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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홍](2) 한인은행 역사는 벤 홍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한미은행 시절부터 벤자민 홍 전 행장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한인은행권에 다수의 행장과 임원을 양성했다. 오른쪽
부터 홍 행장, CBB 조앤 김 행장, 퍼시픽시티뱅크의 조혜영 전 행장과 장정찬 초대 행장. [벤자민 홍 전 행장제공]

한미은행 시절부터 벤자민 홍 전 행장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한인은행권에 다수의 행장과 임원을 양성했다. 오른쪽 부터 홍 행장, CBB 조앤 김 행장, 퍼시픽시티뱅크의 조혜영 전 행장과 장정찬 초대 행장. [벤자민 홍 전 행장제공]

한미은행의 이사들은 1년 여간의 공을 들여 벤자민 홍 행장의 영입에 성공했다. 왼쪽부터 홍 행장, 고 정원훈 초대 한미은행장, 고 안응균 전 이사장 [벤자민 홍 전 행장제공]

한미은행의 이사들은 1년 여간의 공을 들여 벤자민 홍 행장의 영입에 성공했다. 왼쪽부터 홍 행장, 고 정원훈 초대 한미은행장, 고 안응균 전 이사장 [벤자민 홍 전 행장제공]

마케팅·SBA융자 도입 등 시스템 전면 개혁
당시 교육받은 인재들 후일 행장 인력풀 형성


한인은행 역사가 벤자민 홍 전 행장의 전과 후로 나뉜다. 그정도로 그의 한인은행계에 미친 파급력은 업계를 뒤집어 놓았다는 평이다.

그는 미국 내에서 채용된 첫 번째 한인은행장이다.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온 뱅커가 행장이 됐다. 주류 은행에서 임원까지 했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한인 은행계에 첫발을 디뎠다.

홍 행장은 퍼스트인터스테이트뱅크(FIB)에서 익힌 다양한 뱅킹 경험과 노하우를 토대로 한인은행의 현대화와 선진화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한국식 은행 경영 마인드에 젖어있던 한인은행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나게 된 계기도 됐다. 개혁과 성과 위주의 경영방식 도입 등 한인은행의 체질을 본격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주요 수입원인 SBA융자를 최초로 한인은행에 도입했다. 그의 눈부신 경영을 두고 한미은행은 창립 35주년 기념책에서 그의 행장 시절을 한미은행의 도약기로 묘사한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 자산 규모 61억 달러가 넘는 한미은행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말과 같다고 하겠다.

▶삼고초려 끝에 벤 홍을 얻다

한미은행 이사들의 삼고초려와 유사한 영입 과정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화 중 하나다. 방산업체인 노스롭에서 4년 차 금융담당 부장으로 일하던 중에 FIB 시절 알게 된 한미은행 이사인 안응균씨로부터 저녁을 먹자는 연락을 받는다. 식사 자리에서 그는 한인 금융계에 새 역사를 쓰자는 안 이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홍 행장 본인이 원하는 대우를 해 줄 수 있을 만큼 한미 규모가 되지 않으니 다음 기회로 하자고 했다. 그의 속내는 한인은행에서 일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단칼에 거절하고자 돈 문제를 꺼냈던 것이었다고 한다.

“안 이사의 영입 제안은 매우 고마웠습니다만 당시엔 한인은행에서 일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미련 없이 (저를) 단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대우 문제를 거론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런 오퍼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일화로 한때 한인은행권에서 그는 돈을 밝히는 인물로 오해도 받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안 이사는 끈질기게 홍 행장을 계속 찾았다. 당시 한미은행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은행은 한인 자본 투자로 설립됐고 1982년 12월 15일부터 본격 영업에 돌입했다. 확장 중이던 한인 이민 사회 덕분에 개업 첫 해부터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

창립 1년 만에 자산 규모가 4배나 증가하는 등 폭풍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을 기반으로 무역 대출을 늘렸다. 하지만 1986년 세이빙스앤론 사태의 여파로 국내 금융산업은 위기에 봉착했다. 1987년부터 국제금융이 부진의 늪에 빠지며 급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무역 관련 대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 당국으로부터 행정 제재(MOU)까지 받게 된다. 당국의 지침대로 미국 뱅킹 경험의 전문가를 찾아 나서면서 홍 행장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국의 지침 준수 여부가 은행의 존망을 가르는 열쇠였고 당시 홍 행장이 적격 인물이었다.

홍 행장은 안 이사의 진정성 어린 설득과 간청에 마음이 움직이면서 행장 자리를 수락하게 된다. 그의 수락으로 한인은행의 수장이 한국에서 온 행장이 아닌 현지 채용으로 이루어진 첫 사례가 됐다.

1988년 그의 행장 취임 이후 비상을 위한 새로운 바람이 한미은행을 넘어 한인은행권에 불기 시작했다.

“한미은행의 발전 가능성을 엿봤고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판단에 수락했습니다. 특히 후진 양성이 가능하다는 마음에 부푼 기대를 가지고 올림픽에 위치한 본점에 들어섰습니다. 업무 확인 중 대출 심사 서류를 포함한 각종 은행 업무 서류에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섞여 있었고 영어도 엉망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운영도 한국식이었고 그래서 직원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출근 첫날에 대한 그의 회고다.

▶빨간 펜을 든 행장

교육의 힘을 믿는 그는 직원 훈련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직원들이 비즈니스 영어를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영어로만 작성된 대출 서류를 포함한 각종 결재 서류를 집으로 가져가 일일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다시 돌려주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그의 업무 시간은 은행에서 가정까지로 연장됐다. 임직원들의 영어 실력이 향상할 수 있게 그의 개인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 해서 은행 감독국의 서류에 대한 지적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주류은행에서 일하던 비한인 은행 직원을 고용해서 주류 방식의 여신 심사와 관리 등 은행 주요 업무도 익히게 했다.

특히 은퇴한 SBA융자 전문가를 강사로 초청해 SBA융자 상품을 한인은행권에 사상 최초로 선보였다. 그때 배웠던 SBA 직원들이 다른 한인은행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SBA융자를 한인은행권에 전파했다고 한다.

그는 세일즈 및 마케팅 기법을 가르치고, 성공 사례와 장기적인 안목에 바탕을 두고 인수합병(M&A)에 대해 공부할 기회도 제공했다. 그의 직원에 대한 높은 교육열 덕분에 타 은행에서 스카우트는 비교적 적었다. 한미 직원을 성장시켜 인재로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차세대 뱅커를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매년 5~7명은 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채용했다.

“한 조직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력은 대체로 그 조직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사심입니다. 그런 인력이 능력 부족이라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트레이닝 기회를 주어야지 무작정 외부 영입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성장 가능성이 잠재된 인재를 발굴하여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리더의 덕목입니다.”

결국 그의 신념대로 한인은행권에서 발탁한 뱅커 대부분이 고위 임원은 물론 행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전 행장으로 퍼시픽시티뱅크(PCB)의 장정찬 초대 행장과 조혜영 행장이 있다. 오픈뱅크의 민 김 행장과 CBB의 조앤 김 행장도 그의 리더십과 함께했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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