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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 서사에 기발한 연출…형식 깨고 장르 섞다

2023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은 지난주 거행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11개 부문에 후보 지명을 받았다. 에마 스톤이 예상대로 ‘라라랜드’(2016)에 이어 그녀의 2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등의 프로덕션 부문을 휩쓸었다.     ‘가여운 것들’은 스코틀랜드 문학의 르네상스를 연 소설가 알라스데어 그레이(Alasdair Gray)가 1992년 발표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무척 방대한 지식과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 소설은 기이한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더 페이버릿, 2018)를 만나 다시 한번 괴상하고 이상한 영화로 부활한다.   소설에서 작가는 19세기 한 의과대생의 회고록을 빼돌려 재편집, 20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자신의 소설로 재출간하는 전지전능한 작가로 등장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창조물과 갈등을 빚는 내용의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괴테의 ‘파우스트’의 등장인물들을 곳곳에서 패러디한다.     원작의 환상적 서사와 란티모스의 기발한 연출이 조화되어 다시 태어난 영화 ‘가여운 것들’의 세계관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란티모스 특유의 기괴함과 불편함이 그대로 살아있고 형식 파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를 혼용한다. 원작의 사회적 메시지를 유려하고 유머스럽게 담아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God이 숨어있는 이름의 Godwin, 아름답다는 뜻을 지닌 이름의 Bella가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의대생 맥스 맥캔들스는 외과의사 고드윈 백스터(윌렘 데포) 박사의 조수가 된다. 고드윈의 곁에는 벨라(에마 스톤)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여인이 있다. 맥스는 곧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임산부가 남편의 학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고 고드윈 박사가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뇌를 벨라(빅토리아)에게 주입, 되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었다가 부활한 벨라는 서서히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맥스는 벨라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는 성인의 몸에 태아의 뇌를 지니고 어눌한 말투,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의식에는 그 시대 다른 여성들처럼 성적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드윈 박사는 맥스에게 벨라와 결혼하라고 요청한다. 벨라는 이를 받아들이지만 지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날로 커져만 간다. 그녀는 방탕한 변호사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과 함께 도망친다. 그녀를 놓아 주기로 결정한 고드윈은 벨라보다 느리게 성숙하는 젊은 여성 펠리시티에게 또 다른 실험을 시작한다.     벨라와 던컨은 리스본을 시작으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벨라의 언어와 지식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업그레이드되고 그녀의 성적 자유에 많은 남성들이 희생양이 된다. 벨라의 통제가 어려워지자 던컨은 그녀를 유람선에 밀입국시킨다. 벨라는 배에서 마타와 해리를 만나 철학에 입문하고 던컨은 그녀의 성장을 멈추려고 시도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통제할 수 없다. 그는 술과 도박에 빠진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한 벨라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선원들에게 던컨의 돈을 맡기지만 곧 그들에게 속았음을 알게 된다. 남은 여행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벨라와 던컨은 마르세유에서 내려 파리로 향한다.     파리의 매음굴에서 일하는 벨라. 분노한 던컨은 무너지고 벨라는 그를 버린다. 매음굴에서 그녀는 스위니 부인의 지도를 받고 또 다른 매춘부인 투아네트와 친구가 된다. 벨라는 사회주의에 매료된다. 성차별, 제국주의, 빈부격차, 계급사회, 신의 유무, 여성참정권, 노동권 등의 사회적 이념들을 체득한다.     한편 불치병에 걸린 고드윈은 맥스에게 벨라를 찾아오라고 부탁한다. 맥스는 수용소에 갇혀있는 던컨을 통해 벨라를 찾는 데 성공한다. 고드윈과 화해한 벨라는 맥스와 결혼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벨라를 되찾으려는 던컨과 빅토리아의 전남편 알피 장군이 나타난다. 그제야 벨라는 자신의 전생 빅토리아에 관하여 알게 된다.   알피는 벨라를 가둔다. 그러나 벨라는 위기를 모면하고 알피를 제압한다. 고드윈 박사는 벨라와 맥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둔다. 벨라는 고드윈의 작업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하고 염소의 뇌를 알피의 머리에 이식한다.     영화 ‘가여운 것들’의 최고 얘기거리는 단연 에마 스톤의 쉬지 않고 변화하는 엄청난 연기력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으로부터 종국에는 자신의 엄마가 되어 지식의 쾌락을 흡입하고 마녀가 되어 돌아온 벨라의 분노에 찬 지성을 스톤은 미친듯이 연기해 낸다.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또렷해지는 그녀의 딕션과 발걸음에 담겨 있는 벨라의 캐릭터에 상상 이상의 몰입을 보이는 그녀의 연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그녀의 수위 높은 섹스 신은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백지상태에서 세상을 탐구하며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에 섹스는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종종 그 파격적 장면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벨라의 몽환적 모험의 여정에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연상시키는 형식, 인간의 장기, 뼈, 성기 등을 묘사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많다. 그러나 그 표면의 한 꺼풀을 벗겨내면 란티모스 감독의 여성에 대한 통찰과 애정을 보게 된다.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장르 형식 고드윈 박사 환상적 서사 외과의사 고드윈

