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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요식업계까지 올인…F1이 도시를 바꿨다

미국과 달리 포뮬러 원(이하 F1)은 한국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인천광역시가 그랑프리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세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 4월 스테파노 도메니칼리 F1 그룹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F1 인천 그랑프리’ 개최 의향서를 전달했다. 현재 인천시는 오는 2026년 또는 2027년에 첫 인천 그랑프리를 개최, 최소 5년 이상 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F1은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로 꼽히는 대회인 만큼 많은 재원과 준비가 필요하다. 본지는 지난 20~23일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2024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현장에서 대회 관계자들을 만나 노하우를 들어봤다.   라스베이거스=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     호텔은 F1 개최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산업군이다. 경기를 보기 위해 도시를 찾는 관람객 수십만 명을 수용해야 한다.    이번 대회의 경우 주최 측 추산 관람객 수는 무려 30만 6000명이다. 대회를 축제 분위기로 만들어 관람객에게 즐거움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호스피탈리티 서비스 역시 중요하다. 호텔업계의 도움이 필수인 이유다.     앤드류 랜지노 MGM 리조트 인터내셔널 상무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F1 대회를 준비하며 호텔이라는 고급 공간에 모터스포츠 경험을 결합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카지노 호텔 체인인 MGM 리조트 인터내셔널은 이번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의 공식 파트너사였다. 벨라지오, 코스모폴리탄, 아리아 등 라스베이거스에만 14개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   랜지노 상무는 “F1은 축제”라며 “경기를 보러 온 사람은 물론, 여행을 위해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관광객에게까지 대회 기간 동안 어떤 경험을 선사할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도시를 찾은 모든 이들이 대회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팬 공략법도 강구해야 한다.     랜지노 상무는 “F1에는 크게 두 종류의 팬이 있다”며 “F1 경기를 찾아다니고 모터스포츠에 깊게 빠져 있는 열성 팬과 F1을 하나의 축제로 보고 분위기를 즐기는 팬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랜지노 상무의 고민과 전략은 현장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MGM 리조트 인터내셔널 산하의 벨라지오 측은 대회 기간 동안 호텔을 사실상 F1 홍보관으로 꾸며놨다. 호텔 내외부에 각종 F1 관련 시설을 설치했다.   우선 호텔 측은 ‘벨라지오 파운틴 클럽’으로 불리는 VIP 관람객 전용 공간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분수쇼로 라스베이거스의 랜드마크로 손꼽히는 벨라지오 호텔 정면 호수에 가건물까지 설치, 클럽 공간을 마련했다.   벨라지오 호텔 관계자는 “클럽은 3층 높이에 미식축구 경기장 3개 크기”라며 “호텔과 레이싱의 경험을 둘 다 제공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 랜드마크인 이곳에 클럽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호텔 외부에는 F1의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부대시설도 설치했다. F1을 모티브로 차량 시뮬레이터, 자동차 전시 공간, 게임 시설, 음료 및 주류 가판대 등이 자리했다. 특히 F1 차량 시뮬레이터는 좌석까지 실제 F1 차량과 똑같이 만들어 운전 시 발생하는 흔들림이나 충격까지 구현해냈다. 관람객에게 F1의 스피드가 가져다주는 스릴을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존 공간을 탈바꿈한 호텔들은 F1 그랑프리로 인한 경제 특수 효과까지 누린다.   랜지노 상무는 F1 대회의 경제적 파급력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라스베이거스시가 F1 대회 기간 동안 거둬들인 수익만 15억 달러”라며 “벨라지오 호텔의 경우 작년 최고 수익을 대회가 열렸던 주말에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3000개 넘는 벨라지오 호텔 객실이 대부분 예약이 끝난 상태”라고 덧붙였다.     요식업계 관계자들도 이구동성으로 F1의 경험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요리계의 거장이자 미슐랭 스타만 21개를 따낸 알랭 뒤카스 셰프는 이날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F1과 같은 대규모 스포츠 행사에서 수준 높은 음식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며 “성공적인 대회를 위해 요식업계도 F1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음식을 통해서도 경기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대회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뒤카스는 한국에서 F1이 개최된다면 한국으로 직접 가서 식음료 서비스를 제공해보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는 “한식과 한국 식재료에 관심 많다”며 “한국에 실력 있는 셰프들이 많은데 한국에서 F1이 개최돼 그들과 협업할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인인 아키라 백 셰프도 스포츠와 요리의 결합은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F1과 요리의 적절한 섞임이 필요하다”며 “셰프로서 F1 팬과 관광객들이 어떻게 하면 경기를 즐기고 만족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백 셰프는 “언제든지 한국에 갈 준비가 돼 있다”며 “한국에서 F1이 열리게 되면 모처럼 재미난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성공적인 F1 대회 개최를 위해서는 호텔, 요식업계의 전폭적인 지원 외에도 시정부의 탄탄한 행정력도 중요하다. 이번 대회는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거리를 무대로 한 스트리트 서킷에서 진행됐다. 라스베이거스시 중심지를 둘러싼 3.8마일(약 6.2km) 거리가 대회 기간 모두 통제됐다. 스트리트 서킷의 장점은 개최 도시의 풍경을 경기 내내 담을 수 있기 때문에 화려한 모습이 연출될 수 있지만, 도로 통제로 인한 불편함이 뒤따른다. 대회가 열리는 동안 차량들이 통행 가능한 도로가 줄어들어 교통 혼잡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셔틀 운전사 샘 윌리엄스는 “평소 3분이면 가는 거리가 지금은 15분이나 걸린다”고 말했다. 또 대중교통 서비스 부실로 평소 버스를 10분가량 타고 가야 할 거리마저 도보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불편함은 F1 팬과 관광객뿐만 아니라 거주민들까지 경험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대회를 유치하려면 시의 체계적인 교통 관리 능력 역시 요구된다.   관련기사베가스 F1 그랑프리를 가다…베가스 한복판 폭풍질주…할리우드 별들도 총출동 라스베이거스=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라스베가스 라스베이거스 2024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라스베가스 그랑프리 F1 경기 벨라지오 알랭 뒤카스 마크 월버그 김경준 포뮬러 원 유정복 시장 인천 을프강 퍽

