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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소녀 피살에 공분, 법을 바꾸다

  ━   원문은  LA타임스 10월30일자 ‘A 12-year-old girl’s murder shook the country, inspiring far-reaching laws‘ 제목의 기사입니다.     1993년 10월1일 발생한 폴리 클라스(당시 12세.사진)의 실종은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금요일이었던 그날 밤, 캘리포니아 페탈루마에 있는 폴리의 집에서는 믿기 힘든 사건이 벌어졌다.     동갑내기 친구들과 밤샘 파티를 하던 폴리의 방에 괴한이 침입했다. 이 남성은 세 소녀에게 칼을 들이대며 조용히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위협했다.   남성은 소녀들의 손발을 방에 있던 닌텐도 게임 상자의 전선으로 결박했다. 그리고 폴리의 친구들의 머리에 베개 커버를 씌우고 1000까지 숫자를 세라고 지시했다. 당시 폴리의 어머니는 집안에 있었지만,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 수사관은 사건 발생 직후 ‘낯선 사람에 의한 납치’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일부 수사관들은 그 판단에 의문을 품었다. 어린 소녀가 본인의 집 침실에서 낯선 사람에게 납치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고, 특히 목격자가 있는 상태에서 납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경험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폴리 클라스의 실종 사건은 곧 전국적인 뉴스가 됐고, 수사관들에게는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납치 당시 방에 있던 사건 목격자인 폴리의 친구들로부터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집중적으로 심문했다.     “혹시 장난 아니니?”, “폴리에게 남자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폴리가 남자 친구와 가출한 건 아니니?”   경찰은 증언의 사소한 차이에도 집착했다. 범인이 노란 머리띠를 했다고 폴리의 친구 중 한 명이 말한 것과 달리 다른 친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 것을 의심했다. 또 한 소녀는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다른 친구는 듣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한명은 거짓말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다른 한명은 불확실했다.   킴 크로스 작가가 이 사건을 바탕으로 쓴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폴리 클라스 납치 사건과 미국의 아이 찾기 수색’에 따르면 수사관들은 소녀들을 용의자처럼 심문하기 시작했다. 한 수사관은 “사건 자체가 말이 안된다, 뭘 숨기고 있는거냐”면서 “폴리의 부모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지 않느냐. 너희가 진실을 말하면 이 모든 고통을 멈출 수 있다”고 압박했다.   사건 초기부터 페탈루마 경찰국과 긴밀히 협력해온 에디 프레이어 FBI 요원은 “수천 건의 제보가 쏟아졌지만 신뢰할 정보는 없었다”면서 “소녀들을 상대로 질문을 바꿔가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려 했다. 심문 의도는 좋았지만 적절치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심한 압박에 견디지 못한 소녀들은 경찰과 대화를 중단하는 상황에 처하게됐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자원봉사자 수천 명이 인근 숲과 들판을 뒤지며 폴리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심령술사들 마저 사건 현장에 와서 돕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프레이어 요원은 “사건이 점점 더 주목을 받으면서 너도나도 유명세에 편승하려했다”면서 “사람들은 사건 현장인 주택을 찾아와 침실을 둘러보며 심령적 현상까지 탐구하려 했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11월 말, 소노마카운티에 사는 한 여성이 산책 중 발견한 아동용 사이즈의 레깅스(tights) 덕분이었다. 이 여성은 폴리가 실종되던 밤, 길가 도랑에 빠진 틴토 차량에 피투성이의 낯선 남자가 타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당시 경찰 기록에 따르면, 이 남성은 그날 밤 소노마카운티 보안관 두 명에 의해 체포됐지만 차량을 도랑에서 빼낸 뒤에는 풀려났다.   당시 납치사건에 대한 긴급 경보가 발령되지 않았던 탓에 보안관들은 납치 사건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를 놓아준 것이었다.   이 남성의 이름은 리처드 앨런 데이비스(당시 39세)로 밝혀졌다. 그는 판금공장 노동자로 납치 혐의로 기소됐다가 사건 발생 3개월 전 가석방된 상태였다.   경찰은 그의 외모가 소녀들이 증언한 괴한의 몽타주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FBI는 사건 현장에서 당시로서는 신기술이었던 교광등을 사용해 지문을 찾아내는 ‘ALS(alternate light source)’ 기법으로 폴리의 침대에서 손바닥 지문을 확보한 바 있다. 이 지문을 데이비스의 지문과 대조한 결과 일치했다.   데이비스는 체포된 후에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다가 결국 그의 친구가 면회를 오면서 수사 상황을 전해주자 자백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건 당일 마리화나를 피우고 맥주를 마신 상태였다면서 폴리를 목 졸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사건 장소로 경찰을 안내하며 시신이 유기된 위치를 털어놨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경찰이 그날 밤 자신을 체포했던 당시까지만 해도 폴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을 포함한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고 데이비스의 범죄 기록이 공개되자 대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데이비스는 수십 년 동안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다. 정신 병원에서 두 차례 탈출한 전력이 있었다. 또한, 납치와 강도 등의 혐의로 수년간 복역했지만 다시 석방됐다는 사실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1992년 발생한 18세 대학생 킴벌리 레이놀즈 피살사건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주의 ‘삼진법(three-strikes law)’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법안은 세 번째 범죄를 저지를 경우 무조건 최소 25년형을 선고하도록 규정했으며, 이는 당시 범죄 억제에 대한 강력한 대중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폴리의 아버지 마크 클라스는 이 법에 찬성하면서도 우려했다. 비폭력 범죄자에게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는 부작용 때문이다.   1994년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삼진법을 골자로 하는 프로포지션 184를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켰다. 당시 피트 윌슨 주지사가 법에 서명하면서 가주 전역에서 시행됐다. 2년 뒤 가주대법원은 판사들에게 특정 경우에 ‘스트라이크’ 판결을 제외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폴리의 아버지 마크는 이 결정이 충분한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다.   2012년 통과된 논란의 프로포지션 36은 삼진법 적용 대상은 모두 심각한 강력범죄만 해당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지 개스콘 LA카운티 검사장은 휘하의 모든 검사들에게 삼진법에 따른 형량 가중을 구형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이에 대한 소송이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마크는 딸 폴리의 죽음 이후 클라스키즈 재단을 설립해 아동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안을 추진하고 실종 아동을 찾는 수색 및 구조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메간법과 같은 성범죄자 공개법을 지지했고, 딸을 살해한 범인에게 사형 선고를 요구해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지사 개빈 뉴섬이 사형 집행 중단을 선언하면서 클라스는 다시 한번 분노를 느꼈다. 그는 뉴섬 주지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눈 후 바로 사형 중단을 발표한 것에 대해 “완전히 이용당했다”고 말했다.   이후 클라스는 뉴섬 주지사의 소환 운동에 참여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형집행이 중단되면서 폴리를 살해한 데이비스는 상대적으로 더 편한 구금 시설로 이송됐다.     마크는 딸이 무참히 살해됐음에도 범인인 데이비스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점에 대해 회한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동안 운영해온 클라스키즈 재단 역시 올해말로 운영을 중단하기로 했다. 재단을 이어갈 후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폴리의 희생을 기리며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더 이상 후계자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삶의 한 장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한다. 폴리 클라스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법적·사회적 변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캘리포니아 주와 전국적으로 아동과 가정 보호를 위한 다양한 법률들이 강화되었고, 피해자를 위한 목소리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딸이 남긴 유산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사람들이 폴리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이를 통해 아동 보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더욱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크리스토퍼 고퍼드 기자공분 피살 폴리 클라스 당시 폴리 남자 친구

