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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킹포맘 투게더: 이우찬씨] “한국 방문해 부모 만나고 싶어요”

“한국 아버지의 좋은 손기술, 미국 아버지의 훌륭한 품성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이우찬(벤저민 커털리·33·사진)씨가 매일 아침 한 시간을 달려 이중언어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1989년 7월 25일 충남 신탄진에서 태어난 이씨는 뉴욕으로 입양와 부모님을 통해 훌륭한 인격을 형성했다고 감사해 했다. 그의 입양 서류에는 고교 때 교제했던 아버지 이모씨와 어머니 정모씨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태어난 그에게 입양이 결정됐다.     “미국 부모님은 매우 헌신적인 분들이었죠. 소셜워커와 학교 심리상담가로 일하셨고 저보다 4년 전에 한국에서 누나를 입양했어요. 어릴 때 뉴욕에 있던 ‘캠프 친구(camp chin-gu)’에 데려다주시면서 한국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인터뷰 영상 제작을 위해 만든 티셔츠의 이름 ‘이우찬’을 읽어준 것은 그의 딸이다. 그의 이름은 입양을 위해 서류가 급조되면서 만들어졌고 한국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는 “뭔가 부족해서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한때 했었고 그래서 항상 모든 것들을 열심히 하려 했던 기억이 난다”며 “그런 열등감이 동기부여가 되기는 했지만,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고 털어놨다.     애틀랜타 지역 한인 축제에도 꼭 찾아가 음식과 문화를 즐긴다는 그는 내년에 대전을 방문할 계획이다.     “한 달 가량 머물며 일단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봅니다. 기회가 된다면 부모님도 꼭 만나고 싶고요.”     이우찬씨의 인터뷰 영상은 큐알코드를 스캔해 볼 수 있다.     ‘룩킹포맘 투게더’는 미주중앙일보와 한국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이 공동 제작하고 있으며 ‘농심 아메리카’가 후원한다.   최인성 기자벤자민 이우찬 이름 이우찬 한국 보건복지부 손기술 아버지

2022-12-28

페루에 식물인간상태로 고립된 VA 한인 벤자민 정 씨 사연

    페루로 자원봉사를 떠났던 북버지니아 한인 벤자민 정(43) 씨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 상태로 현지에 발 묶인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정 씨의 아내 에밀리 씨는 남편을 버지니아로 귀환시키기 위한 재원마련에 한인사회의 동참을 호소했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서 벤자민 정 종합보험사를 운영하던 정 씨는, 아내와 함께 고아원에서 봉사하기 위해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터지기 직전 페루로 향했다. 팬데믹 사태로 귀환이 늦어지며 현지 봉사에 헌신하던 정 씨 부부의 삶은, 그러나 지난 2월 발생한 오토바이 사고로 산산조각 났다.   아내 에밀리 벤데벤 씨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정 씨의 치료를 위해 지난 반년동안 25만 달러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고, 결혼반지까지 팔아 병원비를 위해 보태야 했다. 에밀리 씨는 “남편은 사고 직후 페루 국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페루의 병원은 선불로 병원비를 지불하지 않으면 치료를 해주지 않아 치료비가 없어 수술을 며칠간 미뤄야 했다”고 회상하며 울먹였다.   제3세계 국가인 페루의 의료수준은 현저히 떨어진다. 부정부패도 만연해 아직까지 정 씨의 교통사고에 대한 정확한 수사여부마저 불투명하다. 에밀리 씨는 “현지 경찰은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다 SUV에 치였다고만 말하는데, 과연 교통사고였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간다”면서 “봉사하던 고아원은 페루 수도 리마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이며, 외국인을 상대로한 강도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 씨 부부는 당시 사고에 대해 모든 보험회사들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어 재정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에밀리 씨는 “카이저 의료보험회사 측은 식물인간 상태인 남편의 직접 서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에밀리 씨는 아내 자격으로 서명을 하려고 해도 미국에서는 혼인관계에서 대리인의 권리가 자동적으로 부여되지 않아 지난 4월에서야 법원에 법적 대리인 신청을 해야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코로나 사태로 법원에도 사건들이 적체돼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행자 보험 측도 비슷한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고 에밀리 씨는 밝혔다.   현재 정 씨는 국립병원에서의 지속적인 치료가 어려워 현지 자택을 빌려 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의료기기를 직접 구매하고 함께 봉사하던 지인들에게 남편의 간병을 맡기고, 아내 에밀리 씨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와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벤자민 정 씨와 아내 에밀리는 대학교 처음 만나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22년을 함께한 그들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봉사'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왔다. 부부는  출석 중이던 교회에서 수년전부터 페루 고아원 봉사 제의를 받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코로나 사태 직전 페루로 떠나 지금까지 생활해 왔다.     의료 관계자에 따르면 미국으로 정 씨를 이동시키는 데만 7만 5000달러의 경비가 소요된다.  비용 마련에 막막했던 에밀리 씨는 정씨의 치료비와 송환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고펀드미 사이트를 개설했고, 주류언론 등에 안타까운 사연을 알리고 있다.  18일 오후 기준으로 고펀드미 사이트에는 9,170달러가 모금됐다. 목표 모금액은 10만달러다.  에밀리 씨는 "남편이 버지니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인 여러분들의 작은 정성이라도 모아달라"고 호소했다. 고편드미 사이트(http://gofund.me/1c823225)와  페이팔/ 젤(Zelle) 후원번호 7037272364를 통해 동참할 수 있다.     박세용 기자 spark.jdaily@gmail.com식물인간상태 벤자민 페루 고아원 북버지니아 한인 아내 에밀리

2022-08-19

[벤자민 홍](8) “한인은행은 계속 성장해야 할 커뮤니티 자산”

