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취재 수첩] 무연고자와 라면 한 봉지

무연고자 박철언(64)씨의 삶은 늘 쓸쓸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지난 7일 세인트제임스교회 김요한 신부가 열어준 장례식은 조촐해도 온정이 가득했다. 〈본지 12월21일자 A-1면〉   노숙자, 무연고자와 같은 소외 계층은 우리 주변에 늘 있다. 중요한 건 박씨와 같은 안타까운 일이 또다시 생겨나선 안 된다는 점이다.   취재가 끝나고 셸터를 운영 중인 김 신부에게 물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구체적인 방안을 듣는가 했는데, 답변은 의외로 단순했다.   “라면이랑 생필품이 필요하죠. 아, 담배도….”   김 신부는 “이 사람들 돌보는 건 사실 별것 없다”며 “일반인이 가진 ‘의지’라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데리고 살면서 사고 안 치고 잘 먹고 잘 자는 일이 가장 중요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인타운에서 셸터 사역을 펼친 지 15년 째다. 지금까지 약 300명 정도의 노숙자가 김 신부의 셸터를 거쳐 갔다.   그 중 살아보겠다고 의지를 갖고 취직까지 한 사례는 30명이 채 안 된다. 갱생 비율이 10%에도 못 미치는 셈이다.     나머지는 뚜렷한 목적 없이 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이들이다.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거나, 다른 이들과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셸터에서의 삶이 답답해서 다시 거리로 뛰쳐나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신부는 돈 얘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했다. 오히려 재정 지원을 받는 게 불편하다는 입장이다. 돈을 받게 되면 도움을 주는 이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그보다 음식이나 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LA시의 노숙자 정책도 슬쩍 꼬집었다.   김 신부는 “노숙자 문제라는 건 돈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며 “어쩌면 셸터가 이 사람들에겐 또 하나의 감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현실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유연한 접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부와 달리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굳이 돕겠다면 셸터에 와서 여기 사람들과 몇 마디 대화나 좀 해주고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주면 좋겠다”며 “이들은 가족도 없지 않나. 사람 간에 어떤 인정을 느끼게 되면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무연고자에게 필요한건 거창한 지원이 아니다. 라면 한 봉지, 대화 몇 마디면 충분할 수 있다. 제2의 박철언씨가 나와선 안 된다. 장열 기자취재 수첩 무연고자 봉지 노숙자 무연고자 무연고자 박철언 봉지 대화

2023-12-22

[중앙 칼럼] 플라스틱 백 규정의 ‘뉴 노멀’

