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동물로 사육된 남자가 던진 슬픈 문명 비판

인간이 만약 언어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성장한다면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는 독일 역사의 기이한 실화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1960년대 라이너 베르너 파스판버, 빔 벤더스와 함께 독일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3대 명장 중 한명인 헤어조크는 광기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감독이다. 그의 독특한 영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생존과 죽음의 본질, 비애와 비밀을 간결하고도 리얼하게 표현한다. 1975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   성경 구절인 듯 들리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속담에서 유래됐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 ‘Jeder fur sich und Gott gegen alle’를 번역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그에 반한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이고, 이를 좀 더 풀어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4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기존 속담의 반어법적 효과와 헤어조크의 실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28년 오순절 일요일 독일의 뉘른베르크 길가에 한 아이가 버려진다. 그의 이름이 ‘카스퍼하우저’이고 군인으로 징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다. 모든 게 미스터리한 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어느 가난한 농부에 의해 지하실에 갇혀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살다가, 그마저도 농부의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졌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이한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완전히 문명과 격리된 그의 백지상태는 사람들의 호기심 또는 지식인층의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카스파는 어느 교수의 집으로 도망을 한다.     교수는 몇 마디 말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학문과 음악, 미술, 종교 등을 가르친다. 빠른 학습에 점차 ‘문명’에 눈을 뜨게 된 카스파의 말과 행동은 나름의 자아 세계를 형성한다. 곧 자서전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카스파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상류사회에 당혹스러운 존재로 떠오른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카스파를 마을에 버린 망토를 두른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사악한 이 자는 언어를 구사하게 된 카스파가 자신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세상은 카스파를 발견하고 카스파는 세상을 발견한다.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온 현명한 바보 카스파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사회이다.  카스파에게 문명이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구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학문과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는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에게 모든 사람이 늑대였다고 토로한다. 그는 교회 회중의 침묵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왜 피아노를 호흡처럼 연주할 수 없나, 라고 반문한다. 토론에서 종교와 합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오만한 논리학자를 제압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다.   카스파는 1833년 두 번째 폭행을 당하고 가슴 깊숙이 칼에 찔린 채 살해된다. 사람들은 그의 기형성 또는 비정상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한다.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위해서다. 공증인은 카스파의 뇌의 어느 한 부분이 변형됐다고 기록한다. 변형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없던 독일 지식인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듯, 영화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공증인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헤어조크는 카스파의 음울한 우화를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탐문으로 이어간다. 그는 카스파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함으로 서구 문명의 큰 축인 이성과 종교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을 조롱하는 ‘문명화된 카스파’와 문명화의 비극을 목도한다. 헤어조크는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포착해 낸다.     헤어조크 감독은 카스파 역에 브루노 슐라인슈타인이라는 43세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그는 평생 보호 시설에서 보냈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슐라인슈타인은 연기 이상의 것을 연기한다. 순수하고 교활한, 그리고 선량하고 악의적인 카스파의 장난기를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표현한다. 젊은 카스파를 연기하기엔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카스파 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 배우는 코믹한 카스파 역을 이질감 없이 잘 소화해 냈다. 낯선 세계에 휘둥그레진 어린 그의 눈은 영화의 중심 이미지이다.   헤어조크는 50년 전 사회 제도 또는 체제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권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운 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쳤다. 상상력과 지성에 기반한 이 영화는 후세대 거장들인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라르스 폰 트리에의 ‘바보들’(1998),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근 작품 ‘푸어 씽스’(2023) 등의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제도가 그들 외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삶을 안겨 주고 있음을 비판한 영화들이다.     명상적이며 가슴 아픈 담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예의 바른척하는 지성인들의 학문과 이성은 문명의 오만함이며 혼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헤어조크는 이 영화를 통해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를 ‘학문적 창조물’로 인식했던 상류사회의 오만을 반성하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비판 문명 바보 카스파 칸영화제 그랑프리 서구 문명