틈새시장 고객 눈높이 서비스 ‘인테그리티’ 인재 육성해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 없어” 벤자민 홍 전 행장이 한인은행권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의 이력서엔 ‘한인은행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들이 많다. SBA융자 도입, 나스닥 상장, 은행 인수합병 등등이 대표적이다. 폐쇄 위기의 한인은행 두 곳을 살려낸 것도 그였다. 뿐만 아니라 인재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바니 이 한미은행장, 민 김 오픈뱅크 행장, 조앤 김 CBB 행장, 김규성 뱅크오브호프 동부지역 프레지던트, 장정찬·조혜영 전 퍼시픽시티뱅크행장 등이 그가 양성한 쟁쟁한 후배들이다. 한인은행권의 상징적 인물답게 벤자민 홍 전 행장이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역시 은행권에 대한 조언이었다. “후배들이 열심히 뛰어서 리저널은행도 나오고 나스닥 상장은행도 4곳이나 됐습니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한인은행들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융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습니다.” 그는 1세대 금융인으로서 후배들에 대한 조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틈새시장과 특화로 차별화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올해 4년간 총 10억 달러를 디지털뱅킹에 투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연간 2.5억 달러 수준이다. 리저널뱅크와 커뮤니티뱅크가 따라갈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그렇다고 디지털뱅킹을 외면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한인은행들이 처해 있다. 한인은행만이 할 수 있는 틈새(niche)시장을 찾아야 한다. 이는 영업방식 변경과 업무 학습을 통해서 가능하다. 방콕뱅크 창업자인 친 소폰패니치 회장의 ‘성공할 기업가를 찾아서 성공할 때까지 도우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인은행이 지속해서 성장하려면 새로운 수익원 개발이 필요하다. 떡잎부터 다른 스타트업을 지원하면 그 기업의 성장에 따라 은행 수익도 동반 성장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직원 재교육은 필수다. 인간관계로만 하는 전통 영업방식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고객의 비즈니스 구조를 파악하고 금융 지원 수요를 찾아내 제공하는 환경으로 변했다. 행원이 고객과 사업 논의를 하고 다양한 성장 전략도 제시할 수 있게 되면 기업은 은행과의 관계를 쉽게 저버릴 수 없게 된다. 한인은행도 기업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익 확대가 가능하다. ‘많은 은행 중 하나’가 되면 미래가 어둡다. 대신 한 분야에 특화된 은행으로 육성한다면 비한인 대형은행과의 경쟁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조직을 유기체라고 하는 데는 구성원이 있기 때문이다. 인재와 제대로 된 리더가 있어야 조직이 성장하고 전진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한인은행권의 차세대 리더 양성 노력은 부족하다. 현재 한인은행들의 영업환경에선 과장(VP)~전무(SEVP) 모두 행장을 보필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분야별 리더 육성이 시급하다. 은행 영업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선 분야별 리더가 현 상황과 미래 변화를 예측하고 분석해서 보고해야 행장이 더 나은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행장이 없어도 은행이 무난하게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VP~SEVP 모두 은행 정책 수립 능력을 키워야 한다. 직원들에게 자유 재량권을 주고 결과는 항상 체크하고 실적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면 주인의식(리더십)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게 된다. 그들의 집단지성이 모이면 은행의 발전 방향이 세워질 것이다. 특히 인재는 채용과정에서부터 감별해야 한다. 조직원이 하나 잘못 들어 오면 그 조직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어서다. 인재 덕목은 ‘인테그리티(integrity)’. 홍콩 선박왕 C.Y. 퉁은 “유능한 직원보다 인테그리티가 있는 직원이 조직에 최적의 인재였다”고 말했다. 인테그리티는 참 좋은 말이다. 굳이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성실, 정직, 투명, 일관성, 진정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과거 대출부서에는 경력 부풀리기와 비한인 은행을 돌면서 몸값만 부풀린 인물을 스카우트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조직 내에서 거짓 없이 성실하고 꾸준하게 일하는 직원을 발탁하고 권한 이양과 확실한 보상을 통해서 인재로 육성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다. 한인은행도 후진을 양성해야 백년지대계를 이룰 수 있다. 특히 후임 행장 인력군이 부족하다는 건 정말 큰 문제다. 이는 매 번 다른 은행의 행장을 영입하는 안이함 탓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세대 리더를 키우는 노력이 시급하다. ▶행장·이사도 바뀌어야 한다 행장은 능동을 넘어서 프로액티브(proactive)해야 한다. 특히 이사회와의 관계에서는 수동적이어서는 안된다. 경영상 필요하다면 이사회를 설득해서 뜻을 관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상호 신뢰 관계 구축이 먼저다. 신뢰는 이사회에 제출하는 모든 서류와 보고 내용이 투명하면 된다. 더는 행장이 이사장의 명령을 듣는 상의하달식 커뮤니케이션보단 집단 지도체제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은행을 위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경영진과 이사회의 마찰은 결국 은행을 파국으로 이끈다. 어려운 때일수록 같은 방향을 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사회는 은행 설립에 투자한 이사회 전문가인 사외 이사로 구성된다. 투자 이사는 은행의 수익과 본인의 이익이 직결돼 은행 경영에 간섭하기 쉽다. 그렇다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한 주인의식을 갖는다는 건 장점이다. 반면 전문직 이사들은 은행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지만 정작 애사심 부족으로 겉돌거나 거수기 역할에 머물 수 있다. 투자 이사든 사외 이사든 상관없이 모두 은행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성숙한 이사회가 돼야만 현재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모멘텀 조성이 가능하다. 인생에는 공짜도, 공식도 없다. 쉽게 살 수 있는 공식도, 노력 없이 성취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힘든 상황을 감내하고 극복 방안을 찾다 보면 성공이라는 자리에 있는 본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벤자민 홍 행장의 주요 성과 ▶한미은행 6년간 자산·수익 각 300% 성장 직원 중 6명이나 은행장 배출 ▶나라은행 9년간 자산 2000% 증대 및 주가 1000% 상승 3년 연속 전국중소은행 중 영업성적 1위 달성 직원 중 4명 은행장 배출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2-21