2024-10-30

[열린 광장] ‘그만’을 모르는 남자

웬일인가? 지난주 110과 120을 밑돌던 공복혈당이 140과 150으로 고공행진하고 있다. 주범(?)은 수박이라고 생각했다.     파머스마켓 같은 곳에서 싱싱한 수박 세 통을 샀다. 깍두기처럼 잘라서 냉장고에 넣고 물 마시듯 먹었다. 단물이 철철 흐르는 시원한 수박. 앉은 자리에서 한참 집어먹어 배가 불러야 직성이 풀린다. 아내는 몇 개만 먹고는 더 먹지 않는다.   나는 ‘그만’을 모르는 남자다. 알고 보니 당뇨 상승의 진짜 주범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내가 성장한 황해도 장산곶은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자주 찾아왔다.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저녁에는 강냉이 또는 수수죽을 먹었다. 얼굴이 비치는 멀건 죽을 두, 세 사발씩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배가 늘어났다. 늘어난 배를 채우려고 애썼다. 어머니는 자기 몫을 먹지 않고 나에게 주었다. 흉년에 어른들은 굶어 죽고 아이들은 배가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배가 불러야 수저를 놓는 습성이 생겼다.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해 영양 과잉으로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젊어서는 앉아서 냉면 두 그릇을 먹어도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러니 과거 식생활을 되돌아보면 당뇨가 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온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으로 달려갔다. 집에서 가져온 세 가지나물과 버섯 복음, 그리고 흰쌀밥을 데워서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었다. 음료수는 레귤러 코카콜라 한 캔, 그리고 초콜릿 바 한 개로 입가심했다. 콘 칩 몇 개로 점심을 때우는 우리 매니저는 지나가면서, “You are having a fine feast everyday(당신은 매일 훌륭한 만찬을 먹네요)” 라고 칭찬인지, 비웃는지 모를 말을 하곤 했다.     초콜릿 바는 설탕 덩어리다. 한국의 미군 부대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는 미군 병사가 피엑스에서 사다 준 초콜릿 바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가끔 얻어먹는 것은 코끼리가 비스킷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콜릿 바를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민 와서 그 소원은 성취했으나, 대가로 당뇨가 찾아왔다.   나는 30년 차 당뇨 환자다. 하루에 세 번 당뇨약을 먹는다. 인슐린 투입 직전이다. 그래도 슈거 프리 초콜릿과 캔디,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즐기고 있다. 슈거 프리도 대체 설탕이 들어있다고 한다.     냉장고의 수박을 다 먹으면 더는 사오지 않으려고 한다. 실컷 먹지 못한다면 아예 먹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 본다.  ‘All or nothing’이다. 남은 것은 식욕뿐인데, 인슐린이 무서워 그 시원한 수박도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요?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 광장 남자 당뇨 상승 슈거 프리 인슐린 투입

2024-10-13

[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넛지(Nudge)와 클루지(Kluge)

오바마 대통령이 읽고 책의 공동저자 중 한사람을 백악관의 행정 각료로 영입했다. 이 책의 제목은 ‘넛지(Nudge)’다. 넛지는 ‘팔꿈치 같은 걸로 남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기’라는 뜻을 갖고 있단다. 옆사람에게 노래를 시키거나 무대로 나가라고 할 때, 팔꿈치로 옆 사람을 슬쩍 툭툭 치면서 상대에게 뭔가를 권하는 행동을 넛지라고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의식하지 못하게 어떤 선택이나 일을 하게끔 넌지시 권한다는 말이다.   ‘넛지’의 몇 가지 예가 있다. 네델란드의 암스텔담 공항에서 처음 시작했다는 남자 화장실 이야기다. 암스텔담 공항에서는 이 넛지 효과를 이용해서 남자 소변기 밖으로 튀어나가는 소변량을 한번에 80%나 줄였다고 한다. 이 공항에서는 소변기마다 중앙 부분에 파리 한 마리씩을 그려 넣었다. 그랬더니 소변기 중앙에 그려 놓은 파리를 맞추려고 남성들이 변기를 정조준하더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소변이 새나가지 않고 대부분 소변기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시카고 다운타운으로 가보면 미시간호를 끼고 달리는 Lake Shore Drive가 있다. 몇 곳에서는 커브가 심해서 감속을 유도하는 표지판들이 붙어 있다. 하지만 빨리 달리는 자동차 운전자들이 감속 표지판을 계속 무시해서 사고가 빈발했다고 한다. 이에 시카고 시는 차도 바닥에 흰색 선을 가로로 많이 그어놓았다. 그런데 커브 구간이 가까워질수록 흰색 선을 점점 촘촘하게 그려놓았다. 커브 길에서는 운전자가 같은 속도로 운전을 하더라도 마치 자신이 굉장히 빨리 운전하는 것처럼 느끼게끔 해서 속도를 줄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부를 장려하고 싶을 때, 신경을 써서 일부러 거절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급여에서 일정액이 기부되도록 하는 것과 같은 행동들도 넛지의 예다.   정부 부문에서는 바람직한 정책을 시도할 때 이러한 넛지 효과를 이용하면 국민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 정책입안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민간부문에서도 기업들은 이런 방법을 판매기법에 도입해서 많이들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처럼 설계자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판에 따라 움직이는 행동을 할 때가 많다. 신경을 써서 생각하기가 귀찮은 것이다. 사람들이 넛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클루지(Kluge) 때문이라고 한다. 클루지는 원래 엔지니어들이 쓰는 말이라고 한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답은 아니지만 대충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임기응변식 대처법을 일컫는 말이란다. 일상에서 매일 너무 많은 선택을 해야하는 인간은 진화한대로, 대충 보고 빠른 판단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이 넛지를 받아들이는 클루지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아주 오랜 동안 식량이 부족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왔다. 언제 식량을 구할 수있을 지 모르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다보니, 인간은 에너지를 적게 쓰도록 진화되었단다. 인간의 몸중에 가장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곳은 두뇌다. 두뇌가 쓰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인간은 평소에 하는 많은 행동들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하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정부나 기업은 넛지를 이용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납세자나 고객은 클루지한 속성 때문에 넛지를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요즘 납세자와 소비자들 사이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설계자들이 미리 준비한 넛지에 마냥 넋놓고 당하고 있지 말라는 각성의 촉구다. 인간의 클루지한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닐 수도있으니 귀찮더라도 좀 생각을 하며 살라는 것이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클루지 nudge 넛지 효과 소변기 중앙 남자 소변기