2024-09-18

[아름다운 우리말] 바보가 남을 바보로 여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갈등과 분노가 한가득입니다. 갈등과 분노의 원인은 주로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상대는 바보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가 됩니다. 사람들은 늘 얼굴이 벌겋고, 화가 나 있습니다. 위험한 사회입니다. 언제든지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인 겁니다. 불안 불안합니다.   바보는 어떤 사람이 바보일까요? 바보라는 말의 어원은 ‘밥보’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밥보는 밥을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먹보랑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먹보에는 바보의 느낌은 없습니다. 그저 많이 먹으니 욕심꾸러기라는 생각은 들 겁니다. 바보는 욕심보다는 어리석음과 연결이 됩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밥을 많이 먹는 것을 어리석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많이 먹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바보가 어리석은 것은 남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니 어리석은 겁니다. 남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신의 배가 불러도 계속 먹으면 어리석습니다. 특히 주변에 배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 어리석은 정도는 심해집니다. 내 배가 부른데도 다른 이는 살피지 않고 계속 꾸역꾸역 입안으로 음식을 넣습니다. 그게 바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바보가 넘쳐납니다. 내 배를 부르게 하는데 신경이 가 있어서, 주변의 배고픔을 모르는 체한다면 바보입니다. 옆집의 누가 배고픈지, 이웃의 누가 힘들어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바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달리 말하면 배부른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나라는 못된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불행한 사람이 많은 나라는 만족하는 바보가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보는 자기가 바보인 줄은 모릅니다. 자기는 문제가 없고 상대가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쉽게 남을 바보라고 욕합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욕을 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바보 취급합니다. 세상에 바보가 너무 많다고 혀를 찹니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는 세상에 바보가 많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바보로 여기고, 아이는 어른을 바보로 여깁니다. 노인은 젊은이를 바보 취급하고, 청년은 노인을 바보라 여깁니다. 선생은 학생을 바보로 여기고, 학생은 선생을 바보로 여깁니다. 남자는 여자를 바보로 여기고, 여자는 남자를 바보로 여깁니다. 진보는 보수를 바보로 여기고, 보수는 진보를 바보 취급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바보 취급하니 바보는 점점 늘어납니다. 온 세상이 바보 천지입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세상에 바보가 참 많습니다. 저렇게 바보가 많으니 세상에 갈등과 분노와 화와 멸시와 차별이 가득하겠지요.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저 바보로 보일 겁니다. 저는 오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보들의 세상입니다. 바보는 남을 바보로 여깁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바보 바보 소리 제일 바보

