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마당] 기다림
수필
요즘 들어 몇 가지 꼭 해야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1주일에 서너번씩 공원에 가서 산책하는 일이다. 공원을 산책하노라면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다. 나무들이 뿜어 내놓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내 몸의 나쁜 것들을 싹 씻어 낸 기분이다. 봄이 되면서 피기 시작한 꽃들은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선화가 피고, 동백이 수줍게 피고, 튤립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군자란의 주황색 나팔꽃들은 어느 신부의 부케를 연상케 하고 연분홍 벚꽃은 새색시 얼굴처럼 쏙 내밀어 주위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어릴 때 집앞 강당에서 많이 보았던 박티나무는 밥풀 모양의 몽우리를 내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린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어느새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이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병석에 누워있는 사촌 오빠다.
지난 늦가을에 한국에 여행 갔을 때 일이다. 가족 모임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촌 오빠가 없었다. 몸이 안 좋아 연락만 했다는 것이다. 말이 사촌이지 어릴 때는 거의 같이 살았다. 방학이면 오빠는 도서관에 오듯이 책을 들고 우리 집에 와 공부를 했다. 그런 오빠를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다. 오빠는 아침을 먹고 우리 집에 왔다. 사랑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점심때가 되면 조그마한 산 등을 내려가 자기 집(큰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온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는 항상 노래를 불렀다. 특히 고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가곡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 ‘가고파’를 목청껏 불렀다. 열심히 공부하고 난 후의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번 여행에서 우리 오빠와 사촌 오빠를 만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아버지의 생애를 쓰고 싶어졌다. 거창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살아오신 일 가운데 하도 기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지나온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가난한 처지에서도 꿈을 이루신 분이셨다. 우리 자매들보다도 두 오빠는 더 열심히 들었고, 사촌 오빠는 종손답게 질문도 곧잘 해서 아버지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아버지는 두 오빠의 직업까지 정해놓고 기회만 있으면 그들이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워 주셨다. 다행히 두 오빠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릴 때부터 정해 온 길을 착실히 걸어 꿈을 이뤄 가문을 빛냈다.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사촌 오빠 집에 병문안을 갔다. 듣기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빠는 운동도 좋아해서 젊었을 때 주말이면 테니스도 하고 나이 들어서는 골프도 쳤다. 원래 키가 훤칠한 호남이어서 웬만한 사람은 그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거기다가 그의 청백함은 그를 차가운 사람으로 만들 정도였다. 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꼈다. 어떤 불의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던 오빠도 병마엔 어쩌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식사를 같이 못 해 미안하다면서 봉투를 내미는 그의 따뜻함에 사양 한번 못하고 말았다.
봄이 되면서 공원에 있는 모든 들풀까지도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못 보던 풀꽃들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읊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풀꽃을 보니 조바심이 더 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에 오빠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빠는 그 옛날 우리 집 앞 강당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빨강 동백을 기억할까? 꿈을 이루려 공부만 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숲 사이로 군데군데 놓여있는 벤치는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자아낸다. 그곳에 앉아 그 옛날 우리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일본 순사를 보기 좋게 혼내 주고 피신 다녔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듣고 싶다. 그 뒤로 오빠는 다행히 병의 원인을 찾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소식이 기다려진다.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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