오래전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였다. 호텔 로비에서 몇몇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놀라서 로비 직원에게 다가가 왜 주의를 주지 않느냐고 하니 직원은 다짜고짜 어디서 왔는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여긴 캘리포니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니 그는 “가주 법은 호텔 안에서 금연하게 돼 있지만 이곳은 손님들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설명했다. ‘자유’를 강조했던 그가 “가주에서 온 손님들만 늘 이런 말을 한다”는 말도 친절하게 덧붙였던 것도 기억한다.  가주민들이 유독 유난을 떤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가주에서 실내 금연법이 시행된 것은 1998년부터다. 전국에서 최초로 가주는 음식점은 물론 바, 카드룸 등의 실내에서 흡연을 할 수 없는 금연법을 제정했다. 당시 단속 규정도 꽤 셌다. 실내에서 흡연한 개인은 물론, 흡연을 허용한 비즈니스 업주에게도 초범일 경우에는 100달러의 벌금에 그쳤지만 반복될 경우 최대 7000달러까지 벌금이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미국 내 대부분의 호텔에서 실내 금연이 시행되고 흡연실도 별도로 운영하고 있지만, 법이 정착되기 전까지만 해도 흡연자와 비흡연자간의 충돌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주 금연법은 이후 직장 내 금연법으로 이어졌고 아파트 등 공동 주거시설이나 해변가에서의 금연법도 만들어졌다. 가주가 금연법 제정에 앞장선 후 다른 주들도 비슷한 금연법을 통과시켰고 덕분에 간접흡연으로 인한 질병도 감소했다는 보고서도 종종 발표된다.     그랬던 가주가 지구 환경보호에 눈을 돌리면서 2014년부터는 전국에서 최초로 일회용 플라스틱 백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소비자는 마켓 등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비닐백을 10센트에 사서 써야 했다. 가주는 이에 그치지 않고 오는 2025년까지 플라스틱 백을 완전히 퇴출하는 법을 마련했다.     개빈 뉴섬 주지사가 올해 서명한 법에 따르면 오는 2025년 1월부터 식료품점과 수퍼마켓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봉지 사용이 금지된다. 쇼핑객들은 앞으로 재활용이나 퇴비화가 가능한 봉투를 사용해야 한다. 과일과 야채를 사거나 포장하지 않은 고기나 생선, 견과류 등을 구입할 때 사용하던 얇은 비닐백도 더는 편하게 쓸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본 롭타 검찰총장은 마켓에서 사용하는 두꺼운 재활용 플라스틱 봉지가 실제로 재활용이 가능한지 조사에 나섰다. 가주 검찰청은 최근 재활용 플라스틱 제조업체에 이들 제품이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증거를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가주 검찰청은 업체들의 주장대로 재활용이 안 된다면 수백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것을 포함해 법적 조처를 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가주 검찰청에 따르면 재활용 플라스틱 봉지라면 적어도 125번은 재사용할 수 있어야 하고 재질의 40%는 재활용 재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주 검찰청의 이런 발표는 지난해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진 플라스틱 봉지의 양이 2018년에 비해 더 많다는 통계 때문이다. 가주 재활용 부서에서 최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재활용되고 있는 플라스틱 봉지는 극히 일부분이며 대부분이 태워지거나, 버려져서 매립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 뉴저지, 오리건주 등은 가주를 따라 일회용 플라스틱 봉지 사용을 금지했다. 이들 주가 가주와 같이 플라스틱 봉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법적 행동을 취할지 주목된다. 가주의 유난스러움의 결과가 새해에 ‘뉴 노멀’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진다. 장연화 / 사회부 부국장중앙 칼럼 플라스틱 규정 재활용 플라스틱 플라스틱 봉지 일회용 플라스틱

