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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의 만장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어릴적 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만장(輓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 ‘효갈모생무적거(曉蝎謀生無跡去), 석문영사유성래(夕蚊寧死有聲來) - 새벽 빈대는 살기 위하여 자취를 감추지만, 저녁 모기는 죽을지언정 소리를 내며 날아온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만장이라며 알려주신 내용이다. 만장이란 고인의 업적과 공덕을 치하하고 슬퍼하는 짧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 쓴 깃발을 말한다.     나는 열 살 때부터 열흘에 한 번 정도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았다. 사실은 일방적인 훈시였다. 할아버지는 늘 “안중근 의사처럼 불굴의 의지를 갖고 목표를 달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만장을 시조처럼 목청 높여 읊고 훈시를 끝냈다. 그의 왕방울 같은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 눈물을 흘리니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와 안중근 의사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해주시 광석동(廣石洞), 일명 ‘광석 개’다. 할아버지보다 두 살이 많은 안중근 의사는 일곱 살 때 황해도 신천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이 칠언시 만장은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한다.  만장을 만들었다면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사형을 당한 후 시신이 없는 장례식, 혹은 추도식이라도 치렀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최자는 누구였을까? 장소는, 해주, 신천, 연해주, 또는 상하이, 어디에서 열렸을까? 누가 빈 상여를 메고 가두 행렬을 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하지만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안중근 의사의 장례식이나 만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각설하고 나는 지난해 안중근 기념사업회에 만장의 칠언시를 유물 전시관에 전시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구전(口傳)의 글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기발한 회답이 왔다. 그 때 사용했던 만장, 그 유물(遺物)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올해 다시 용산 대통령 민원실에 이 만장의 칠언시를 안중근 기념관에 무형유산으로 전시해달라고 민원을 제출했다. 역시 비슷한 내용의 다음과 같은 회답을  받았다. ‘귀하께서 언급하신 만장 및 칠언시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의미 있는 기억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으나 무형유산의 범주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올해 구순이다. 총성과 함께 ‘꼬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라는 메아리가 울리는 듯한 이 만장은 돌이 물속으로 가라앉듯 나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독자 여러분과 특히 미주 안중근 의사 숭모회 회원들은 이 칠언시를 메모하여 보존하기를 바란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기념관 미주 안중근

2024-10-02

[이 작품과 만났다] 영웅의 어머니와 촌부인 나의 차이 -‘하얼빈’ 김훈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그는 서른한 살의 청년이었다.”   간결하지만 숨을 멎게 하는 긴장감으로, 액자에 박제되어 있는 역사 속 인물들과 생생히 만나게 해주는 김훈 작가의 신작 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전작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만큼 촘촘하고 빼곡한 서사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후기까지 책을 다 읽었을 때,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한 젊은이의 뒤에 남겨진, 세 아이와 부인 김아려의 비참했을 최후가 떠오르면서 어찌나 뜨거운 것이 코끝에 올라오든지, 써보려 했던 독후감을 한 자도 못 쓰고 도서관을 나왔다.   책은 1908년, 일본제국 메이지 천황이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하는, 우리 역사의 비애를 시작으로, 천황의 업을 받들어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문명개화의 탈을 쓰고 약육강식의 전횡을 휘두르는 악행과 나라 곳곳에서 이에 항거하며 행해지던 조선인들의 자결, 의병 운동 등을 보여준다.     그런 중에, 작은 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냥하는 일을 소일거리 삼아 지내던 청년 안중근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솜씨다. 짐승을 쏘기에는 아깝구나’라던 그의 다듬어진 조준 솜씨를 칭찬하는 숙부 안태건의 한마디로, 청년 안중근의 운명이 감지된다. 마음먹는 대로 수많은 조선인을 학살한 원흉 이토를 저격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할 일이라는 믿음 아래, 거사는 말할 수 없이 무거운 사안이었으나 진행은 그 무엇보다도 가볍게 동지 우덕순과 치러버리는 안중근의 면모, 저격 후 체포, 수사와 재판, 판결 과정, 죽음 앞에서도 본명인 안응칠의 이름으로 자기 뜻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리려 했던 한 청년의 마지막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는 작가의 인생 숙제와 같았던 이 책은, 실재하는 우리 역사의 아픈 속살과 가까이서 만날 기회를 준다.   우리는 결국, 지나온 역사의 발자취를 통해 배우고, 그 안에서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이어갈 것인데, 정신없이 펼쳐진 자잘한 일들 속의 걱정과 재미에 넋을 잃고 오늘을 살아가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할 계기를 준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다. 2011년 즈음, 뉴욕의 한가운데 링컨센터에서,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한국 뮤지컬, ‘영웅’을 볼 때였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라고.     사형에 처한 아들에게 보낸 안중근 어머니의 편지가 읽히던 장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모성을 가진 어미가 저럴 수 있는가 하며 가슴에 멍울이 남던 장면이다.     서울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인 지금, 10년 전의 그 뮤지컬이 영화화되어 절찬 상영 중이라고 한다. 모성과 애국심 사이에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고 서성댔던 나의 감정은, 그때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내가 감히 서른 살 내 아들에게 대의를 위해 죽으라고 한마디나 할 수 있을까….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김훈 어머니 안중근 어머니 청년 안중근 안중근 의사