2024-09-1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바보 갈매기, 알바트로스

바보 갈매기, 알바트로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보다 힘이 있고   움직이는 것이   정지된 것보다 강하다       부드러운 싹이 동토를 뚫고   가느다란 뿌리가   바위를 무너트린다       강한 바람은   옷을 여미게 하지만   부드러운 햇살은   겉옷을 벗게 한다       움켜쥔 꽃봉오리를 피운 것은   외압의 힘이 아니라   내면의 자율이다       부드러운 깃털을 가진 새는   날갯짓의 수고보다   바람에 기대어 날기에   두려움이란 힘을 빼고   나를 맡기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 있다       사람의 삶도 그렇다   경계를 긋거나   담을 세우지 말라   이것들은 돌아서 당신을 가두고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을 것이다   마침내 당신의   언어를 빼앗기게 된다      어떤 강한 말보다   조용한 문필의 힘이 강하다   그리고 명사보다 동사가 강하다   그리하여 명명되지 않은 시간에   바보 갈매기 *알바트로스는   바람에 기대어 긴 날개를 펴고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갔다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날 수 있는 새       미시간 호수를 산책하다 여러 무리의 새들을 보았다. 하얀 깃털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껏 부풀어 있다. 바다 갈매기도 보이고 작은 물새도 간혹 눈에 띄었다. 모래 위 세 갈래 발자국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덩치가 꽤 큰 갈매기 한 마리를 보았다. 호수 가까이 날다가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새를 보면서 두 발로 디딘 땅을 떠나 결코 날 수 없는 내가 초라해 보였다. 수면 위 높은 하늘로 날아간 새는 한동안 날갯짓을 하지 않고도 오랫동안 편안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인가? 이 물음은 나에게 던진 물음이기도 하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향해 걷고 있냐고.    독서에 빠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방과 후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깜깜한 밤하늘에 뜬 별들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 읽은 책 중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빠져 몇 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책 속에 나왔던 신의 이름, ‘아프락사스’를 기억한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새는 힘겹게 싸운다. 마침내 나를 감싸고 있는 알, 세상을 벗어나 신에게로 날아가는 한 마리 새의 날갯짓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수고와 노력도 이와 같지 않은가.     바보 갈매기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바보 갈매기의 이름은 알바트로스이다. 조류 중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새는 타조이지만 타조는 날 수 없는 새이기에 세상에서 날 수 있는 짐승 중에 가장 큰 것은 단연 알바트로스이다. 날개를 펼치면 그 길이가 무려 3미터가 넘는다. 길고 폭이 좁은 날개를 편 채 바다 표면에 생기는 풍속 차를 이용해 날아오르는 알바트로스는 날갯짓을 하지 않고서도 어느 새보다 더 멀리 날고 더 높이 오른다. 커다란 날개로 미끄러질 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단 한 개의 알을 낳아 암수 교대로 알을 품는다. 새끼는 성장이 느리지만 수명은 30년 이상이나 산다. 한 마리의 짝과 평생 어울려 다니는 독특한 생태가 특이하다. 아마도 함께 기대어 하늘을 나는 데에는 한 마리의 짝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알바트로스가 지상에 내려앉으면 큰 날개가 오히려 장애가 되어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일단 하늘에 오르면 폭풍우 속에서도 가공할 만한 용기와 담력으로 고도의 추진력과 힘을 얻어 속도와 높낮이를 자율 하는 능력도 준비되어 있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볼 때 시련과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삶은 그 속에서 견디며 단련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 찾아온 어떤 시련과 폭풍우 속에서도 다듬어지고 단단해져서 더 높이 더 멀리 역경을 헤치며 날아오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바보새 알바트로스처럼.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알바트로스 갈매기 바보새 알바트로스 바보 갈매기 바다 갈매기

2024-09-09

[이 아침에] 나는 바보인가

구글 지도도 길을 틀리게 가르쳐줄 때가 있나?     3475 라팔라마 애비뉴는 내가 찾고 있는 이비인후과 주소이다. 그런데 구글 지도를 보고 갔더니 병원 같은 건물이나 간판은 없고 일반 주택만 있다. 차를 돌려서 다시 한 번 주소를 확인했으나 병원은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확인하면 되는데. 전화번호가 없다. 수첩에 전화번호 적는 것을 깜빡 잊었다.     만일 전화번호가 있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만일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나의 일생은 ‘만일’로 다시 말해서 후회로 점철되어있다.   집에 와서 주소를 확인하니 ‘3475’가 아니고 ‘5475’였다. 애꿎은 구글 지도만 나무랐다. 병원에 전화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거의 90세가 되는 노인이라서 주소를 혼동했다고 고백했다. 핑계다. 주소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 나의 잘못이다.     행선지를 확인하지 않아 윌셔 불러바드를 헤매고 다닌 적이 있다. 2011년 4월 22일이었다. 나는 그 해 중앙신인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입상하여 상장 수여식에 초청되었다. 전화에 구글지도가 입력되지 않은 시절이 었다.     초행길이라 시간을 넉넉히 잡고 중앙일보 LA본사를 향하여 부에나파크의 집을 나섰다. 윌셔 불러바드에서 동쪽으로 우회전하여 690 번지를 찾았다. 중앙일보 건물이 나오지 않는다. 바로 옆에 110번 프리웨이 고가도로가 보인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떤 건물에 좁은 진입로가 보인다. 올라가면서 보니 진입로가 아니고 출구 표시가 붙어있다. 차를 후진하여 다시 윌셔 불러바드로 나왔다. 그때 어떤 차가 그 출구로 내려왔으면 충돌할 뻔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차를 세우고 중앙일보 본사에 전화했다. 690 윌셔 불러바드가 아니고 690 윌셔 플레이스라고 한다. 불러바드와 플레이스를 혼동했다.     수상식 일동 사진을 찍기 바로 전 도착했다.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 같은 촌놈이 미국에서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며, 신인문학상을 받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하긴 농촌에도 똑똑한 사람이 있다. 사람 나름이다. 나는 바보인가.     지난달에도 또 일을 저질렀다. 자동차 등록증과 뒤 간판에 붙이는 2023년 스티커를 우편으로 받았다. 새 자동차에 스티커를 붙이고 누가 뜯어갈 것이 두려워 칼로 X를 새겼다. 웬걸! 스티커를 잘못 붙였다. 중고차에 붙이는 것을 새 자동차에 붙였다. X가 새겨있기 때문에 두 차의 스티커를 뜯어내다가 모두 망가트렸다. 엉성하게 뜯어 맞추었으나 경찰이 보면 반드시 질문을 받을 것 같다.     차량 국에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45불을 지불하고 두 개의 스티커를 받아왔다. 그 직원은 나 같은 사람이 가끔 있다고 한다. 좀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문제는 확인하지 않는 데 있다. 무슨 일이나 서두르지 말고 확인해야겠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서두르면 낭비(haste makes waste)’라고 했다. 나는 바보는 아니지만 가끔 서두르다 바보짓을 한다. 윤재현 / 전 연방공무원이 아침에 바보 만일 전화번호 중앙일보 건물 중앙일보 la본사