2024-03-20

[글로벌 아이] 반복된 서사, 중국인도 지쳤다

1950년 9월 30일 중국 국경절 리셉션. 마오쩌둥 주석은 산부인과 의사 린차오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기가 병원에 폭탄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할 건가?” 의사는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보호할 겁니다.”   지난달 28일 중국에서 또 한편의 항미원조(抗美援朝) 영화가 개봉했다. ‘의용군:영웅의 출격’. 6·25 종전 70주년을 맞아 ‘패왕별희’로 유명한 천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더 집요하게 중국의 참전을 정당화하고 왜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싸워야 했는지 강변한다. 유엔 회의에서 중국 대표는 38선을 넘은 미군을 침략자라 비난하고 마오 주석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영화는 그해 11월 30일 중국 의용군이 전사한 평안남도 ‘송골봉 전투’로 치닫는다. 치열한 교전 끝 마지막 남은 소나무 한 그루를 비추며 이들의 희생과 미군의 잔혹함을 대비시킨다. 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그 시대를 인식하게 하고 젊은이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의용군들의 공헌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개봉 전부터 ‘서사적 걸작’, ‘시공간을 넘어선 교감’이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었다. 2년 전 같은 시기에 개봉한 ‘장진호’가 12시간 만에 2억 위안(370억원)을 돌파한 데 반해 ‘의용군’은 개봉 첫날 2700만 위안(5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데 그쳤다. 개봉 일주일째였던 지난 5일 ‘의용군’의 누적 수익은 4억3600만 위안으로 같은 기간 ‘장진호’ 30억 위안의 15% 수준에 불과했다. 연휴 기간 흥행 순위는 경찰 영화 ‘바위처럼 단단해’(7억8000만 위안)와 로맨틱 코미디 ‘엑스:젊은 결혼’(6억 위안)에 밀렸다.   장쯔이, 탕궈창 등 중국 최고 배우들의 등장에도 흥행에 실패한 건 반복되는 서사에 중국인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란 평가다. 한 매체 기사의 댓글에선 “사람이 만든 영화인가?”라는 짧은 문구가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 중국 영화평론가들도 “기대가 컸지만 관객들은 캐릭터들이 구호를 외치는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 “정치적 성과를 축적하려는 시도로는 흥행할 수 없다”며 배우만 바꾼 선전 영화를 혹평했다.   격세지감이다. ‘장진호’에 흥분했던 중국인들의 분위기는 2년 만에 크게 달라졌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미국과 충돌을 피하려는 당국의 기류도 있다. 시진핑 주석은 다음 달 미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할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중국의 모습은 이제 그만 봤으면 싶다. 박성훈 / 한국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글로벌 아이 중국 서사 서사 인도 서사적 걸작 선전 영화

