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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자전거 예찬

무릎이 까이며 자전거를 탔던 시절이 있었지요. 넘어져도 아픈 줄 모르고 히죽히죽 웃고, 일어났던 그때가 생각났어요. 나비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강둑에 핀 데이지에 정신이 팔려 노을이 지는 줄도 몰랐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모르고 마냥 페달을 밟으면 새로운 풍경이 시야에 나타나고 또 사라지곤 했지요. 바람이 얼굴을 만지며 지나가면 송송 맺혔던 땀방울이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엄마가 부르는 소리는 아득해서 달빛이 가로등보다 환해질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지요. 잔잔한 시내도 가뿐히 건너고 황량한 들판도 나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신세계였어요. 꿈속에서도 별이 총총 떠다니는 하늘을 이곳 저곳 찾아다니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 꺼진 우리 집이 까마득히 보였어요.   집 앞 공원에서 한 청년이 아이들과 놀고 있어요. 햇볕이 좋은 봄날이었을 거에요. 열심히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다 흔들리는 자전거를 살짝 잡아 주기도 해요. 복사꽃이 눈처럼 날리는 공원길을 흔들흔들 위태롭게 자전거 두 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오곤 해요. 나는 알고 있어요. 높은 키의 전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저 돌아가는 길에서 넘어졌을지도 몰라요. 노란 달맞이꽃을 바라보다 넘어질 뻔했을 거에요. “자전거 뒤를 잡고 있으니 걱정 말고 페달을 밟아. 넘어질 리 없어.” “아빠 잡고 있지요? 꼭 잡아야 해요.” 잡았던 내 손이 떨어지고 자전거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힐끗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번지던 자신감이 햇살과 함께 따뜻하게 밀려왔어요.       바람이 오는 길   세월이 가는 결 하늘이 열리고 내려앉은 밤 별 어둠은 깊어서 스치는데 풀, 나무, 숲도 한 호흡   바람에 소리 없이 깊어지고   안개처럼 뿌려지는 고요      초록을 따라가는 길 얼굴을 말끔히 씻고 새벽으로 오는 이슬 같은 노오란 달맞이꽃 피어나는 앳된 봉오리 걸음을 멈춘 생각     밤새 뒤척이던 나뭇잎 사이 먼동으로 깨어나는 하늘     흔들리며 오는 그대는     낯선 길에 있어요. Chicago에서 멀리 떨어진 Wisconsin의 시골길을 달리고 있어요. 이 나이에 자전거를 타리란 생각은 없었어요. 자전거를 보는 순간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주인의 허락을 받고 밤새 잠을 설쳤어요. 바람이 얼굴을 부딪치고 지나가요. 길옆 가로수가 손짓하며 잎사귀를 흔들어요.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어요. 고요가 나지막이 깔린 이곳에 새소리가 들려와요. 바람결에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려와요.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을 씻어주던 그 유년의 바람이 이곳에도 있었네요. 언덕 내리막길을 달려요. 페달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브레이크를 가끔 잡아야 해요. 돌아오는 길, 언덕을 오를 땐 힘이 들었어요. 호흡이 가빠져와요. 기능이 떨어진 나를 탓하진 않아요.     자전거를 타는 이 짧은 시간에 걸어온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요. 행복했고, 아팠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작은 힘을 보태고, 새 소리를 들으며 평탄 대로를 걷다가도, 내 힘으론 견딜 수 없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도 해요. 페달을 밟았을 뿐인데 시간이 흐르듯 자전거는 움직였고 지울 수 없는 희로애락의 인생길들이 펼쳐졌어요. 시간이 지났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었어요. 어딘가에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가 오늘 낯선 장소,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 끄집어낼 수 없던 자전거를 통해 펼쳐지고 있어요. 그래요. 어쩌면 지나간 시간도,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다가올 미래도 찾아가는 사람의 것이 된다는 어쭙잖은 이론이 공식처럼 다가왔어요. 한 달 전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장소에서 그것도 이른 새벽 Wisconsin의 낯선 시골길에서, 빌린 자전거를 탔어요.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이야기들이 유년의 시절 불어 왔던 똑같은 바람에 실려 오고 있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자전거 예찬 자전거 예찬 새벽 wisconsin 언덕 내리막길

