이 색깔이고 말도 못하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불을 끄고 잠을 자지 못합니다. 자다가도 불을 끄면 일어납니다. 요새는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데를 올라가면 겁이 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겁이 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오줌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포증은 혼자 있을 때 더 심하게 나타 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여러 명이 같이 있으면, 해부학 실습실에 같은반 학생들이 전부 있으면 겁이 덜 납니다. 어린애가 어머니의 품에 있으면 옆에 폭탄이 터져도 겁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언젠가는 혼자 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두운 길을 혼자 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때는 생각만 해도 겁이 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두려워 말라 내가 언제나 너화 합께 있겠다’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더 의지하는지도 모릅니다. 너와 함께 있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내가 놓지않는 것은 오래전 뒷간에서 “오빠 거기있어”라고 하던 동생의 심정일지 모릅니다.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공포심 해부학 실습실 오빠 노래 오래전 뒷간

2022-07-15

[독자 마당] 독서의 즐거움

나는 한글을 일찍 깨우쳤다고 한다. 해방 후, 초등학교 2, 3학년이던 언니 오빠가 한글을 배우기 위해 벽에 붙여 놓은 가나다라 표와 구구단을 한글로 읽는 것을 듣고 따라 했다고 한다. 덕분에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글자를 깨우친 나는 글자만 보면 이것 저것 읽기 시작했다.     언니 오빠의 교과서는 물론 신문도 보았다. 한자가 너무 많아 한글만 건너 띄어 읽으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들어가자 읽고 쓰는 공부가 너무 즐거웠다. 국어책은 거의 외울 정도로 큰 소리로 자주 읽었다. 3학년 때 6.25가 났고 수복 후 5학년이 된 나는 그때 새로 나온 동화책이나 아동 월간지를 많이 읽었다.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 6남매에게 그런 과외의 책을 사주기가 힘이 드셨을 것이다. 공부하라고 전과나 수련장 정도만 사주실 뿐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 친구가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새로 나온 책을 가지고 왔다. 학교에서만 빌려 보기로 하고 시간만 나면 보았지만 다 읽지 못했다. 너무 재미가 있어 차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 학교가 끝나자마자 가방에 넣고 집으로 왔다.     아무도 모르게 다락으로 올라가서 보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다. 석양 빛이 환하게 비치는 다락에서 나는 숨 죽여 책을 보고 친구는 다락 밑 쪽마루에 앉아 기다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처럼 80이 되었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도 가끔 책방에 들러 신문에서 소개한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구해 온다. 요즘처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을 때 시간 보내기 가장 좋은 것은 책읽기인 것 같다. 새벽에 도착하는 신문 읽기부터 시작해 하루에도 여러 시간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책은 항상 내 곁에 있어 준 오랜 친구인 것 같다. 오늘도 책을 읽는다.  정현숙·LA독자 마당 독서 시간 돋보기 언니 오빠 시간 보내기

202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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