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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어제는 77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일제 36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수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역사를 생각해본다.  
 
최근, 김훈 소설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작가는 ‘권총 한 자루와 100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하고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적의 법정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며 의연함을 보였다.  
 


 일제는 만주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다. 거사 이후 80여 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남겨졌다. 1993년 8월 21일에 와서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타당하다’고 선언했다.
 
 안중근 거사 이후, 역사가 소용돌이쳤다.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했다. 안중근 일가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큰 아들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다.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남겨진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서곡이었다.  
 
 30년 뒤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이토 공 영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 군’ 이라는 사진을 게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박문사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일을 손석희 앵커는 뉴스 시간 앵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겨진 가족에게 현실은 잔혹했다. 애국 대신 매국을 선택하여 살아남고자 했던 비극과 통한의 역사였다.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김구는 광복 직후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병사했다.    
 
 다시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고, 현재는 어떤가. 그리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이 울려온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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