2022-12-29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과 두 알과 김 세 봉지

어른 섬기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논밭 뙈기 받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다. 사랑은 축복이다. 보답 없는 친절이다. 사랑은 베푸는 사람이 더 기쁘고 행복하다.   한 달에 한 두 번 연세 많고 독거하시는 분, 장기간 투병하시는 몇 분께 요리해서 배달한다. 미리 나와 기다리시며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시는지 황송할 따름이다. 내 인생에 이처럼 날 기다린 사람이 있었던가.     내 요리 실력은 ‘꽝’이다. 사실 꽝이였다. 레이쳘 레이쇼에 출연하던 둘째 딸이 인터뷰에서 자기가 요리를 잘 하게 된 건 (나를 건너 뛰고) 할머니 덕분이라고 해서 나를 물 먹였다. 그뿐이랴! 엄마가 잘 하는 건 단 두 가지, 추수감사절 터키와 빈대떡 뿐이라고 해서 날 난감하게 했다. 화랑과 창작예술센터 운영하며 여섯 식구 건사하는 동안 식사도 흡입식으로 해결한 내 고충을 알 리가 없다.     다행히 어머니는 종가집 요리솜씨 뽐내는 분이셔서 생전에는 차려주신 밥상을 받아먹는 호강을 누렸다. 그러다 보니 한식요리는 뒷전이고 여태 김치도 잘 못 담근다. 양식은 요리책 보고 그럭저럭 흉내 내는데 한식은 당초 무개념에 기본기가 없어 젬병이다. 김치야말로 고난도의 비법과 손맛이 필수라서 김치 장인 어른들과 물물교환, 반찬 갖다 드리고 얻어먹는다.     기댈 곳이 없으면 홀로서기가 정답이다. ‘이대로 반풍수로 살 순 없다’를 모토로  ‘노력은 모든 난관을 이긴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유튜브 보면서 유명 세프들의 레서피를 학습한 결과 일취월장, 믿거나 말거나 요리솜씨 좋다고 칭찬(?)이 자자 하다. 매달 색다른 메뉴를 개발해 다양하게 공수하는데 성공했다.     나는 소문난 ‘파티 퀸’이다. 30년 동안 현대미술 화랑을 경영하며 유명화가들을 초청해 고객들을 위한 작품 전시와 리셉션을 기획했다. 감미로운 음악과 아름답게 장식한 식탁, 국제적 감각의 메뉴로 차려진 파티는 상류층 인사들을 전시장으로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천방지축, 밥도 서서 삼키던 내가 ‘상류층 여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장군과 결혼한 프랑스 대령 크라우스부인 덕분이다. 흉내를 내려면 꽁지보다는 한걸음 앞서 가는 게 모양세가 좋다   상류층의 차별에 밀리지 않기 위해선 ‘손자병법’이 고난도 작전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상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가장 한국적이고 세계적인 것으로 승부수를 던지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쪼그라들고 비겁해지면 짓밟히고 무시당한다. 사태를 잘 파악하고 올인 하면 승부는 내 쪽이다.   나이 들면 사는 게 엄숙해진다. 정갈하고 소박한 내 반찬을, 가장 맛있게 먹을 분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어른들께는 배달 간다고 미리  알리면 안 된다. 빈손으로 안 보내고 한 개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부엌 살림을 뒤지시기 때문이다.   그저께는 도착 5분 전에 전화드렸다. 할머니는 사과 두알과 김 세봉지를 주신다. 얼마나 주고 싶으셨으면 황급하게 사과 두알과 겉봉지 뜯어진 김을 주실까.     보물보다 더 귀한 선물을 곁에 두고 시동을 건다. 뜨거운 눈물이 핑 돈다. 사는 동안 이토록 뜨겁고 가슴 아린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차가 멀어질 때까지 할머니는 손을 흔들고 계신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는 세상은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과 봉지 종가집 요리솜씨 상류층 인사들 상류층 여인

2022-12-13

[이 아침에] 커피를 닮은 사람

상큼한 커피 향이 잠에 취한 아침을 깨운다. 꿈나라에 잠겼던 영혼을 불러내 밝은 세상으로 걸어 나오게 하는 커피. 진한 갈색 음료에는 혼을 각성시키는 힘이 숨겨져 있나 보다.   매번 아침마다 또 다른 하루의 새로움이 달여지듯, 아침 녘이면 정성스레 커피를 달인다. 커피 팟에 맑은 영혼 같은 물 한 컵을 붓고, 커피 가루 두 스푼을 커피 기계에 넣는다. 열려 있는 커피 봉지에서 바닐라 향내가 물씬 스며 나오자, 잠자던 후각이 화들짝 깨어난다.   달리는 기차 소리의 커피 팟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물이 원두커피 가루를 통과하면 잠시 후 짙게 우려진 갈색 커피가 반가운 소식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것은 차갑기만 한 삶을 자신의 열정과 정성으로 끓인 다음 환상의 아로마 향이 가득 찬 꿈에 여과시켜, 마침내 노력과 인내의 열매인 커피라는 삶의 꽃을 화사하게 피워내는 것과 같다.       완성된 커피를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고운 찻잔에 따른다. 가만히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을 상큼하게 맛본다. 따뜻한 커피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자, 나는 차츰 커피나무로 변해간다. 높은 산을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열이 몸에 깃들었는지 전신이 따뜻해 온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이성(理性)이 맑아지는가 하면 푸른 산의 정기가 육신에 스며들자 머리까지 청정해진다.     자기만의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자신만의 여유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쉼 없이 공격해 오는 일상의 충격 속에서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언젠가 터질지도 모르는 쓰나미 같은 삶의 충격을 완화시켜 주는 방편이 될 듯도 싶다. 팽팽해지는 하루의 일과에서 자신만의 이완장치가 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린다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삶을 배워갈 나 같은 하루살이들에게는 필수일 것 같다.     원두커피에는 신맛과 단맛이 있는가 하면 짠맛과 쓴맛 그리고 감칠맛과 향기로운 아로마 향까지 숨겨져 있다. 오감을 산뜻하게 자극하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서는 커피, 매혹적인 향으로 후각을, 오묘한 맛으로 미각을 매료시키는가 하면, 예측할 수 없는 삶처럼 불투명하지만 신비한 빛으로 시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마침내 넉넉한 여유로움에서 오는 풍요로운 영혼의 소리까지 듣게 만든다.   헤아려보면 좋은 커피에는 각기 다른 여러 맛이 존재할 뿐 아니라 그 밸런스 역시 잘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삶의 복합적인 요소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어울려 서로의 맛을 받쳐주고 살려주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사람들이 좋은 커피에 매료되는 이유는 커피 맛이 복합적이고도 조화로운 삶의 맛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가을 낙엽 빛의 커피를 닮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생기 넘치고, 신선하게 톡 쏘는가 하면 날카롭지만 밝고 풍요로운 멋을 가슴에 품은 사람. 더 나아가 담백하고 은근하지만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삶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영애 / 수필가이 아침에 커피 원두커피 가루 갈색 커피 커피 봉지