2024-07-01

[문예 마당] 인순이 예찬

  요즘 왕년의 한국 최고 디바 4명이 결성한 ‘골든걸스’라는 그룹이 화제다. 그중 맏언니 격인 인순이는 67세로 70을 바라보고, 나머지 3명도 환갑이 눈앞이다. 하지만 이들의 에너지 넘치는 공연은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그 중심의 인순이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래서인지 이곳저곳에서 인순이 인터뷰 내용이 많이 나온다. 얼마 전엔 한 TV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녀는 가수로 성공한 지금까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인터뷰를 본 후 인순이에 대해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됐다.     인순이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 미군이었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흑인인 아버지는 복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인순이는 “10살쯤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했다. 그런데 안 갔다. 왜냐하면, 미국에 아버지 가족이 있을 거고, 내가 가서 그 가정을 흔들기가 싫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또 홀로 남게 될 어머니 걱정도 했다고 덧붙였다. 인순이는 “다름으로 인한 모진 시선을 받았던 딸을 매서운 바람에도 꽃이 필 수 있도록 끝까지 잘 지켜준 어머니,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잘 견뎌준 어머니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인순이는 남들보다 오랜 사춘기를 겪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라가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 나라가 있다.  그럼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는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했다고 한다.  사춘기 시절 버스를 탔는데 짓궂은 남학생들이 외모를 놀리며 괴롭혔다. 그때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남학생들이 놀리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결심하고 “그래 너희들 말이 맞다”고 당당하게 맞서니 그들이 할 말이 없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과거 ‘신정아 게이트’로 한국 예술·문화계가 학력위조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인순이 이름도 도마에 올랐다. 인순이는 서강대학교에서 자신의 히트곡인 ‘거위의 꿈’을 주제로 연 특별강연에서 ‘대한민국에서 혼혈아로 산다는 것, 혼혈가수로 살면서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강연 끝에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겨우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얼마 전 기자로부터 학력을 묻는 전화가 왔길래 날 비껴갔으면 했던 것이 결국 왔구나 생각했단다. 하지만 솔직하게 다 말하고 웃는 사진 넣어주고, 욕을 먹을지언정 동정받지 않게 써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어 “사람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어 잠시 나도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며 그동안 잘못 기재된 나의 학력을 고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밝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인순이는 한국 최고의 가수이다. 그녀에게 학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순이는 도전의 아이콘이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가수들은 무대를 잃어 설 자리가 없었다.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하려고 보디빌딩 대회에 도전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거울 앞에 접착 메모지를 수십장 붙였다. ‘이러다가 잊힌다’ ‘나를 컨트롤 하고 싶다’ ‘나를 이기고 싶다’ 등 3개월 동안 지독하게 운동하고 대회에 나갔다. 등수는 처음부터 안중에 없었다. 막상 무대에 올라가기 20분 전에는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내 인생,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이면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며 무대에 올라섰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난 아무것도 못 한다. 한발 내딛지 않으면 완주도 없다. 차라리 즐기자고 결심했다. 아버지 피부를 닮아 남이 10번 선텐 할 때 3번 아버지 체형을 닮아 궁둥이가 튀어나와 오리 궁둥이라 놀림당하여 감추려 노력했는데 그게 보디빌딩에서는 힘 안 들이고 애플힙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인순이는 2013년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해밀의 뜻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이란 순 우리말이다. 여태껏은 자신을 지키고 세우는데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줄 형편이 되었다. 그 아픔을 알기에 상처받고 소외된 아이들이 겪을 아픔을 빨리 털어내도록 그들 옆에 있어 줘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해밀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그녀는 동화책을 쓰고 싶다고 했다. 단점인 줄 알았던 자신의 다름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미운 오리 새끼’ 같은 동화책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인순이를 30여년 전 가까이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노래하는 무대가 아니라 모 대학 대학원 최고위 과정에서다. 그녀는 남편과 같은 과정이었고 졸업 파티를 할 때 나도 가족으로 참석했었다. 첫인상은 수더분하고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입지전적 여성임을 알게 됐다. 편모슬하에서 혼혈아로 자라며 정체성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을 키워 나갔고, 차별과 멸시를 극복하고 가수로 성공한 용기와 노력, 아버지의 부름을 거부하고 어머니를 택한 현명한 결단, 자기의 약점을 감추지 않는 솔직함, 남을 의식하지 않는 도전정신, 대안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를 위한 공헌 등….       ‘난 꿈이 있었죠’라는 노랫말로 시작되는 ‘거위의 꿈’이라는 그녀의 히트곡은  본인의  삶을 노래로 표현한 듯하다. 인순이는 학식 높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 못지않은 VVIP 라는 생각이 든다. ‘골든걸스’에 이어 인순이의 또 다른 도전을 기대해 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인순 예찬 한국인 어머니 아버지 나라 아버지 가족