2023-10-06

[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70주년 (2)-재외동포의 서사 '미군 신부'들

지난 7월 27일, 워싱턴DC에서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정전협정 체결 및 한미동맹 70주년 기념행사가, 다른 쪽에서는 종전과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가. 시민들의 행진이 있었다. 전자는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되새기며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고, 후자는 70년 간의 대북정책을 반추하고 무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한 평화를 강조하며 미 의회에 발의된 한반도 평화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이 자라온 사회적 환경과 유전적 성향, 문화, 종교 등을 기반으로 형성된 대서사(master narrative)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해석한다. 이 서사는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원리와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과 시선을 하나의 프레임에 가두기도 한다. 역사와 국제관계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대서사만을 통해 지나치게 단순화할 경우 우리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흑백론적 프레임에 갇히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필자는 지난 번 칼럼에서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을 통한 창조적 서사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미동맹 70주년 행사들을 지배하는 대서사(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과 미국의 역할에 대한 무비판적 미화와 반공주의적 메세지)의 도덕적, 논리적 빈약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전쟁과 냉전시대를 겪은 세대의 숭고한 희생과 노고를 기리고 기억하는 행위는 중요하다. 하지만 미주 한인들은 국가적, 이념적 서사로 점철된 진영론에 동조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보편적 서사를 통해 한미관계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가 제작한 ‘초선’이라는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하는 메릴린 스트릭랜드 연방하원의원의 가족사는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리는 또 하나의 대안적 서사가 될 수 있다. 스트릭랜드 의원은 한국전쟁 후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출생한 1962년 당시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제도적 차별을 당했고, 타인종간 결혼은 불법이었다. 또 미국을 백인국가로 유지하려는 인종주의적 이민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1965년 이민법 제정 전까지는 미국으로의 공식 이민이 불가능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미군과 결혼한 여성에 대한 편견, 사회적 낙인찍기가 심했다. 흔히 ‘전쟁 신부’ 혹은 ‘미군 신부’라고 불리던 한국 여성 모두가 기지촌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령 ‘기지촌 여성’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한·미 양국의 공조에 의한 제도적 피해자로 볼 수 있다. 지난 2022년 9월 대한민국 대법원은 한국 정부가 군사동맹, 외화벌이를 위해 수 십년 동안 미군 주둔지 인근에 기지촌을 직접 설치·운영한 점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판결했다. 이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 후 한미동맹이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비인간적, 비민주적 행위를 가감없이 직면해야 할 책임은 우리의 몫이다.   스트릭랜드 의원이 두 살 되던 해 미국으로 건너온 가족은 첫 날부터 흑인-한인 커플과 갓난아기를 받아줄 숙소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세계한민족문화대전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최소 10만 명 가량의 미군 신부들이 미국으로 왔고, 이들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은 물론 추후 가족 초청 등을 통해 미국 내 한인 사회 형성의 토대를 닦았다. 미군 신부야말로 한국과 미국을 잇는 문화, 사회, 경제적 접점의 선두에 있었다. 그런데 한미동맹 70주년의 대서사에서 그들의 서사는 어디에 있는가?   스트릭랜드 의원은 인종차별과 한국전쟁이라는 양국의 비극 사이에서 잉태된 자신의 존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머니의 사랑과 가르침에서 찾는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태어난 그녀가 연방하원의원이 된 서사는 그 어떤 국가주의적 수사법도 흉내낼 수 없는 감동과 무게감을 지녔다.     사실 대부분의 미주 한인들은 한미양국 관계에서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 한인들은 양국 사이에서 다중적, 포괄적, 초월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역량도 갖췄다. 물론, 강남순 교수가 지적했듯 단순히 지리적으로 외국에 거주한다고 재외동포적(디아스포라적)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자신의 주변성 (marginality by imposition)을 비판적 주변성(critical marginality)으로 전환시키고 정체된 이념적, 국가중심적 사유 방식을 인류보편적, 혁신적 사유로 탈바꿈할 수 있어야 한다.   미주 한인들이 국가적 서사에 동조되는 수동적 객체가 아닌 적극적 주체가 될 때, 한미동맹 70주년의 의미는 더욱 빛날 것이다. 전후석 / 다큐멘터리 감독디아스포라 시선 한미동맹 재외동포 미군 신부 한미동맹 70주년 창조적 서사