[벤자민 홍](7) 한인은행 최초 상장…인수합병 모델도 제시

이사회와 경영권 갈등으로 '나라' 떠나 새한행장 끝으로 은퇴, 한국에서 활동 1998년 1월 29일은 벤자민 홍 전 행장의 은행가 경력에서 최고의 날이다. 벼랑 끝에 있던 나라은행을 나스닥 상장은행으로 환골탈태시킨 날이니 감격할 만도 하다. 그것도 한인은행 최초로. 나라은행 행장 취임 후 4년 만에 그의 꿈을 이룰 것이라는 건 생각도 못 했다. 티커(ticker)명 ‘NARA’로 정식 투자 종목으로서 거래가 시작됐다. 나스닥 상장이 주는 혜택은 은행 인지도 상승과 원활한 자본 유입이다. 나라은행의 전신인 미주은행의 1989년 주식 발행가격은 주당 10달러였다. 1994년 폐쇄 위기에 직면했을 땐 2~3달러로 폭락했다. 상장 직전 1997년 11월 공모가는 주당 7달러였다. 나스닥 상장 후 6개월 만인 1998년 7월경에는 12.75달러까지 대폭 올랐다. 희석된 후의 주식 가치를 고려하면 나라은행의 몸값은 어마어마하게 뛴 것이다. 상장 은행이라는 이름값 덕에 주가는 급등하고 1998년 예금고는 전년 대비 58%까지 증가했다. 자본이 넉넉해지자 그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렸다. ▶‘M&A’라는 그림 그가 구상한 그림 중 하나는 바로 다른 은행과의 인수합병(M&A)이었다. 1998년 10월 한국 외환은행의 뉴욕 플러싱 지점을 인수했다. 2000년 2월에는 한국 제일은행 뉴욕지점을 사들였다. 당시에도 이사회는 은행 인수를 탐탁지 않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은행들도 한인은행에 넘겨주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한국은행의 위상이 더 큰데 굳이 자그마한 한인은행에 팔아야 하냐는 게 이유였다. 홍 행장은 양쪽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이사회에는 “뉴욕 진출의 발판이라는 명목상 이유와 한인은행의 한국계 은행 인수라는 상징성이 주는 이득을 내세웠다”고 기억했다. 한국으로 날아가 인수 대상 은행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해 굳이 비한인 은행에 넘겨줄 바엔 한인에게 매각하는 게 좋지 않으냐는 거듭된 설득 끝에 겨우겨우 인수를 매듭지었다 . 탄력을 받아 2003년 8월에는 북가주 한인은행인 아시아나은행과의 M&A를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나은행의 홍승훈 행장이 합병은행의 행장직을, 본인은 이사회에 남기로 했다. 재임 9년 동안 은행의 자산 규모는 500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20배나 커졌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은행을 한인사회 두번째 규모의 은행으로 비상시켜 다시 한번 구원투수의 진면모를 드러냈다. ▶낙동강 오리알이 된 ‘이사’ 그의 이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03년 9월에 취임했던 홍승훈 행장이 3개월 만에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돌연 사임했다. 당시 이사장이었던 홍 전 행장은 임시 행장직을 맡았다. 2005년 2월 양호 행장이 취임하면서 이사직만 유지한 채 경영에서는 손을 뗐다. 그러다 이사들과의 갈등으로 그는 은행을 떠났다. 얼마되지 않아 나라은행은 홍 행장이 2002 회계연도 회계 부정에 연루됐다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홍 행장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나라은행이 고공행진하자 제 연봉도 당연히 크게 늘었습니다. 이사들의 불만 역시 커졌습니다. 행장의 고액 연봉을 빌미로 잡은 건 형식적인 구실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불만은 기득권 의식이 강한 이사들을 은행 경영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 점에 있었습니다. 이사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한 번은 보너스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75만 달러 정도. 당시 이사장은 미안해하면서 추후 컨설팅 비용으로 보전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은행은 이를 트집 잡아 법정 다툼을 진행했고 이는 2007년 고용중재재판소가 홍 행장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됐다. 그에 의하면, 포기한 보너스를 제외하고 홍 행장의 변호사 비용을 나라뱅콥이 부담하라고 판결했다고. 홍 행장의 변호인은 이를 근거로 명예훼손 혐의로 손배소를 제기하자고 했지만, 나라와의 인연을 생각해 거절했다. “억울해서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다시 하려다 옛정에 꾹꾹 참았습니다. 나라가 20만 달러를 벤자민홍재단에 기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엄청난 배신감은 느꼈지만 ….” ▶잘못된 선택 ‘새한’ 2006년 1월 한인은행과의 연을 끊으려 했던 홍 행장은 다시 구원투수로 새한은행 행장에 추대됐다. 그는 행장 대신 고문 자리를 역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새한 이사회가 홍 행장 영입을 두고 물러서지 않았고 딱한 사정에 동의했다. 일각에선 그의 새한은행장 수락을 두고 그로 인해 새한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다른 일부는 새한의 부실 상태가 회복 불가였다고도 한다. 이런 논란에 대해 후자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그때 나이가 73세였습니다. 5등 은행의 실적을 챙기고 부실대출을 해결하고 강성 이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행장 자리가 주는 무게감이 버거웠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증훈 전 한미은행장을 (내가) 교섭하고 이사회에 소개했습니다. 은행을 잘 이끌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홍 행장은 리먼 브러더스 발 금융위기가 시작된 2008년 9월경 행장직을 그렇게 내려놨다. ▶한국에서 찾은 인생 반쪽 3년 동안 한인가정상담소 고문으로 비영리단체를 도왔고 한국 여행등을 하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 그러다 그는 돌연 한국행을 결심한다. 2011년 한국 부산에서 열린 세계한상대회에서 글로벌 코리언 금융 네트워크 구축 부문 강사로 나서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때 한국의 지식인들과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들의 지식에 공백이 보였습니다. 이론에는 해박했지만, 미국 사회와 금융 시장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도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나눌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2012년 79세의 나이에 한국에 간 홍 행장은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지금의 반려자를 만나 미국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2-16