2024-11-28

F1 그랑프리를 가다…베가스 한복판 폭풍질주…할리우드 별들도 총출동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밤거리로 셀러브리티들이 몰려들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자레드 레토, 폼 클레멘티에프, 마크 월버그 등 세계적인 할리우드 배우들부터 존 레전드, 루다크리스, 보이즈 투 맨, 아델 등 유명 가수들이 모습을 보였다. 고든 램지, 알랭 뒤카스 등 스타 셰프들은 물론이고 패리스 힐튼, 마이클·브루스 버퍼 형제, 세계 최다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미스터 비스트까지 총출동했다. 영화 속 한 장면을 방불케 할 정도다.   이들이 모인 건 시상식이나 음악 축제 때문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들의 경주인 포뮬러 원(F1) 경기를 보기 위해서다. 〈관계기사 2면〉   ‘2024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가 지난 20일부터 23일까지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서킷에서 개최됐다. F1은 1인승 오픈휠 차량 경주의 1부 리그를 뜻한다. 차량들은 ‘머신’으로 불리며 최고 시속 248마일(약 400km)로 최소 190마일 이상의 구간을 질주한다.     F1은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로 꼽힌다. 주최 측에 따르면 30만 명이 대회를 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집결했다.     한국에서도 F1에 대한 팬덤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4회에 걸쳐 ‘F1 코리아 그랑프리’가 열렸고, 최근에는 인천광역시가 대회 유치를 적극 추진 중이다. 넷플릭스와 쿠팡플레이 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도 F1 관련 콘텐츠를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엄청난 스피드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와 그랑프리 대회의 의미 등을 취재하기 위해 자동차 엔진 굉음이 가득한 현장으로 직접 찾아가 봤다.    라스베이거스=김경준 기자 [email protected]      ━   230마일 도심 질주, 아드레날린 굉음 솟구쳐    라스베이거스 호텔 사이로 굉음 속 미친 속도 레이싱 경찰·군까지 투입 도로 통제   거리에 유니폼 관광객 붐벼 한인 팬들도 곳곳 응원전 2,3위 추월전 탄성 쏟아져   지난 23일 오후 11시 화려한 조명이 수 놓인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거리. ‘부아앙’ 굉음이 잇따라 귓가를 때린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온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은 굉음이 울릴때마다 환호성을 지른다. 이들이 열광하는 건 포뮬러 1(이하 F1) 차량의 엔진음이다. F1 차량 20대가 무려 시속 230마일 넘는 속도로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호텔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대회의 피날레인 본선이 진행되고 있다. 이미 오전부터 스트립 거리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곳곳에 F1 팀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간다. 레드불 레이싱부터 페라리, 맥라렌, 메르세데스-AMG 등 팬들이 입고 있는 유명 F1 팀의 유니폼들은 대회 열기를 반영하고 있다.   F1 매장을 찾은 인파도 많았다. 플라밍고 호텔 1층에 있는 F1 팝업 스토어에서 페라리팀의 유니폼을 구경하던 윌리엄 커밍스는 “F1 경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에 온 건 아니지만, F1 팀 유니폼을 착용한 사람이 많이 보여 구경하러 왔다”며 “기념 삼아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자국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국기를 두른 팬들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기를 두르고 있는 두 여성은 프랑코 콜라핀토(윌리엄스 레이싱)을 응원하기 위해 국기를 챙겨왔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호텔 곳곳에도 행사장이 설치돼 F1 팬은 물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베네시안, 코스모폴리탄, 벨라지오 등은 호텔 내부에 F1 차량을 전시하고 있었다. F1 차량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있는가 하면, 처음 보는 차량이 신기해서 오랜 시간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기 준비는 이날 오후 4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도심 거리를 무대로 한 경기인만큼 도로 통제부터 진행됐다. 경찰은 물론 예비군까지 도로 통제에 투입됐다. 이스트 플라밍고 로드 선상에 위치한 홀스슈 호텔 앞에는 라스베이거스경찰국 차량과 네바다주 방위군 험비 여러 대가 길을 막았다.       패독(Paddock) 건물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패독은 F1 선수 및 팀 관계자, VIP 관람객 전용 공간으로 차량 정비, 선수 대기 및 휴식, VIP 관람 등이 이뤄지는 곳이다. 서킷이 F1 그랑프리의 본무대라면, 패독은 백스테이지다.     팀의 초청을 받았거나 패독 클럽 티켓을 구매한 경우는 VIP로 분류된다. VIP 티켓 한장의 가격은 무려 1만 달러가 넘는다. 일반 티켓도 싸지 않다. 평균 티켓 가격은 1617달러다. 이번 시즌 열린 24번의 그랑프리 대회 중 입장 가격이 가장 비싸다.     4시 30분쯤 페라리팀의 샤를 르클레르가 F1 선수 중 가장 먼저 패독에 도착했다. 경기를 앞두고 집중력을 위해 사람들을 피해 빠른 속도로 팀 클럽(전용 공간)을 향해 걸어갔다. 뒤이어 맥라렌 팀의 오스카 피아스트리 선수도 도착했다.       유명인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4시 50분쯤 마이클·브루스 버퍼 형제가 패독에 도착했다. 이들은 미국 최고의 링 아나운서다. 갑자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F1 경기를 진행하러 왔나”며 웅성댔다. 이날 두 형제는 경기 시작 전 선수 퍼레이드의 진행을 맡아 분위기를 예열시켰다. 뒤이어 영화 ‘화이트 칙스’로 유명한 배우 테리 크루즈와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가수 루다크리스 등도 도착했다.       오후 8시. 피트 레인에는 전운이 맴돌고 있다. 이번 시즌 챔피언인 막스 페르스타펀이 속한 레드불 레이싱팀 차고 앞에서 엔지니어들의 타이어 교체 연습을 하고 있다. 엔지니어 4명이 F1 차량을 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밀어오면 대기 중인 엔지니어들이 빠르게 타이어를 교체했다. 위잉거리며 소리를 내는 특수 전동 드라이버를 이용해 타이어 4개를 교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초 남짓이다.     바로 옆 애스턴 마틴팀도 같은 방법으로 타이어 교체 연습을 하고 있다. 반면, 페라리팀 차고에서는 엔지니어들이 몸풀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민첩함이 가장 중요하다. 엔지니어들까지 스트레칭과 팔벌려 높이뛰기를 하고 있다.       오후 9시 30분쯤 되자 피트 레인에 수많은 VIP 관람객이 몰려 들었다. 팀 차고와 차량, 그리고 선수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자레드 레토, 실베스터 스탤론, 폼 클레멘티에프 등 배우들과 고든 램지, 패리스 힐튼 등 유명인들이 코앞에서 지나간다. 피트 레인이 인파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선수들은 차량이 위치한 서킷으로 향했다. 메르세데스-AMG팀 소속 루이스 해밀턴, 조지 러셀과 페르스타펀의 얼굴에는 웃음이라고 찾아볼 수 없다.     오후 10시. F1 차들이 굉음과 함께 스키드마크를 내며 출발했다. 이어 밤하늘에서는 헬리콥터 여러 대가 생중계를 위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굉음이 도시에 울려 퍼지자 관중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관람객도 덩달아 환호했다. F1 차량이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랜드스탠드 좌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한인 박모씨는 “워싱턴 DC에서 라스베이거스로 여행 온 김에 F1을 보러 왔다”며 “엔진 소리와 빠른 스피드로 아드레날린이 마구 치솟는다”고 말했다.     경기 초반, 르클레르와 페르스타펀이 2, 3위를 다투며 서로 추월전을 펼치자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10번째 순서로 출발한 루이스 해밀턴 선수가 천천히 3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모습에 사람들이 경이롭다 듯이 쳐다봤다. 또 38번째 랩에서 세르히오 페레즈(레드불 레이싱)가 한 코너에서 두 선수를 한 번에 추월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경기가 시작되자 스트립 거리를 거닐던 인파의 움직임 속도가 느려졌다. F1 측은 서킷과 거리 곳곳에 가림막을 설치해 길거리에서 경기가 보이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이 까치발을 들고 가림막 사이로 경기를 보는가 하면, F1 차량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차량이 자신의 앞을 지나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오후 11시 22분. 승자가 결정 났다. 러셀이 1시간 22분 05.969초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어 같은 팀의 해밀턴, 페라리팀의 카를로스 사인츠가 2, 3위로 들어왔다. 메르세데스-AMG팀 차고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번 그랑프리 1, 2위를 배출했다. 엔지니어, 팀 관계자 등 서로 껴안으며 기쁨을 나눴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레드불 레이싱팀 차고 또한 축제 분위기였다. 되레 메르세데스-AMG팀 관계자들보다 더 신나 보였다. 그 이유는 바로 페르스타펀이 이번 시즌 챔피언을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 그랑프리 5위를 기록한 페르스타펀이지만, 시즌 2위인 랜도 노리스(맥라렌)와 우승 포인트 격차를 넓히면서 2024 F1 시즌 챔피언이 되었다. 페르스타펀은 차고로 돌아와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헬무트 마르코 레드불 레이싱팀 상임고문을 꽉 안았다.     이번 그랑프리 우승자와 시즌 챔피언이 결정되자, 패독의 팬들도 환호하며 이번 그랑프리를 끝까지 축제처럼 즐겼다. 패독에서 경기를 지켜본 한인 마이클 홍씨는 “F1 때문에 오렌지카운티에서 왔다”며 “이렇게 가까이서 경기를 즐길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14세 때부터 40년 넘게 F1 팬을 자처했다. 홍씨는 페라리팀 팬이다. 페라리팀 재킷까지 입고 경기장을 찾았다. 그는 “르클레르도 순위권에 들 수 있었는데 사인츠만 포디움에 올라 아쉽다”며 “다음에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랑프리는 단순한 모터스포츠가 아니다. 굉음 속에 수십만 명의 아드레날린이 응집되는 축제다.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포뮬러 원 F1 2024 F1 라스베이거스 그랑프리 조지 러셀 루이스 해밀턴 실베스터 스탤론 존 레전드 패리스 힐튼 라스베이거스 F1 경기 라스베가스 고든 램지 막스 베르스타펜 김경준

2024-11-27

LACMA ‘위작 전시’ 사실상 전면 부정

  LA카운티미술관(이하 LACMA) 측이 최근 전시된 한국 유명작가들의 작품이 위작일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사실상 번복했다.    LACMA 측은 위작 의혹 작품들에 대한 간행물 제작 강행 의사까지 밝혀 예술계에 다시 파문이 일 전망이다.   LACMA 측은 ‘한국의 보물들·Korean Treasures’ 전시회의 위작 논란과 관련한 본지의 이메일 질의에 나흘만인 지난 6일 답신을 보내왔다.   먼저 LACMA 측은 “현재까지 연구를 통해 얻은 과학적 요소들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고 (기증자인 체스터 장의 작품들에 대한) 추가 연구를 위해 계속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해당 작품들에 대한 미술사적 중요성과 맥락 등은 추후 온라인과 인쇄물 등을 통해 ‘LACMA 간행물(LACMA publication)’에 게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LACMA 측이 지난달 26일 간담회를 열어 한국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이중섭, 박수근 그림 4점을 포함, 조선 시대 회화, 도자 등에 대해 위작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완전히 상반된 입장이다. 이날 간담회를 마친 뒤 마이클 고반 LACMA 관장은 “계획된 전시 도록 발행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본지 7월1일자 A-1면〉   관련기사 “이중섭 그림, 타일에 베낀 위작”…LA미술관 전시 초유의 사건 [사설] LACMA 위작 논란 명성에 타격 LA카운티미술관 LACMA 위작 전시…문제 제기에 ‘묵묵부답’ LACMA 제시카 윤 홍보 디렉터는 “이 전시회에서는 ‘도록(catalogue)’ 제작을 계획한 적조차 없다”고 까지 주장했다.   즉, LACMA 관장은 도록 발행을 계획 했었다고 언급했으나, 윤 디렉터는 애초에 계획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LACMA 측은 6일 본지에 보내온 답변에서 ▶기증자인 체스터 장 등이 지난 2015년과 2017년 예술자료분석센터(CAMA)에 의뢰한 2건의 과학적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작품은 이중섭, 박수근의 화풍과 일치하고 ▶작품에 쓰인 재료의 제작 시기는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동일한 기증자가 기부한 20세기 중반 한국 유화 작품을 조사했던 LACMA 회화보존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해당 작품의 마모, 손상  패턴을 봤을 때 1950~60년대 작품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특징이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LACMA 측은 이중섭, 박수근 그림 외에 위작 의혹이 제기된 도자들에 대해서도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LACMA 측은 “일부 작품은 지난 2007년 영국의 옥스퍼드 인증을 통해  조선시대 18~19세기 작품임이 명백히 입증됐다”며 “남은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열발광분석법을 통해 모든 도자를 검증한 뒤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위작 가능성을 인정했던 간담회 이후 일단락 분위기로 접어들던 가짜 그림 전시 논란은 LACMA 측의 새로운 입장 발표로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만약 LACMA 측이 향후 자체 조사 연구 등을 통해 간행물 발행을 강행한다면 작품의 진위 여부 공방은 다시 한번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지는 LACMA 측 성명 내용과 관련해 추가 인터뷰를 공식 요청했으나 8일 오후 6시 현재까지 답변을 받지 못했다. 장열·장수아·김경준 기자LA카운티미술관 LACMA 위작 논란 한국의 보물들 이중섭 박수근 LA 로스앤젤레스 미주중앙일보 장열 장수아 김경준 미술계 전시회