2022-07-29

[이 아침에] 아빠가 딸의 남자를 만날 때

내가 교꼬를 처음 만난 것은 27살 때였다. 교꼬는 23살,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생활 1년차. 그녀를 만난 지 딱 24시간 만에 그녀의 아빠를 만났다.     교꼬와 나는 당시 미국 국적의 컴퓨터 회사 직원이었다. 나는 한국 지사에 근무하고 그녀는 일본 지사 직원이었다. 회사의 대외관계를 다루는 신생 부서의 일을 맡게 되어 업무 수습차 가는 출장길. 일본 지사의 같은 업무를 하는 부서의 책임자는 상무급, 직원이 60여명 있었다. 한국 지사에는 달랑 나 혼자. 그래도 아버지 뻘이 되는 담당 임원은 나를 자신의 상대역으로 깍듯이 대해 주었다.     금요일 오후 날 보고 ‘우리’ 회사의 경영 철학에 관해서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본으로 뭔가 배우러 갔는데 입사 1개월짜리 보고 모회사의 경영 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하라니. 어쨌든 강단에 올랐다. 40여명의 부서 직원들이 모였고 앞줄에 열댓 명의 여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때 눈에 띈 여인이 교꼬였다. 모두 명찰을 달고 있어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사내 전화 번호부를 찾아서 전화를 했다.     “교꼬상, 내가 일본이 처음인데 주말에 뭘 할지 모르겠어요. 주말에 안내를 좀 부탁할까요?” 당시 일본 지사는 주 5일 근무였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뭐라고 대답을 드려야 할지.” 교꼬의 망설임, 이해가 가는 대답이었다.     저녁에 호텔로 전화가 왔다. “저는 주말이면 부모님을 뵈러 가요. 효도행이라고 하지요. 내일 같이 가실래요?”     황당한 나의 요청에 더 황당한 제안. 속으로 ‘Why not?’ 기내에서 산 12년 시바스 리갈도 한 병 있겠다, 갑작스러운 손님 노릇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가나가와에 있는 교꼬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일본의 고도 가마쿠라에 내려서 하루 종일 놀면서, 배스킨로빈슨 아이스크림도 먹고, 가마쿠라 큰 부처님도 보고.   저녁에 교꼬의 집에 도착했다. 2층짜리 아담한 일본식 가옥.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교꼬의 부모가 기다렸다. 아버지는 아마 50 전후.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둘이 대작을 했다. 정종잔을 주거니 받거니. 반 시간도 안 되어서 그는 술이 취해 누워 버렸다. 교꼬의 어머니는 조용히 차를 따라 주기만 했다.   그날 밤 교꼬의 집에서 묵었다. 1층에는 부모가 쓰는 방, 2층에는 교꼬의 방 그리고 그녀의 오빠 방이 있었다. 오빠는 취직을 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서 내가 그의 방을 차지했다. 그 이튿날은 후지산을 구경하고, 도쿄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 바빠서 다시 교꼬 아버지와 대작을 할 기회는 없었다.     세월이 지나 나도 딸의 아버지가 되고 난 다음 가끔씩 교꼬 아버지가 생각난다. 딸이 불쑥 집으로 데리고 온 첫 남자가 한국인, 불편한 상황이었을 터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술이 취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딸의 남자를 처음 만날 때,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순간이다. 내가 교꼬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어찌했을까? 딸 바보 아빠는 아마도 술기운을 빙자해서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겠지.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아빠 남자 바보 아빠 부서 직원들 한국 지사