[벤자민 홍](6) 파산 직전 은행…나만의 경영 맘껏 펼쳤다

벼랑 끝에서 소액 투자가 만으로 200만불 증자 성과급 확산에 직원들 의욕 불타며 성장 가도 1996년 3분기 나라은행의 대출고는 6690만 달러로 직전 분기 대비 13.1% 증가했다. 이는 당시 한인은행들 중 가장 큰 폭이었다. 1996년의 순익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전년보다 75%나 급증한 것. 벤자민 홍 행장이 다 쓰러져가던 나라를 이끈 지 2년 만이다. 나라은행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그는 사실 잠시 인생의 쉼표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구원투수로 등판해달라는 요청을 너무 일찍 받았다. 한미은행과의 연을 뒤로한 지 5개월이 지난 즈음에 나라은행 이사들로부터 교섭이 들어왔다. 당시 나라은행은 파산 일보 직전이었다. 은행 감독국의 제재(C&D)에다 자본 규모도 100여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그들에겐 구세주가 필요했다. 이사 일부가 나라은행에 와달라며 통사정을 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홍 행장은 “한미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엔 거절했지만 이사들은 대안이 없다고 계속 설득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힘을 합쳐서 살려고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나라은행 이사회와 경영진은 서로 반목하고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극구 사양한 이유다. 이런 연유로 그는 훗날 은행의 경영과 소유를 확실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소신을 관철하기에 이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감독국은 은행 증자가 안 될 경우 은행 문을 닫게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라은행 이사들은 홍 행장만이 증자를 성공적으로 이끈 은행의 구세주라며 부탁을 했다. 그도 한미은행에서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던 터라 한 번 더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소식이 한인 은행권에 퍼졌다. 창피하게 왜 망하기 일보 직전인 은행의 행장으로 가느냐고 만류한 한미은행 직원도 있었다. 반면 그를 따라 은행을 옮기겠다고 나선 이도 있다고 한다. 현재 오픈뱅크를 이끌고 있는 민 김 행장도 탄탄한 성장 가도를 달리던 한미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나라로 당장 달려온 인물이다. ▶15만불이 된 1000불 촌지 우여곡절 끝에 나라은행으로 1994년 7월 그는 출근하게 됐다. 직접 마주한 은행의 재정상태와 은행 인력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말 답이 있을까 하는 정도로 앞이 캄캄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그의 도전정신을 다시금 불러냈다.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은행 상황은 완전 백지상태였습니다. 은행이 이 지경까지 됐을까 할 정도로 말입니다. 기가 막혔지만, 긍정적인 눈으로 다시 보니 텅 비어 있는 흰 도화지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당장 필요한 돈을 구하고 리더십과 인력만 갖추면 한미를 따라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런 확신을 바탕으로 홍 행장은 급선무였던 자본금 확충에 나섰다. 그는 사방팔방으로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한인 재력가들은 문 닫을지도 모르는 나라은행 증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결국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공모뿐이었다. “반신반의했습니다. 망해가는 은행에 누가 돈을 투자하겠습니까? 그래도 포기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한인 미디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1200달러로 나라은행의 주인이 되어주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모 캠페인을 펼쳤다. 1200달러면 400주를 매입해서 나라은행의 주주가 될 수 있었다. 결과는 그도 놀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순식간에 200만 달러 증자를 달성한 것. 투자자 중에는 한미은행 당시 촌지 1000달러 거절로 연을 맺었던 건설업체 사장<12월 3일자 미주 6면>도 있었다. “1200달러를 공모하는데 160배가 넘는 돈을 투자하겠다며 찾아왔습니다. 20만 달러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장은 홍 행장이면 믿을 수 있다면서…. 전액 투자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15만 달러만 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공모자 중 가장 큰 액수였습니다.” 거절했던 돈 봉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에 150배로 불어서 돌아온 것이다. 수년 전 촌지에 눈이 멀어 그 고객을 진정성 있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결과도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그 건설업체 사장은 물론 한미은행에 투자해서 짭짤하게 이익을 얻었던 투자자와 4·29 폭동 때 도움을 받았던 업주들까지 수백명의 개미 투자자 덕분에 나라은행이 살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그는 강조했다. 취임하던 첫해에 2차례의 증자를 실시했고 600여 명의 투자가를 규합해서 총 650만 달러를 모았다. 이 공모를 통해 한인은행권은 소액투자가들의 힘만으로도 은행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둑한 보상, 주인의식 일깨워 행장급이나 돼야만 보너스 조건이 있었던 시절에 홍 행장은 전무급과 수익창출과 같은 중요 업무를 담당한 부행장급으로 이를 확대했다. 그의 고용계약서에 일부 직원들의 상여 조건을 포함한 것이다. 지금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상여 조건이란 이익공유와 성과급이었다. 수익에 대한 배당을 보장하는 ‘직원 주주제’형식을 한인은행 중 가장 먼저 1997년에 시행했다. “일방적으로 애사심을 강요하는 건 능률 저하만 불러올 뿐”이라고 지적한 홍 행장은 “현재 몸담은 직장이 땀 흘린 대가를 확실하게 보상해주는 등 장래를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젊은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확실한 보상체계 덕에 직원들의 근로의욕은 탱천했다. 이게 바로 나라은행이 빠른 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설명이다. 일을 열심히 해 은행의 수익을 내면 본인의 주머니도 두둑해지니 당연한 결과다. 진성철 기자

2020-12-14

[벤자민 홍](5) 한인 기업 키워 은행도 크는 동반성장 개척

벤자민 홍 전 행장은 한미은행을 빠르고 탄탄하게 성장시키며 승승장구했다. 그는 고객에게 그 공을 돌리지만, 그에게 더 큰 감사함을 표하는 이들도 많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홍 행장의 비즈니스 컨설팅과 멘토링이 영세했던 고객 업소를 기업으로 변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멘토가 되다 홍 행장은 비즈니스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성장 가능성이 큰 업체를 발굴해 비즈니스 스킬, 대출 지원, 경영 멘토십 등을 무료로 해주었다. 현재는 컨설팅 업체가 돈 받고 해주는 일이다. 어느 정도 기업의 면모를 갖춘 한인 업체에는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 및 조직 운영과 성장 전략 등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경영 멘토링으로 대성한 기업인도 꽤 된다. 한 한인 기업가는 “경영기법을 익히기 쉽지 않았던 시절에 홍 행장은 기업을 인큐베이팅하듯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지원으로 걸음마를 하던 유아를 뛸 수 있는 기업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그의 이런 멘토십은 과거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방콕뱅크의 창업자 친 소폰패니치 회장과의 만남에서 배우게 됐다. 은행의 급성장 비결에 대한 질문에 친 회장은 “성공한 기업을 쫓아다니지 말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 기업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미 성공을 이룬 기업에 은행이 해줄 역할이 많지 않지만, 성공 잠재성이 큰 기업을 지원하면 은행이 그 기업과 동반 성장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홍 행장은 그의 조언을 은행 경영의 신조로 삼았다. 그런 신조 덕에 업소의 주인을 컨설팅해주며 기업의 대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자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는 “3 플러스 로지스틱스 그룹의 김영석 회장과 터보에어의 브라이언 김 회장 모두 한미 시절 중요한 고객”이라며 "그들과는 지금도 연락하며 안부를 묻는 사이”라고 말했다.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감독기관의 행정제재가 풀리고 은행의 실적이 좋아지자 이사들 사이에서 홍 행장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 반대파 이사들은 홍 행장의 좋고 싫음이 분명한 직설적 화법과 홍 행장 영입 조건 중 수익공유(revenue sharing)와 스톡옵션을 거슬려 했다. “행장 영입 제안 시 노스롭 금융부장 시절의 절반도 안 되는 연봉을 제시했습니다. 연봉은 제 가치입니다. 이를 50%로 줄이는 것은 제 가치를 깎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정을 말하자 이사들은 스톡옵션과 수익공유로 부족분을 채우자고 제시했고 이에 합의했습니다. 스톡옵션도 당시 가치가 10달러였던 것을 은행에 유리하게 12달러로 올려서 한미은행장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더욱이 홍 행장은 거래되지도 않았던 한미은행 주식을 수트로 컴퍼니를 통해 장외에서 사고팔 수 있게 했다. 이후 한미은행 주가는 빠르게 올랐다. 거래 한 달 만에 14.3%나 뛰었다. 주가 급등으로 이사들은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음에도 행장이 받는 돈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우스갯소리라며 홍 행장은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당시 친했던 대만계 은행인 제너럴뱅크의 리페이 우 행장과 LA다운타운 옴니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를 기다리는데 롤스로이스 한 대가 (우리 앞으로) 왔습니다. 기사가 차 문을 여니 그가 그 차로 걸어갔습니다. 차에 관해 물었더니 은행 이사회가 호실적을 거뒀다며 롤스로이스를 선물로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행장은 차가 커서 운전을 하지 못하겠다며 고사했더니 운전기사까지 내어줬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행장은 물이고 이사회는 물을 담는 그릇이란 걸 깨달았다”며 무릎을 ‘탁’ 쳤다. 위기에 놓인 은행의 행장으로 스카우트할 때는 이익공유와 스톡옵션을 흔쾌히 받아들였던 이사들이 살 만해지니 얼굴을 180도 바꾸었다고 회고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고. 이사회가 행장을 믿고 뒷받침해주어야 더 열심히 뛰어서 그들의 이득을 더 늘릴 수 있다. 수익을 가져다준 행장을 해고해서 본인들의 이득을 더 챙기겠다는 계산이 참 어리석게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다 은행 감독국이 이사 접대비가 과다하다는 지적에 홍 행장과 이사들의 갈등과 반목은 더 커졌다. “이사회가 끝나고 저녁 식사 후 2차 술자리를 가게 됐습니다. 소위 룸살롱이라고 하는 데였습니다. 그 당시에도 비용으로 수천 달러가 나왔습니다. 한 이사가 은행경비로 처리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독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그 이사의 돌아온 대답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한 번 맞아보자는 겁니다. 지난 행정제재로 사지까지 몰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서 .” 이런 마찰이 이어지면서 홍 행장과 반대파 이사들 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이사들과의 마찰이 그가 한미은행을 떠나는 이유가 됐다. 한미은행 이사들은 1994년 1월 첫 정기이사회를 통해 3개월 임기 만료를 앞둔 홍 행장과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6년 만에 홍 행장과 한미와의 연은 이렇게 끊어졌다. 홍 행장은 “한미은행에서 유능한 후배를 많이 키울 수 있었다는 점은 매우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며 “그때 나이가 61세였다. 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그리고 잠시 쉬려 했던 그에게 벼랑 끝에 내몰린 나라은행 이사들이 다시 찾아왔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2-09

