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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너도 늙어 봐라

요즘 부쩍 밤에 잠이 자주 깬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새벽 2시다. 잠을 더 자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눈만 초롱초롱해진다. 몇십 분을 뒤척이다 그냥 침대에서 일어나 버린다. 오지 않는 잠을 자려고 애를 쓰는 것이 더 괴롭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책도 잃고 유튜브도 보고, TV도 다시 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온다. 물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직장에 가기 위해서 준비 중인가 보다.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읽으며 차 한잔을 마신다.  갑자기 뜨끈한 숭늉이 생각난다.  냄비에 어제 만들어 둔 누룽지와 물을 넣고 끓인다. 중약불로 약 20분 끓여야 하니 좀 기다려야 한다. 누룽지가 끓기를 기다리며 TV를 보다 깜박 졸다가 깼다.  그 순간 “아 참, 숭늉”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 손녀가 방으로 뛰어오며 “할머니 불 날 뻔 했어요. 숭늉은 다 끓어 넘쳤고 냄비는 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휴 미안해, 어떡하니?” 당황스러움에 할 말을 잃었다. 누룽지가 끓어 넘친 스토브를 닦고 있던 며느리는 아무 말이 없다. 민망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잠시 후 며느리도 한마디 한다. “어머니, 불 날 뻔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조금 있다 손녀가 한 마디를 보탠다. “스토브 불을 켜 두고 다른 곳에 가시면 어떡해요. 벌써 몇 번째예요?” 손녀의 말은 사실이다. 전에도 몇 번 비슷한 이유로 냄비를 태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이 왜 그렇게 고깝게 들리는지. 육신은 점점 늙어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는데….  냄비 몇 번 태웠다고 며느리와 손녀에게서 지적받는 것이 왜 그리도 섭섭한지.   난 속으로 외쳤다. “너희는 평생 젊을 것 같니, 너희도 늙어봐라.” 노영자·풋힐랜치독자 마당 누룽지가 끓기 그때 손녀 순간 쥐구멍