2024-10-10

[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마음챙김의 속성을 이해하고 나면 편견을 줄일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사람들 간의 차이를 더 적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구별하는 것이다. 맥락의 중요성과 다양한 관점의 존재를 깨닫고 나면 우리는 능력이나 장애에 대한 인식이 상황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럼으로써 어떤 장애를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절름발이’나 ‘당뇨 환자’ ‘간질 환자’가 아닌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 당뇨병이 있는 여자, 발작 증세가 있는 청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절름발이보다는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가 더 정교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순한 ‘청각 장애자’가 아니라 ‘청각이 정상 수준의 70%인 사람’으로, ‘당뇨 환자’가 아니라 ‘인슐린 비의존형 당뇨병이 있는 사람’ 식으로 좀 더 정교하게 구분할 수도 있다.     엘런 랭어 『마음챙김』   심리학자인 저자에 따르면, 범주를 잘게 쪼개어 더 많은 특징을 구별할수록 포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은 줄어들고 독창성과 창의력은 자란다. 저자는 아동 대상 실험결과도 소개한다. “주의 깊은 구별 짓기를 훈련받은 아이들은 편견을 품지 않고 대상의 특징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신체 장애가 특정 기능과 관련된 특성이지 그 사람의 전체와 관련된 특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구체성과 디테일의 힘이다.   ‘마음챙김(mindfulness)’이란 마음을 열고 주의를 기울이며 창의적인, ‘마음집중’ 상태를 뜻한다. 마음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많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청각 장애자 남자 당뇨병 당뇨 환자

2024-08-28

대디오…‘영화화 불가’ 딱지 2인극 마침내 영화화

2017년 이후 오랫동안 제작사들 사이에서 ‘영화화 불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2인극 ‘대디오(Daddio)’는 다코타 존슨이 제작자로 참여하면서부터 현실화됐다. 이후 숀 펜이 존슨의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고 극작가 크리스티 홀이 연극무대에 올렸던 자신의 희곡을 직접 연출했다.       영화는 다시 만날 일 없는 택시 기사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뉴욕의 흔한 일상을 모티브로 한다. 낯선 두 사람이 택시 공간의 앞뒤에 앉아 나누는 대화를 통해, 영화는 대도시 속 인간은 누구나 소외되고 외로운 영혼들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오클라호마의 배다른 언니를 방문하고 늦은 밤 JFK 공항에 도착한 걸리는 맨해튼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올라탄다. (다코타 존슨이 연기하는 Girlie는 크레딧에 올라오는 이름일 뿐 작품 속 그녀의 이름은 미상이다) 택시 기사 클라크(숀 펜)와 그녀는 교통사고와 도로공사로  지체된 1시간 반 동안 이례적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미모의 프로그래머 걸리. 셀폰 스크린에 나타나는 문자들을 통해 그녀가 나이 많은 기혼남과 불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그곳 사진을 전송한 후 걸리의 은밀한 곳을 찍어 보내달라고 조른다. 걸리는 그를 ‘대디’라고 부르며 사랑한다고 답한다.   두 번 결혼했고 수많은 불륜 경험이 있는 클라크는, 그 남자가 걸리를 지켜주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섹스라는 논리다. 승객들을 ‘짐승’이라고 부르는 클라크의 거친 말투에 걸리는 당황하지만 그가 주도하는 대화에 이끌린다.     두 사람의 대화는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해 서로의 인생 깊은 곳까지 이른다. 걸리는 오크라호마에서 있었던 자신의 낙태 경험을 클라크에게 털어놓으며 불안 장애를치유받는다.     20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하며 인간의 본성을 관찰해온 클라크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분명 ‘나쁜 남자’다. 걸리는 그의 내면에 뭔가가 숨겨져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늑대 속에 숨어 있는 순한 양을 찾아낸다.     택시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은 뉴욕 거리를 디지털로 옮겨온(렌더링) 가상 공간을 활용,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실시간으로 16일간 촬영했다. 두 배우의 연기가 그들의 이전 모습과 많이 다르다.     Daddy-O의 변형 ‘Daddio’는 나이가 많지만 ‘쿨한’ 남자를 지칭하는 슬랭이다. 걸리가 오늘 밤 잠에 들며 생각하는 그녀의 대디는 누구일까? 방금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한 불륜남? 아니면 그녀의 지성에 도전하며 남성의 속성에 대하여 충격과 일깨움을 준 나쁜 남자 클라크? 김 정 영화평론가영화화 불가 영화화 불가 남자 클라크 택시 기사