[벤자민 홍](4) 울부짖는 LA폭동 피해자 한인위해 10만불 무담보 대출 결심

SF 대지진 때 BoA의 길거리 대출서 아이디어 100% 상환한 고객들 평생 한미 충성고객 남아 벤자민 홍 전 행장은 10대와 20대를 거쳐 6.25전쟁을 겪었다. 북한 인민군에 잡혀 포로생활까지 했으며 죽음으로 덮인 전장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참혹한 전쟁터가 40여년이 지난 미국 LA 한복판에서 다시 재연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그다. 1992년 한미은행의 주주총회가 열렸던 날 LA는 폭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한인 관광객과 한인 이민자 증가 덕에 승승장구하던 한인은행도 미국에 불어닥친 경기침체의 영향을 조금씩 받기 시작할 즈음이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한인타운에서 식사하면서 TV를 시청하던 홍 행장은 흑인들의 시위가 소요사태로 번져가는 뉴스에 화들짝 놀랐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뉴스를 계속 확인하며 폭도들이 웨스턴 길을 따라 한인타운으로 북상하는 모습에 그의 등엔 서늘함이 엄습했다. 그다음 날 한인타운은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뉴스 매체들은 폭도가 지른 불로 화염에 휩싸인 한인 상점들을 쉴 새 없이 보도했다. 폐허로 변한 업소 앞에서 한인 업주들은 주저앉아서 울부짖고 있었다. 백인 경찰의 저지선이 한인타운을 내어준 채 베벌리힐스로 물러나 한인들의 피해는 더 컸다. 공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한인들은 스스로 자경단을 꾸려 총으로 무장하고 폭도들로부터 일터를 지키기 위한 총격전도 불사했다. 40년 전 그 참혹한 전쟁터가 그의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또 다른 전쟁과 같았던 LA폭동 역시 홍 행장의 기억에 생생히 새겨질 만큼 끔찍했다. 폭동은 3일간 지속했고 5월 1일 대통령의 명령으로 해병대가 배치된 후에야 잦아들었다. 한인타운 은행들은 은행감독국의 지시로 4월 30일과 5월 1일 모두 문을 닫았다. 한미가 융자한 아파트에 화염병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찾았다. 가는 길에 그의 눈 앞에 펼쳐진 한인타운은 6.25 전쟁 때 서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는 폭동 피해를 본 80여 곳의 고객 업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고객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인 이민자들이 잠도 안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일군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해가는 모습에… (우리 은행) 고객과 한인 업주들이 땅을 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한인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인은행계 BoA가 되다 한인사회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느라 밤잠을 설치던 그의 눈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 들어왔다. 그는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에 책을 꺼내 들어 읽어내려갔다. 1906년 4월 18일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쳤다.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했고 당시 은행들은 가을까지 영업 정상화가 어렵다며 돈을 풀지 않았다. 복구 자금이 절실했던 소상공인들은 돈을 구하지 못해 비즈니스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세운 뱅크오브이탈리아의 아마데오 피터 지아니니가 마차에 현금 1만 달러를 싣고 거리에서 소액대출을 해줬다. 이후 지아니니는 최대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설립자가 된다. 홍 행장은 이 부분을 읽고 책을 내려놨다. 그리고 한인 비즈니스 지원 플랜을 바로 짰다. 빠른 복구가 가능한 업소를 대상으로 최대 10만 달러를 무담보로 빌려주는 것이다. 일부 임직원과 이사들이 부실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다. 한미은행 역시 한인 이민자들이 세운 은행으로 한인사회를 도와야 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4일부터 대출을 시작했다. 한인은행으로는 유일하게 자사 고객뿐만 아니라 다른 한인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인에게도 융자를 해주었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인업소가 살아야 커뮤니티은행도 함께 산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인은행의 뿌리는 한인사회니까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사례를 드니 부정적이던 이사들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당시에는 우리가 한인 고객을 살렸다고 뿌듯해했지만, 그 이후에는 그들이 우리를 살리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베풀어야 돌아옵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무담보 10만 달러 융자를 받은 고객 50명 중 채무 변제를 하지 못한 고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더해 홍 행장은 론오피서들을 동원해 재해복구 융자 신청을 돕도록 업소에 파견도 했다.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된 서비스에 감사함을 넘어 감동한 한인 고객들은 한미를 지키는 충성 고객이 됐다. 한미 측에 의하면, 대출 초기 우려와 달리 당시 빌려 간 돈은 100% 상환됐다. 한미은행에 20년 이상 고객이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한미를 살린 폭동 피해자들 2009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부실사태로 한미은행의 주가가 페니스톡으로 전락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언론에서 뱅크런 가능성까지 지적하는 상황에도 4·29폭동을 함께했던 한미 고객 중 대형 예금을 찾은 고객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며 LA폭동 때 도와준 친구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저명한 경제학자인 토드부크홀츠가 쓴 ‘죽은 CEO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책에도 소개됐다. 한미은행은 2020년 3분기 기준으로 자산 규모 61억 달러가 넘는 은행이 됐다. 그 원동력에는 위기 시에도 한미를 든든하게 받쳐줬던 충성 고객이 있었다. 그 충성 고객을 만든 건 바로 모두가 아니라고 했을 때 소신이 있게 밀어붙인 홍 행장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말 훌륭한 보스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고객들도 많았습니다. LA폭동 때 한미은행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 폐쇄 위기에 봉착했던 나라은행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더 크게 보답해 주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많이 얻은 셈이죠. 저를 믿고 도와준 고객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2-07