2024-07-08

천사의 도시 LA, MZ 세대 살기 고단하다

LA를 누가 ‘천사의 도시’라 했나. 현실을 보면 천사라는 애칭이 무색하다.   LA타임스는 젊은 층이 모이는 도시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LA 카운티가 고령화되고 있다고 지난 2일 보도했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럴만하다. 높은 임대료, 치솟는 주택 가격, 고물가로 인한 생활비 문제 등은 젊은 층에 좌절감을 안긴다. 이는 출산율 감소, 교외 지역 이주 등의 문제로 이어지며 젊은 층이 LA를 떠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본지 김경준 기자는 미시간 대학을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다. 지난 1월 LA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다. 지갑을 여는 게 무섭다. 젊은 층이 높은 생활비 때문에 LA를 외면한다는 뉴스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김 기자의 빠듯한 한 달 가계부를 1인칭 시점을 통해 공개한다. 〈그래픽 참조〉     USC 도웰 마이어스 교수(인구 정책학)는 LA의 고령화 현상이 “미래에는 매우 치명적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20대는 가주에서 가장 중요한 세대”라며 “그들이 너무 부족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기자도 20대다. 중요한 세대면 뭐하나. 좋아하는 파스트라미 샌드위치 하나 사 먹는 것도 LA에선 어려운 일이다.   LA한인타운 인근의 유명 델리 숍인 랭거스(Langer's)에 갔다. 샌드위치 하나가 세전 기준 24달러다. 미시간 대학 캠퍼스에서 사 먹던 샌드위치가 그립다.   한국에서 아버지가 전화로 묻는다.   “LA사는 건 어때. 살만해?”   농담조이지만 현실을 담아 답했다.   “아메리칸 드림은 커녕 '아메리칸 악몽'이에요.”     매번 가계부를 적는다. 헛웃음이 나온다. 아파트 임대료는 가장 큰 지출 항목이다. 매월 첫날이 되면 '1477달러'가 은행 계좌에서 어김없이 빠져나간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4명이 함께 살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다. 다시 말해 5900달러가 넘는 한 달 임대료를 룸메이트 4명이 나누어 내는 셈이다.     한국의 친구들은 LA지역 임대료 현실에 다들 놀란다. 젊은 층이 가장 많이 몰리는 한국 강남역에서 도보로 30초 거리의 오피스텔 월세도 이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는 가정도 꾸려야 할 텐데 종잣돈을 모으기 힘든 상황에서 집을 산다는 건 엄두도 못 낼 것 같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맛집 찾아다니는 게 취미다. 가계부에서 엥겔지수(총 소비 중 식비 비율)가 높았던 이유다.   LA로 오고 나서는 엥겔지수가 현저히 낮아지고 있다. 맛집 찾아다니다간 되레 “굶어 죽겠다”라는 위기감이 생겼다. 비싼 음식값에 팁까지, 게다가 대리 주차 비용까지 더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최근 동료들과 한인타운 한 치킨집에 갔다. 치킨 두 마리에 68달러다. 대리 주차 때문에 5달러를 더 냈다. 팁까지 합하면 치킨을 먹는데 '100달러' 지폐 한장이 우습게 날아간다.   지난 한 달 외식 비용을 합산해봤다. 총 558.96달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전달과 비교했을 때 계속 줄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은 너무나 중요하고 고마운 제도다. 단, 요즘은 '도둑놈들' 같다. 매달 자동차 보험으로만 300달러를 지출한다. 회사와 거주지가 모두 한인타운이다. 통근 거리도 짧은데 보험료 산정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요즘은 돈이 '물' 같다. 집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모든 게 다 돈이다. 차가 없으면 발이 묶이기 때문에 젊음을 마음껏 누리기 힘들다. 그만큼 주유 비용도 부담이다. 한번 주유할 때마다 '60달러' 가량 소요된다.   센서스국에 따르면 LA카운티의 중간 연령은 현재 37.4세다. 지난 10년(2012~2022년) 사이 2.6세가 더 증가했다.     연령대로 나눠보면 20대는 이 기간에 무려 10.2% 감소했다. 10세 이하(-20.2%), 10~19세(-14.1%) 등 젊은 세대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친구들과 통화하면 미국 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팜 트리가 가득한 말리부 해변 도로를 자주 드라이브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산이다. 한번 차를 운행할 때마다 개스비 나가는 걸 생각하면 해변가 드라이브는 꿈도 꿀 수 없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어쩔 수 없이 '집돌이'를 자처하게 된다.   문화생활도 사치다. LA에 온 이후 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단 두 번뿐이다. 영화 한 편도 마음 편히 즐기는 게 쉽지 않다. 머릿속으로 계산부터 한다. CGV는 매주 화요일 영화 티켓(18달러)을 반값에 판매하고 있다. 애처롭겠지만 LA에서 본 영화 두 편은 모두 '화요일'에 봤다.   곧 스포츠 빅 이벤트도 있다. 축구를 사랑하는 20대다. 오는 27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의 친선 경기가 LA에서 열린다. 물론 그림의 떡이다. LA에 살면 뭐하나. 영화 한 편도 반값 티켓인 '화요일'에만 보는 처지에 100달러가 넘는 축구 티켓은 사치다.   그들이 LA를 떠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한마디로 살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이 '꿈'을 꿀 수 없다면, LA는 곧 악몽의 도시로 전락할 수 있다. 천사의 도시에서 진정 살아보고 싶다. 김경준 기자가계부 청년 발렛주차 비용 외식 비용 자동차 보험료 LA 로스앤젤레스 미주중앙일보 김경준 천사의 도시 MZ세대

2024-07-04

"MB 뻔뻔하고 후안무치"…'BBK' 김경준, 페이스북서

'BBK 사건'의 김경준(51)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검찰 소환과 관련해 자신의 생각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밝혔다. 김경준은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가 책에 썼던 내용들이 기억난다"면서 3가지 의견을 썼다. 그는 "2007년 MB(이명박 전 대통령)는 김경준에게 속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했다"면서 "11년 후 지금도 동일한 밑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주장을 되풀이하니…그의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본성(Audaciously Shameless Nature)에 참 할 말이 없다"고 했다. MB가 김경준에게 속았다고 한 사건은 김경준이 투자자문사인 BBK의 자금으로 2001년 코스닥 상장사인 광은창투를 인수한 뒤 주가조작을 통해 319억여원을 빼돌린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횡령사건'을 말한다. 김경준은 "BBK의 실소유주는 MB"라고 했지만 이 전 대통령은 "김경준에게 속아서 투자했다"고 주장했다. 김경준은 지난해 본지와 8차례 연재 인터뷰에서 MB와의 만남부터 주가조작까지 그간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공개한 바 있다. 김경준은 페이스북에서 "2000년 MB는 내게 언제나 책임을 뒤집어 씌울 사람을 만들라고 했다. 난 거절했고, 내가 뒤집어 썼다"면서 "이제보면 MB는 책임을 뒤집어 씌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든 것 같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난 MB, 정부, 삼성 등과 정말 불가능한 싸움을 감옥에서 돈 없이 한 것이다. 너무 힘들었다"고 썼다. 그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기 이틀 전인 MB가 소환되던 날 본지 기자와 메신저를 통해서는 한국에 대해 '경멸만 남았다(I have only contempt)'고 가시가 돋친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2007년 내가 MB의 범죄에 대해 증언할 때 한국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가서 입을 다물고 MB가 대통령이 됐다고 기뻐했다"면서 "그랬던 한국 사람들은 이제와서 MB를 감옥에 보내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나와 내 가족들에 대해 저주를 퍼붓고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8-03-16

"BBK를 버리자" 둘만의 계약서를 썼다

MB "BBK와 ebk 내가 세워" 인터뷰 때문에 금감원 조사 두 회사 자회사로 드러나 금융법위반 허가 취소 위기 BBK 내가 떠안고 빠지기로 밤새 계약서써서 MB와 합의 '위조 자백'은 검찰 협박때문 MB가 단 2개월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참았더라면 'BBK 사건' 자체는 아마도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2000년 10월13일에 금융감독원(금감원)에 신청했던 e뱅크증권중개(ebk)의 예비허가가 나왔다. 말했다시피 ebk는 증권거래회사로 MB와 내가 구상한 '인터넷종합금융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자회사였다. 지주회사이자 소프트웨어 회사인 LKe뱅크 아래 BBK(투자자문업), 은행(하나은행과 투자 협약)이 갖춰졌고, 증권거래업 허가까지 받으면 비로소 전체 사업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투자자문과 증권업을 병행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ebk와 BBK는 같은 자회사였지만, 서류 상엔 주주 구조를 모호하게 했다. 물론 ebk 허가를 신청할 때도 금감원에 BBK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예비허가를 받았으니 예정대로라면 2~3개월 뒤인 2000년 연말쯤 ebk의 정식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비허가가 나오자마자 MB는 여러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앞서 두달전인 8월 광복절 특사에서 MB는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위반에 대한 유죄판결을 사면받았던 터였다. 정치적 족쇄가 풀렸고, 우리 사업도 순탄했으니 대중 앞에서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듯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한 내용들이다. '종합금융회사'를 설립했다고 밝힌 것이다. ebk 뿐만 아니라 BBK와 LKe도 자기가 설립했다고 공식 석상에서 스스럼없이 말하고 다녔다. (김경준의 이 증언은 당시 언론 보도로도 확인된다. 일명 'BBK 동영상'도 그중 하나다. MB는 ebk 예비허가가 나온지 나흘만인 2000년 10월17일 광운대 최고경영자 과정 특강에서 "올해 1월에 BBK를 내가 설립했고, 증권회사(ebk)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증권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금감원에 신청서를 냈고, 6개월 만에 허가가 나왔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MB는 금감원이 '구멍가게만도 못하다'는 말까지 했다. 금감원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조사를 시작했다. 금감원 직원들이 우리 사무실로 1주일간 매일 출근해 자금 흐름 등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겉으로는 정식 인가를 위한 절차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주주 관계와 자금 흐름을 확인하려는 감사 성격이었다. 투자자들에게도 이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하나은행과 삼성생명도 알게 됐다. 난 MB에게 항의했다. MB는 "걱정하지 말라"며 "금감원장을 직접 만나 해결하겠다"고 날 안심시켰다. 그래도 못 미더워한 내게 MB의 집사이자 부회장이었던 김백준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명박 회장님을 못 믿느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누가봐도 LKe, ebk, BBK는 같은 회사였다. 사무실도 같이 쓰고 있었고, 세 회사 사이에 자금이 수시로 왔다갔다 했다. 심지어 사무용품까지 같은 계좌로 구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ebk 허가가 취소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던 어느 날이었다. 2001년 4월쯤으로 기억한다. MB의 집사 김백준이 "회장님이 부르니 가자"고 했다. MB와 김백준, 나, 그리고 변호사, 네 사람이 마주앉았다. 그날 8시간 넘는 긴 회의에서 얻은 결론은 '무조건 ebk를 살리고 보자'는 것이었다. 김백준은 'ebk와 BBK가 관련 없는 것으로 정리하면 금감원에서 ebk 허가를 주는 것'으로 조율이 됐다고 했다. BBK를 버려야 했다. 책임은 내가 지기로 했다. BBK는 나 혼자 소유한 회사며, ebk와 LKe의 주주에서도 내 이름은 빼기로 합의했다. 당시 내 생각은 단순했다. 내가 MB를 지켜주면 MB가 나도 보호해줄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MB의 ebk를 살려야 나도 살 수 있었다. MB는 날 걱정했다. "내가 김 사장 부모님들까지 만나 안심시켰는데 이렇게 해도 되겠어?" 회의를 끝내고 생각이 많았다. 밤새 사무실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내 자신을 보호할 뭔가를 마련해놓아야 했다. BBK가 MB의 회사라는 지분 관계를 분명히 한 계약서를 작성했다. MB와 나 둘만 아는 이른바 '이면 계약서'다. 계약서는 당시 업계에서 주식 매매시 흔히 쓰는 계약서 형식을 사용했다. 아침 7시쯤 출근한 MB의 방을 찾아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MB는 순순히 도장을 찍자고 했다. 회사 금고에 보관했던 MB의 인감도장을 가져와 MB 앞에서 찍고, 내 도장도 찍었다. 계약 날짜는 1년 전인 2000년 2월쯤으로 정했다. LKe와 BBK만 있던 시점이다. 현재 날짜로 쓰면 ebk와 옵셔널벤처스 주식 매입 등 당시 진행중인 사업 전반에 걸쳐 금감원에 사유를 설명하기가 더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측은 이면계약서의 도장이 가짜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MB의 서명이 없는 것도 위조의 증거라고 했다. 밝혀두지만, MB의 도장은 2개였다. 회사에 보관한 것과 본인 개인 소유 도장이다. 또, 계약시 MB가 서명한 것은 하나은행의 5억 투자 계약서밖에 없다. 하나은행이 굳이 도장과 서명을 함께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외 다른 계약시 통상 MB는 회사에 보관된 도장만 찍고 서명은 하지 않았다. LKe 인감관리대장에 찍힌 도장들이 이면계약서 도장과 같다는 것이 그 증거다. 나 역시 이면계약서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LA연방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변호사가 와서 여러 가지 서류들을 찾았다면서 내민 것 중 하나가 이면계약서였다. 난 이면계약서가 한국에서의 내 재판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연방구치소에서 한국에 인도되던 2007년 11월16일 국제우편으로 한국의 박수정 변호사에게 보냈다. 당시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면계약서 원본 종이 재질과 글꼴, 도장 사용 경위를 종합한 결과 계약 날짜(2000년)보다 1~2년 뒤 작성됐다"면서 위조라고 했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는 거꾸로 이면계약서가 사실임을 뜻한다. 2001년에 작성했으니 말이다. 사실 검찰의 발표는 내가 이면계약서 위조를 시인했다는 자백에 근거한다. 당시 난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MB는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이었다. 칼은 그가 쥐고 있었다. 또, 검찰은 미국에 있는 누나와 아내를 상대로 범죄인도 청구하겠다고 협박하던 상황이었다. 내 거짓 자백의 거래 조건은 더이상 누나와 아내를 괴롭히지 않는 것이었다. (김경준은 2008년 6월26일`허위사실유포 및 한글 이면계약서 위조' 사건에 대한 첫 공판에서 위조를 인정하며 "이명박 대통령께 끼친 피해에 대해 한없이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울먹인 바 있다.) ebk는 결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 2001년 4월8일 사업을 자진 철회했다. MB와 나와의 관계는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남은 건 '옵셔널벤처스'의 처리 문제였다. BBK 사건수첩 이면계약서 2007년 11월20일 김경준씨의 아내 이보라씨가 LA윌셔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보유한 BBK주식 61만 주(100%)를 김경준씨에게 49억9999만5000원에 매도한다는 내용이다. 한글로 된 계약서는 '주식매매 계약서'로, 계약 일자는 2000년 2월21일로 돼 있다. 매도인은 '이명박', 매수인은 '㈜LKe뱅크 대표이사 김경준'으로 되어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개인이고, 김경준씨는 LKe뱅크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으로 LKe뱅크는 BBK의 지주회사가 되는 셈이다. 또 BBK의 실소유주가 이 전 대통령이라는 증거가 된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6-30