2024-08-21

[아름다운 우리말] 우산과 양산

저 앞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과 그 뒤를 따라 양산을 쓰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두 사람의 성별은 구별이 될까요? 아마도 우리는 앞에 가는 사람의 성별은 알 수 없지만, 뒤에 가는 사람은 여성일 것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치마를 입은 사람, 스커트를 입은 사람은 어떤가요? 갓을 쓴 사람, 바지를 입은 사람, 하이힐을 신은 사람 등등 복장은 사람의 성별을 구별합니다.     복장은 성별뿐 아니라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 성향도 구별합니다. 청바지가 자유를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선글라스가 상징하는 게 있고, 완장이 상징하는 게 있습니다. 노란 리본이나 빨간 열매를 가슴에 달고 있는 것도 모두 상징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에 무엇을 두르고, 입고, 쓰면서 나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입을 수 없고, 원하는 대로 입기도 어렵습니다. 모든 게 상징이고, 때로는 그 상징이 나를 나타내는 질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의 성별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산을 남녀 모두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죠. 이는 마치 갓을 쓴 사람은 남자일 거라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산을 쓰면 우리는 일단 여성일 것이라 판단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부분 맞습니다. 실제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양산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여성이 대부분입니다. 양산이 중요한 패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우산도 원래는 여성이 주로 썼다는 점입니다. 문화에 대한 예전의 기록을 보면 남성이 우산을 쓰는 것은 여성스러운 행동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영향 때문에 군인이 우산을 쓰는 게 금기처럼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산도 예전에는 여성적 상징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뀝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우산을 든 영국신사가 등장하고 더 이상 우산은 여성의 상징이 아니게 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세상의 흐름에 따라, 문화에 따라 변화합니다. 로마의 장군이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충격적입니다. 스커트를 입고 행진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합니다. 성별을 상징하는 물건은 고정적인 상징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에게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유연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생각이 늘 맞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왜, 여자가 왜?’라는 질문은 시대착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양산으로 돌아가면, 사실 이제는 양산이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양산을 쓰고 다니는 남성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해 무더위 속에서 양산 쓴 많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햇볕이 강하면 양산을 쓰면 그만인데 우리는 지나치게 고정관념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산이 그러했듯이 양산도 남자의 손에 자연스레 잡힐 날이 오리라 봅니다.   이번 여름 우리는 사상 최고의 더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한여름의 열기가 어마어마합니다. 햇볕이 검은 머리를 태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양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머뭇거립니다. 올해 양산의 유혹을 강하게 느꼈지만, 고정관념의 벽은 넘지 못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남았지만 작은 결심을 해 봅니다. 내년에는 꼭 양산을 쓰겠다는 결심. 올해 참 더웠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우산과 양산 우산과 양산 양산도 남자 올해 양산

2024-08-18

올림픽 남자 브레이킹 우승자 알고 보니 한국계 캐나다인

지난 파리 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브레이킹 남자 부문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가 한국계 캐나다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AP 등 복수의 매체에 따르면 남자 브레이킹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캐나다 브레이킹 국가대표 필립 김(27) 선수는 한인으로 목회자의 아들이다. 김 선수에 따르면 이번 올림픽은 김 선수의 부친인 김병태 목사가 처음으로 아들의 브레이킹을 본 순간이기도 하다. 김 목사는 지난 1997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이민 목회를 시작할 때 김 선수를 낳았다. 현재는 노모의 병간호를 위해 목회를 사임하고 한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선수는 결승전 직후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에서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며 우승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김 선수는 지난 2009년 처음 브레이킹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 브레이킹을 접한 뒤로 춤에 빠져 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밤을 새워가며 길거리에서 춤 연습을 하기 일쑤였다. 김 선수는 평소 코치 없이 훈련해왔다. 인터넷에 있는 다양한 춤 영상이나 음악을 참고삼아 독창적인 기술과 표현력을 연마했다. 그 결과, 올림픽에 앞서 지난 2023년 샌티아고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남자 브레이킹 금메달을, 지난 2022년 서울에서 개최된 월드 브레이킹 챔피언십에서도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김경준 기자브레이킹 캐나다인 남자 브레이킹 한국계 캐나다인 캐나다 브레이킹 필립 김

2024-08-14

[글마당] 재봉틀 밟는 남자

친구 남편은 손재주가 많다. 팬데믹 때는 재봉틀에 앉아 마스크도 근사하게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연말에는 스카프도 받았다. 집수리도 잘할 뿐만 아니라 정원에 허브를 심어 허브티를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이렇게 자상한 남편을 둔 내 친구는 얼마나 좋을까?”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만들 수 있어. 재봉틀만 있으면.”   “정말?”   “내가 총각 시절 옷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특히 백투스쿨 시즌에는 재봉틀이 불이 나도록 청바지 아랫단을 줄였다고. 옷가게 주인도 내 실력에 감탄했다니까. 대신 드로잉 테이블 만들어 줄까?”   “또 홈디포 가려고?”   “스튜디오에 나무판이 있어. 가지고 와서 만들게.”   며칠 후 남편이 쓴 카드 명세를 들여다보다가 홈디포에서 널빤지 산 기록을 봤다. 자그마치 나 102달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 돈이면 차라리 이케아에 가서 디자인 테이블을 사지.   “널빤지 스튜디오에 있다고 했잖아. 그냥 굴러다니는 것 있으면 만들랬지. 왜 새 나무를 샀어.”   “이왕 만드는데 질 좋은 재료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이케아에서 사고 싶은 테이블 봐 둔 게 있다고.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남편 별명은 ‘그린포인트 이 목수’다. 가구를 사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그냥 만들겠다고 난리 쳐서. 한번 만들겠다고 마음먹으면 내 발끝에서 허리 높이, 키 재느라 자를 들고 쫓아다닌다. 설계도를 그려 보여주고 다시 고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고집부려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마음에 드는 것도 간혹 있지만, 이케아에 점 찍어 놓은 가구가 눈에 아른거려 실망한다. 하지만 만들고 싶어 하는 남편을 둔 내 팔자니 어쩌겠는가.   “그것마저 못 하게 하면 남편은 무슨 재미로 살까?”   얼마 후, 부셔서 다른 것으로 활용할망정 결국에는 내가 포기한다. 나무 판때기를 아예 그린포인트 스튜디오에서 재단하고 프라이머를 칠해 핸드카로 끌고 왔다. 오자마자 내 얼굴 볼 틈도 없이 만들기가 급했다. 다 만들어 놓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떨어져서 보고 가까이서 만져본다.   “와! 잘 만들었는데. 수고했어요.”   저녁 식탁에 앉아서 다시 “너무 잘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남편 얼굴을 슬쩍 보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근데 내 친구 남편은 친구 머리도 염색해 준다는데. 그 집 남편처럼 내 머리 염색 좀 해줄래?   “아주 나를 머슴으로 부리시네. 내가 마당쇠냐? 그건 못해. 미장원에 가서 해. 돈줄 테니.”   남의 남편 장기 자랑 열거해서 드로잉 테이블 생기고 싸지 않은 미용실 비용도 챙겼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재봉틀 남자 친구 남편 남편 얼굴 남편 장기