2022-06-06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착한 바보로 편히 살기

착하게 살기로 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다. 따지지 말고 원망하지도 않고 서운해 하지 말고 내려 놓고 편히 살기로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울화통이 터지면 지옥불을 왔다 갔다 한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능률이 저하되고 기운이 쏙 빠지고 패잔병이 된 것처럼 어둠의 상자에 갇힌다. 내 잘못이 아닌데, 분명히 잘못은 그 쪽에 있는데 내가 죽을 지경이 되는 이 한심한 지경에서 벗어나야 내가 산다.   마음에도 길이 있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길은 펼쳐진다. 막힌 길 뚫으려고 용쓰지 말고 비켜가고 돌아서가면 된다. 큰 길이 아니면 작은 길로 가면 된다. 라호야비치에서 태평양 바라보며 작은 화랑에서 그림을 그리려던 내 꿈은 어이없이 박살났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크라샹으로 아침 떼우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픈 내 꿈은 타인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샌디에이고로 이사 가기 위해 수년 동안, 아니 내 장년을 온통 바쳐 준비했다. 화랑 건물 두 곳 정리하고 미술작품 보내고 집도 계약하고 가구와 살림, 자동차도 서부로 보냈다. 서류에 사인한 뒤 집 대금 받아 은행에 송금하는 일만 남았는데 클로징 두시간 전에 바이어가 파토를 냈다. 살던 집을 관리인 없이 방치할 수 없었다. 샌디에이고에 계약한 새 집은 도로아미타불, 코로나 확산으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귀향하는 일이 발생했다.     살던 옛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땅바닥에 자며 와신상담, 후회와 반성으로 지난 시간을 정리했다. 바이어가 우리 쪽에서 취소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지만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싸움은 두 쪽 다 죽기 살기로 피곤하다. 토네이도나 허리케인은 진원지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아프고 뼈저린 기억도 살아남기 위해 넘어가야 할 산이고 언덕이다. 꽉 막힌 줄 알았는데 벽을 헐고 보니 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다. 부동산 값이 크게 올라 살던 집은 높은 가격에 팔렸다. 멀리 아름드리 솟은 나무로 담장을 한, 작은 연못이 보이는 곳에 내 생애 마지막 집을 지었다.     나는 이 집을 ‘유배지’라 부른다. 부와 욕망과 때묻은 옷을 벗고 권력과 부귀에서 자유로운,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집. 탐스런 꽃도 이름없는 풀도 무성할 때와 시들어 죽을 때가 있다. 흥망성쇠의 번성함과 쇠태함의 외로움을 민들레홀씨로 날려 보낸다. 새벽이면 제일 먼저 만나는 바람과 볼을 비비고 동쪽으로 통하는 데크에 나가 붉게 타오르는 해 뜨는 풍경을 그리고 어둔 밤엔 찬란한 별들의 사랑이야기를 적는다.     ‘착하다’는 마음이 곱고 어질고 선하다는 뜻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착하게 사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멍 때리며 사는 삶이 착하기는 하는 건지. 모든 것을 좋게 좋게 넘기는 것이 착하게 사는 걸까. 남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친구들 잘 사귀고 부모에게 말썽 안 부리고 민폐 안 끼치고 남의 부탁 잘 들어주고 돈도 잘 빌려주고 타인에게 잘 베풀고 측은지심으로 남을 돕고 사는 것이 착하게 사는 것일까.     ‘바보와 착한 사람은 한 끝 차이’라는 말은 마냥 착하게만 살면 바보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착하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마음 밭 비우고 향기로 채우면 편하고 쉽게 산다.   공자는 ‘꽃이 핀 마을에 머무르면 매향을 품은 인생이 따라온다’고 했다. 인생은 선택이다. 풍요하든, 부족하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로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고 텃밭의 작은 소출에 감사하며 착한 바보로 편히 산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바보 죽기 살기 도로아미타불 코로나 화랑 건물

