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홍](4) 울부짖는 LA폭동 피해자 한인위해 10만불 무담보 대출 결심
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한인은행의 '처음' 벤자민 홍
100% 상환한 고객들 평생 한미 충성고객 남아
벤자민 홍 전 행장은 10대와 20대를 거쳐 6.25전쟁을 겪었다. 북한 인민군에 잡혀 포로생활까지 했으며 죽음으로 덮인 전장의 참혹함을 직접 겪었다. 참혹한 전쟁터가 40여년이 지난 미국 LA 한복판에서 다시 재연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그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한인타운에서 식사하면서 TV를 시청하던 홍 행장은 흑인들의 시위가 소요사태로 번져가는 뉴스에 화들짝 놀랐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뉴스를 계속 확인하며 폭도들이 웨스턴 길을 따라 한인타운으로 북상하는 모습에 그의 등엔 서늘함이 엄습했다.
그다음 날 한인타운은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뉴스 매체들은 폭도가 지른 불로 화염에 휩싸인 한인 상점들을 쉴 새 없이 보도했다. 폐허로 변한 업소 앞에서 한인 업주들은 주저앉아서 울부짖고 있었다. 백인 경찰의 저지선이 한인타운을 내어준 채 베벌리힐스로 물러나 한인들의 피해는 더 컸다.
공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한인들은 스스로 자경단을 꾸려 총으로 무장하고 폭도들로부터 일터를 지키기 위한 총격전도 불사했다. 40년 전 그 참혹한 전쟁터가 그의 눈앞에 다시 펼쳐졌다. 또 다른 전쟁과 같았던 LA폭동 역시 홍 행장의 기억에 생생히 새겨질 만큼 끔찍했다.
폭동은 3일간 지속했고 5월 1일 대통령의 명령으로 해병대가 배치된 후에야 잦아들었다. 한인타운 은행들은 은행감독국의 지시로 4월 30일과 5월 1일 모두 문을 닫았다. 한미가 융자한 아파트에 화염병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찾았다. 가는 길에 그의 눈 앞에 펼쳐진 한인타운은 6.25 전쟁 때 서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할 정도로 처참했다. 그는 폭동 피해를 본 80여 곳의 고객 업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고객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인 이민자들이 잠도 안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일군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해가는 모습에… (우리 은행) 고객과 한인 업주들이 땅을 치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무조건 한인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인은행계 BoA가 되다
한인사회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느라 밤잠을 설치던 그의 눈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역사’라는 제목의 책이 들어왔다. 그는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에 책을 꺼내 들어 읽어내려갔다.
1906년 4월 18일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쳤다.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했고 당시 은행들은 가을까지 영업 정상화가 어렵다며 돈을 풀지 않았다. 복구 자금이 절실했던 소상공인들은 돈을 구하지 못해 비즈니스를 재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세운 뱅크오브이탈리아의 아마데오 피터 지아니니가 마차에 현금 1만 달러를 싣고 거리에서 소액대출을 해줬다. 이후 지아니니는 최대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설립자가 된다. 홍 행장은 이 부분을 읽고 책을 내려놨다. 그리고 한인 비즈니스 지원 플랜을 바로 짰다. 빠른 복구가 가능한 업소를 대상으로 최대 10만 달러를 무담보로 빌려주는 것이다.
일부 임직원과 이사들이 부실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다. 한미은행 역시 한인 이민자들이 세운 은행으로 한인사회를 도와야 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4일부터 대출을 시작했다. 한인은행으로는 유일하게 자사 고객뿐만 아니라 다른 한인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한 한인에게도 융자를 해주었다고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인업소가 살아야 커뮤니티은행도 함께 산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인은행의 뿌리는 한인사회니까요.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사례를 드니 부정적이던 이사들도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당시에는 우리가 한인 고객을 살렸다고 뿌듯해했지만, 그 이후에는 그들이 우리를 살리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베풀어야 돌아옵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무담보 10만 달러 융자를 받은 고객 50명 중 채무 변제를 하지 못한 고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더해 홍 행장은 론오피서들을 동원해 재해복구 융자 신청을 돕도록 업소에 파견도 했다.
다른 은행과의 차별화된 서비스에 감사함을 넘어 감동한 한인 고객들은 한미를 지키는 충성 고객이 됐다.
한미 측에 의하면, 대출 초기 우려와 달리 당시 빌려 간 돈은 100% 상환됐다. 한미은행에 20년 이상 고객이 많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한미를 살린 폭동 피해자들
2009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부실사태로 한미은행의 주가가 페니스톡으로 전락할 정도로 위기를 맞았다.
언론에서 뱅크런 가능성까지 지적하는 상황에도 4·29폭동을 함께했던 한미 고객 중 대형 예금을 찾은 고객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며 LA폭동 때 도와준 친구를 버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저명한 경제학자인 토드부크홀츠가 쓴 ‘죽은 CEO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라는 책에도 소개됐다.
한미은행은 2020년 3분기 기준으로 자산 규모 61억 달러가 넘는 은행이 됐다. 그 원동력에는 위기 시에도 한미를 든든하게 받쳐줬던 충성 고객이 있었다. 그 충성 고객을 만든 건 바로 모두가 아니라고 했을 때 소신이 있게 밀어붙인 홍 행장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말 훌륭한 보스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고객들도 많았습니다. LA폭동 때 한미은행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 폐쇄 위기에 봉착했던 나라은행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더 크게 보답해 주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많이 얻은 셈이죠. 저를 믿고 도와준 고객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성철 기자 jin.sungch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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