"유영하가 30만 달러 줄테니 입국하라했다"

기획입국 제안은 박근혜측 유영하, 연방구치소로 면회 민사소송비 30만달러 약속 조작된 편지에 두려움 느껴 "거짓도 사실로 믿는 나라" 가짜로 드러나도 처벌 없어 면죄부준 검사들 조사해야 최근 김경준이 소셜네트워크 트위터를 통해 '기획입국설'과 '가짜편지' 등 BBK 사건과 관련된 내막들을 잇따라 폭로하고 있다. 그는 21일 "내게 기획입국을 실제 제안한 자는 박근혜의 유영하 변호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BBK 소유권을 자백한 'BBK 동영상'을 무마시키기 위해 MB측이 조작한 것이 '가짜 편지'이고, 그러므로 대선이 조작되었다. 검찰은 조작을 확인하고도 아무도 처벌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당일 더불어민주당은 이 글에 대해 즉시 논평을 내고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며 수사를 촉구하고 나서 파장이 예상된다. 본지는 기획입국설과 가짜 편지와 관련해 그가 트위터에 글을 올리기 전 두 차례 인터뷰했다. 주제를 가짜 편지로 정한 건 김경준 본인이다.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가짜 편지 사건을 정리한다면. "대한민국 5000만 국민 전체가 우롱당한 사건이다. 편지 하나로 대선 결과가 조작돼 MB를 당선시킨 사건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화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감옥에 갇혀있던 나만 실체를 파헤쳤고, 다들 관심조차 없었다." -가짜 편지의 존재를 언제 알았나. "당시 구속된 상태에서 들었다. 홍준표가 기자회견을 한 다음날 변호사가 접견 와서 말해줬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화가 났다기보다는 두려웠다. 한국에서는 조작만 잘하면 뭐든지 사실이 되는구나 싶었다. 가짜 편지 공개 후 날 찾아온 검사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니들 다 잡았다' 그런 표정이었다. 내가 죽는 건 괜찮은데 누나의 송환과 아내까지 거론하니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싶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이었다." -가짜 편지 작성자로 알려졌던 신경화와는 어떻게 알게 됐나. "내가 LA연방구치소에서 수감된 지 2년 뒤(2006년)에 들어왔다. 내가 그 사람과 친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신경화는 당시 미주 중앙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구치소에 들어온 지 몇 개월 지나 신문에 난 내 기사를 들고 오더니 '이게 너냐'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 9년을 살았다면서도 영어를 전혀 못했다. 내게 여러 가지를 묻고 도와달라고 해서 오히려 귀찮은 존재였다." -기획입국을 실제 제안한 사람이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측 유영하 변호사라고 했다. "2007년 3~4월쯤 LA연방구치소로 심원섭 변호사와 함께 찾아왔다. 유영하가 한 말의 요지는 'BBK와 MB와 관련된 증거를 내게 넘기고 빨리 입국해서 MB에 대해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 대담 때 증언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유영하는 한 방송에서 김경준을 면회한 사실과 한국에 오라고 말한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김경준 본인이 억울하다고 하니 와서 밝히라고 했을 뿐이다. 자기가 억울해서 나와서 밝힌다고 그러면 밝히라고 하지 그럼 밝히지 말라고 하나?"라고 말했다.) -입국 조건을 제시했나. "3가지였다. 당시 MB 측과 다스가 날 상대로 미국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한 상황이었다. 변호사 비용이 없어서 내가 한국에 가게 되면 꼼짝없이 소송에서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영하에게 변호사 수임료로 30만 달러를 도와주면 가겠다고 했다. 또 다른 조건은 박근혜 당선시 나의 사면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유영하가 한국에서의 내 형사사건을 무료로 수임해주는 것이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았나. "유영하가 한국에 가더니 30만 달러를 주기 어렵다고 했다. 나중에 혹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 돈이 없으면 난 한국에 갈 수 없었고, 그래서 없던 일이 됐다." -편지는 가짜로 드러났는데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검찰은 내가 고소한 6명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았다. 오히려 고소인인 나만 수사했다. 검찰은 당시 내 접견기록물을 다 가지고 갔다. 누군가 내게 접근해 가짜 편지를 수사하도록 사주했다고 추측했다. 어떻게 수사를 의뢰한 사람만 조사하나. 가짜편지를 무마한 검사들을 수사해야 한다. 특히 날 수사한 김기동 검사와 그 라인인 박철우 등이 포함된 당시 특수 1부 조직을 집중 조사해야 한다." -검찰이 왜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시끄러워질게 뻔했다. 신명에게 가짜편지를 쓰라고 지시한 양승덕을 기소했다고 치자. 양승덕이 윗선을 불기 시작하면 관련자들이 줄줄이 드러나게 된다. 조용히 덮고 싶었을 것이다." -가짜편지의 최종 배후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MB의 손위 동서인 신기옥과 MB의 집사 김백준이다. 신기옥은 가짜 편지 사건에 처음부터 개입했다. 그 증거는 양승덕이 편지를 건넨 MB 상임특보인 김병진의 법정 진술에도 나와있다." (김경준이 본지에 공개한 진술서에서 김병진은 "BBK 동영상이 공개돼 대선 여론이 이명박 후보에게 매우 안 좋았고, 신기옥이 다급하게 신명의 방송 인터뷰를 부탁해왔다"고 증언했다.) BBK 사건수첩 가짜편지 2007년 12월 17대 대선을 앞두고 김경준씨가 이명박(MB)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여권과 교감해 국내에 입국했다는 '기획입국설'의 근거가 된 자료다. 편지 폭로자는 당시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이다. 대선을 엿새 앞둔 12월13일 그는 "지난 3월부터 10월까지 기획입국이 진행됐다"며 "입증할 편지와 각서가 있다"고 주장했다. 편지 작성자는 김씨와 1년 가까이 LA 연방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함께 한 신경화씨다. 편지에는 '자네(김경준)가 큰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나라당은 '큰집'을 청와대(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로 해석하며 김씨가 집권 여당에게서 모종의 대가를 약속받고 입국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MB는 'BBK 동영상'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BBK의 실소유주라고 집중 공격을 받던 때였다. 수세에 몰렸던 MB 측과 한나라당은 가짜편지를 공개하면서 반격에 나서 MB의 당선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3년 뒤인 2011년 편지는 날조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경화씨의 동생 신명씨의 폭로에 의해서다. 그는 "편지는 MB 가족과 측근의 부탁으로 내가 날조해서 쓴 것"이라고 했다.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형에게 도움을 주려고 편지를 꾸며 썼다는 것이다. 이에 김경준은 가짜 편지 작성자인 신명 형제와 편지를 폭로한 홍준표 위원장 등 6명을 명예훼손과 사문서 위조 등의 이유로 고소했고,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은 조사 결과 "신명씨가 양부처럼 따르던 양승덕 전 경희대 관광대학원 행정실장(현 행정부처장)의 지시를 받아 대필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양씨는 가짜편지를 MB 대선캠프 상임특보였던 김병진에게 줬고, 은진수 BBK법률지원팀장을 경유해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에게까지 전달됐다. 그러나 검찰은 "(가짜편지의) 배후는 없다"고 결론냈다. 양씨가 대선에서 공을 세워 교육단체 감사 등 직책을 얻을 생각으로 혼자 모든 것을 꾸며냈다는 것이다. 편지는 가짜로 드러났지만 검찰은 신씨 형제 등 김씨가 고소한 6명 전원에 대해 무혐의 처분하거나 각하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6-22

하나은행 문건 "BBK는 MB의 회사"

