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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새날이 밝아온다

해는 날마다 뜹니다.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낀 날에도 해는 어김없이 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해를 보지 못하여, 해가 안 뜬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해는 이렇게 매일 뜨지만 새해가 되면 왠지 설레고, 새로운 다짐을 합니다. 묘한 일입니다. 시간은 이어져 있지만 우리는 분절하여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이어져 있지만, 심리적인 시간, 인문학적인 시간은 분리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불면의 밤이 긴 사람에게 해 뜨는 새날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못 이루었다면 날이 밝는 게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해가 뜬다,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는 말에서 저는 하얀 커튼이 떠오르고 아픈 하루가 떠오릅니다. 어떤 이는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어떤 이는 새벽에 잠을 못 이룹니다. 아침형 인간이나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그저 아침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잠을 못 이루고 일찍 일어났기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침형 인간보다는 아침에 푹 자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나, 낮에 즐겁게 활동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전에 심리학자의 강의를 들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에 놀랐습니다. 인간의 뇌에는 한계가 있어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로 뇌는 단순해서 현재 마음의 상태가 긍정적이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어휘를 되풀이하면 자신의 몸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일부러 웃고, 좋은 말을 떠올리면 몸도 좋아지는 겁니다. 긍정적인 표현 몇 가지를 기억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해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불안도 스트레스도 줄고, 좌절이나 우울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불안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전보다 밝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긍정의 힘이죠. 웃으면 복이 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수업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업에서는 수많은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 어휘나 표현을 더 많이 소개할 수도 있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활동이나 과제를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세상을 즐겁게 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학생에게만 영향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나도 몰래 가르치는 사이에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즐겁지 않은데도 즐거운 듯이 말을 했더니 즐거워졌습니다. 그러한 습관 속에서 어느새 나는 즐거운 사람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나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나는 사람도 즐거워집니다. 내가 웃으니 그도 웃습니다. 웃음도, 기쁨도, 즐거움도 전염력이 큽니다. 그야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薺家治國平天下)입니다. 내가 긍정적이고 즐겁게 살면 가정이 바뀌고, 사회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시작점은 나입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세상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등등 좋은 단어가 참 많습니다. 이런 표현을 떠올리면서 고마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 행복하고 기쁜 순간, 즐거운 만남을 떠올려 보세요. ‘다시 해보자, 어차피 지나간 일이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를 걱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등등 내게 힘을 주는 표현도 많습니다. 자신을 일으키는 단어와 표현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생겨납니다. 때로는 좋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나 일찍 깨어 한없이 가라앉은 새벽에 긍정의 어휘와 표현을 말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냥 해 본 것이었을지 모르나, 후에는 내 삶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럼 진짜로 새날이 기쁘게 밝아올 겁니다.     모두에게 올 한 해 늘 기쁜 해가 뜨기 바랍니다.     새날이 밝아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새날 시간 인문학적인 아침형 인간 불안 정도