2024-06-04

[수필] 손녀의 대학 입학

나는 자식 셋에  손주가 모두 다섯명이다.  그중에서 가장 위인 첫 손녀가 지난해 9월에 대학에 입학했다. 손녀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캘리포니아의 여러 대학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미국 전역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대학들이다. 그중에 몇 학교는 장학금 혜택까지 있었다. 우리는 손녀에게 선택의 지혜를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손녀는 스스로 여러 가지를 비교 분석해서 지금의 학교를 택했다.     매주 목요일이면 손녀가 오는 날이다. 목요일 저녁은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한다. 그녀의 일주일간의 학교생활을 들으며 다투어 궁금한 내용들을  물어본다. 손녀가 처음 기숙사에 들어간 날이다. 사위는 먼저 손녀와 같이 짐들을 싣고 학교로 갔다.  딸이 엄마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는 궁금했던 차에 그 소리가 너무 반가워 동행했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학교에서 마련한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손녀의 옷가지 침구 등은 바퀴 달린 큰 바구니  두 개에다 나눠 넣어 방 호실을 써서 트럭이 싣고 갔다.     많은 선배 학생들이 나와서 친절하고 정확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셔틀에서 내리니 손녀의 짐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바구니를 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방은 세 명이 사용하게 되어있었다. 선배 둘과 미리 연락되어 손녀는 2층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 천장과 맛닿아 있는 침대가 앞으로 1년 동안 자야 할 침대라고 생각하니 나는 겁이 덜컥 났다. 그동안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침대다.     우리는 서로 말을 아끼며 침대 정리를 한 다음 올라가는 연습을 시켰다. 누웠다 일어나서 내려오는 연습도 수없이 시켰다.  우리는 걱정이 되면서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침대 펜스가 높아 아늑하다, 옷장이나 책상이 아주 고급이다 등등 좋은 점을 들어 손녀를 기분 좋게 하였다.   일주일이 지났다. 손녀가 집에 오자마자 제 침대를 껴안고 누웠다. 마치 엄마의 포근한 가슴에 안기는 어린아이처럼 침대를 쓰다듬었다. 자기 침대가 무척 그리웠다 한다. 그래서인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수업이 끝난 목요일이면 집에 온다. 별일이 없으면 금요일 토요일은 집에서 공부하며 그리운 침대에서 자고 간다. 학교는 교통체증이 없는 시간이면 집과 한 시간 거리다.     손녀를 키우려 미국과 한국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비행기 타는 일이 너무 힘들어 우리 부부는 영주권까지 받으며 손녀를 돌보았다. 무려 18년이 되었다. 손녀는 유치원 초중고를 다니며 힘들다고 짜증 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항상 밝게 웃으며 매사를 즐겁게 풀어나가는 긍정 마인드 손녀다.     손녀가 18개월이 되었을 때 체류 기간 만기 한 달 전에 한국에 입국해야 했다. 딸과 사위가 일하는 낮에 어딘가 맡겨야 하는데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밤에 꿈을 꾸는데 어떤 수녀님이 나타나 양손을 벌리며 오라고 하였다. 그곳은 24개월이 된 아이부터 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도 안 했다. 그래도 실오라기만 한 희망을 가지고 이튿날 찾아가서 꿈 얘기를 했더니 난처해 하면서도 웃으며 허락해 주셨다. 나중에 들으니 손녀는 적응을 못하고  수녀님 치마만 잡고 종일 지냈다고 한다.   손녀는 유난히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할아버지가 식사 때 잔기침을 조금만 해도 금세 일어나 물을 갖다 드린다. 그리고 “할머니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다”고 한다. 할아버지 생일에 축하의 말과 앞으로의 각오를 한글 편지로 썼는데 받침 하나 틀린 곳이 없었다. 손녀를 미국에서 키우며 우리도 다시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 되었다. 유치원, 초중고의 많은 행사에 참여해 마냥 신났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손녀는 바이올린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댄스팀 활동을 해  발표회가 많았다. 발표회는 항상 환상적이었고 손녀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다.         이제 대학생이 된 늠름한 우리 큰 손녀, 언니답게 누나답게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자신감을 주었다. 본인의 더 큰 꿈을 향해 가다 보면 2층 침대 같은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극복하리라 믿는다.  오늘도 기숙사 앞에 내려주며 등에 십자 성호를 그어주었다. 손녀는 자기가 바빠서 집에 가지 못하면 우리더러 학교에 와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도 한다.  60평생 삶을 뒤로하고 미국 땅에 온 보람이 손녀의 마음 씀씀이에 모두 스며있는 것 같아 대견하고 흐뭇하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손녀 대학 대학 입학 침대 펜스 학교 주차장