BBK 지주사 LKe뱅크 설립 자본금 30억서 60억 증자 하나은행 투자 거부서 선회 5억 받고 5만주.4% 양도 MB 별장서 직원 단합대회도 "김 사장, 우리 자본금이 얼마지?" 2000년 2월 BBK의 지주회사인 LKe뱅크를 법인으로 등록한 직후 즈음이다. MB(이명박 전 대통령)는 뜬금없이 LKe의 자본금이 얼마인지 궁금해 했다. 당시 다스의 1차 송금액 50억 중 e캐피탈에서 빌린 30억을 갚고 남은 돈과 여기저기 투자금을 합해 30억쯤 됐다. 다스는 MB의 형 이상은이 회장으로 있는 자동차부품납품회사다. MB는 내게 다스가 자기 회사라고 했다. "자본금이 그것(30억)밖에 안돼?" MB는 LKe뱅크 자본금이 무조건 60억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내게 언론들은 왜 자본금을 60억으로 결정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LKe뱅크는 금융회사가 아니라 금감원의 감시를 피할 목적으로 만든 소프트웨어회사기 때문에 많은 자본금이 필요 없었다. 자본금이 60억으로 2배 뛴 이유는 단순하다. MB가 당시 하나은행 김승유 행장에게 LKe에 투자를 권유하면서 자본금이 60억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미 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어 그 금액을 무조건 맞춰야 했다. MB는 추가로 필요하게 된 자본금 30억을 마련하기 위해 나에게 다스로부터 받은 자금 등이 섞여 있는 회사 운영금을 이용해 Lke 자본 총액을 60억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자본금을 60억으로 늘린 뒤 하나은행으로부터 5억을 투자받았다. 하나은행의 투자는 사업 파트너로서의 참여였다. 이미 밝힌 대로 MB와 내가 합의한 사업 계획은 지주회사(LKe) 아래 투자자문회사(BBK), 증권회사(ebk증권), 보험회사, 은행의 4개 자회사를 둔 인터넷종합금융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직접 은행을 세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파트너 은행이 필요했고, MB와 친분이 있는 김승유씨가 행장으로 있던 하나은행이 적격이었던 것이다. 하나은행의 투자는 MB의 전화 한 통화로 이뤄졌다. 투자 유치 한 달 전인 5월 나는 'MB의 집사' 김백준과 하나은행의 인터넷 관련 팀을 찾아가 '인터넷종합금융회사' 개요를 설명했다. 당연히 투자할 거라 예상했지만, 하나은행 측에서는 시간만 끌다가 '투자 거부 통지'를 보내왔다.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는 내 설명을 들은 MB는 화를 내면서 내 앞에서 바로 김승유 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MB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김 행장에게 따졌다. 며칠 뒤 하나은행 측 투자 실무 부서가 인터넷 팀에서 행장 직속 비서실로 바뀌었고, 곧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다. 5억을 투자받고 주당 1만 원씩 5만 주를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지분으로는 4.0%다. MB가 BBK의 실소유주라는 증거는 당시 하나은행이 작성한 내부문건에도 명시되어 있다. LKe뱅크의 지분을 나와 MB가 반반씩 갖고 있고, BBK가 LKe뱅크의 자회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2007년 당시 한나라당은 "하나은행에 투자 설명을 한 사람은 바로 김경준이다. 하나은행은 김경준의 설명에 근거해 LKe뱅크를 이해했을 것이고, 하나은행의 문건 작성자가 이를 오인해 품의서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LKe뱅크를 설립한 뒤 MB에게 새 명함이 생겼다. MB의 첫 명함은 BBK 회장이었지만 LKe뱅크, e뱅크증권주식회사 등 2개 회사명이 추가됐고 직함은 '회장/대표이사'였다. 이 명함도 MB가 BBK의 실소유주임을 입증하는 증거로 자주 거론됐다. 하나은행 투자로 LKe뱅크 지주회사 아래 BBK와 은행 2개 부문 설립이 완료됐다. 이때 즈음 MB가 직원 단합대회를 하자고 했다. 경기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세 버스로 직원 20여 명과 함께 별장으로 갔다. 도착 15분 전쯤인가 그가 버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별장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돈이 많아 이 별장을 산 게 아니라 현대건설에서 일할 때 회사를 위해 헌신하느라 쉴 시간이 없는 날 위해 회사가 휴식 공간으로 마련해줬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난 '자기 별장을 가면서 굳이 직원들한테 이런 설명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고 의아해했던 터라 그때 상황을 잘 기억하고 있다. 은행을 파트너로 뒀으니 이제 나머지 자회사들의 설립도 서둘러야 했다. 하나은행 투자유치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e뱅크증권중개(ebk) 인허가를 금감원에 신청했다. ebk는 우리에게 고객계좌를 열 수 있는 기능을 마련해주는 중요한 자회사였다. BBK만으로는 투자 자문만 할 수 있고, 직접 고객의 자금을 받을 수 있는 계좌를 만들 수 없었다. 금감원으로부터 ebk의 예비 인가를 받으려면 BBK와의 연관성을 철저하게 지워야만 했다. 당시에 투자자문과 증권업을 병행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BBK의 주주 구조를 모호하게 했다. 신청 4개월만인 10월에 고대하던 ebk의 예비 허가를 승인받았다. 예비 허가만 받으면 정식 허가를 받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업은 차질없이 착착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돌발변수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예비 인가를 받고 사업 계획이 탄력을 얻자 MB는 공식석상에서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쏟아냈다. ebk가 끝내 정식 허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때까지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MB의 입 때문이다.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BBK 사건수첩 ▶정봉주 전 의원 1960년 서울 출생이다. 17대 대선 당시 'BBK 저격수'로 통했다. 한국외대 재학시절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회장을 맡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83년 시위 주동 혐의로 구속돼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대통합민주신당의 BBK진상조사단장을 맡아 MB의 BBK 관련 의혹을 앞장서 알리다 '허위 사실 유표'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0년간 피선거권도 박탈당했다. 2012년 12월25일 만기출소했다. 사진은 정 전 의원이 충남 홍성교도소에서 출소한 직후 두부를 먹고 있는 장면이다.SBS 라디오 '정봉주의 정치쇼'를 진행하는 등 정치평론가로 활동중이다. ▶하나은행 내부 문건 2007년 10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봉주 의원이 하나은행으로부터 받은 'LKe뱅크 출자 및 agreement 체결의 건'을 말한다. LKe가 '700억 원 규모의 헤지펀드를 운용하는 BBK 투자자문(주)를 100% 소유하고 있으며…'라고 적혀 있다. 또, LKe의 주요 주주가 '김경준 50%, 이명박 50%'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 정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문건을 공개하면서 "BBK 주식은 단 한 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던 MB가 BBK의 실소유주임을 입증하는 공식 문서"라고 주장했다. 문서에는 담당 직원은 물론 준법감시팀과 협의를 마쳤다는 서명과 감사의 서명, 은행장 서명까지 적혀있다. 정리=정구현 기자

2017-06-15

"자금 옮길 준비하라"…경주로 향했다

BBK 정관과 다스 송금 'BBK 시계'는 2000년이 되면서 더 빨라졌다. MB가 약속대로 '공식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그는 서울 중구 삼성생명빌딩 17층의 BBK 사무실로 출근했다. MB의 방은 이미 입주 당시부터 마련되어 있었다. 이미 밝힌 대로 모든 사업은 처음부터 MB와의 합의 아래 기획됐기 때문이다. 'MB의 집사' 김백준은 그 옆방을 썼다. MB가 출근하면서 가장 먼저 챙긴 것 중 하나가 BBK 정관이다. 그는 정관을 통해 BBK를 통제했다. 당시 BBK 정관은 이미 한차례 개정했다. 99년 4월 BBK의 법인 등록시 만든 정관을 11월에 투자자문업 인가 신청을 하면서 금감원 규정에 맞게 바꿔야 했다. 1차 개정 정관상 BBK 의결권은 100% 내게 있었다. MB는 그 정관에 본인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는 내용을 넣길 원했다. 그래서 'BBK와 관련된 모든 의사 결정은 김경준과 이명박이 합의해야 가능하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그게 언론에 공개된 2차 개정 정관이다. MB 측에서는 이 정관을 내가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위조라면 내게 이익이 있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내 지분의 50%를 남에게 줘서 손해를 볼 목적으로 정관을 위조하는 바보가 어디 있나. MB는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우리가 합의했던 본인의 역할을 실천했다. 그의 영향력으로 운영자금과 투자금이 몰려들었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BBK 투자자문 인허가를 받을 때 e캐피탈에서 빌린 30억을 갚아야 했다. MB는 "자금을 받아야 하니 경주로 가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간 회사가 바로 '다스'다. MB는 여전히 본인과 다스가 관련없는 회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MB는 다스를 설명하면서 "내 회사니까 형제처럼 지내라"고 했다. 다스의 원래 이름은 대부기공이다. '대부 오토 시스템스'의 영문 앞글자를 따서 다스(DAS)로 바꿨다. 공항에서 내리니 부사장과 직원 2~3명이 마중와서 귀빈대접을 했다. 회사에 도착해 2층 사장실로 안내받았다. 악수를 청한 이는 당시 대표이사였던 김성우 사장이다. 그는 MB에 대한 칭찬부터 시작했다. "제가 현대에서 이명박 회장님을 모셨습니다. 대단하신 분이죠. 이 회장님과 어떻게 아십니까. 이런 사업까지 하실 줄 몰랐습니다." 간단히 MB와 기획한 사업을 설명했고, 저쪽에선 내가 왜 왔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다고 했다. 다스의 최대 주주가 MB의 큰 형 이상은 회장이고 감사가 김재정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여담이지만 이상은 회장을 한번 직접 만난 적이 있다. 어느 날 MB가 내게 인터컨티넨탈 호텔로 아침 일찍 오라고 한 적이 있다. 기독교 조찬모임이었다. 다소 늦게 도착했는데 한 테이블에 MB의 가족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이상은 회장, 이상득 의원의 식구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MB의 형수들이 날 보고 '잘 생겼다'고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MB는 가족들과 있을 때는 막내티가 났다. 이 회장과 이 의원 두 형들은 말을 아꼈지만, MB는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하여간 '다스 출장'에서 돌아온 며칠 뒤 MB는 "자금을 옮길 준비를 하라"면서 전화번호를 하나 줬다. 다스 자금을 관리하는 부사장이었다. 첫 송금액 18억이 BBK로 들어왔다. 이후 2개월여 사이 총 50억이 입금됐다. 그중 30억이 모이자마자 e캐피탈에 빌린 돈을 갚았다. (다스 김성우 사장이 미국 법정에서 증언한 투자 배경은 김경준의 증언과 사뭇 다르다. 김 사장은 2000년 1~2월 서초동 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백준의 추천으로 투자했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을 MB의 맏형이자 다스 대주주인 이상은 회장과 처남인 김재정 감사에게 설명하고 투자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했다. 그후 김 사장이 김경준을 경주로 불러 투자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다스 측은 BBK에 보낸 돈이 펀드에 투자하라고 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밝혀두지만 다스는 BBK 법인 계좌로 송금했다. 펀드 투자라면 펀드 투자용 계좌를 따로 개설해 송금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첫 송금을 시작으로 다스가 그해 BBK로 보낸 돈은 총 190억이다. 금액이 결정된 배경을 설명하면 투자금이 아니라 MB와 내가 합의했던 사업 자금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BBK 투자자문 인허가에 필요한 30억, 지주회사인 LKe뱅크 자본금으로 60억, e뱅크증권(ebk) 인허가 자금으로 100억이 필요했다. 이 190억을 다스는 5월까지 50억, 10월에 50억, 12월에 90억씩 3차례 나눠 보냈다. 당시 다스의 연수익은 30억 원 정도였다. MB가 아니었다면 연수익의 6배가 넘는 거액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내 설명만 듣고 BBK에 송금했겠나. 다스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기에 삼성생명의 투자도 유치했다. 역시 MB의 입김이 작용했다. 난 내 힘으로 삼성생명의 투자를 받으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고민하다 MB에게 말했더니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느냐'면서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길로 나설 채비를 했다. 그는 이학수 부회장(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 본부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이후 열흘 남짓 만에 삼성생명은 100억 원을 BBK가 운용하는 MAF 아일랜드 해외펀드에 투자했다. MB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투자했기 때문에 다스도 따라서 투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뜻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한번 더 생각하면 허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삼성생명이 투자한 사실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경주에 있는 중소기업이 국내도 아닌 해외 펀드에 대기업 삼성이 투자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다스가 송금하기 시작하고 삼성 투자가 이뤄진 2월, 우린 한걸음 더 내디뎠다. BBK의 지주회사 LKe뱅크를 설립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했다. 이듬해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BBK 사건수첩 이상은 1933생으로 MB의 3형제중 맏형이다. 2살 아래 동생인 이상득 전 의원은저축은행 비리로 2013년 징역 1년 2월에 추징금 4억5000여만원을 선고받았다. MB는 8살 아래 막내다. 포항 동지상고를 나와 1985년 대원산업 대표를 거쳐 1987년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의 전신인 대부기공의 대표 이사가 됐다. 그후 30년간 회장직을 맡고 있고 최대 주주다. BBK 정관 MB가 BBK의 실소유주라는 의혹을 낳은 대표적 자료다. BBK가 2000년 5월 법무법인의 공증을 받아 금감원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30조 2항에는 "과반수의 결의에는 발기인인 이명박 및 김경준이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이명박 및 김경준이 지명한 이사가 의결권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명기돼 있다. 이는 MB나 김경준의 의결권 행사 없이는 이사회 결의가 무효라는 제한조항이다. 다스 87년 12월 MB의 큰형 이상은씨와 처남인 김재정씨가 일본 후지기공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공동 설립한 자동차 부품 회사다. 대부기공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이듬해부터 현대자동차에 납품을 시작했다. 당시는 MB가 현대엔지니어링 대표로 재임하던 시절이다. 2015년 현재 매출액은 2조 1300억원이다. 매출액의 절반 이상이 현대자동차와 납품 거래에서 발생한다. 정리=정구현 기자