2023-08-14

[시로 읽는 삶] 어떤 서사도 안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서사는 안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서사도 안전하지 않다/ 모든 부류의 사물은 결국 서사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의 생애 역시 서사 아닌 것이 없다/ (…) 어떤 대상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하려하지 말 것,/ 그 남자의 구부정한 등이 한권의 서사인 것처럼/ 훌쩍거리며 국물 마시는 당신도 결국 한 권의 서사이다/ 젖은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나 페트병도 알고 보면 글씨들 빼곡한 한 권의 책// 히아신스는 눈물처럼 맑은 문장이다   -송종규 시인의 ‘히아신스’ 부분       단맛 들어가는 복숭아, 생의 절정을 만끽하며 울어대는 매미들, 냉커피를 들고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풍경이 전개가 조금씩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자 세상은 커다란 도서관이 된다. 부동, 혹은 움직이는 책들로 가득한 세상이라니,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이 연상된다. 보르헤스는 우주를 거대한 도서관으로 묘사했다.     서사는 이야기의 진술이다.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 픽션이 가미되기도 한다. 리얼리티에도 약간의 보완이 있겠고 다소 왜곡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도 부풀려지거나 축소될 때가 많다.   그 남자의 구부정한 등은 한 권의 책이다. 남자의 뒷모습은 에필로그처럼 한 생을 감지하게 한다. 훌쩍거리며 국물을 마시는 여자도 절절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여자의 눈물은 휘발성이 강하지만 영롱한 이슬이다. 갈피마다 갖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은 순환이라는 기승전결을 거쳐 마침표가 찍힌다.     인생은 한 권의 자서전이다. 우리는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며 그렇게 사는 것 같다. 히아신스같이 맑은 문장이거나 때로 표범처럼 날쌘 문장이거나 나만의 명문장을 얻고 싶어 한다.   파격 없이 지지부진한 일상들도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 문장의 격이 달라진다. 문장을 구성하는 것 중 발견과 묘사의 힘이 크다고 본다. 어휘의 바다를 유영하며 종횡무진 하는 상상력이 있다면 분명 참신한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데, 이야기의 기발함과 묘사의 특이성으로 눈에 확 띄는 책도 있고 지나치게 소박해 누구도 진가를 알아채는 이가 없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함부로 발설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시인의 조언이 가슴에 닿는다. 한 권의 책을 두고 섣부른 판단이나 자기중심적인 해석은 옳지 않겠다. 취향이나 선호도가 다를 수는 있어도 태생의 의미나 무게의 경중을 두고 지나치게 두둔하거나 폄하하지는 말아야겠다.   저마다 웅숭깊은 이야기를 지닌 인생들이 있어 세상이라는 도서관은 늘 풍성하다. 양서도 있겠고 해로운 책들도 많을 것이지만 악서라도 한 줄쯤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어떤 서사도 안전하지 않다. 또한 완벽하지도 않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이야기는 흔들리면서 이어질 뿐이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자란 어머니, 어머니의 서사와 더불어 성장한 나, 이 돌고 도는 인생유전이 굽이치는 여름밤, 좋은 시 한 편을 읽는 일은 첨탑이 높은 교회당에 들어설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처음과 끝이 손을 잡고 무심하게 돌고 있는 시간의 수레 위에서 우리들의 안전하지 않은 이야기는 길기만 하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서사 안전 마찬가지 이야기 갖가지 이야기 문장 하나

2022-08-02

[취재일기] 다양한 아시안 서사가 중요한 이유

지난주, 올 가을 브로드웨이에 진출한다는 뮤지컬 ‘케이팝(KPOP)’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NY1, NBC, 뉴욕포스트, PIX11, 한국 취재진 등 25개 매체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생각보다 큰 관심에 뉴욕한국문화원 직원들도 뿌듯한 분위기였고, 포토타임 이후 취재 경쟁도 꽤 치열했다.   기다림 끝에 뮤지컬 케이팝의 디렉팅을 맡은 테디 버그먼 감독에게 물었다. ‘아시안 소재 뮤지컬인 만큼, 혹시 증오범죄나, 아시안들이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고충을 풍자하는 내용도 약간 들어 있느냐’고. 뉴욕에서 증오범죄가 핫이슈인 데다, 시선이 꽤 몰려 있는 만큼 당연히 그렇다는 답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대답은 “노(No)” 였다.     매우 강한 어조의 부정이라 살짝 당황하던 찰나, 버그먼 감독은 바로 말을 이어갔다. 케이팝 스타가 되고 싶은 일반적인 사람들, 한국인들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야망이 넘치고, 꿈을 위해 이들이 얼마나 인생을 쏟아붓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는 것.     뮤지컬 음악을 작곡한 한인 작곡가 헬렌 박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뮤지컬을 만들려 했고, 각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려 했을 뿐 특정 이슈를 다루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또 “다양한 아시안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는 데 의미가 있고, 이들의 이야기들이 계속 노출되다 보면 사람들도 아시안에 대해 더 제대로 알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고 강조했다.     인종차별을 딛고 살아가는 아시안들의 삶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고 답했다면 좀 더 광고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을 텐데, 이들은 오히려 아시안 서사를 담백하게 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예상외였던 제작자들의 답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잊을 만하면 뉴욕 일원에서 아시안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이 소식이 뉴스로 생산된다. 물론 예전엔 숨기려 했던 차별과 증오범죄 문제를 겉으로 꺼낸 것은 의미가 크다. 제대로 된 처벌을 끌어내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런 뉴스는 계속 필요하다.     다만 지나치게 증오범죄 이야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칫 ‘아시안=범죄 타겟’이라는 또 다른 차별이나 편견을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다. 꿈을 위해 살아가는 다양한 아시안, 열정적으로 살아온 한인들의 일반적 서사가 더 많이 알려져야 하는 것 아닌지. 우리가 마치 ‘백인’ 이야기라고 해서 내용을 예측하고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지 않는 것처럼, 다양한 아시안의 이야기가 알려져 더는 ‘아시안’ 콘텐트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될 때, 진정 차별도 사라지지 않을까. 김은별 / 편집국 기자취재일기 아시안 서사 아시안 서사 아시안 열정적 아시안 소재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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