[벤자민 홍](3) 한국식 대신 실리경영, 순익 3배 뛰었다

철저한 성과제·여성 지점장 발탁 등 조직 바꿔 무담보 신용대출·SBA융자로 수익모델 혁신 벤자민 홍 전 행장은 직원 교육과 함께 한국식 경영의 틀을 과감히 부쉈다. 명분보다 효율성과 수익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실리를 추구하는 경영 방식으로 바꿨다. 반발과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미은행의 조직 문화도 확 뜯어고쳤다. 또 올림픽에 있던 본점을 당시 LA 월스트리트로 불리던 윌셔로 옮기는 등 도약의 발판을 다졌다. ▶오래된 틀을 벗다 한미를 포함한 한인은행권엔 직책과 서열을 우선하는 한국식 경영 마인드가 만연했다. 홍 행장은 일단 상의하달식 의사결정 방법을 하의상달로 뒤집었다. 일선 책임자에게 권한을 주어서 고객이 윗선에 부탁해도 소용이 없다는 인식을 심어 줬다. 중요 아젠다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해 잡음을 없앴다. 보상체계도 연공서열에서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전면 개편했다. 우수한 성과를 낸 직원에게는 급여 인상, 보너스, 승진 등 두둑하게 보상했다. “흔히 말하는 애사심은 직원이 조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고 느낄 때 생깁니다. 인정은 곧 급여 인상과 승진입니다. 보상이 명확해야 다른 직원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보상 없이 애사심만 강요하는 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받은 것 같지도 않은 보상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한인은행들은 대출을 ‘해준다’는 입장이었다. 갑의 위치다. 대출 수요가 많아 그럴 만도 했지만, 이는 당시 한국은행의 고객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가 한인은행의 고객 서비스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이 고객에게 점심을 접대받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에게 그런 상황은 문화 충격이었다. “은행원이 앉아서 영업하고 고객에게 접대를 받으며 대출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촌지도 있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객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 비용을 은행에 청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이 눈치를 보고 사용 방법을 몰라 거의 식사비를 청구하지 않았지만 ‘찾아가는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이런 영업 방식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는 촌지에 관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하루는 현금 1000달러가 든 편지 봉투 한 통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 봉투를 밀봉해서 고객인 건설 업체 사장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 사장은 기분이 나빴는지 수개월 연락이 없었다. 홍 행장은 먼저 전화를 걸어 점심식사를 청했다. 그와 만남에서 업체 대표는 “너무 빡빡하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홍 행장은 “행장이 촌지로 1000달러를 받으면 전무는 얼마를 받아야 하고 부장은 얼마를 받아야 하겠냐”며 반문했다. 그는 “촌지를 주지 않아도 대출 요건만 되면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은행을 운영할 테니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런 일화가 은행과 고객들에게 알려졌는지 그 이후 촌지가 종적을 감췄다고. 촌지를 없앤 홍 행장은 가슴에 띠를 두르고 한인 마켓 앞으로 달려갔다. 기존의 틀을 부순 건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은행권에는 남성 위주의 권위적인 문화가 팽배했다. 그는 그 틀을 깨야만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도 꾀할 수 있고, 조직 문화도 바꾸어야 직원 간 선의의 경쟁을 끌어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과감하게 유능한 여성 행원을 지점장으로 발탁하고 임명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지점장 임명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래서 남성 임원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기억했다. “고객의 요구를 찾아 나서고 그의 어려운 사정에 공감하는 능력은 여성 행원들이 탁월했습니다. 그런 여성들이 지점장으로서 영업 일선에서 선봉에 나서는 것만이 후발 주자인 한미가 급성장할 기회라 여겼습니다.” 오픈뱅크의 민 김 행장이 당시 한미는 물론 한인은행의 최초 여성 지점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성 지점장들의 활약으로 한미은행의 실적도 동반 상승세를 탔다. ▶길은 내가 개척한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한인은행들의 대출방식은 담보 설정을 요구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담보 신용대출을 받으려면 은행 요건을 맞추어야 하는데 당시엔 매우 까다로웠다. 갓 도미한 이민자가 요건을 충족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 홍 행장은 무담보 여신이 은행 성장의 추진체가 될 것이라고 이사회를 설득해 관철했다. 무담보 여신의 위험성이 컸지만, 대출과 순익 급증에 일조했다. 그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한인은행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인 SBA융자를 처음 도입한 것도 홍 행장이다. 은행의 성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수입원을 찾던 중 SBA융자가 눈에 띄었다. 연방정부의 보증 부분이 커서 다른 대출 상품보다 안전했고 성장 중인 한인 이민 사회에도 적합했다. 여기에 한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한 무역 금융까지 추가하면서 한미은행의 수익 구조가 탄탄해졌다. 이와 더불어 1988년 8월부터 한미은행의 주식이 장외시장(OTCBB)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한인은행 역사에서 첫 장외 거래 역시 그의 작품이다. 주당 12~13달러에 거래되던 주식은 1989년 말에는 10달러가 껑충 뛰어 거래가 이루어졌다. 매수 수요에 부응하고자 90년 1월 19일 자로 1대2 주식분할을 단행했다. 한인은행 중에서 한미은행이 주식분할도 처음했다. 1987년 한미은행의 연순익은 105만 달러 정도였지만 홍 전 행장이 취임한 3년 후에는 3배가 넘는 384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홍 행장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한인은행 최초로 다른 은행과의 합병을 시도했다. 글로벌은행과의 합병은 최종 성사를 앞두고 틀어졌다. 그는 “글로벌 은행장을 경영진으로 합류하는 옵션을 제시했다면 합병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당시만 해도 처음 시도했던 거라 거기까지 생각을 미처 못했다고 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일 중 하나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2-02