2024-08-08

한국 총·칼·활로 금메달 10개…복싱 임애지 아쉬운 동메달

이번 파리에서는 시상대 가장 위를 한국의 궁사들이 독식했다. 김우진은 남자 단체전, 혼성전에 이어 개인전까지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남자 궁사로는 올림픽 최초이자, 여자 선수까지 합쳐서는 도쿄 대회 안산(광주은행), 이번 대회 임시현(한국체대)에 이어 사상 3번째 올림픽 양궁 3관왕에 등극했다.   또한, 통산 5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수확한 김우진은 김수녕(양궁), 진종오(사격), 전이경(쇼트트랙·이상 금메달 4개)을 넘어 한국인 개인 통산 올림픽 최다 금메달 신기록을 세웠다.   준결승에서 김우진에게 결승행 티켓을 내준 이우석(코오롱)은 3위 결정전에서 플로리안 운루(독일)를 물리치고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 양궁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5개에 여자 개인전 은메달 1개, 남자 개인전 동메달 1개를 합쳐 총 7개의 메달을 수확하는 사상 최고 성적을 냈다.   한국은 양궁을 비롯한 사격(금메달 3개)·펜싱(금메달 2개)이 선전한 덕분에 폐회가 일주일이나 남은 4일 현재 대한체육회가 ‘아주 객관적인 시각’에서 제시한 목표 ‘금메달 5개’의 두 배인 ‘금메달 10개’를 채웠다.   복싱 임애지(화순군청)는 여자 54㎏급 준결승에서 하티세 아크바시(튀르키예)에게 2-3(28-29 27-30 29-28 27-30 29-28)으로 판정패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복싱은 3위 결정전을 치르지 않아, 임애지는 동메달리스트가 됐다. 임애지는 한국 복싱 여자 선수 최초로 올림픽 메달을 따냈다.     남자부를 포함해도 2012년 런던 대회 한순철(남자 60㎏급 은메달) 이후 12년 만에 탄생한 한국 복싱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기록됐다.     한국 선수단은 4일 양궁과 복싱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추가했다. 선수단 전체 메달은 24개(금 10개, 은 7개, 동 7개)로 늘었다.   2021년 도쿄(금 6개, 은 4개, 동 10개로 20개)와 2016년 리우 대회(금 9개, 은 3개, 동 9개로 21개)의 금메달 및 전체 메달 수를 이미 넘어섰다.   배드민턴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 안세영(삼성생명)도 은메달을 확보했다. 안세영은 여자 단식 준결승전에서 세계 8위 그레고리아 마리스카 툰중(인도네시아)을 2-1(11-21 21-13 21-16)로 꺾었다.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한국 선수가 결승에 오른 건 1996년 애틀랜타 대회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이후 28년 만이다.올림픽 메달 올림픽 메달 대회 10일차메달순위 스포츠클라이밍 남자

2024-08-04

한국 양궁, 남자 단체전도 금메달

여자에 이어 남자도 해냈다. 남자 양궁 한국 대표팀이 단체전 3연패를 달성했다.   김우진(32·청주시청), 김제덕(20·예천군청), 이우석(27·코오롱엑스텐보이즈)으로 이뤄진 대표팀은 29일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양궁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프랑스를 세트 점수 5-1(57-57, 59-58, 59-56)로 이겼다. 이로써 남자 양궁은 2016 리우, 2020 도쿄에 이어 3회 연속 정상에 올랐다.   전날 여자 단체전에 이어 또다시 금빛 화살을 쏜 한국 양궁은 목표로 했던 금메달 3개를 초과달성할 확률이 높아졌다. 남은 종목은 혼성전과 남녀 개인전까지 3개다. 사상 최초로 금메달 5개를 따낼 가능성도 있다.     맏형 김우진은 한국 양궁 사상 처음으로 3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따낸 선수가 됐다. 단체전에서만 금메달 3개를 따낸 김우진과 도쿄올림픽 2관왕이었던 김제덕은 역대 금메달 순위에서 공동 2위(박성현, 윤미진, 기보배, 안산)가 됐다. 단독 1위는 4개의 김수녕이다.   이날 앞서 벌어진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 결승에서는 17세 ‘여고생 소총수’ 반효진(대구체고 2학년)이 중국의 황위팅과 연장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해 대한민국 여름올림픽 통산 100번째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반효진은 또 역대 여름 올림픽 한국 최연소 금메달리스트의 영예도 차지했다.     또 ‘독립투사의 후손’인 재일동포 허미미(22·경북체육회)는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허미미는 29일 파리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열린 여자 57㎏ 결승에서 세계 1위 크리스타 데구치(29·캐나다)와 연장 승부를 벌인 끝에 지도 3개를 내주며 패했다. 허미미는 2002년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부터 ‘유도 종주국’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허미미는 2021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한국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유언에 따라 곧장 한국행을 택했다.    허미미는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격문을 붙이다 옥고를 치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선생의 5대손이다.   한편, 이날 탁구 혼성 복식 준결승전에 나선 한국의 신유빈·임종훈은 중국의 왕추친·쑨윙샤와 맞서 선전을 펼쳤으나 세트 스코어 4대 2로 패해 동메달 결정전에 나서게 됐다.   >> 관계기사 6면·한국판  김은별 기자금메달 단체전 한국 양궁 남자 양궁 파리올림픽 양궁