2021-11-16

[이 아침에] 사람값 하며 사는 삶

 사람값은 사람이 매긴다. 다른 사람이 매긴다. 삶의 무게는 질량으로 잴 수 없고 사람값은 숫자로 매기기 어렵다. 살아 생전보다 사후에 매겨지는 점수가 더 정확한 수치인지 모른다. 사람값 하며 살기는 참 어렵다. 살아 생전에 붙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죽은 뒤 남기는 몇 줄의 평판이 어쩌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지 모른다.     지역사회에 알게 모르게 봉사하던 두 분의 죽음이 생각난다. 한 분은 이름도 얼굴도 없이,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연장자 아파트에서 가난하게 지내던 할머니다. 자기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고, 황금 송아지 키우던 과거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손수 키운 채소로 맛난 김치 만들어 이웃과 다정하게 나눠 먹었다. 일요일엔 교회 밴 타고 오는데 텃밭에서 갓 뽑은 채소를 봉지에 담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나도 몇 번 얻어먹는 행운을 누렸는데 부추나 깻잎은 일렬로 줄세워 깨끗이 손질해 씻어주셔서 요리하기 편했다.     다른 한 분은 지식과 교양, 품위와 인격을 모두 갖춘 분이다. 전문직 남편 덕분에 적당한 부를 누렸고 두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냈으며 교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지 못했으며 알게 모르게 지역 사회에 봉사한 분이다.     죽음은 한 인간의 민낯을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 진솔하게 그려낸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 했다. 굽은 손으로 플라스틱 봉지에 담긴 싱싱한 채소를 건네주던 할머니의 다정한 미소를 그리워하고 그 분의 일생을 추모했다.     다른 한 분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배우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우아한 단어로 추모하고 애도했다. 나도 그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덜 가진 사람, 적게 배운 사람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그 사람 잘난 체 하잖아요. 겉다르고 속 달라요. 도와주는게 아니라 불쌍해서 그러는 거죠.”   깜짝 놀랐다. ‘동물적 감각’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습관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반응 시간이 빠르고 진솔하다. 동물적 감각은 이성이 지닌 위선의 탈 속에 숨은 인간의 속내와 진실의 실체를 보게 한다.     위선자는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가슴이 얼음처럼 차가울 때 베푸는 동정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다. 자애로운 동정심은 ‘빈민 구제’가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일 뿐이다.     사람들은 가슴으로 말한다. 가슴은 없는 말을 꾸며대지 않는다. 보이는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판단하고 내키는 대로 답한다.       정성 담아 사람 대하고 동정 대신 사랑으로 섬기면 죽어서도 사람값을 하지 않을까. 호랑이가 아니라서 죽어 남길 가죽 없고, 이름 기억할 명성은커녕 남길 유산 조차 없으니 그냥 허공에 떠돌다 흩어질 이름 석 자 나홀로 불러 볼 뿐이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해도 외로워 말고,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고, 내 생의 점수가 빵점이라 해도 후회하지 말고, 위선이 아닌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가슴 뜨겁게 살아온 날들과 남은 시간들을 위해 건배!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작가이 아침에 사람값 반응 시간 플라스틱 봉지 노블레스 오블리주