2022-05-24

[이 아침에] 아빠가 딸의 남자를 만날 때

내가 교꼬를 처음 만난 것은 27살 때였다. 교꼬는 23살,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생활 1년차. 그녀를 만난 지 딱 24시간 만에 그녀의 아빠를 만났다.     교꼬와 나는 당시 미국 국적의 컴퓨터 회사 직원이었다. 나는 한국 지사에 근무하고 그녀는 일본 지사 직원이었다. 회사의 대외관계를 다루는 신생 부서의 일을 맡게 되어 업무 수습차 가는 출장길. 일본 지사의 같은 업무를 하는 부서의 책임자는 상무급, 직원이 60여명 있었다. 한국 지사에는 달랑 나 혼자. 그래도 아버지 뻘이 되는 담당 임원은 나를 자신의 상대역으로 깍듯이 대해 주었다.     금요일 오후 날 보고 ‘우리’ 회사의 경영 철학에 관해서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본으로 뭔가 배우러 갔는데 입사 1개월짜리 보고 모회사의 경영 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하라니. 어쨌든 강단에 올랐다. 40여명의 부서 직원들이 모였고 앞줄에 열댓 명의 여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때 눈에 띈 여인이 교꼬였다. 모두 명찰을 달고 있어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사내 전화 번호부를 찾아서 전화를 했다.     “교꼬상, 내가 일본이 처음인데 주말에 뭘 할지 모르겠어요. 주말에 안내를 좀 부탁할까요?” 당시 일본 지사는 주 5일 근무였다.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뭐라고 대답을 드려야 할지.” 교꼬의 망설임, 이해가 가는 대답이었다.     저녁에 호텔로 전화가 왔다. “저는 주말이면 부모님을 뵈러 가요. 효도행이라고 하지요. 내일 같이 가실래요?”     황당한 나의 요청에 더 황당한 제안. 속으로 ‘Why not?’ 기내에서 산 12년 시바스 리갈도 한 병 있겠다, 갑작스러운 손님 노릇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가나가와에 있는 교꼬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일본의 고도 가마쿠라에 내려서 하루 종일 놀면서, 배스킨로빈슨 아이스크림도 먹고, 가마쿠라 큰 부처님도 보고.     저녁에 교꼬의 집에 도착했다. 2층짜리 아담한 일본식 가옥.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교꼬의 부모가 기다렸다. 아버지는 아마 50 전후.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둘이 대작을 했다. 정종잔을 주거니 받거니. 반 시간도 안 되어서 그는 술이 취해 누워 버렸다. 교꼬의 어머니는 조용히 차를 따라 주기만 했다.   그날 밤 교꼬의 집에서 묵었다. 1층에는 부모가 쓰는 방, 2층에는 교꼬의 방 그리고 그녀의 오빠 방이 있었다. 오빠는 취직을 해서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서 내가 그의 방을 차지했다. 그 이튿날은 후지산을 구경하고, 도쿄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 바빠서 다시 교꼬 아버지와 대작을 할 기회는 없었다.     세월이 지나 나도 딸의 아버지가 되고 난 다음 가끔씩 교꼬 아버지가 생각난다. 딸이 불쑥 집으로 데리고 온 첫 남자가 한국인, 불편한 상황이었을 터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술이 취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딸의 남자를 처음 만날 때,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한 순간이다. 내가 교꼬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어찌했을까? 딸 바보 아빠는 아마도 술기운을 빙자해서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겠지.   김지영 / 변호사이 아침에 아빠 남자 바보 아빠 부서 직원들 한국 지사