2024-05-09

[삶의 뜨락에서] 신록 예찬

6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5월이 꽃들의 잔치와 화려한 색채의 향연이라면 6월은 차분하고 곱게 익어가는 신록의 달이다. 5월이 사춘기의 소녀라면 6월은 열여덟 살의 꽃봉오리다. 날마다 하루가 다르게 녹즙이 짙어간다.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대학 일 학년 신입생 때의 일이다. 연대 뒷산 쪽으로 걸어가면 청송대(소나무 소리가 들리는 곳)를 만난다. 6월의 청송대에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 황홀경에 난 그만 휘청대며 비틀거렸다. 키 큰 소나무 사이사이로 살짝살짝 비치는 청잣빛 하늘과 햇빛을 머금은 연두 잎들이 영롱하게 빛 방울을 튕기고 있었다. 눈이 시리고 가슴이 시려 몸을 겨우 벤치에 눕혔다. 신선한 기운을 흠뻑 받아 눈을 씻고 머리와 가슴까지 씻어낸 후 눈을 감는다. 귀를 열어 소나무 소리를 듣는다. 소나무들의 행복한 재잘거림에 나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내 몸도 마음도 연두에서 녹색으로 번져간다.     봄이 여름에 바통을 넘겨주는 소리가 귓불을 스친다. 풋풋하고 싱그럽다. 신록의 향기를 전해주는 신선한 바람, 세상은 온통 푸르게 변하고 새들도 흥에 겨워 초록을 노래한다. 초록에 묻혀있던 야생화도 환하게 웃는다. 투명과 해맑음! 누가 세상을 이토록 초록으로 도배했을까. 초록에 눈이 멀어 시선 둘 곳을 잃는다. 초록의 그림자를 마시고 이 숲에서 태어난 바람이 달콤하다. 그렇게 몇 시간 연두에 취해 초록 세례를 받고 집에 돌아와 ‘신록 예찬’이라는 수필을 ‘연세 춘추’, 연대 대학신문에 기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얼마 후 휴학하고 군대에 간 많은 동문으로부터 격려의 글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최근 한 십 년 동안은 5~6월이면 먼 여행을 다녀오고는 해서 정신없이 6월을 보냈다. 6월을 즐기기에 너무 바빴던 탓도 있다. 올 6월은 오랜만에 주방을 새로 단장한 후 의자의 위치를 바꾸어보았다. 전에는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았는데 이번에는 뒷마당을 즐기기 위해 의자를 나란히 배치했다. 남편이 “올해는 유난히 나무가 풍성하고 녹음 지네” 하길래 “그동안 당신은 항상 뒷마당을 등지고 앉아서 그래” 하면서 웃었다.     초록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선물을 준다. 우선 초록은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공해와 매연에 지친 눈을 들어 가끔 초록을 올려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면 눈과 가슴이 편해짐을 느낄 수 있다. 건강해지고 싶다면 숲을 찾으라는 조언도 있다. 심신의 건강을 숲에서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숲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은 위대하다.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 나는 특유의 상쾌한 향은 피톤치드(Phytoncide: 식물이 해충이나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발산하는 휘발성 물질)라 하는데 이의 방출량이 가장 많은 6월에 산림욕은 크게 권장된다. 이는 크게 항균 효과와 면역력 증강 효과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피톤치드 효과는 또한 심장병이나 대사 증후군 원인인 혈압과 혈당을 떨어뜨린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또한 우울증, 비만, 골다공증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떨어뜨린다. 아토피성 피부염 개선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어있다.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산림욕은 가을보다 봄, 여름 숲이 내보내는 양이 최대치에 달한다.     피톤치드는 green doctor라고도 한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몸이 피곤할 때 몸에서 양이온이 발생한다, 이런 때 음이온이 풍부한 숲에 가면 몸이 가뿐해진다. 이밖에 음이온이 많은 공기는 두통을 없애주고 피를 맑게 해주며 피로를 풀어주고 식욕을 증진하며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떤 상품보다 초록은 우리를 젊고 건강하게 해준다. 오늘도 풋풋한 피톤치드에 물들어 온몸이 파랗게 멍들도록 한껏 마셔보자.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신록 예찬 신록 예찬 소나무 소리 소나무 사이사이로