2024-07-29

[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은 자유로운 새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파탄에 이르게 하는 요부나 악녀를 팜므 파탈이라고 한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이다. 그녀는 순진한 청년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하바네라’를 부른다. “사랑은 자유분방한 새.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요. 일단 거절하기로 마음 먹으면 불러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하바네라는 2/4 박자의 춤곡으로 특징적인 3-3-2 패턴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 리듬이 매우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가슴 깊숙이 눌러 놓았던 본능을 깨우는 리듬이라고나 할까. 윤리나 도덕에 얽매인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리듬, 남자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 넥타이를 풀게 만드는 리듬이다.   비제가 팜므 파탈의 전형인 카르멘이 부르는 노래를 하바네라로 한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사실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 양식은 인간의 본성과 관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데에 적합한 양식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고상하다고 해야 할까. 인간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는 이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나라에는 인간의 본능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 무수한 춤곡들이 있기에. 하바네라도 그중 하나였다.   카르멘은 하바네라로 돈 호세를 유혹하면서 자기의 사랑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도 돈 호세는 속수무책으로 카르멘에게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카르멘은 나중에 돈 호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가 자기를 죽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내 그를 거부한다. 결국 카르멘은 돈 호세의 칼을 맞는다. 마지막까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다 간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 주인공 카르멘 리듬 남자 팜므 파탈

2024-06-24

[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마음챙김의 속성을 이해하고 나면 편견을 줄일 다른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사람들 간의 차이를 더 적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구별하는 것이다. 맥락의 중요성과 다양한 관점의 존재를 깨닫고 나면 우리는 능력이나 장애에 대한 인식이 상황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그럼으로써 어떤 장애를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절름발이’나 ‘당뇨 환자’ ‘간질 환자’가 아닌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 당뇨병이 있는 여자, 발작 증세가 있는 청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절름발이보다는 한쪽 다리를 저는 남자가 더 정교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순한 ‘청각 장애자’가 아니라 ‘청각이 정상 수준의 70%인 사람’으로, ‘당뇨 환자’가 아니라 ‘인슐린 비의존형 당뇨병이 있는 사람’ 식으로 좀 더 정교하게 구분할 수도 있다.     엘런 랭어 『마음챙김』   심리학자인 저자에 따르면, 범주를 잘게 쪼개어 더 많은 특징을 구별할수록 포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은 줄어들고 독창성과 창의력은 자란다. 저자는 아동 대상 실험결과도 소개한다. “주의 깊은 구별 짓기를 훈련받은 아이들은 편견을 품지 않고 대상의 특징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신체 장애가 특정 기능과 관련된 특성이지 그 사람의 전체와 관련된 특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음이 밝혀졌다.” 구체성과 디테일의 힘이다.   ‘마음챙김(mindfulness)’이란 마음을 열고 주의를 기울이며 창의적인, ‘마음집중’ 상태를 뜻한다. 마음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많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마음챙김 청각 장애자 남자 당뇨병 당뇨 환자

2024-06-05

Liam-Olivia 7년•5년 연속 아기이름 1위

리엄(Liam)과 올리비아(Olivia)가 각각 7년•5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자 아기와 여자 아기 이름을 차지했다.    연방 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SSA)은 최근 2023년 미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기 이름 탑10을 성별로 발표했다.     리엄과 올리비아가 남녀 아기 이름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노아(Noah)와 엠마(Emma)가 각각 2위를 기록했다. 노아와 엠마는 2년 연속 인기 많은 남자 아기 및 여자 아기 이름 2위에 올랐다.     남자 아기 탑10과 여자 아기 탑10 가운데 2022년과 다른 유일한 이름은 남자 아기 이름 순위 6위에 오른 마테오(Mateo)였다.     2023년 남자 아기 이름 탑10은 리엄, 노아, 올리버(Oliver), 제임스(James), 일라이자(Elijah), 마테오, 테오도르(Theodore), 헨리(Henry), 루카스(Lucas), 그리고 윌리엄(William)이었다.     2023년 여자 아기 이름 탑10은 올리비아, 에마, 샬럿(Charlotte), 아멜리아(Amelia), 소피아(Sophia), 미아(Mia), 이사벨라(Isabella), 에이바(Ava), 이블린(Evelyn), 루나(Luna) 순이었다.     연방 사회보장국은 2023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남자 아기 이름 탑5와 여자 아기 이름 탑5도 각각 공개했다.     이 부문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자 아기 이름들은 이자엘(Izael)•초즌(Chozen)•에이든(Eiden)•캐시언(Cassian)•카이렌(Kyren)이었고 여자 아기 이름들은 케일리(Kaeli)•앨릿절(Alitzel)•엠린(Emryn)•애드해라(Adhara)•아자리(Azara) 등이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기의 사회보장번호를 발급받기 위해 SSA에 출생증명서를 제출한다. SSA가 그 어느 곳보다 정확한 신생아 이름 통계를 갖게 되는 셈이다.   SSA는 1997년부터 일반에게 관심이 높은 신생아 작명 경향을 분석해 매년 5월 발표하고 있다. SSA는 웹사이트에 이름 선호도 변화와 1880년 이후 연도별 인기 이름 순위 등도 소개해놓았다.     Kevin Rho 기자아기이름 olivia 연속 아기이름 남자 아기 아기 이름

2024-05-16

[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음악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편안하게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 ‘나비부인’은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핑커톤이라는 미군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 초초상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오페라다. 동양 여자가 자신을 희생하며 맹목적으로 서양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판타지일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동양인에게는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못 된다.   미군 장교 핑커톤은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전형적인 서양 남자다. 나가사키 항에 내린 그는 배가 새로운 도시에 닿을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데리고 놀’ 여자를 구한다. 일본인 포주는 그에게 어떤 여자든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단돈 100엔에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 음흉한 남자들의 행각에 걸려든 것이 바로 초초상이라는 게이샤다. 핑커톤은 그녀와 장난삼아 결혼하지만 초초상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핑커톤과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핑커톤은 잠시 초초상을 데리고 놀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나가사키 항을 떠났다. 그 후 핑커톤의 아들을 낳은 초초상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다림이었다. 핑커톤은 본국으로 돌아가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핑커톤이 본부인을 대동하고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초초상은 진실을 알게 된다. 삶의 희망을 잃은 그녀는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초초상은 아리아 ‘어떤 갠 날’에서 핑커톤이 “나의 버터플라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돌아오는 날을 상상한다. 그렇게 한동안 달콤한 꿈을 꾼 다음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외치며 노래를 끝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외침이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그 사랑이 곧 파국으로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게이샤 초초상 서양 남자 동양 여자