2024-01-01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날

새날   날이 밝아오고 있다 / 나는 네게 무엇이었는가 / 눈길을 걸어야겠다 /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 내 발이 녹고 눈이 녹을 때까지 / 불꽃처럼 타오르리라 / 다시 네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게 / 활 활 태우며 살아가리라 / 남은 재 한 줌까지   음력 설이다. 하늘 저편 지구의 반대편 사람들은 바쁘다. 새로운 해가 떴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떠난다. 차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북이 걸음을 걸어도 기어코 떠나고야 만다. 하늘의 반대편 이곳 시카고는 조용한 설을 맞이하고 있다. 신문이나 SNS를 통해 정보를 얻지 않으면 구정인지도 모르고 지나게 된다. 고향이 너무 멀어서일까? 너무 오래 이곳에 살아서일까? 소리 없이 새로운 하루가 이곳에서도 움트고 있다.   해가 뜨는 것과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구 위 모든 나무와, 들녘의 꽃들과, 바다 같은 미시간 호수와, 빌딩의 숲들과, 그 사이를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들 모르게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거대한 우주의 하늘 속에서 매일 기울어진 체 스스로 돌고 있다는 사실은 입증되어진 지 오래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서로 부딛히지도 않고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잘 살아가고 있다. 서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서로 밀쳐내면서 기막힌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을 지나고 있는 오늘 새벽 창가에 눈이 내렸다. 얇은 솜이불을 펼쳐 놓은 듯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어제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얼마 후 먼동이 트고 하루가 밝아 올 것이다. 밤과 낮의 구별은 단순히 공간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먼 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바라봄의 위치에 따라 밤이 될 수도 한편으론 낮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판단은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진실이 되고 거짓이 될 뿐이다.   벽난로에 불을 부친다.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나무가 탄다.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침잠해 있던 마음의 열정이 다시 일어난다. 나무를 뒤집어 주면 더 활 활 타 오른다. 삶의 열정이 식어 질 때 무섭게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질 것이다. 불꽃같이 타오르는 새날이 되기를 마음 속에 다짐해 본다. 일 년을 불꽃같이 살아간 후에 다시 새날 앞에 설 것이다.   설을 맞으면서 사람들은 소원 하나쯤은 모두 가지고 있다. 가족의 행복을 소원하기도 하고, 무너져 내린 건강을 회복하기 원할 것이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를 소원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도모하기를 원할 것이다. 꿈이란 의지로 세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안에서 자라는 것이다. 새싹이 자라나듯, 꽃이 피어나듯, 낙엽이지듯, 오늘같이 눈이 내리듯, 구름이 바람에 흐르듯이 내 안에서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생명력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다.   아침이 오고 있다. 새날에 대한 기대와 감사가 함께 다가오고 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설레임인가?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일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음은 또한 얼마나 귀한 일들인가. 나에게도 작은 소원이 있다. 내 속에 생각과 언어들을 꾸밈 없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원하고 있다. 창밖에는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아침은 샤프란 향기처럼 내 마음을 채우고 있다. 자주 찾는 호수에 나가 그리운 사람에게 그리움을 전해야겠다. 어서 일어나라고.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날 미시간 호수 소원 하나쯤 하늘 저편

2023-01-25

[이 아침에] 새날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온다

설날, 다시 새날이다. 새벽이 오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눈보라 치는 벌판에 떨며 혼자 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흑암, 깊고 깊은 어둠으로부터 새벽이 온다는 사실을.   스무 살 무렵 설날 저녁, 강가 절벽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새날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 밤, 어둠은 깊고 시간은 무거웠다. 새벽은 더디게 왔다. 녀석이 길을 잃어버렸나 싶을 때, 멀리 하늘과 땅 사이에 실금이 생겼다. 세상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먼 산이 산을 보듬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등성이와 골짜기가 서서히 구분되고 산 사이로 난 길이 보였다. 숲속에 묻혀 있던 가까운 곳의 나무가 보이고 백조가 날아올랐다. 어둠은 더디게 물러났다. 희뿌옇게 여명이 찾아왔다.     산마루가 붉게 물들더니 햇살을 타고 세상에 온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썰물에 개펄이 제 모습을 먼저 드러내자 차츰차츰 큰 개울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물고랑까지 또렷이 보였다. 깨진 얼음조각들이 서로 부딪쳐 와글거리며 강물 따라 떠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숲에서 새들이 푸드득 푸드득 날개 쳐 솟아올라, 마파람을 가르며 날기 시작했다. 강물에서 물고기 한 마리 퍼덕이며 튀어 올랐다. 비늘이 햇살에 반짝였다. 빠르게 흐르는 물길을 거슬러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라니. 그렇다. 살아있는 놈은 저렇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심장이 뛰었다.     저곳 갯벌 속에는 수많은 생명들이 숨죽이며 겨울을 나고 있을 터였다. 장어, 낙지, 맛, 게…. 눈보라 치는 이 시절이 지나면 저들은 갯벌 구멍에서 빠져나와 다시 세상을 활개칠 것이다. 그래, 지금은 내 인생의 겨울 한 철일 뿐이다. 길을 찾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지 않던가.   결단을 내렸다. 이제라도 학교에 가자. 내가 학생이 되다니… 가슴이 뛰었다. 지게를 벗어 던지고 그 길로 집을 떠났다. 스물 한 살 나이에 광주에 있는 야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 밤이 내 생의 갈림길이었다. 긴 인생에서 방향이 중요하지 몇 년 빠르고 늦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는 없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 생은 큰 틀에서 결정된다. 운명이다. 누구나 순응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운명을 탓하지 않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 앞에 운명은 길을 열어준다. 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 그리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마치고 굽이굽이 살아오는 동안, 운명이 사람을 좌우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어김없이 설날이다. 벌써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 그해 설날 새벽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설은 일 년의 첫날. 새날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새날은 아니다. 새날은 간절한 사람의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새날이다.    정찬열 / 시인이 아침에 새날 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 순간 운명 동안 운명