2024-01-04

[이 아침에] 너무 채우면 터진다

자식 농사가 제일 힘들다. 밭농사는 한 해를 망치면 다음 해를 기대할 수 있다. 자식 농사는 기약할 수 없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三歲之習 至于八十)’는 말은 어릴 때 몸에 밴 나쁜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금은 백세시대지만 예전에는 평균나이 60을 넘기지 못했다. 칠십세 고희를 맞는 사람이 드물었으니 여든은 이미 죽은 나이, 세 살 버릇은 죽어도 못 고친다는 말이다.   뉴저지 사는 딸 부부가 아이 둘 데리고 다녀갔다. 손녀는 6살이라서 말귀도 알아듣고 사람 구실을 하는데 3살짜리 손자는 제멋대로다. 잠시 상냥하게 굴기에 대견해서 칭찬하려는 찰나 본색이 드러나 사고를 친다. 손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데 인내심 부족인지 내 머리는 빙글빙글 돈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지, 무슨 말로 교양있게 타일러야 하는지 헷갈린다.     애들은 보통 돌이 지나면 걷기 시작하고 세 살이 돼 말을 하는데 그 때부터  고집 부리고 원하는 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울거나 떼를 쓴다. 손주는 내 자식이 아니라서 마음 놓고 훈계도 못 한다.     요즘 애들은 어른 열 명보다 더 똑똑하고 모르는 게 없다. 영어가 딸리는 할머니가 간단한 게임조차 못해 허둥대면 유치원생 손녀가 슬쩍 손가락으로 짚어준다. 딸이 친정에 오면 어릴 적 소꿉친구들이 다들 결혼해 애 데리고 만나는데 이건 완전 디즈니랜드 놀이공원 온 것보다 더 난리방구통이다.     내 새끼나 남의 새끼나 세 살짜리 인간들은 한결같이 말썽꾸러기에 제멋대로다. 손자는 작은 일에도 삐침을 잘 타서 “누굴 닮아서 저러냐” 했더니 딸 친구가 “크리스 삼촌 닮았어요”한다. 크리스는 내 아들! 유전자에 문제 있나 얼핏 생각나 “아냐. 크리스가 얼마나 잰틀맨인데”라고 했더니 다 같이 성토, 한글학교에서 삐침 잘 타기로 일등선수였다는 보고다.     손녀는 하는 짓이 수준을 능가해 ‘천재’ 아님 ‘여우’라고 감탄했는데 알고 보니 고만한 여자아이들은 한결같이 ‘아인슈타인’아니면 감당이 안되는 ‘백여우’다.     신세대 어머니들은 인내심도 기막혀서 조목조목 설명하고 가르치고 맞장구를 치는데 누가 애인지 엄마인지 분별이 안된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게 저토록 충실하게 가르치면 학교 가서 무엇을 배우나. 잠시 교편생활을 한 과거를 떠올리며 씁쓸해진다. 애들은 백지처럼 깨끗하고 마음대로 뛰놀았다.   작은 주머니를 너무 꽉 채우면 터진다. 어릴 적 동무들과 주머니놀이 할 때 공중에 던진 내 주머니는 땅에 떨어지면 실이 터져 콩이 튀어나왔다. 옥이 언니가 내 주머니에 콩을 너무 많이 넣어 꿰 맺기 때문이다.     뮤지컬 공연 물랭루주의 서두에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화려한 장난감 없어도, 스스로 한 일에 책임지고, 넘어져도 일어나는 용기를 가르치는 것이 사랑의 참모습이다. 사랑은 달콤하지만 넘치면 상한다.     진정한 사랑의 참모습과 가치를 심어주면 세 살 버릇은 나이 들면 저절로 교정된다. 아이는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따라 배운다. 롤모델이 올바르게 살면 철없는 아이들도 큰 나무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자식 농사 크리스 삼촌 유치원생 손녀

2023-10-15

[J네트워크] 바이든이 웃는 또 다른 이유

최근 들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얼마 전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으로 확정되고 하원에서조차 예상보다 선전하면서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경사가 겹쳤다. 이번 주말 애지중지하는 손녀의 새 출발을 지켜보는 할아버지로 인생의 또 다른 순간을 맞이한다는 소식이다.   장손녀이자 아들 헌터 바이든의 딸 나오미 바이든(28)이 워싱턴 시간으로 19일 백악관 사우스 론에서 오랜 남자친구이자 법학도인 피터 닐(25)과 백년가약을 맺는다. 백악관 결혼식은 13년 만인데, 222년 역사의 백악관에서 19번째 경사다.   변호사인 나오미는 2020년 할아버지의 대선 캠페인 동안 SNS 등을 통해 젊은 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했다. 올여름 자신의 백악관 결혼식 소식을 알린 것도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워싱턴 사교계는 들떠 있는 모습이다. 초청 대상은 누구인지, 신부가 어느 디자이너의 어떤 웨딩드레스를 선택할 것인지, 메뉴와 와인은 무엇을 고르고 웨딩케이크는 어떤 모양에 무슨 맛일지, 설레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결혼식의 비용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일제히 함구하는 분위기다. 바이든가(家)는 지극히 사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결혼식의 자세한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지난 7월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번 결혼식에 국민의 세금이 쓰이는 것 아니냐는 출입기자 질문에 백악관 업무와 관련 없는 사적인 일이라 답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얼핏 보기엔 공과 사가 뒤섞일 수 있는 사안에 명쾌하고 단호한 답변이었다. 여기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미국 언론 또한 낯설고 추가 취재도 없는 분위기다. 공적 영역이든 사적 영역이든 공인의 모든 사안이 정치화되기 쉬운 우리 사회와 언론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결혼식 바로 다음 날은 바이든 대통령의 팔순 생일이다. 미국 역사상 최고령(78살) 취임 대통령으로서 건강과 차기 대선 출마 여부는 여전히 민감한 문제다. 그럼에도 워싱턴 정가는 새출발하는 대통령 손녀 부부의 결혼식에 관심 어린 축복을 보내고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닉슨 대통령도 1971년 자신의 딸 트리샤의 로즈 가든 결혼식을 회고하며 “우리 모두가 영원히 기억할 하루였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아름답고 그야말로 행복했다”고 말한 바 있다. 새 출발은 대개 아름답다. 그래서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주말 많이 웃을 것이다. 안착히 / 글로벌협력팀장J네트워크 백악관 결혼식 대통령 손녀 피에르 백악관

