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흰 토끼를 따르라
옛날에 한 살 남짓한 여동생을 등허리에 업고 종일토록 경상도 철로 변에서 동네 애들과 놀던 시절이 있었다. 광목 띠로 내 등에 칭칭 감긴 채 동생은 자주 울었다. 가까운 집 대청 위 사과 궤짝에 철망을 엮어 만든 토끼장 속에 눈이 빨갛고 몸이 하얀 토끼 한 마리가 산다. 거기에 가서 등을 돌려 토끼를 보여주면 울음을 뚝 그치는 동생. 돌이켜보면 그 토끼는 영물이었다. 초등학교 때 ‘산토끼’ 노래를 배웠다. 뛰어가는 토끼의 행선지를 궁금해하는 동요. 2절에서 토끼가 답하는데 산 고개를 넘어서 알밤을 주워 오겠다는 플랜이다. 새가 벌레를 입에 물고 새끼들이 삐악거리는 둥지로 돌아오는 정경이나 다름없다. 중학교 교과서의 별주부전에서 토끼는 자라 등에 업혀 가 용궁 속 용왕을 알현한다. 간을 용왕에게 기증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라는 치사스런 압력을 받는다. 깜빡 집에 두고 온 간을 금방 가져오겠다는 지략을 써서 토끼는 위기를 모면한다. 그놈은 눈이 까맣고 몸이 갈색인 야생 토끼였을 것이다. 1960년 출간된 존 업다이크(John Updike: 1932~2009)의 소설, ‘달려라, 토끼’(Rabbit, Run)의 농구선수 출신 해리는 별명이 토끼다. 심리적 불안과 종교적 갈등에 시달리는 미 프로테스탄트 중산층의 시대 감각을 대변하는 세일즈맨 해리는 발정한 토끼처럼 여자들 사이를 황급히 뛰어다닌다. 1938년부터 2000년까지 미 TV 애니메이션을 주름잡던 ‘Bugs Bunny’가 거의 전 지구촌을 장악해 온 것도 토끼의 위력이다. ‘bunny’는 어린 토끼라는 뜻. 성깔머리 되게 더러운 ‘버그스 버니’를 직역하면 ‘벌레토끼’가 된다. 그는 눈앞에 누구라도 얼씬하면, “What’s up, Doc? 무슨 일이시죠, (의사) 선생님?” 하며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건다. ‘doctor’는 라틴어 ‘docere, 가르치다’에서 유래했다. 대학 시절 야시장 길거리 돗자리에 용산 미군부대에서 버린 영어 포켓북이며 철 지난 ‘Playboy’ 월간지가 깔려 있었다. 힐끗 살펴보는 19금 사진들! ‘playboy bunny girl’이라는 단어는 한참 나중에 들었다. ‘플레이보이 토끼소녀’? 플레이보이 매거진은 1953년 12월 개간 후 2020년 3월에 폐간됐다. 머리 위 하늘로 길게 뻗친 귀와 꽁무니에 원형의 꼬리가 봉긋한 버니 걸이 정식으로 등장한 시기가 1960년 시카고 플레이보이 클럽에서다. 토끼의 스태미나와 다산력(多産力)의 상징, 토끼소녀! 1999년 사이파이 영화 ‘매트릭스(Matrix)’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비몽사몽 간 컴퓨터 화면의 “Follow the white rabbit, 흰 토끼를 따르라”는 지시를 받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상한 나라 앨리스(1865)’에 나오는 흰 토끼. 회중시계를 손에 들고 다니는 초조한 흰 토끼 때문에 앨리스는 토끼 굴에 들어가서 신기한 모험을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식 토끼는 방황하고 반항하고 성적으로 방종하다. 한국에서는 산토끼 동요 외에 정당 지지율에 토끼가 등장한다. 여의도에서 자주 쓰는 말로 ‘집토끼를 산토끼로 만들지 말자’가 있는데 국회의원들이 유권자를 토끼로 착각하는 이상한 비유법이다. ‘bunny’는 옛날 스코틀랜드어로 ‘꼬리’, ‘튀어나온 것’을 뜻했다. 불어로 ‘bon’은 좋다는 뜻. Bonjour, 봉주르! 튀어나온 것이 좋다. 봉긋 솟아나는 새싹, 벙긋 웃으며 굴에서 튀어나오는 흰 토끼, 드높은 산봉우리 같은 것들이.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토끼 플레이보이 토끼소녀 상징 토끼소녀 playboy bun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