2017-06-08

"김승유 행장 찾아가 협조 요청하라"

BBK 사무실 얻고 MB가 주문 사업 설명에 김 행장 "알겠다" 그후로도 최소 5차례만나 e캐피탈서 대출 MB와 합의 BBK 주식 담보로 30억 빌려 다시 말하지만 BBK는 MB(이명박 전 대통령)와 함께 그린 '큰 그림'의 출발점이지 종착지가 아니다. 언론에 'BBK 사건'으로 보도됐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오해할 수 있어 다시 한번 밝혀둔다. MB와 합의한 사업 구조는 4가지였다. 투자자문업(BBK) 증권업(ebk증권) 은행업(하나은행과의 연계) 보험업을 자회사들로 연결하는 인터넷 종합 금융회사다. 이 4가지 사업을 연결하는 사업만 할 수 있으면 당시 한국내 대부분의 금융상품을 취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은 단일 금융업체에 이 모든 사업을 할 수 있는 허가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4개 부문별 회사를 설립해 표면적으로는 서로 별개로 보이도록 한 뒤 지주회사(소프트웨어회사 Lke뱅크)를 만들어 통합시키기로 했다. 물론 편법이라는 것은 나와 MB 모두 알고 있었다. 이 계획이 현실화됐다면 BBK를 통해 투자한 펀드의 가치를 담보로 ebk증권으로 주식이나 채권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투자자의 신용조회가 가능해져서 그 데이터를 LKe뱅크를 통해 다른 금융업체에 팔 수도 있었다. 이 구조는 내가 고안한 게 아니다. 당시 미국에선 보편화된 금융기업의 구조였다. 한국의 첫 모델을 MB와 내가 만들려 했을 뿐이다. 전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자본금 5000만 원에 법인 등록만 했던 회사가 삼성생명 빌딩 17층의 75%를 빌릴 수 있었던 것은 MB의 영향력 때문이다. MB는 자기가 삼성생명과 잘 안다고 했고 투자도 받을 테니 삼성생명 빌딩에 사무실을 얻는 게 좋겠다고 했다. MB가 공식적으로 사업 전면에 나서겠다고 한2000년(선거법 위반 혐의 사면 받은 해)이다. 그 전에 종합금융에 필요한 시스템을 개발 구축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금감원에 BBK의 투자자문업 인허가부터 신청했다. 인허가에 필요한 최소 자본금은 30억이었다. MB는 이 돈을 자기가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인허가 절차가 빨리 진행되면서 MB가 전면에 나서는 시점인 '2000년' 전에 그 돈이 필요했다. MB가 전면에 나설 수 없었기에 우선 BBK 회사 명의로 자본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였던 홍종국씨가 당시 대표로 있던 e캐피탈에서 30억을 빌렸다. BBK의 주식 99%(60만 주)가 대출 담보였다. e캐피탈의 홍 대표는 내가 MB와 한배를 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본금 5000만 원짜리 회사에 30억을 누가 빌려주겠는가. 그래서 e캐피탈은 돈을 빌려주면서도 오히려 동업자로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30억을 받고 2개월만인 99년 11월 금감원은 BBK에 투자자문업 허가를 내줬다. 99년말 LA에서 부모 방문 MB 논현동 자택에 저녁 초청 김윤옥 여사 반찬 일일이 설명 그 사이 거래 시스템 구축에도 매달렸다. 우선 BBK 가 운용할 해외펀드를 만들었다. 아일랜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말레이시아 라부아 등 3개다. 아일랜드와 라부안은 한국과의 조세조약에 따라 펀드를 만들면 당시 국내 주식거래와 마찬가지로 시세 차익에 대한 세금이 면제됐다. 난 MB의 소개로 정재계의 실력자들과도 만나야 했다. 어느 날 MB는 내게 김승유 당시 하나은행장을 찾아가라고 했다. 투자를 받아야 하니 협조를 요청하라는 주문이었다. MB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사업계획만 가진 30대 초반의 날 은행장이 만나줄 리 만무하다. "이 회장(MB)께서 어떻게 이 사업을 하시게 됐습니까? 두 분이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김 행장은 새파란 30대 청년이 MB와 동업을 하게 된 배경을 구체적으로 물었다. 1시간여 동안 사업 취지와 현재까지 사업 추진 과정을 설명했다. 다 들은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김 행장과는 최소 5차례 이상 만났다. 사업은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러웠지만 평생 잊지 못할 슬픔이 찾아왔다. 12월3일 사랑하는 남동생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은 내 걱정을 하셨고 크리스마스 즈음 한국에 오셨다. 그 소식을 들은 MB가 논현동 사택에 부모님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 했다. 아직도 그 저녁식사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부모님과 나 MB 부부 그리고 'MB의 집사'인 김백준까지 6명이 함께한 자리였다. MB의 아내 김윤옥 여사가 직접 만든 반찬이라면서 하나하나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해줬다. 예를 들어 김튀김을 살짝 튀겨서 6번에 걸쳐 만들고 시금치는 어떻게 버무리는 등등이다. 돌아보면 그때부터 김윤옥 여사는 한식에 대한 조예가 남달랐다.(MB 정부 주요 사업중 하나가 한식 세계화다. 김윤옥 여사가 직접 나서서 주도했다.) 식사 후 다들 소파에 앉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셨다. 대화하던 중 내 어머니는 작은 실수를 하셨다. 부모님은 90년대 초반 유행했던 MB를 모티브로 한 '야망의 세월'의 애청자였다. 어머니는 각색된 드라마가 사실인 줄 아시고 MB 부부의 연애사에 대해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셨다. 다들 웃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자리를 파하면서 MB가 부모님께 말했다. "김 사장(MB는 날 사장이라고 불렀다)과 함께 일하게 됐으니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MB의 그 말에 아마도 부모님은 한국에 있는 하나 남은 아들에 대한 근심을 놓으셨던 듯 하다. 어떤 부모든 그렇지 않겠는가. '야망의 세월'의 주인공이자 '현대 신화'를 만든 사람이 한 약속이다. 지금까지도 MB는 2000년 이후에 날 만났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99년 MB를 만나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는 지금까지의 내 설명은 모두 거짓말이다. 부모님과 MB와의 저녁식사도 내가 꾸며낸 이야기가 된다. 독자들에게 묻겠다.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가. BBK 사건수첩 김승유 1943년 충북 청주 출생이다. 경기고를 거쳐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 동기다. 1965년 한일은행을 거쳐 71년 한국투자금융(하나은행 전신)의 창설멤버로 입사한 하나은행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30대에 임원이 됐고 97년 2월 은행장에 올랐다. 2007년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은 하나은행의 LKe 뱅크 투자과정에 김 행장이 적극 개입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5-30

MB와 두번 만나 ‘BBK 그림’ 완성했다

첫 만남부터 뜻 맞아 4시간 대화 리츠칼튼 호텔로 옮겨 점심 하며 "사업계획 짜서 다시 보자" 약속 두 번째 미팅서 사업 추진 합의 MB 첫해 흑자 및 상장기업 원해 "사업 위해 정치 은퇴" 약속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난 현대건설 회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명박이라고 해요." 김백준이 '대단한 분'이라고 했던 MB가 자기를 소개했다. 나도 지난 2년간 한국에서 해온 일들을 설명했다. 사실 첫인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대단하신 분'을 만난다고 했는데 당시 MB는 선거법 위반혐의로 의원직을 잃은 상황이었다. (96년 4월 총선 출마 당시 MB는 법정선거비용 9500만 원보다 8400만 원을 초과지출한 혐의로 기소돼 의원직을 자진 사퇴했다) 지금 그날을 돌아보면 불행하게도 대화를 할수록 그와 잘 맞는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그의 사업 제안이 매력적이었다. MB는 인터넷 관련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닷컴 창업 열풍이 막바지였던 때다. 난 금융회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 그렇다면 금융+인터넷 회사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합의'가 그날 이미 이뤄졌다.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져 4시간을 넘겼다. 이야기 도중 리츠칼튼 호텔 일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까지 함께 먹었다.헤어지면서 MB는 사업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달라고 했다.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다음에 만날 때 함께 의논하자고 했다. 지금까지도 MB측은 나와의 첫 만남이 2000년 이후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99년 4월 세운 BBK와 본인이 아무 상관없다는 알리바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99년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내가 다니던 회사와의 소송건이다. MB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환은스미스바니에서 퇴사할 결심을 했다. 문제는 내가 받아야할 성과급이다.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청구액은 21억8000만 원에 달했다. 그 소송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동아일보 99년 3월26일자 '잘나가는 증권맨 "성과급 21억 달라") 8개월간 소송 끝에 합의하고 18억 정도를 돌려받았다. 재판까지 가도 승소할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소송에 연루되는 것을 MB는 싫어했다. MB와 첫만남의 날짜까지 기억할 순 없지만, 상식적으로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모두 지어낸 얘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첫 만남 이후 1주일쯤 뒤 다시 영포빌딩에서 만났다. MB와 김백준이 기다리고 있었고, 난 동료 한 명과 함께 찾아갔다. 훗날 BBK 사건이 터진 뒤 언론에 오르내린 모든 자회사들과 각각의 역할은 이미 그날 두 번째 미팅에서 결정됐다. 아직 회사 이름은 미정이었지만 BBK, LKe뱅크, ebk뱅크 등 설립과 기존 상장회사를 인수해 우회상장하겠다는 계획까지.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반인들을 위해 큰 그림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MB가 내게 원한 사업 목표는 크게 3가지였다. 인터넷 회사를 세우고, 첫해부터 흑자를 내서, 상장기업으로 만들자고 했다. 그 목표 아래서 난 세부계획을 짰다. 인터넷 기반 회사 중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회사가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소프트웨어 회사(후에 LKe뱅크)를 지주회사로 그 아래 각각의 금융 거래를 실제 할 수 있는 자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투자자문 회사, 증권회사, 협력은행, 보험회사까지 4개 자회사 기둥을 만드는데 합의했다. 지주회사를 금융회사가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로 내세우기로 한 배경은 투자회사의 고객관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 금감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기도 했다. 물론 사업 계획이 편법이라는 것은 MB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MB의 목표대로 인터넷 회사가 첫해부터 흑자를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흑자를 만들 수단으로 투자자문 자회사를 먼저 만들어야 했다. 그게 BBK다. 투자자문 회사는 펀드만 모으면 운영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에 시작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사업 계획을 설명한 뒤 사업자금 500억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회사들의 인허가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금감원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MB는 걱정 말라고 했다. 마지막 요구조건을 꺼냈다. "회장님, 사업을 하시려면 더이상 정치는 하시면 안됩니다." 그는 이미 정치에서 은퇴를 했고 당연히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돌아보면 그 약속은 정반대로 현실화됐다. 일단 밑그림이 그려지자 MB는 하루빨리 사업을 진행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MB에겐 걸림돌이 있었다. 선거법 위반 혐의다. 그러면서 본인이 본격적으로 사업 전면에 나서는 시점은 그 이듬해인 2000년부터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에 단행한 일명 '밀레니얼 사면'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두 번째 만남 후 한 달도 채 안돼 4개 자회사 중 첫 회사를 만들었다. 이름을 BBK로 정했다. 나중에 언론들이 내가 회사명을 내 동료였던 오영종(미국명 Bob)과 내 아내 이보라, 내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지었다고들 했다. 사실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퍼스트네임을 회사 이름으로 짓겠는가. 그저 의미 없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던 단어였다. 어차피 나중에 지주회사를 만들고 지분을 정리하면 바꿔야 할 이름이었다. BBK를 일단 보통 회사로 설립됐고, 그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본금 5000만 원은 내 돈을 넣었다. 나중에 검찰이 BBK와 MB가 연관되어 있지 않고 내가 만든 회사라고 한 주장의 근거가 여기 있다. 하지만, 내가 BBK를 세운 것은 MB와 합의한 전체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또 환은스미스바니에서 퇴사한 뒤 미국 국적자인 나는 당장 체류신분이 필요했다. 비자를 얻기 위해 일단 회사부터 세웠어야 했다. BBK를 만들면서부터 사업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MB의 영향력'은 실제로 존재했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했더니 서울 중구 한복판 삼성생명빌딩의 17층 전층의 75%를 얻을 수 있었다. 자본금 5000만 원 짜리 이름 뿐인 회사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MB의 이름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BBK 사건수첩 밀레니얼 사면 김대중 정부는 2000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각종 사범 3만647명에 특별 사면을 단행했다. 98년 3·13사면(552만여명)과 93년 3·6사면(4만900여명)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이며 광복절 사면으로는 최대규모였다. 96년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피선거법이 박탈된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전 의원도 사면됐다. MB를 비롯해 이때 사면복권된 선거사범은 총 382명이다. 당시 같은당 소속 홍준표 전의원도 그중 한명이다. 정리=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5-22