2022-11-18

[독자마당] 기다리는 마음

데이지가 창가 소파 등받이에 엎드려 하염없이 밖을 바라고 있다. 전에도 학교에서 돌아오는 손주들을 그렇게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아이들이 한국으로 떠난 후 더 길어진 시간이다.   4년 전 애니멀 셸터에서 데이지를 데려왔을 때는 6개월 된 강아지였는데 지금은 많이 컸다. 그동안 손주 3명의 사랑을 듬뿍 받아 내겐 눈길도 안주던 녀석이 요즘은 제법 꼬리를 흔들고 곁에 있으려 든다.   아들 가족이 한국으로 여행을 떠난지 3주가 지났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한국. 보내 준 사진을 보니 여기저기 계획했던 여행이 잘 진행되는 것 같다.     떠나기 전 큰 손녀는 주의 사항들을 종이에 적어 주고 갔다.  데이지의 밥과 물은 몇 시에 얼마씩, 간식은 몇 개, 그리고 매일 밖으로 몇 번 꼭 데리고 나가라고. 또 특별히 하루에 20번 이상 등을 쓰다듬어 주라고 했다.     내몸 하나도 귀찮은 판에 데이지 돌보는 일을 맡았으니 종이 들여다 보며 열심히 따라했다. 그런데 밥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종일 자기를 사랑하던 며느리와 손주들을  찾아 해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다.   손녀 침대에 올라가 웅크리고 자는 모습이 부모 떨어진 아이같아 보이고 마치 5식구가 떠난 덩 빈 집의 내 센세 같아서 슬퍼진다.   데이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모두 어디 갔나요?” “왜 나만두고 갔나요?” “언제 오나요?”“라고 했을 것 같다.   달력에 오는 날짜 표시해 놓고 기다니는 나와 하염없이 창가에 앉아 있는 데이지가 똑 같아 보인다.   3남매가 학교 같다 돌아올 때면 이산가족 상봉하는 모습이었는데 7주만에 만나는 그들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이 안된다.     요즘 ‘기다리는 마음’이란 시에 곡을 붙여 아름다운 가곡이된 노래를 자주 불러본다. ”기다려도~기이다려도~님 오지않고~“ 오늘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정현숙 / LA독자마당 마음 창가 소파 손녀 침대 얼마씩 간식

2022-07-17

[이 아침에] ‘할빠’의 시간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는 ‘할빠, 할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손자 손녀의 육아를 책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할빠, 할마라고 하는 모양이다. 요즘 60대는 노인 축에도 못 끼는 시대이다. 6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랑 같이 있어도 언뜻 보면 좀 나이 든 아빠, 엄마처럼 보이니 이런 신조어까지 생겨났나 보다.     지금 세상은 어디나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다보니 시간상으로 좀 여유가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돌보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다.   3년 전 첫 외손녀를 보며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이번에 둘째 손녀가 태어나면서 나도 ‘할빠’ 대열에 합류했다. 아기 아빠는 출근하고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아직 몸 추스르기도 어려워 큰 손녀를 돌보는 건 거의 우리 부부의 몫이 됐다.     사위 일 때문에 딸 가족이 외국에 살 때는 같이 살 기회가 생긴다면 예쁜 손녀에게  그림책도 읽어주며 재미있게 노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가끔 화상 통화로나 얼굴을 보고 동영상으로 손녀의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는 너무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올해 초 이곳으로 딸네 가족이 이주해 오면서 손녀를 직접 안아주고 놀아주며 그림책도 읽어주는 상상이 실현되는 행복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세살이 다 돼 가는 손녀를 돌보는 게 마냥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울고불고 떼쓰는 건 다반사인데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놀이터에서 몇 번 따라다니다 보면 체력이 금방 바닥이 난다.   요즘은 자녀들이 혼기가 지나도 결혼을 미루고, 설사 결혼하더라도 아기를 잘 가지려 하지 않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되는 일도 벼슬을 받기처럼 어려운 일이 됐다. 주위 친구들 경우를 봐도 손주를 못 본 친구가 더 많은 터라 친구들 모임에 가서도 손녀 자랑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인다. 사실 손자 손녀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나도 한때는 틈만 나면 손주 자랑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좀 성가시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할빠, 할마 노릇하다가 몸도 망가지고 자녀들과 사이도 안 좋아지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늙어서 다시 육아에 시달리면서 여유롭고 한가한 노후의 삶을 즐기려던 계획이 어긋나서 당황스럽다는 노년들의 볼멘 목소리도 들린단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랑 노는 것도 잠깐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학교 들어가고 조금 지나 10대만 돼도 친구들을 더 찾지, 할아버지 할머니랑은 잘 놀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금 축복처럼 주어진 이 ‘할빠’의 시간을 즐기자. 아직은 뛰어다니고 손녀를 번쩍 들어 안아 줄 체력이 있음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도 젊은 할빠는 놀이터로 공원으로 달려간다. 송훈 / 수필가이 아침에 시간 할아버지 할머니들 손자 손녀 주위 친구들