2024-03-18

[세상만사] '애니깽' 슬픈 이름

애니깽이란 멕시코에서 재배하는 용설란 나무를 말한다. 원래 명칭은 ‘에네구엔(Heneguen)’ 이지만 발음을 잘못한 것이다. 나무의 잎은 길쭉하고 그 껍질을 잘라 삶아서 심줄을 뽑아내 선박용 로프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그리고 뿌리 부분은 데낄라 술 원료로 쓰인다. 이처럼 부가 가치가 높은 작물이라 과거 한국인을 농장 노동자로 고용했다.   1905년 4월 4일 한국인 남자 802명과 여자 209명 그리고 어린이등 총 1033명은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했다. 그리고 1905년 5월 15일 멕시코 유카탄주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여 메리다 등지의 25개 농장으로 흩어졌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농장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을 시작했는데 목표량을 못 채우면 채찍질을 당하는 등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새벽에 시작된 일은 밤늦게야 끝났는데 한국인들은 스페인 어 교육을 받지 못해 소통조차 어려웠다. 당시 중국인 허이후씨가 황성신문에 멕시코 한국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려 국내 여론이 들끓었지만 망해가던 대한제국 정부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1909년 5월로 4년간의 계약이 끝났지만 일제 강점으로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었다.   그들 중 약 300여 명은 쿠바로 떠났다. 유카탄의 한인들과 쿠바로 떠난 한인들은 적은 돈이지만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 앞으로 독립자금을 보낸 기록도 있다. 대한국민회 유카탄 지부와 쿠바 지부를 열고 한인의 정체성을 교육하고 민성국어학원을 열어서 한글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유카탄과 쿠바에 정착한 한인들 중 재계나 문화계, 정치계에 흔적을 남긴 한인은 거의 없다. 그들인 한국에서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빈한한 삶을 살았던 그들은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고국은 너무 멀고 일제의 강점 상황에 있었다. 그만큼 불운한 세상을 살다 가신 분들이었다.     지금 그 지역과 주요 대도시에는 5세, 6세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인사가 방문하면 한인 후손인 어린이들이 한복을 입고 꽃다발을 전달하지만 행사 때뿐 평소에는 모일 일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멕시코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 그리고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고 쿠바로 탈출한 한국인들은 꿈속에서만 고국을 그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신 분들이다. ‘애니깽’은 한국인 노동자의 슬픈 이름이라고 밖에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그분들의 고혼을 위로하며 명복을 빌고 빈다. 김호길 / 시인세상만사 애니깽 이름 한국인 노동자들 멕시코 한국인 한국인 남자

2024-02-06

[글마당] 남자 사람 친구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만나며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도 내가 싫지 않은지 개인적으로 연락하곤 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떤 사인 가요?”   “친구 사이지.”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에 데이트하다가 헤어진 여자가 다시 잘해보자고 연락해 온 적이 있었어. 나는 사귀다가 끝난 여자에게는 다시 연락하지 않아. 하지만 친구와는 헤어짐이 없는 거야.”   “혹시 우리가 친구로 지내다가 헤어지더라도 꼴사납게 끝내지는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와 어두워지는 길을 걸으며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는구나!’ 왠지 모를 곤혹스러움에 구두코만 쳐다보며 조용히 걸었다. 뭔가 머릿속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버스정류장에서 손을 흔들고 그와 기약 없이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진 그가 30여 년 만에 뉴욕을 방문해서 나에게 전화했다.     “나 기억해” 귀에 익은 목소리다.   “아아~ 기억나요.”     “어떻게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았어?”     “낮으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서. 하하. 반가워요. 어디예요?”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전화로 더 이야기할 수는 없나요?” 나는 그와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럴 일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해 줄게.”   ‘한때 좋아했던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그도 나를 잊지 못하고 살다가 연락했을까?’ 여름 안개 저편 먼 곳에서 아른거리던 그리운 사람이 갑자기 곁에 다가와 속삭이는 듯 기분이 들떴다.   카페에 들어서는 그가 싱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물기 빠지기 시작하는 사과처럼 조금은 쪼그라든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도 색이 바래고 비틀어지기 시작하는 사과 꼭지 같다. 그의 뒤로 여자가 주춤거리며 다소곳이 따랐다.     “내 와이프야.” 그가 와이프와 함께 오리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참한 인상의 여자가 다소곳이 인사했다. ‘이런 현모양처를 찾으시느라 나에게 ‘친구’를 강조했구나.     나는 그동안 뉴욕을 방문했던 그와 내가 알던 친구들 소식을 신이 나서 들려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내가 한 이야기를 통역하듯이 간간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전화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어.”   나는 그의 얼굴 가까이 몸을 들이밀며 높은 톤으로 또박또박 잘 들으라고 지껄여 댔다.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다. 나는 저절로 맥이 풀리며 조용해졌다.     만나기 전 희망이 잠시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시계추가 멈춘 듯 그와의 시간이 뚝 멈췄다. 그는 나의 수다가 끊긴 분위기에 눌렸던지 시계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더니 싱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일어났다. ‘남녀 간의 친구 사이란 애인을 만나는 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가 애인과 헤어지면 들춰 보는 별 볼 일 없는 사이? 오랜 세월 구석에 처박혀둔 내가 잘 있나 확인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나?’ 만남과 헤어짐처럼 분홍빛으로 타오르던 노을이 어둠 속으로 차갑게 사라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씁쓸했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남자 친구 친구들 소식 남자 사람 세월 구석

