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역지사지(歷知思志)] 온난화의 역설

“강원도 간성의 바닷물이 6월에 얼음이 얼어 종이처럼 두꺼웠다.”(‘숙종실록’ 35년 1월 10일)   17세기는 소빙기의 절정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바다가 얼어붙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빙기는 밥상도 바꿔놓았다. 추위와 함께 수온이 내려가면서 대구·청어 같은 한류성 어종이 크게 늘어났고 서식 범위도 확장됐다. 이전엔 동해안 북쪽에서나 발견되던 명태가 전국 모든 바다에서 나타나 해마다 수천석씩 잡혔다. ‘땔나무처럼 많아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소빙기의 축복’이라고 할 만한 역설이다.   올겨울도 어김없이 이상 기후가 이슈다. 북미는 강추위로 얼어붙었다. 북극의 찬 공기를 가두고 있던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벌어진 현상이라고 한다. 반면 유럽은 연일 따뜻한 겨울이 화제다. 얼마 전 영국 런던은 13~14도, 폴란드 바르샤바는 19도를 기록했다. 유럽의 온난화는 각종 발전소가 파괴되어 전력 공급이 어려운 우크라이나엔 큰 위안거리다. 당초 가스관을 잠가 유럽을 굴복시키려던 푸틴의 구상도 좌절됐다.   ‘동장군(冬將軍)’은 19세기 초 러시아에 쳐들어갔던 나폴레옹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던 데서 유래된 단어다. 동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히틀러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동장군이 전선에서 이탈했다. ‘소빙기의 축복’처럼 ‘지구 온난화의 축복’이라고 회자할 듯싶다. 유성운 / 한국 문화부 기자역지사지(歷知思志) 온난화 역설 지구 온난화 폴란드 바르샤바 한류성 어종

2023-01-11

[살며 생각하며] 8월에 생각되는 역설적 진리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 상영작으로 대한민국 멜로 영화 수작 중 하나로 꼽힌다. 대강의 줄거리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한 남자가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가운데 구청 주차요원으로 근무하는 한 여인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남자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얼마 못 가 죽을 입장인 남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놀이터도 가고 밥도 먹는다. 그러다 남자가 입원하게 되고 사진관은 문이 닫힌다. 입원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매일같이 사진관을 찾아가 아쉬운 마음을 편지에 담아 창문틀에 걸어 둔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로부터 연락은 없다.     여자가 타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나 했지만 퇴원한 남자가 정리차 사진관에 들르면서 깨진 창문과 함께 놓여 있는 여자의 편지를 발견한다. 남자가 늦은 답장을 쓰지만 붙이지는 않는다. 대신 남자는 수소문으로 찾아낸 여자의 새 근무지 인근의 카페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나타났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남자가 죽고 세월이 적당히 흐른 시점에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사진관 외곽 진열대를 통해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고백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역설(Paradox)이란 일반 상식, 통념, 정의에 맞지 않는 논리의 비약적 전개를 말한다. 물론 여기는 거짓말 같은 의미론적 억지까지 포함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대신 붙인 제목이다. 왜 제작사나 감독이 본래의 제목 대신 계절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목으로 택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제목이 상상 불능하지도 않음은 일본의 수필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바 있어서다. 그러나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모았음은 이런 역설적 발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문구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이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등이 좋은 예다. 이야기로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이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수장이 되었는가 하면, 아들 요셉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들을 고센 땅에 이민시켜 400년 후 대이스라엘 민족의 씨앗이 되게 했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진짜 역설의 밑그림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찐 역설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다. 전에는 십자가가 악과 죽음이었다면 예수 후 십자가는 구원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생각 역설 역설적 진리 역설적 발상 진짜 역설