[벤자민 홍](2) 한인은행 역사는 벤 홍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마케팅·SBA융자 도입 등 시스템 전면 개혁 당시 교육받은 인재들 후일 행장 인력풀 형성 한인은행 역사가 벤자민 홍 전 행장의 전과 후로 나뉜다. 그정도로 그의 한인은행계에 미친 파급력은 업계를 뒤집어 놓았다는 평이다. 그는 미국 내에서 채용된 첫 번째 한인은행장이다.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온 뱅커가 행장이 됐다. 주류 은행에서 임원까지 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한인 은행계에 첫발을 디뎠다. 홍 행장은 퍼스트인터스테이트뱅크(FIB)에서 익힌 다양한 뱅킹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한인은행의 현대화와 선진화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한국식 은행 경영 마인드에 젖어있던 한인은행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게 된 계기도 됐다. 개혁과 성과 위주의 경영방식 도입 등 한인은행의 체질을 본격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주요 수입원인 SBA융자를 최초로 한인은행에 도입했다. 그의 눈부신 경영을 두고 한미은행은 창립 35주년 기념책에서 그의 행장 시절을 한미은행의 도약기로 묘사한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 자산 규모 61억 달러가 넘는 한미은행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과 같다고 하겠다. ▶삼고초려 끝에 벤 홍을 얻다 한미은행 이사들의 삼고초려와 유사한 영입 과정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화 중 하나다. 방산업체인 노스롭에서 4년 차 금융담당 부장으로 일하던 중에 FIB 시절 알게 된 한미은행 이사인 안응균씨로부터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받는다. 식사 자리에서 그는 한인 금융계에 새 역사를 쓰자는 안 이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홍 행장 본인이 원하는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만큼 한미 규모가 되지 않으니 다음 기회로 하자고 했다. 그의 속내는 한인은행에서 일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단칼에 거절하고자 돈 문제를 꺼냈던 것이었다고 한다. “안 이사의 영입 제안은 매우 고마웠습니다만 당시엔 한인은행에서 일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련 없이 (저를) 단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대우 문제를 거론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런 오퍼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일화로 한때 한인은행권에서 그는 돈을 밝히는 인물로 오해도 받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안 이사는 끈질기게 홍 행장을 계속 찾았다. 당시 한미은행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은행은 한인 자본 투자로 설립됐고 1982년 12월 15일부터 본격 영업에 돌입했다. 확장 중이던 한인 이민 사회 덕분에 개업 첫 해부터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 창립 1년 만에 자산 규모가 4배나 증가하는 등 폭풍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을 기반으로 무역 대출을 늘렸다. 하지만 1986년 세이빙스앤론 사태의 여파로 국내 금융산업은 위기에 봉착했다. 1987년부터 국제금융이 부진의 늪에 빠지며 급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무역 관련 대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 당국으로부터 행정 제재(MOU)까지 받게 된다. 당국의 지침대로 미국 뱅킹 경험의 전문가를 찾아 나서면서 홍 행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국의 지침 준수 여부가 은행의 존망을 가르는 열쇠였고 당시 홍 행장이 적격 인물이었다. 홍 행장은 안 이사의 진정성 어린 설득과 간청에 마음이 움직이면서 행장 자리를 수락하게 된다. 그의 수락으로 한인은행의 수장이 한국에서 온 행장이 아닌 현지 채용으로 이루어진 첫 사례가 됐다. 1988년 그의 행장 취임 이후 비상을 위한 새로운 바람이 한미은행을 넘어 한인은행권에 불기 시작했다. “한미은행의 발전 가능성을 엿봤고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판단에 수락했습니다. 특히 후진 양성이 가능하다는 마음에 부푼 기대를 가지고 올림픽에 위치한 본점에 들어섰습니다. 업무 확인 중 대출 심사 서류를 포함한 각종 은행 업무 서류에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고 영어도 엉망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운영도 한국식이었고 그래서 직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출근 첫날에 대한 그의 회고다. ▶빨간 펜을 든 행장 교육의 힘을 믿는 그는 직원 훈련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직원들이 비즈니스 영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영어로만 작성된 대출 서류를 포함한 각종 결재 서류를 집으로 가져가 일일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다시 돌려주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그의 업무 시간은 은행에서 가정까지로 연장됐다. 임직원들의 영어 실력이 향상할 수 있게 그의 개인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 해서 은행 감독국의 서류에 대한 지적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주류은행에서 일하던 비한인 은행 직원을 고용해서 주류 방식의 여신 심사와 관리 등 은행 주요 업무도 익히게 했다. 특히 은퇴한 SBA융자 전문가를 강사로 초청해 SBA융자 상품을 한인은행권에 사상 최초로 선보였다. 그때 배웠던 SBA 직원들이 다른 한인은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SBA융자를 한인은행권에 전파했다고 한다. 그는 세일즈 및 마케팅 기법을 가르치고, 성공 사례와 장기적인 안목에 바탕을 두고 인수합병(M&A)에 대해 공부할 기회도 제공했다. 그의 직원에 대한 높은 교육열 덕분에 타 은행에서 스카우트는 비교적 적었다. 한미 직원을 성장시켜 인재로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차세대 뱅커를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매년 5~7명은 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채용했다. “한 조직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력은 대체로 그 조직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사심입니다. 그런 인력이 능력 부족이라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트레이닝 기회를 주어야지 무작정 외부 영입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성장 가능성이 잠재된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리더의 덕목입니다.” 결국 그의 신념대로 한인은행권에서 발탁한 뱅커 대부분이 고위 임원은 물론 행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전 행장으로 퍼시픽시티뱅크(PCB)의 장정찬 초대 행장과 조혜영 행장이 있다. 오픈뱅크의 민 김 행장과 CBB의 조앤 김 행장도 그의 리더십과 함께했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1-30