2023-12-15

[열린광장] 깔끔하지 않은 남자

깔끔하지 않은 남자는 바로 나다. 또 일을 저질렀다. 주택 단지에 있는 수영장에 다녀와 무심코 현관문을 잠갔다. 아내가 밖에서 걷고 있는 것을 깜빡 잊었다. 내가 샤워하는 동안 아내는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고 한다.       아내는 뿔이 났다. “못 들었어, 미안해.” 사과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아내가 화를 낼 때는 가만히 듣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다음번에는 잠그지 말아야지 마음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웬걸, 며칠 후 또 잠갔다. 아내는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남편이라며 화가 단단히 났다. 자기를 무시한다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이다. 어쩌면 좋을까. 문을 잠그지 않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해도 안 된다. 의지(意志)에 의지(依支)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할 수 없이 전가의 보도를 빼 들었다. 현관문에 ‘LOCK?’이라고 비망(備忘) 표어를 붙였다. 아내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밖에 나갈 때는 열쇠를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꾸준히 노력하면 나의 심정을 알아주겠지.   지난주 약국에서 전화가 왔다. 크레딧카드를 가져가라고. 약값을 지불하고 카드를 놓고 온 것이다. 카드에 줄을 맬 수도 없고. 지갑 위에 흰 글씨로 카드의 첫 글자 ‘C’를 썼다.   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면 한, 두 가지를 빠뜨렸다. 배추를 사 오면서 마늘이나 생강을 사 오지 않았다. 이제는 수첩에 적어 다닌다. 수첩의 비망록이 점점 늘어난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애쓰다가 다음 날 생각이 났다. 가을에 피는 꽃 이름을 잊어버리고 당황했다. 다음 날 코스모스가 떠올랐다. 일시적으로 잊으면 건망증이고 영원히 잊으면 치매란다.   치매는 암보다 무섭다. 지난달 아내가 치매를 앓아 입원 중인 친구를 방문했다. 그의 아내는 가까이 지내던 우리도 알아보지 못했다. 치매가 심하면 남편에게 “당신 누구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건강하게 늙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배설하고, 잘 자고, 잘 움직여야 한다. 밤중에 깨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우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물 한 모금 마신 다음 스트레칭과 이완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면 잠이 저절로 온다.   생사의 결단으로 움직여야 한다. 시니어들에 권장하는 최상의 운동은 수영장에서 걷는 것이다. 물속에서 태권도나 타이 치를 하는 것도 좋다.  운동을 위한 투자는 가장 값진 투자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남자 지난달 아내 동안 아내 친구 이름

2023-12-03

[글마당] 소하의 죽음에 대한 남자들의 불라불라

소하의 죽음에 대한 친정 식구들은 시부모 구박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시집 식구들은 미국에 초청한 친정 식구들이 자리 잡는데 도와달라는 성화를 견디지 못하고. 여자들 말로는 ‘남편의 외도로 속 썩이다’가. 또 다른 엇갈린 소문은 소하가 남편 몰래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동분서주하다가 열 받아서 쓰러졌다고 남자들은 쑥덕거렸다.   교포입네 하고 남자들이 한국에 나가서 예쁜 색시를 데려오곤 했던 1970대 초, 미국으로 이민 간 오빠 친구가 한국에 나와서 창숙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서둘러 결혼하고 미국으로 데려왔다. 기술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미국에 온 창숙 남편은 정비소에서 일했다. 엔진오일 묻은 작업복을 입고 기름때 낀 손으로 자기 몸을 더듬는 남편이 귀찮고 싫었다. 창숙은 속아서 한 결혼이라며 주말이면 LA 갈비 씹듯이 불평불만을 질근질근 씹었다.   창숙은 6개월 동안 빈둥거리다가 돈을 벌어 집도 사고 꿈꾸던 멋진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소하의 바느질 공장을 찾았다. “일 배워보고 싶어 왔습니다.” 뽀얀 피부, 커다란 눈, 부푼 가슴을 자랑하듯 내민 창숙의 상냥한 목소리에 직공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고 바느질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화려한 창숙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소하는 마치 동공이 닫혀 보이지 않았던 물체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넋 나간 듯 창숙을 쳐다봤다. 창숙은 그 순간 왜 사람들이 ‘쉬엄쉬엄 일해도 뭐라지 않고 소하가 제 한 몸으로 다 때우는 여자’라는 동네 소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창숙이 소하 밑에서 일하면서 시집 식구에게 구박받는 소하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나서 못 참고 “왜 그렇게 죽어 살아요. 일만 하지 말고 바람도 쐬고 멋도 부려요. 누구를 위해 돈을 버는데요.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알아요. 시집 식구와 맞서서 자신의 위치를 다져야 해요. 돈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더니. 운전면허증도 따요. 도와줄게요.”   얼마 후 창숙은 재봉질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카지노 딜러가 된 후 남편과 이혼했다. 소하는 그동안 틈틈이 익힌 운전 솜씨로 마음이 심란할 때면 창숙을 만나러 갔다. 쇼핑도 외식도 하며 점점 자신만을 위한 삶을 터득했다. 창숙은 카지노 딜러가 성격에 맞는지 인기가 좋았다.     “언니 나 골수암이래.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 급전 좀 해줄 수 있어요? 부탁이야.”   시댁, 친정과 남편에게 돈으로 시달리는 소하는 돈거래만은 누구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나마 자기에게 살갑게 구는 창숙이 암 수술을 해야 한다니! 4년 전, 쌈짓돈을 들고 가서 꿔줬다. 창숙은 의사의 오진으로 암 수술할 필요가 없었다고도 하고 급전이 필요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딜러가 수입이 좋다는데. 나에게 빌려 간 돈 이자는 그만두고 원금이라도 조금씩 갚았으면…” 소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창숙은 빌려 간 돈을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딴청을 떨었다. 소하는 할 말을 잃고 서둘러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그동안 창숙만은 믿고 마음을 줬는데. ‘너마저도 나를 버리다니!’ 차를 몰고 오며 소하는 잘못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탄했다. 상대의 허점을 이용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차창 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봤다. 하늘에 피를 토하는 듯한 붉은 해를 마주하자, 뇌에 통증이 왔다. 토하고 싶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쓰러졌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죽음 남자 창숙은 카지노 창숙은 재봉질 창숙은 의사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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