"MB와 손 잡았다…악몽의 시작이었다"

97년 도쿄서 한국 스카우트 IMF 위기속 270억 순익 올려 24억 번 '투자 귀재' 유명세 고위층 '만나자' 요청 쇄도 'MB 집사' 김백준 먼저 전화 "대단한 분이 뵙고 싶어한다" 99년초 영포빌딩서 MB대면 1997년 1월경 도쿄. 전화는 느닷없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전화를 건 헤드헌터는 한국의 신생 증권회사가 자본 운용 책임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난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모건 스탠리 도쿄 지점에서 자본 운용 전문가인 '프랍트레이더(proprietary trader)'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한 회사는 환은스미스바니(이하 환은)였다. 한국의 외환은행과 미국 증권업계 2위인 스미스바니투자은행이 투자한 합작회사였다. 날 선택한 이유는 그 당시 일본과 한국 증권업계의 상황 때문이다. 일본에 주재한 미국계 투자은행들은 최고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세계 유수 투자은행의 CEO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실력을 쌓고 승진했다. 그래서 투자은행가들에게 일본은 '성공 보증 근무지'로 꼽혔다. 나도 그 기회를 잡았다. 1996년 한국도 일본의 증권시장을 모델로 주가지수 선물거래 시장을 개설했다. 파생상품을 처음 거래하게 된 한국에서는 일본 근무 경험이 있는 한국계 프랍 트레이더가 필요했다. 당시 도쿄에 주재한 외국계 투자은행가 중 유일한 한국계인 나는 그 조건에 맞는 적격자였다. 환은 측의 스카우트 제의는 파격적이었다. 연봉 20만 달러에 집 차 별도의 업무비 지급과 이익의 20%까지 보너스로 주겠다 했다. 당시 증권업계에서 이익 배분을 보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민 끝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제 2의 일본 파생상품 시장을 현실화시키자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97년 3월 한국땅을 밟았다. 5살에 미국으로 이민 간 뒤 '사실상 처음'으로 고국을 다시 찾게 됐다. 굳이 사실상 처음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이후 BBK 사건 조사과정에서 95년 내가 입국한 기록이 문제됐기 때문이다. 그해 난 홍콩을 가던 중 한국을 경유했다. 당시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을 문제 삼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어 밝혀둔다. 한국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이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으면서다. 한국으로 간 그해 11월 IMF가 터졌다. 증권가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금융위기가 곧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금융계 전체에 대규모 감원의 칼바람이 몰아쳤지만 난 반대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해 200억의 펀드로 270억의 순익을 거둬 환은스미스바니 전세계 지점 중 최고 수익률을 올렸다. 연봉과 실적 보너스를 합해 200만 달러를 받았다. 당시 원화로 24억이 넘는다. 그때 내 실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난 '24억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매일경제 99년 2월12일자 17면 TV 출연에 강의 요청도 밀려들었다. 다들 성공 비결을 알고 싶어했다. 내겐 어렵지 않았다. 한국의 투자전문가들이 이제 갓 걸음마를 할 때 난 뛰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금리가 10~25%까지 널뛰기를 할 때였다. 파생상품 거래는 시장이 불안정할 때 오히려 수익률이 높다. 이듬해에도 고수익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했다. 한때 한국 전체 선물 거래의 80%가 내 손을 거쳐 이뤄졌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난 한국 근무생활에 서서히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시장 자체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금융 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터라 거래 하나하나를 완성하기가 힘들어졌다. 한번은 해외 헤지펀드와 5억 달러 스왑거래를 한 적 있다. 당장 그 회사로 3억 달러를 보내야 했는데 송금을 못해 발을 동동 굴린 적이 있다. 그날 한국 전체 외환 보유액이 3억 달러가 안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국 기업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모 은행에서 근무하는 와튼스쿨 동문을 찾아가서 겪은 일이다. 동문은 부장이었다. 부서마다 하루종일 다른 동료가 무엇을 하는지 감시해서 보고서를 올리는 직원들이 있었다. 행장에게 직접 보고서를 매일 올린다고 했다. 도저히 창의적인 발상이 나올 수 없는 근무환경이었다. 한국에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즈음 홍콩의 한 재벌기업 총수가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 일을 택하지 않았는지 후회된다. 그랬다면 BBK도 없었을 것이고 13년간 교도소에 갇힐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99년 초로 기억한다. 역시 느닷없는 전화였다. "나 김백준이라고 합니다. 대단하신 분이 한번 만나자고 하시는데 어떻습니까?" 당시 한창 유명세를 얻던 내게 만나자는 실력가들이 많았다. 정치인 대기업 회장 등등 김백준의 제의 역시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보통 저쪽이 '대단한 분'이라고 하면 이쪽에서는 누군지 묻지 않는 게 그런 대화에서의 불문율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김백준은 나에 대해 사전에 검증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근무한 환은스미스바니의 감사가 외환은행 쪽 직원이었다. 외환은행 런던 지점장 출신이었던 김백준이 그 직원에게 내 실적을 다룬 보도의 사실 여부를 물어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백준의 비서가 이틀 뒤 오전 7시30분에 서초동 영포빌딩으로 가면 그분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알려줬다. 춥고 쌀쌀한 출근시간에 강남의 길은 번잡했다. 번듯한 고층빌딩이라 생각했던 영포빌딩은 실망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정면에 화장실이 보이는 작은 건물이었다. 약속 장소인 1층 사무실 입구에는 '동아시아연구소'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안내 데스크에 비서인 듯한 여직원 한 명만 있을 뿐 다른 책상들은 다 비어있었다. 뒤쪽 큰 방으로 따라갔고 여직원이 문을 열어줬다. 정면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활짝 웃으며 일어나 악수를 건넸다."이명박입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BBK 사건수첩 프랍 트레이더 금융회사 자기자본을 운용하는 트레이더. 개인의 돈을 운용하는 펀드 매니저와 구별된다. 월가의 엘리트중에서도 엘리트들이다. 소설가 톰 울프는 1987년 발표한 '허영의 불꽃'에서 프랍 트레이더를 '우주의 지배자(Master of the Universe)'라고 불렀다. 김백준 1940년 전북 출생이다. MB의 최측근으로 '집사'로 불린다.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2년 선배다. 외환은행 근무시절 1976년 현대종합금융으로 스카우트되면서 당시 현대건설 사장인 MB와 처음 인연을 맺은 후부터 지금까지 40년을 함께 일했다. MB가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막아내 'MB의 수호신'으로도 통한다. 특히 BBK 사건이 터지자 MB측 소송 대리인으로 나서 미 연방 법원에 김경준의 송환 연기를 신청하기도 했다. MB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총무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입성해 퇴임까지 5년간 MB 옆을 지켰다. 정리=정구현 기자

2017-05-16

여론 "BBK 재수사해야"…MB와 김경준의 만남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농단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을 재조사하고 세월호 진상 조사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공약으로 내건 '적폐 청산'의 서막을 예고한 셈이다. 권력이 저지른 누적된 폐단이 적폐라고 한다면 폐단을 저지른 당사자 혹은 집단을 가려내는 것이 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점은 불분명한 의혹에 대한 조사다. 이명박 전 대통령(MB) 당선 직전 불거진 BBK 주가조작 사건은 한국 역대 정권의 대표적인 의혹 중 하나다. 지난 4월 국민일보와 조원씨앤아이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BBK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전체 응답자 중 73.8%가 '필요하다'는 답을 내놨다. 당시 검찰이 MB를 무혐의 처분한 데 대한 불신이다. BBK 사건의 시작은 김경준과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첫만남이다. 그 시점부터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린다. 김경준은 MB와 99년 초에 만났고 그해 BBK를 함께 만들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MB측은 2000년 2월7일이라고 주장한다. MB측이 BBK 설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입증하려면 첫 만남 시점이 2000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경준의 진술에 따라 두 사람의 첫 만남으로 되돌아간다. 의혹의 시작점이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5-16

"책(수감중 펴낸 'BBK의 배신')에 쓰지 못한 진실 모두 말하겠다"