2022-04-24

[이 아침에] ‘할빠’의 시간

얼마 전부터 한국에서는 ‘할빠, 할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손자 손녀의 육아를 책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할빠, 할마라고 하는 모양이다. 요즘 60대는 노인 축에도 못 끼는 시대이다. 6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랑 같이 있어도 언뜻 보면 좀 나이 든 아빠, 엄마처럼 보이니 이런 신조어까지 생겨났나 보다.     지금 세상은 어디나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렵다보니 시간상으로 좀 여유가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을 돌보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럽다.   3년 전 첫 외손녀를 보며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이번에 둘째 손녀가 태어나면서 나도 ‘할빠’ 대열에 합류했다. 아기 아빠는 출근하고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은 아직 몸 추스르기도 어려워 큰 손녀를 돌보는 건 거의 우리 부부의 몫이 됐다.     사위 일 때문에 딸 가족이 외국에 살 때는 같이 살 기회가 생긴다면 예쁜 손녀에게  그림책도 읽어주며 재미있게 노는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가끔 화상 통화로나 얼굴을 보고 동영상으로 손녀의 커 가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는 너무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올해 초 이곳으로 딸네 가족이 이주해 오면서 손녀를 직접 안아주고 놀아주며 그림책도 읽어주는 상상이 실현되는 행복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세살이 다 돼 가는 손녀를 돌보는 게 마냥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울고불고 떼쓰는 건 다반사인데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놀이터에서 몇 번 따라다니다 보면 체력이 금방 바닥이 난다.   요즘은 자녀들이 혼기가 지나도 결혼을 미루고, 설사 결혼하더라도 아기를 잘 가지려 하지 않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 되는 일도 벼슬을 받기처럼 어려운 일이 됐다. 주위 친구들 경우를 봐도 손주를 못 본 친구가 더 많은 터라 친구들 모임에 가서도 손녀 자랑하는 것조차 눈치가 보인다. 사실 손자 손녀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나도 한때는 틈만 나면 손주 자랑하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좀 성가시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 할빠, 할마 노릇하다가 몸도 망가지고 자녀들과 사이도 안 좋아지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늙어서 다시 육아에 시달리면서 여유롭고 한가한 노후의 삶을 즐기려던 계획이 어긋나서 당황스럽다는 노년들의 볼멘 목소리도 들린단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랑 노는 것도 잠깐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학교 들어가고 조금 지나 10대만 돼도 친구들을 더 찾지, 할아버지 할머니랑은 잘 놀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금 축복처럼 주어진 이 ‘할빠’의 시간을 즐기자. 아직은 뛰어다니고 손녀를 번쩍 들어 안아 줄 체력이 있음을 감사히 여기면서 오늘도 젊은 할빠는 놀이터로 공원으로 달려간다. 송훈 / 수필가이 아침에 시간 할아버지 할머니들 손자 손녀 주위 친구들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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