2023-06-30

[문장으로 읽는 책] 머리맡에 두고 읽는 시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통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김용택 『머리맡에 두고 읽는 시-백석』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고르고 단상을 곁들인 다섯 권의 시선집이 나왔다. 그중 백석 편에 실린 ‘국수’의 끝부분이다. 밥보다 면을 좋아하는 ‘국수주의자’들이라면 더욱 맘이 동할 ‘국수 예찬’. 김용택은 ‘국수 다섯 그릇’이라 불렸던 아버지 얘기를 들려준다. 제사상 유언으로, 다른 것은 차리지 말고 국수를 다섯 그릇 차려달라는 말을 남겼단다. 가난한 서민성의 온기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시의 마지막 행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를 책의 부제로 세웠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로 시작되는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소개하면서는 “이 시가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시가, 우리의 삶이 가난하지 않게 되었다.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가득 차올라 나는 금세 부자가 되었다”고 썼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란 구절이 특히 유명한 시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머리맡 육수국 내음새 담배 내음새 국수 예찬

2023-03-15

[문장으로 읽는 책] 고양이에 대하여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 그 뒤 오랫동안 나는 친구네 집의 고양이, 가게의 고양이, 다른 농가의 고양이, 거리에서 본 고양이, 담장 위의 고양이, 기억 속의 고양이를 그 푸르스름한 회색의 얌전한 고양이와 비교해보았다. 기분 좋게 목을 골골 울리던 그 녀석은 내게 유일한 고양이,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고양이였다.   도리스 레싱 『고양이에 대하여』   굳이 고양이가 아니어도 괜찮다. 무언가 하나뿐인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넘기기 힘든 문장이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이 쓴 고양이 예찬이다. 여성해방·인종차별·이념갈등 등 사회적 모순을 천착하는 묵직한 작품 세계와 달리 고양이 예찬 글은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뉴욕타임스는 “레싱의 따뜻한 관찰이 담긴 글을 읽으면, 진짜 고양이들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는 듯하다”고 평했다. 2013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평생 여러 고양이를 기르고 관찰한 레싱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정말 대단한 호사”라고 썼다.   인용문 속 “푸르스름한 회색의 얌전한 고양이”는 어린 레싱이 길렀던 고양이다. 찬바람이 파고드는 “내 침대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나의 병, 음식, 베개, 잠을 함께 나눈…고양이, 내 친구”였다. 시인 황인숙이 소개글에 쓴 것처럼 첫 문장부터가 매혹적이다. “집이 언덕 위에 있는 관계로, 바람을 타고 덤불 위를 빙빙 도는 매나 독수리가 내 눈과 같은 높이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내 눈높이가 오히려 더 높았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고양이 고양이 예찬 고양이 담장 진짜 고양이들