2022-05-22

[삶의 뜨락에서] 순진한 그림이 좋다

 얼마 전에 요양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옆방에 계신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기가 그린 그림도 보여주었다. 개성이 고향이라고 하시며 살았던 마을의 모습을 손이 가는 대로 기억이 가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오밀조밀 그려놓아 가고 싶은 고향의 추억이 살아나고 있었다.   매일 기운차게 떠오르던 앞산 위에 햇님도 실감 나게 그려져 있었다. 여러 가지 기법을 가르쳐 주는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자신이 그리고 싶은대로 그려 놓아 아이들 그림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순박한 동시를 읽는 것 같은 감동이 마음에 스며들고 있다.   한국의 지방 문화를 돌아보는 기행문적 화면을 보면 그곳 문화교실에서 꽤 나이 든 분들이 열심히 그림 공부하고 작품활동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의 그림 공부가 무슨 화가로서 큰 성공을 바란다든가 그림을 높은 가격에 팔아보겠다는 기대가 앞서는 것이 아니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림 한장 그려내는 것이 마냥 즐거운 분위기다. 물론 그려 놓은 작품이 번듯한 화풍을 뽐내는 그런 그림은 아니지만 보는 이를 역시 즐겁게 만들어주는 감동이 있다. 자신의 느낌대로 붓이 가다 보니 때로는 파격적인 그림이 만들어져 깜짝 놀라게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특별한 색깔과 선이 어우러진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이 아이들의 그림과 잘 알려진 대가들이 말년에 모두 내려놓고 그린 약간 유치해 보이는듯한 어떤 그림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 듯하여 재미있는 흥미를 갖게 한다.   민화라 불리는 그림들이 있다. 한국의 조선 시대 민화는 오히려 소재와 표현 방법이 정통이라 불리는 그림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 용도도 단지 그림 솜씨 뽐낸다거나 품위 있는 장식을 넘어서 복을 기원하거나 화를 물리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어떤 규범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리는 사람 마음대로 그려놓아 오히려 많은 사람, 체면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호랑이를 그려도 산중 왕의 엄숙한 얼굴도 있지만 좀 바보스러워 보이는 웃음 나는 얼굴 그림이 더 많다. 이름 모를 풀벌레가 화려하게 자리 잡기도 하고 싱싱한 물고기가 묘한 자세로 물방울 튕기며 요동치기도 하여 잘 차린 밥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새들은 자기 느낌대로 커다란 머리로 노래하고 화단의 꽃들은 원색의 꽃잎을 마구 날리며 즐거운 잔칫날 분위를 띄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까치와 표범이 소나무 아래에서 합창하며 팍팍한 삶을 위로하여 주기도 한다. 그렇게 민화라는 그림은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붓질로 그림의 세계를 확장하고 꾸미지 않은 백성의 마음을 드러낸다.   요즈음 많이 보이는 노래경연대회를 대해보면 박자나 창법이나 그런 것에 잘 맞게 틀림없이 부르는 것보다 자신이 가진 개성을 꾸밈없이 보기 좋게 드러내 보여 즐겁게 진심 어린 어떤 감성을 전하여 주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나이 어린 친구들의 순수한 느낌 주는 노래가 환영받기도 한다. 명망 있는 신학자가 길에 넘어진 할머니를 도와주었을 때 그 할머니의 순전한 믿음이 담긴 한마디에 잊었던 신을 향한 사람을, 이웃을 향한 사랑을 순식간에 되살리고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복잡하거나 꾸미면 많은 이론이나 어렵게 늘어놓은 설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근원에 가까이 있는 단순하고 쉬운 한 마디에 드러나고 있어 그것을 찾는 이에게 뜨겁게 다가온다. 할머니의 그림이, 아이들의 동시가, 어떤 화가가 말년에 그린 바보 그림이, 노학자의 짧은 탄식에 사람들은 더 깊이 더 많은 감동을 한다.   골목길을 걷다가 만나는 담벼락에 그려진 동네 아주머니의 서툰 붓질의 난해한 그림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도 꾸미지 않은 순진한 감성이 묻은 솜씨인 까닭이다. 삐뚤빼뚤하고 무심한듯한 선과 색깔로 그려진 그림이 스스럼없이 다가오면 편안하여지고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순진 얼굴 그림 바보 그림 아이들 그림