2023-01-16

[문화산책] 신앙심과 폭력 사이에서

종교의 신앙심과 폭력 사이의 갈등은 인류의 오랜 질문 중의 하나다. 역사의 갈피마다 만나는 질문이기도 하다. 종교는 폭력을 적극 부정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십자군전쟁처럼 많은 전쟁이 종교 때문에 일어난 것이 현실이다. 천주교신자인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그렇다. 김훈의 신작 ‘하얼빈’도 그런 갈등을 그리고 있어서 감동적이다. 나는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하면서도, 쉽게 술술 읽을 수는 없었다.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같이 연극을 하던 동료 중에 신부가 되려고 소신학교를 다녔지만, 이런저런 형편으로 대학은 법대를 나오고, 외교관이 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안중근 도마의 신앙심과 나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사람을 쏴 죽여야 하는 인간적 고뇌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서, 희곡으로 썼다. 안타깝게도 공연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큰 공부를 했다.     그 뒤로 내가 존경하는 출판인인 ‘열화당’ 이기웅 사장의 안중근 의사에 대해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보면서 또 많은 것을 배웠다. 이기웅 사장은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록을 꼼꼼히 챙겨 책으로 펴냈고, 파주에 출판단지를 조성하면서 ‘응칠교’라는 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응칠은 안중근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그동안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로 끊임없이 소개되었다. 대부분이 찬양 일색의 영웅적 서사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대한국인’이라는 서명의 힘찬 붓글씨도 유명하다. 하지만, 안중근의 인간적 고뇌를 그린 작품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김훈의 ‘하얼빈’이 더욱 반갑다.     한국 천주교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후 긴 세월 그를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긴 죄인’으로 규정해왔다. “악을 악으로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고집해온 것이다. 그런 생각의 벽이 깨진 것은 1993년이었다. 김훈의 ‘하얼빈’은 이 사실을 후기에서 슬그머니(?) 언급한다.   “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 날 미사의 강론에서, …(중략)…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려 80년도 넘게 걸렸다. 긴 세월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정당화하지 않았고, 교리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중근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중근 의사와 함께한 동지 우덕순(1879-1950)이 지었다는 시(詩) ‘보난대로 죽이리라’는 매우 뜨겁지만, 살벌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신앙인 안중근의 생각은 그런 단순한 증오심이 아니었다. 평화를 위한 폭력… 그래서 인간적 고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일본인 수사관의 질문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대답이다. 생각이 뚜렷하고 당차다. 또,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의 종교적 진리와 교회 밖 세상의 정의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신앙과 폭력, 불의에 맞서는 힘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남의 얘기나 옛날의 문제가 아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신앙심 폭력 한국 천주교회 안중근 의사 안중근 추모