2022-08-26

[살며 생각하며] 8월에 생각되는 역설적 진리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있다. 1998년 상영작으로 대한민국 멜로 영화 수작 중 하나로 꼽힌다. 대강의 줄거리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한 남자가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며 아무 일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가운데 구청 주차요원으로 근무하는 한 여인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남자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남자에게 은근슬쩍 호감을 보이며 접근하지만 얼마 못 가 죽을 입장인 남자는 무반응으로 일관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놀이터도 가고 밥도 먹는다. 그러다 남자가 입원하게 되고 사진관은 문이 닫힌다. 입원 사실을 모르는 여자는 매일같이 사진관을 찾아가 아쉬운 마음을 편지에 담아 창문틀에 걸어 둔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로부터 연락은 없다. 화가 치민 여자는 어느 날 밤 돌을 던져 창문을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여자가 타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끝나나 했지만 퇴원한 남자가 정리차 사진관에 들르면서 깨진 창문과 함께 놓여 있는 여자의 편지를 발견한다. 남자가 늦은 답장을 쓰지만 붙이지는 않는다. 대신 남자는 수소문으로 찾아낸 여자의 새 근무지 인근의 카페에 앉아 여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여자가 나타났지만 다가가지는 않는다.   남자가 죽고 세월이 적당히 흐른 시점에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사진관 외곽 진열대를 통해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은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고백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역설(Paradox)이란 일반 상식, 통념, 정의에 맞지 않는 논리의 비약적 전개를 말한다. 물론 여기는 거짓말 같은 의미론적 억지까지 포함한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대신 붙인 제목이다. 왜 제작사나 감독이 본래의 제목 대신 계절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목으로 택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제목이 상상 불능하지도 않음은 일본의 수필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같은 제목을 사용한 바 있어서다. 그러나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모았음은 이런 역설적 발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역설적인 문구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이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얻으리라.’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등이 좋은 예다. 이야기로는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이 후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수장이 되었는가 하면, 아들 요셉은 이복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오히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들을 고센 땅에 이민시켜 400년 후 대이스라엘 민족의 씨앗이 되게 했다 등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진짜 역설의 밑그림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찐 역설은 예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다. 전에는 십자가가 악과 죽음이었다면 예수 후 십자가는 구원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생각 역설 역설적 진리 역설적 발상 진짜 역설

2022-08-19

[독자 마당] 지식혁명의 역설

 예전에는 연령에 따른 세대 구분으로 사회적 위계질서의 중심을 삼았다. 이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세상을 알게 되고 원숙해지며, 지식과 인격을 채워가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학문과 지식은 기존의 토대 위에 쌓아가는 것이어서, 먼저 배우고 체득한 연장자가 연소자를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반의 인터넷 발전과 확대로 촉발된 3차 산업혁명은 기존의 아날로그 지식 기반을 뛰어 넘는 지식혁명이다. 방대한 정보와 자료들을 디지털 방식으로 저장하고 구현하며 전달한다.     이러한 방식에 청소년들은 익숙하다. 습득의 과정도 쉽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은 바로 보이고 잡히는 것이 아닌 디지털의 세계가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정보들을 얻고 이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제는 디지털 영역에 인공지능과 나노기술 등이 더해지면서 현실과 가상이 융합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르렀다. 기성세대들에겐 더 큰 장벽이다.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며 삶의 필요를 채워가는 것이 사회 구성의 시발점이다. 이를 유지하고 지속하는 데에는 일정한 질서가 요구된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윗세대 연장자가 존중 받고 신체적·사회적 약자 일지라도 차별 없이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우 받는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이러한 건전한 공동체 존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질서다. 질서가 바로 세워지려면 전통, 윤리, 도덕이 전승되고 법과 제도로 개인의 정당한 이익이 지켜져야 한다. 이런 사회가 바른 사회다.     지식의 발달과 습득이 개인과 공동체 발전의 절대적 요건이지만 지식만능주의, 물질우선주의로 사람의 도리가 뒤처진다면 사회 결속이 어지러워지고 삶의 기반도 무너진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 최상의 가치이며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윤천모 / 풀러턴독자 마당 지식혁명 역설 사회적 위계질서 지식만능주의 물질우선주의 디지털 기반

2022-02-14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