2023-02-01

[수필] 잡초 예찬

고생과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 사람들은 흔히들 자신은 “잡초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잡초가 얼마나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았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잡초는 인간이 재배하지도 않고 저절로 자라나는 잡다한 풀로 때와 장소에 적합하지 않은 식물로 취급되어 왔다.     한적한 시골 논밭을 걸어가노라면 초록 색으로  뒤덮인 풀 중에 잡초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지도 못하고 생활에 유용하지도 않은 풀로 천대를 받고 살아가고 있으니 잡초가 인간이라면  셋방살이의 서러움을  면치 못하며 살아가는 신세일 것 같다.     “건강은 제일의 재산이다”라고 말한 미국의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식물이라고 말하였다   일주일 동안 무덥던 더위가 가셨는지 제법 초가을 기분이 든다. 하늘을 쳐다보니 우중충하고 한판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이곳 라스베이거스는 너무 가뭄이 심하다 보니 질서 정연하게 우뚝우뚝 서 있는 가로수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비가 오기만을 고대하며 기도하는 모습들이다.     한국에서는 엄청난 비가 내려 야단법석이고, 히남도 태풍까지 휩쓸고 지나가 남해 일대는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곳은 빗방울이 떨어지기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참으로 세상은 공평하지도 못하다. 수십년간 콘도에서 살다 보니 빗자루로 마당을 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 딸네 집을 방문해 뒷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내가 사는 콘도는 아침마다 청소 담당자는 공기 청소기로  먼지를 날려 보낸다. 빗자루는 쓰레기를 쓸어모아 버리니 참으로 겸손한 존재이다.   그 겸손한 빗자루로 싹싹 쓸어도 악착같이 붙어 있는 녀석이 있다. 바로 잡초다. 콘크리트 사이에서 안간힘을 쓰고 솟아난 잡초다. 잡초란 녀석은 쓸고 쓸어도 쓸리지 않고 넘어졌다 고개를 들고, 숙였다가 솟아나고 도저히 빗자루 가지고는 속수무책이다. 잡초의 정신은 칠전팔기의 끈질긴 속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인 것 같다. 잡초의 끈기와 인내만큼은 대단하다.     아쉽게도 내가 건강하던 젊은 시절에는 잡초의 속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를 누가 바라보겠는가,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 텐데, 이것 저것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잡초’를 누가  바라 보겠는가. 가수 나훈아는 잡초의 속성을 일찍이 깨달은 것 같다.     세월이 흘러흘러  내가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만큼 살다 보니 잡초의 속성이 보이는 것 같다. 인간이란 노년이 되면 온몸의 기관이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필요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강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호소할 때 잡초의 특성인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의 끈질긴 위력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게 마련이다. 그때서야 잡초 같은 건강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참으로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다. 몸이 건강할 때 몸을 낮추고 잡초의 특성을 발견 못 한 아쉬움이 나를 에워싸고 괴롭히고 있다. 천한 것을 귀하게도 볼 줄 아는 아쉬움도 나를 깨워준다. 산과 들에 번식하는 쓸모없는 풀이  큰 교훈을 주고 있다.   틀림없이 잡초는 창조주로  하여금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소·염소·산양 같은 동물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이나, 그들의 배설물로 우리가 사는 토양이 더 기름진 땅으로 만들게 한다든가, 약재와 식용으로  사용되어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수치스럽다고 여겨지는 그 약점이 때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잡초, 너는 알고 있는가. 너의 약점이 기회가 되어 흔한 것이 귀하게 여겨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잡초 같은 인생이란 말이 사라질 것이다. 약점을 활용하면 성공의 촉매제가 된다는 것. 잡초 너도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백인호 / 수필가수필 잡초 예찬 잡초 예찬 공기 청소기 천덕꾸러기 대접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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