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자전거 예찬
집 앞 공원에서 한 청년이 아이들과 놀고 있어요. 햇볕이 좋은 봄날이었을 거에요. 열심히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가다 흔들리는 자전거를 살짝 잡아 주기도 해요. 복사꽃이 눈처럼 날리는 공원길을 흔들흔들 위태롭게 자전거 두 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돌아오곤 해요. 나는 알고 있어요. 높은 키의 전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저 돌아가는 길에서 넘어졌을지도 몰라요. 노란 달맞이꽃을 바라보다 넘어질 뻔했을 거에요. “자전거 뒤를 잡고 있으니 걱정 말고 페달을 밟아. 넘어질 리 없어.” “아빠 잡고 있지요? 꼭 잡아야 해요.” 잡았던 내 손이 떨어지고 자전거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힐끗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에 미소와 함께 번지던 자신감이 햇살과 함께 따뜻하게 밀려왔어요.
바람이 오는 길
세월이 가는 결
하늘이 열리고 내려앉은 밤 별
어둠은 깊어서 스치는데
풀, 나무, 숲도 한 호흡
바람에 소리 없이 깊어지고
안개처럼 뿌려지는 고요
초록을 따라가는 길
얼굴을 말끔히 씻고
새벽으로 오는 이슬 같은
노오란 달맞이꽃
피어나는 앳된 봉오리
걸음을 멈춘 생각
밤새 뒤척이던 나뭇잎 사이
먼동으로 깨어나는 하늘
흔들리며 오는 그대는
낯선 길에 있어요. Chicago에서 멀리 떨어진 Wisconsin의 시골길을 달리고 있어요. 이 나이에 자전거를 타리란 생각은 없었어요. 자전거를 보는 순간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주인의 허락을 받고 밤새 잠을 설쳤어요. 바람이 얼굴을 부딪치고 지나가요. 길옆 가로수가 손짓하며 잎사귀를 흔들어요. 새벽 6시가 조금 넘었어요. 고요가 나지막이 깔린 이곳에 새소리가 들려와요. 바람결에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도 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려와요.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을 씻어주던 그 유년의 바람이 이곳에도 있었네요. 언덕 내리막길을 달려요. 페달을 움직일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브레이크를 가끔 잡아야 해요. 돌아오는 길, 언덕을 오를 땐 힘이 들었어요. 호흡이 가빠져와요. 기능이 떨어진 나를 탓하진 않아요.
자전거를 타는 이 짧은 시간에 걸어온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요. 행복했고, 아팠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작은 힘을 보태고, 새 소리를 들으며 평탄 대로를 걷다가도, 내 힘으론 견딜 수 없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도 해요. 페달을 밟았을 뿐인데 시간이 흐르듯 자전거는 움직였고 지울 수 없는 희로애락의 인생길들이 펼쳐졌어요. 시간이 지났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었어요. 어딘가에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가 오늘 낯선 장소,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 끄집어낼 수 없던 자전거를 통해 펼쳐지고 있어요. 그래요. 어쩌면 지나간 시간도, 살아가고 있는 지금도, 다가올 미래도 찾아가는 사람의 것이 된다는 어쭙잖은 이론이 공식처럼 다가왔어요. 한 달 전까지 상상할 수도 없던 장소에서 그것도 이른 새벽 Wisconsin의 낯선 시골길에서, 빌린 자전거를 탔어요.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이야기들이 유년의 시절 불어 왔던 똑같은 바람에 실려 오고 있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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