2022-03-07

[이 아침에] 아들 바보

젖은 티셔츠를 손으로 탁탁 털어서 옷걸이에 거는 자신을 보며 픽 웃는다. 아들은 결혼 전에는 이웃사촌이고 장가가면 해외동포가 된다고 하던데. 그걸 잘 알면서도 아들의 빨래를 건조기에 넣지 않는 이건 뭔가. 남편의 옷을 이렇게 정성스레 널어본 기억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외국으로 나간 지 2년 반 만에 돌아온 아들이다. 결혼 적령기를 꽉 채운 나이가 된 탓일까. 장발을 하고 공항 터미널 입구에 서 있는 녀석에게서 세월이 스쳐간 자국을 본다. 와락 끌어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행복을 넘어 오히려 찡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한 시간과 도착 후 첫 식사를 하는 동안이 우리의 밀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놓치면 녀석의 근황은 물론 마음 나누기도 힘들다. 거침없이 이웃사촌으로 전락한다. 이번 주말에는 친구 결혼식 참석하러 샌타바버러에 갈 거고 그 다음 주는 또 비즈니스 관계로 샌프란시스코를 들러 뉴욕도 다녀와야 한다. 겨우 3주 일정으로 왔는데 우리하고는 언제 놀까? 물으니 허허 웃는다. 모르겠단다.     무심한 것 같아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가방을 풀면서 조카의 장난감을 꺼내어 준다. 누나랑 엄마 화장품도 사왔다. 그것 산다고 헤매고 다녔을 녀석을 생각하니 고맙다 못해 자식인데도 흥감하다. 아빠랑 매형 것은 없냐니까 그건 살 시간이 없었단다. “당신하고는 쇼핑을 갈 거래. 자기 옷 사면서 아빠 것도 살 거래.” 섭섭한 표정의 남편을 그렇게 달랬다.     저녁을 먹은 녀석이 멜라토닌이 있는가 묻는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못 잤는데 푹 자고 싶다고 했다. 약장을 뒤져보니 있긴 한데 유효기간이 일 년이나 지났다. 두 말 않고 차를 몰고 나갔다. 컴컴한 도로를 휘익 달려 새 것을 사 왔다. 몇 알을 더 먹으면 되는데 왜 그랬냐며 아들이 깜짝 놀란다. 유효 기간 지난 약을 먹이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녀석의 방문 앞을 지나간다. 남편보고도 조용히 다니라고 눈짓을 했다.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남편은 방문을 열고 빼꼼히 들여다보며 아빠 회사 잘 다녀올게 인사를 올린다.     한참 뒤 나온 아들의 등에는 백팩이 메여있다. 아침은 LA로 나가 친구랑 먹을 거란다. 스토브에는 이틀 동안 푹 고운 곰국이 뽀얗게 끓고 있는데 저건 어쩌라고. 엄마 차를 쓰라고 했는데도 기차를 타겠다며 어느새 표를 예매까지 했다.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며 토스트라도 사먹자는 내 말에 콘퍼런스 콜이 있다며 그냥 가라고 한다. 대합실로 들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아, 이제 엄마가 필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껏 들떴던 마음이 풍선에 바람 새듯 내려앉는다. 아들이 온다며 모든 일정을 취소했는데 괜히 수선을 피웠나 보다. ‘우리 이제는 아들에게 더 무심해지자. 그냥 던져두고 바라만 보자.’ 남편과 약속한 말을 되뇌면서도 아들이 던져두고 간 빨랫감을 손으로 쓸어 주름을 펴가며 옷걸이에 건다.  성민희 / 수필가이 아침에 아들 바보 아들 바보 친구 결혼식 엄마 화장품

2021-10-2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