[벤자민 홍](1) 인민군 포로로 끌려가다 탈출

6·25 때 통역장교로 복무 꿈 좇아 1970년 미국으로 벤자민 홍 행장(88)은 혁신의 아이콘이다. 항상 ‘최초’와 ‘처음’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남다른 추진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한인 은행업계에 역사를 썼다. 그는 한미·나라·새한은행 등 세 곳에서 19여년 동안 행장을 맡았다. 한인은행들의 중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된 SBA 융자도 한인사회에 처음 소개했다. 최초의 나스닥 상장 한인은행을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던 여성 지점장도 과감하게 임용했다. 그가 발탁한 여성 행원들은 이후 한인은행을 이끌어가는 주역이 됐다. 중앙일보 창간 46주년 기획 시리즈 '남기고 싶은 이야기' 두 번째로 벤자민 홍 전 행장의 발자취를 들어본다. LA 한인사회 초창기 한인 은행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함이다. 시야에 들어 온 건 우거진 나뭇가지들뿐이다.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울뚝불뚝 솟아오른 돌멩이의 감촉으로 거친 산길을 걷고 있음이 느껴졌다. 북한 인민군에 잡혀 포로가 된 홍병각(벤자민 홍) 중위는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통역 장교로서 그가 처음 배속됐던 강원도 인제의 9사단은 석 달 전 인민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퇴로가 막혀 물러서지도 못한 군인들은 쏟아지는 총탄에 스러져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몇몇은 포로가 됐다. 그중 홍 중위와 다른 2명은 한 특무상사 덕에 탈출할 수 있었다. 3일간 먹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강원도에 있던 미 2사단을 찾아서 살았다. 성이 민씨였던 그 특무상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다고 홍 행장은 회상한다. 참혹하게 젊은 생명이 사그라지는 모습은 당시 19세였던 그에게 잊지 못할 충격이 되어 평생 남았다. “총알 하나에 사람의 목숨이 쉽게 지는 걸 내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던 아군의 얼굴이 갑자기 피범벅이 되는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해줄 정도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는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바뀌었습니다.” 홍 행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당시를 떠올렸다. 가치관, 신념, 인생 철학은 그때를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 “둘러보니 나 빼고 모든 임원이 백인이었다” UCLA 졸업, FIB서 고속 승진하며 주류사회 활동 한미은행장 제의에 1년 숙고뒤 한인사회로 들어와 벤자민 홍 행장은 아버지가 건축업을 하는 중산층 수준의 가정에서 1932년에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까지 일본인 교사로부터 일본어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한글을 ㄱ, ㄴ, ㄷ부터 배웠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조용했던 학생 홍병각은 고등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을 맞게 됐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우리나라를 해방한 미국에 대한 관심이 커져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영어 선생님과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웠다. 군대는 ‘유엔군 연락 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지원했다. 미군 상대 통역 장교로 나라에도 봉사하고 본인의 영어 실력도 가늠해보고자 한 게 지원 동기였다. 그가 처음 배속된 곳은 3군단 예하 9사단이었다. 한국전 3대 패전으로 기록된 현리전투가 벌어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현리가 9사단의 주둔지다.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 12군단, 27군단, 조선인민군 5군단이 국군 3군단을 공격한 전투다. 국군 3군단의 지휘통제는 포위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당시 사단장과 지휘관들은 계급장을 떼어내고 살기 위해 달아났다. 지휘통제가 와해한 9사단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9사단 병력의 60%가 사망했거나 실종됐다. 9사단 소속의 홍 중위는 포로로 잡혀 북송되던 중에 민 상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대구로 후송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육군 정보학교에서 번역 일을 맡았다. 번역 장교가 교장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그의 기억 속에 남은 박 전 대통령은 냉철하고 과묵하며 대범했지만 본인한테는 엄격했다. 특무대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김창룡 특무대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미국인 윌리엄 글렌 박사도 만났다. 글렌 박사는 1953년부터 4·19 때까지 7년간 이 전 대통령의 대외문서 작성을 도왔고, 그 후 자유 중국에 건너가 대만 정부의 신문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홍 행장이 미국 행을 결심하게 한 인물이다. 홍 행장은 1956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뒤 1960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그후 10년 동안 삼영목재에서 일하면서 전무 이사 자리까지 올랐다. 그 와중에 군사 혁명 정부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마다하고 1970년 LA 땅을 밟았다. 벤자민 홍이 되다 LA에 와 고등학교 동창의 권유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주유소를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정착하려면 미국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UCLA 앤더슨 경영대학 석사과정 입학을 결심했다. 39세의 나이 때문에 입학허가가 잘 나오지 않자 그는 글렌 박사에게 추천서를 부탁했다. “남들이 공부할 때 그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다”는 내용이 담긴 글렌 박사의 추천서 앞에 UCLA의 문이 열렸다. 그는 UCLA 웨스트우드에 아파트를 빌려서 캠퍼스 생활을 시작했다. 1년 동안 원 없이 공부만 했다. “일제 강점기, 광복, 한국전쟁으로 제대로 공부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영어와 문화 차이의 벽은 높고 한국과 다른 토론식 수업 때문에 3~4시간밖에 못 잤지만 1년간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는 그때 받은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당시 한국에서 가져온 자금의 대부분을 석사학위 취득에 투자한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교육은 초기엔 돈이 많이 들지만 나중에 가져다 주는 이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나만 봐도 교육에 투자한 비용 대비로 평생 수백 배의 이득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교육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걸 증명하듯 경영학 석사(MBA) 과정이 끝나갈 무렵 당시 금융계 톱10이었던 뱅크오브아메리카(BoA)와 퍼스트인터스테이트뱅크(FIB) 2곳에서 동시에 일자리 오퍼를 받았다. 기업들과 연결고리인 은행을 알면 미국 경제와 사회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어서 정착에 용이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아래 은행에 들어갔다. 물론 급여도 좋았다. 당돌한 사회 초년생 각 은행의 인사 담당자들과 인터뷰를 마친 그는 은행 내 아시아인으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 인물과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 아시안 임원도 없었던 당시를 생각하면 매우 당돌하고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아시아계로서 승진 가능한 직위와 그들의 근무환경 등 조직문화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BoA에서는 중국계 부행장(VP)을, FIB에서는 동경 지점에서 출장 온 일본계 부행장을 만났다. BoA 관계자는 최고 은행에 다니려면 인종차별은 감수하라고 일렀다. FIB 관계자는 "이 기업은 크지는 않지만, 인종에 대해서는 색맹(color blind)"이라고 말했다. 홍 행장은 색맹의 뜻을 되물었다. 인종 차별에 둔감하다는 속뜻을 들은 홍 행장은 지인과 동창들의 예상을 깨고 FIB에 입사해 국제부 론오피서 일을 시작했다. 1972년이었다. 흰 벽에 붙은 파리 FIB에서 주요업무는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은행 및 기업들에 달러 여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입사 5년 만에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석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임원 회의에 참석한 그는 친했던 직장 동료에게 ‘너는 흰 벽에 붙은 파리 한 마리 같다’는 농담을 들었다.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홍 행장을 제외한 임원이 모두 백인이었다. "인종에 둔감했던 은행을 고르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일본어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아시아계 임원으로 발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회는 주어진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만들어가는 게 더 맞습니다. 사회생활을 할 때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실행하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면 성공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홍 행장은 은행의 자회사인 트레이딩 컴퍼니 대표를 거쳐 1984년 대형 방위산업체인 노스롭의 금융담당 부장으로 옮겼다. 연봉도 두둑했고 전 세계를 다니는 구상무역 업무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쯤 되었을 때 한미은행 이사들로부터 행장 제의를 받았다. 이 제의를 수락하는 데 1년여를 숙고했다. 한미은행은 삼고초려 끝에 홍 행장을 얻게 된 것이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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