2022-09-21

[문화산책] 신앙심과 폭력 사이에서

종교의 신앙심과 폭력 사이의 갈등은 인류의 오랜 질문 중의 하나다. 역사의 갈피마다 만나는 질문이기도 하다. 종교는 폭력을 적극 부정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십자군전쟁처럼 많은 전쟁이 종교 때문에 일어난 것이 현실이다. 천주교신자인 안중근 의사의 거사도 그렇다. 김훈의 신작 ‘하얼빈’도 그런 갈등을 그리고 있어서 감동적이다. 나는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하면서도, 쉽게 술술 읽을 수는 없었다. 내 젊은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같이 연극을 하던 동료 중에 신부가 되려고 소신학교를 다녔지만, 이런저런 형편으로 대학은 법대를 나오고, 외교관이 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안중근 도마의 신앙심과 나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사람을 쏴 죽여야 하는 인간적 고뇌를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서, 희곡으로 썼다. 안타깝게도 공연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큰 공부를 했다.     그 뒤로 내가 존경하는 출판인인 ‘열화당’ 이기웅 사장의 안중근 의사에 대해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보면서 또 많은 것을 배웠다. 이기웅 사장은 안중근 의사의 공판기록을 꼼꼼히 챙겨 책으로 펴냈고, 파주에 출판단지를 조성하면서 ‘응칠교’라는 다리를 만들기도 했다. (응칠은 안중근의 어린 시절 이름이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그동안 소설, 연극, 영화, 뮤지컬로 끊임없이 소개되었다. 대부분이 찬양 일색의 영웅적 서사로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대한국인’이라는 서명의 힘찬 붓글씨도 유명하다. 하지만, 안중근의 인간적 고뇌를 그린 작품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김훈의 ‘하얼빈’이 더욱 반갑다.     한국 천주교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이후 긴 세월 그를 ‘살인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긴 죄인’으로 규정해왔다. “악을 악으로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는 생각을 암묵적으로 고집해온 것이다. 그런 생각의 벽이 깨진 것은 1993년이었다. 김훈의 ‘하얼빈’은 이 사실을 후기에서 슬그머니(?) 언급한다.   “1993년 8월 21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 미사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 추기경은 이 날 미사의 강론에서, …(중략)…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려 80년도 넘게 걸렸다. 긴 세월 한국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정당화하지 않았고, 교리상으로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중근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안중근 의사와 함께한 동지 우덕순(1879-1950)이 지었다는 시(詩) ‘보난대로 죽이리라’는 매우 뜨겁지만, 살벌하고 섬뜩하기도 하다. 하지만, 신앙인 안중근의 생각은 그런 단순한 증오심이 아니었다. 평화를 위한 폭력… 그래서 인간적 고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일본인 수사관의 질문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대답이다. 생각이 뚜렷하고 당차다. 또,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가 이토의 목숨을 없앤 것은 죄일 수 있겠지만, 이토의 작용을 없앤 것은 죄가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의 종교적 진리와 교회 밖 세상의 정의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신앙과 폭력, 불의에 맞서는 힘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남의 얘기나 옛날의 문제가 아니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신앙심 폭력 한국 천주교회 안중근 의사 안중근 추모

2022-09-15

[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그저께는 77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일제 36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수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역사를 생각해본다.     최근, 김훈 소설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작가는 ‘권총 한 자루와 100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하고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적의 법정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며 의연함을 보였다.     일제는 만주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다. 거사 이후 80여 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남겨졌다. 1993년 8월 21일에 와서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타당하다”고 선언했다.   안중근 거사 이후, 역사가 소용돌이쳤다.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했다. 안중근 일가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큰 아들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다.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남겨진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서곡이었다.     30년 뒤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이토 공 영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 군’ 이라는 사진을 게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박문사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일을 손석희 앵커는 뉴스 시간 앵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겨진 가족에게 현실은 잔혹했다. 애국 대신 매국을 선택하여 살아남고자 했던 비극과 통한의 역사였다.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김구는 광복 직후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병사했다.       다시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고, 현재는 어떤가. 그리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이 울려온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찬열 / 시인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거사 안중근 일가