2022-02-03

[이 아침에] 사랑과 배려로 새날을 연다

처음으로 미국에 와 살며 연말이면 특이한 풍경을 보았다. 친척이나 친한 이웃에 초청을 받으면, 나는 음식이나 선물을 들고 갔다. 그때마다 느낀 것 중에 하나이다. 어떤 이웃은 한 벽면에 온통 수십 통의 카드를 가득히 장식해 놓은 것이다. 한참 들여다보면서 느낌이 참 좋았다. 가지가지 그림 속에서 개성이 느껴지는 카드의 분위기가 흥미로웠다.   또한 우체국에 가면 조용히 그 긴 줄을 기다리는 이곳 사람들에게도 놀라웠다. 마치 이것저것 꾸러미 싸들고 부모와 형제를 찾아 인사가던 한국의 명절 분위기와 흡사했다. 형식은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이 나를 감동시킨 것이다.     나도 카드를 쓰려고 동네 ‘홀마크’ 가게에 자주 들락거렸다. 또 아프터 세일이 있는 것을 알면서는 1년 전부터 여러 박스의 카드를 구입하기도 했다. 신이 나서 연말이면 수십 년 동안 한국과 미국으로 80여 통의 카드를 써 보냈다. 비행기 타고 가는 비용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인사가 아닌가.     이제 나이가 드니 손목과 손가락이 아파서 11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하여 12월 중순까지는 완료한다. 보내는 즐거움도 좋지만 답장을 받아보는 느낌은 더욱 즐겁다.   카드 속에는 편지지 한 장에 타이프를 쳐서 쌓인 1년 소식을 보내오던 미국 친구들과 조카의 카드도 있었다. 진심과 정성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싱거운 한 문장이나 그저 이름만 달랑 써서 보내오는 것과 가족사진 카드만 보내오는 것도 있다. 그처럼 개인의 마음이 가지각색으로 담겨 있었다.   그러니 나도 배려를 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담이 되지 않도록 어떤 분들에게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새해 인사를 시작했더니 훨씬 내 일이 점점 수월해졌다. 올해도 집안일에 쫓기어 사는 나는 카드 숫자를 줄여 미국의 지인들에게만 20여 통을 썼다. 덕분에 기뻐하시는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한편 해마다 받은 카드 중에 내용이 좋거나 그림이 특별한 것들은 책장에 세워두고 자주 쳐다보기도 한다.   요즈음 아이들은 필기체를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문자만 칠 줄 알지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대부분의 부모도 신문과 책을 전혀 보지 않고 건강에 해로운 전화기만 들여다보니 슬프고 안타까운 세상이다. 사람은 종종 얼굴 표정을 보면서 만나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대화하며 종이 편지도 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 사이에 따듯한 정이 흐르는 새해를 기원한다. 최미자 / 수필가이 아침에 사랑 새날 가족사진 카드 카드 숫자 새해 인사

202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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