2021-11-0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람값은 가슴으로 매긴다

사람값은 사람이 매긴다. 다른 사람이 매긴다. 삶의 무게는 질량으로 잴 수 없고 사람값은 숫자로 매기기 어렵다. 살아 생전 보다 사후에 매겨지는 점수가 더 정확한 수치인지 모른다. 나이값 얼굴값 꼴값 사람값 하며 살기는 참 어렵다. 살아 생전에 붙은 화려한 수식어보다 죽은 뒤 남기는 몇줄의 평판이 어쩌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인지 모른다.   지역사회에 알게 모르게 봉사(?)하던 두 분의 죽음이 생각난다. 한 분은 이름도 얼굴도 없이,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연장자 아파트에서 가난하게 지내던 할머니다. 자기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고, 황금 송아지 키우던 과거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손수 키운 채소로 맛난 김치 만들어 이웃과 다정하게 나눠 먹었다. 일요일엔 교회밴 타고 오시는데 텃밭에서 갓 뽑은 채소를 봉지에 담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나도 몇 번 얻어먹는 행운을 누렸는데 부추나 깻잎은 일렬로 줄세워 깨끗이 손질해 씻어주셔서 요리하기 편했다.   다른 한 분은 지식과 교양, 품위와 인격을 모두 갖춘 분이다. 전문직 남편 덕분에 적당한 부를 누렸고 두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냈으며 교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소문내지 않았으며 알게 모르게 지역 사회에 봉사한 분이다.   ‘죽음’은 한 인간의 민낯을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 진솔하게 그려낸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해 했다. 꼬부라진 손으로 플라스틱 봉지에 담긴 싱싱한 채소를 건네주던 할머니의 다정한 미소를 그리워하고 그 분의 일생을 추모했다. 다른 한 분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배우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우아한 단어로 추모하고 애도했다. 나도 그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덜 가진 사람, 적게 배운 사람들의 태도는 냉담했다. “그 사람 잘난 체 하잖아요. 겉 다르고 속 달라요. 도와주는 게 아니라 불쌍해서 그러는 거죠.”   깜짝 놀랐다. 이 처절하고 진솔한 동물적 감각! ‘동물적 감각’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습관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반응시간이 빠르고 진솔하다. 동물적 감각은 이성이 지닌 ‘위선의 탈’ 속에 숨은 인간의 속내와 진실의 실체를 보게 한다.   위선자는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 될 때, 가슴이 얼음처럼 차가울 때 베푸는 동정은 사랑이 아니라 기만이다. 자애로운 동정심은 ‘빈민 구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일 뿐이다.   사람들은 가슴으로 말한다. 가슴은 없는 말을 꾸며대지 않고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는다. 보이는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 판단하고 내키는 대로 답한다. ‘잘 생긴 놈은 얼굴 값하고 못생긴 놈은 꼴값한다’ 해도 생긴 대로 살고 정성 담아 사람 대하고 동정 대신 사랑으로 섬기면 죽어서도 사람값을 하지 않을까.   호랑이가 아니라서 죽어 남길 가죽 없고, 이름 석자 기억할 명성은커녕 남길 유산 조차 없으니 그냥 허공에 떠돌다 흩어질 이름 석자 나 홀로 불러 볼 뿐.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해도 외로워 말고,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고, 내 생의 점수가 빵점이라 해도 후회하지 말고, 위선이 아닌 내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가슴 뜨겁게 살아온 날들과 남은 시간들을 위해 건배!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사람값 가슴 나이값 얼굴값 플라스틱 봉지 교양 품위

2021-10-2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