2022-08-17

[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어제는 77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일제 36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수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역사를 생각해본다.     최근, 김훈 소설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작가는 ‘권총 한 자루와 100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하고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적의 법정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며 의연함을 보였다.      일제는 만주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다. 거사 이후 80여 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남겨졌다. 1993년 8월 21일에 와서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타당하다’고 선언했다.    안중근 거사 이후, 역사가 소용돌이쳤다.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했다. 안중근 일가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큰 아들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다.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남겨진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서곡이었다.      30년 뒤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이토 공 영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 군’ 이라는 사진을 게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박문사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일을 손석희 앵커는 뉴스 시간 앵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겨진 가족에게 현실은 잔혹했다. 애국 대신 매국을 선택하여 살아남고자 했던 비극과 통한의 역사였다.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김구는 광복 직후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병사했다.        다시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고, 현재는 어떤가. 그리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이 울려온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찬열 / 시인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거사 안중근 일가

2022-08-15

[별별영어] 스프링(spring)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스프링(spring)’ 하면 저는 봄과 함께 용수철이 떠올라요. 소설과 영화로 알려진 『샬롯의 거미줄(Charlotte’s Web)』에 나오는 새끼돼지 윌버(Wilbur) 때문이죠.   윌버는 사람들이 자신을 ‘spring pig’라고 부르자 용수철처럼 점프를 잘한다는 뜻으로 알았지만 이내 ‘봄에 태어난 돼지’로 크리스마스 전에 햄과 베이컨이 된다는 뜻임을 알게 돼요. 겨울에 눈을 못 본다니 슬픈 데다 농장 주인이 훈제 하우스에 대해 말하자 기절하고 맙니다. 그런 그에게 헛간 문틀에 사는 거미 샬롯이 친구가 되어 주고 돕겠노라 약속해요. 똑똑한 샬롯은 윌버를 칭찬하는 말을 거미줄로 써서 사람들의 주목을 끕니다. 인기가 높아지면 살 수 있을 거라면서요.   첫 번째가 ‘some pig’입니다. 그런데 some을 ‘몇 개의’ ‘어떤’ ‘불특정의’ ‘별것 아닌’ 정도의 뜻으로만 알고 있다면 이게 왜 칭찬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spring에 ‘봄’ 말고도 ‘튀어 오르다’ ‘용수철’ ‘샘물’ 같은 의미가 있듯이 some에는 반어적으로 생겨난 ‘멋진, 굉장한’이라는 의미도 있거든요.   이렇게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면 ‘다의어(polysemous word)’라고 부릅니다. 의미상 관련 없는 단어들의 소리가 같다면 ‘동음어(homonym)’라고 하고요. 예를 들어 ‘야구 방망이’ bat와 ‘박쥐’ bat가 동음어죠. 얼핏 spring도 의미들 사이에 관련이 없는 동음어 같죠? 하지만 봄에 새싹이 나니까 솟아난다는 의미가 있고 어원을 공유하므로 다의어입니다.   다의어와 동음어는 어느 언어에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많은 단어가 다의어이며 동음어도 꽤 있죠. 저는 안중근 의사의 직업이 의사인 줄 알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의로운 일을 한 의사(義士)’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醫師)’처럼 한자어 단어에 동음어가 많지요   다의어와 동음어는 오해를 일으키거나 농담의 소재가 되곤 하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대부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의어 store가 동사 ‘저장하다’인지 명사 ‘가게’인지는 앞뒤를 살펴보면 알 수 있죠. 우리말의 다의어 ‘머리(신체부위, 지능, 머리카락)’나 동음어 ‘배(신체부위, 교통수단, 과일)’도 맥락을 통해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알 수 있고요. 그래서 외국어를 잘하려면 하나의 단어가 다른 뜻을 갖거나 소리만 같은 다른 뜻의 단어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스프링엔 우리도 발에 스프링을 단 듯이 신나게 뛰어 볼까요? 채서영 /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별별영어 스프링 spring spring pig 안중근 의사 의미상 관련

20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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