박범계 의원 보호소로 접견와 "추방 이의제기 해보자" 제안 정치적 계산에 "1초도 싫다" 유원일 전 의원도 함께와 불편 접견 몰래 녹음해 '나꼼수' 전달 한 사건의 진실에 대한 이해는 양쪽 당사자의 '공통 진술'과 '엇갈리는 주장'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만약 BBK 사건 역시 김경준의 이야기를 그의 관점에서 들어야만 진실에 좀 더 가까워 질 수 있다. 더욱이 전직 대통령이 수백억 원 규모의 주가조작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전제라면 그의 증언 청취는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차기 정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MB) 집권 당시의 의혹들을 재조사한다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기사는 시간을 거슬러 그가 직접 서술하는 연재 형식이다. 3월28일 천안교도소에서 출소했다. 큰 감흥은 없었다. 수감생활에서 몸으로 배운 것이 있다면 날짜를 잊는 것이다. 출소일을 계산할수록 시간은 더디게 갔다. 그래서 잊고 지냈고 그러다 보니 그날이 왔을 뿐이다. "김경준씨 출소 준비하세요." 습관처럼 오전 운동을 마치고 방으로 오니 나갈 시간이 됐다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부 언론에서 내 출소일이 원래 30일이고 조기 석방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다. 형법상 구속되는 날을 하루 형기로 계산한다. 또 징역형 복역을 마치고 벌금을 노역으로 대신하면서 사실상 다시 구속됐기 때문에 또 하루가 빠진 것이다. 이미 짐은 싸뒀다. 가방 2개와 사과 박스 2개가 전부다. 책과 소송 관련 서류들을 넣었다. 그중 하나가 대법전이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나는 변호인 없이 난해한 대법전을 읽으며 스스로 변호했다. 버릴 수 없는 책이다. 친하게 지내던 교도관들이 와서 작별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유감이에요." 한국에서 거의 10년간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난 줄곧 독방에서만 지냈다. 난 사형수나 흉악범도 아니었지만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채 생활해야 했다. 내게 유일한 대화상대인 교도관들은 그동안의 내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출소했으니 공식적으로 난 자유였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여전히 '특별관리 대상'이었다. 보호소 밴을 타고 나가던 중 갑자기 교도소 측에서 밴을 세웠다. 국회의원이 찾아와 나와 만나고 싶어한다고 했다. 곧 교도소장이 외부인 3명과 함께 나타났다. 박범계 의원과 유원일 전 의원(18대 창조한국당 소속)과 다른 일행 1명이다. 박 의원이 물었다. "이따가 내가 보호소로 찾아갈 테니 만나주겠습니까." 2시간쯤 지나 보호소에서 박 의원 일행과 마주 앉았다. 만나겠다 했지만 난 그 자리가 불편했다. 함께 온 유 전 의원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 내 후견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5~6차례 날 접견왔던 그는 나와의 접견 내용을 내 동의없이 녹음해서 '나꼼수'에 전달했다. (2012년 3월11일 팟캐스트 라디오 '나는 꼼수다'는 김경준의 육성을 공개했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측이 김경준의 입국을 기획했고 이를 검찰이 알고도 묵살했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 방송을 듣지못했지만 방송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유 전 의원이 녹음기를 교도소내로 반입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고 무엇보다 대화 내용의 파장이 컸다. 검찰이 수사를 한다고 했고 별도의 교도소 자체 내사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교도소 내사는 수감자 입장에서 '징벌방행'을 뜻한다. 짧게는 열흘 길게는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 한가운데 앉아만 있어야 한다. 벽에 등을 기대는 것조차 금지다. 석방됐지만 여전히 특별관리 LA행 탑승 직전에 수갑 풀고 아시아나 직원은 여권 압수 다행히 징벌방은 면했지만 나를 향한 감시는 더 심해졌다. 그는 내 대변인이 아니라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이다. 사실 유 전 의원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나 국회 입성을 꿈꾸는 자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교도소로 날 찾아왔고 내 말을 이용했다. "이 사람(유 전 의원)과 함께 오시면 전 박 의원님과 대화 안 합니다." 유 전 의원은 '오해가 있었다'면서 일단 얘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박 의원은 "김경준씨 추방당하지 않도록 이의신청을 해보시면 어떨까요"라고 내 의견을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추방되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 구속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생각해보라. 난 10년 가까이 독방에서 지냈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날 욕하고 비난했다. 내가 왜 더 갇혀있길 원하겠는가. 당시 언론에서도 내가 추방 이의신청을 해 국내에 계속 있고 싶어한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출소일까지도 정치인들과 언론의 희망사항이 마치 내 의지인 것처럼 비춰졌다. 박 의원에게 동의했던 것은 하나뿐이다. 그는 "MB도 적폐청산 대상"이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하고 만약 청문회가 열린다면 증인으로 참석해 증언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면담은 40여 분 만에 끝났고 그날 밤을 보호소에서 보냈다.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표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한 달 전에 미리 사뒀다. 공항에서도 '특별관리 대상' 대우는 이어졌다.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공항에서 기자들을 발견하고서는 그제야 급히 수갑을 풀었다. 비행기에 탄 것도 이륙 5분 전이었다. 그런데 아시아나 항공사 직원이 내 여권을 가져갔다. 법무부나 경찰도 아니고 항공사 직원이 왜 내 여권을 압수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비행기에 타서야 난 비로소 자유를 경험했다. 장기복역 후 출소해서 가족에게 돌아가는 길이니 11시간 기내에서 많은 상념이 떠올랐을 거라고 추측할지 모른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출소 5일 전부터 먹기만 하면 설사를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기내에서도 15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11시간은 금방이었다. LA국제공항 입국장에서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난 언론을 믿지 않는다. 미주지역 언론도 내 누나와 MB가 마치 무슨 부적절한 관계인 양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나와 MB가 만든 'LKe뱅크'라는 회사명의 e가 내 누나의 이름(에리카)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무식한 소리다. L과 K는 이명박과 김경준이 맞다. 하지만 소문자 e가 '인터넷뱅크'를 뜻한다는 건 상식이다. 한바탕 씨름을 하고 기자들이 돌아갔다. (그는 본지와 지난 인터뷰에서 이 내용을 밝힌 바 있다.) 마중나온 가족들이 걱정됐다. 며칠 전 가족들과 통화하면서 "기자들이 많이 오면 나한테 오지말라"고 했다. 휴대폰이 없어서 공중전화를 찾았다. 대부분 고장이었다. 공항직원의 도움으로 가족과 어렵게 통화했다. 30분 만에 가족과 만났다. 나도 가족들도 펑펑 울었다. 10년 만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은 집에서 피자를 시켜 함께 먹었다. 거짓말처럼 설사가 멎었다. 집에 왔다는 것을 내 몸이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동안은 구속된 몸이었기 때문에 난 말을 아껴야 했다. 교도소에서 쓴 책에도 민감한 내용들은 싣지 못했다. (2012년 그는 'BBK의 배신'이라는 수기를 펴냈다.) 이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은 진실을 가르쳐주고 사실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하려고 한다.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리=정구현 기자

2017-05-02

MB가 BBK 실소유주 "새로운 증거 있다"

'BBK 사건'의 김경준(50)이 LA에서 입을 열었다. 2007년 대선 직전 한국을 뒤흔든 그가 10년이 지난 현재 다시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에서 또 파장을 예고했다. 그는 "BBK 실소유주가 MB(이명박 전 대통령)라는 새로운 증거가 있다"라며 "MB와 관련된 청문회가 열린다면 증언할 의향이 있다"고 본지와 인터뷰에서 밝혔다. BBK 사건으로 한국에서 10년간 수감됐다가 출소해 지난달 29일 LA로 돌아온 뒤 언론과의 첫 정식 인터뷰다. <관계 인터뷰 4면> 그는 "BBK라는 투자자문사를 만든 이유 자체가 MB의 '첫해 흑자' 목표 때문이었다"면서 "당시 MB가 하고자 했던 인터넷 사업은 적자가 예상됐고, BBK 투자자문사를 먼저 세워 펀드를 운용해 수수료란 이익을 창출해 이를 충당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BBK 사건의 주요 의혹중 하나가 BBK 설립 당시 인허가에 필요했던 투자금 30억 원의 출처다. 당시 검찰은 김경준 본인이 그 30억을 e캐피탈로부터 대출받았기 때문에 BBK는 김경준의 소유라며 MB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경준은 본지와 인터뷰에서 "BBK 허가를 받고 난 지 2개월 뒤부터 다스라는 회사에서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면서 "다스 측에서 1~2개월 사이에 3차례에 걸쳐 50억을 보냈고 그 돈으로 e캐피탈 대출금을 갚았다"라고 말했다. 다스는 MB의 큰 형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운영하던 현대차 부품업체다. 김경준은 본인이 대출을 받긴 했지만, 인허가에 필요한 투자금 30억을 지불한 것은 사실상 MB 측이라는 주장이다. MB는 2000년 10월16일자 중앙일보 본사와의 인터뷰에서도 "인터넷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LKe뱅크와 자산관리회사인 BBK를 창업한 바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를 비롯해 최근 정치권에서는 차기 정부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만약 청문회가 열린다면 그의 증언은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 한국에서 추방된 외국인은 5년 이상의 입국규제를 받게 돼 현재로서 그의 청문회 출석은 어려울 수 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17-04-23

김경준 단독 인터뷰 "오랜 독방…함께 있고 대화하는 게 어색"

MB(이명박)도 적폐청산 대상'에 동의 관련 청문회 열리면 증인 참석 기꺼이 -한국에서 돌아와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나. "13년간 수감생활을 했다.(한국 인도 전까지 LA 연방 구치소에서의 3년 6개월과 한국에서 9년 4개월을 합한 기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운전면허도 다시 신청했는데 운전 자체도 생소했다. 종합검진도 받았다."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과 동시에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구속된 뒤 계속 독방에만 혼자 수감됐다. 대화상대가 교도관밖에 없었다. 그렇게 10년을 독방에 있다 보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직 어색하고 불편했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한국 수감생활은 어떤 의미인가. "지옥. 단테는 신곡(The Divine Comedy) 천국편에서 '지옥은 모든 희망이 없는 곳(hell is where no hope exists)'이라고 묘사했는데, 내게 교도소가 그랬다. 모두가 나를 벌했고, 나를 비난했고, 나를 죽이려 했다. 난 모든 희망을 박탈당했다. 모두가 나를 파멸시키고 MB가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주기만을 원했다. 부모님마저 누나를 살리기 위해 날 버렸고, 내 변호사라는 자들마저 변호는 하지 않고 나를 이용한 뒤 버렸다. 좌절과 절망뿐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가 수감생활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전체가 내게는 교도소, 즉 지옥이었다." -변호사가 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국 송환된 첫날 내 변호사가 만나자마자 수임을 못하겠다고 했다. 기자들의 취재 경쟁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후 수임한 김정술 변호사는 날 변호하지 않고 내게서 정보만 빼내 언론에 공개했다. 아무도 나를 위한 변호를 하지 않았으니 재판 결과는 뻔했다" -독방에만 수감된 이유는. "내 모든 행동들이 감시 대상이었다. 난 2급 그리고 마지막 3년은 1급 수용자였는데도 상대적으로 자유가 제한된 3급 교도소에 수감됐다. 다른 수용자들과 달리 나와의 대화들은 모두 불법으로 녹음, 녹화, 기록됐다. 분명한 인권 침해다. 편지 역시 철저히 검열됐다. 이 사실은 법원이 모두 인정했다." -본인은 무죄라고 생각하나. "얘기하기 싫다. 말해봤자 이제 와서 무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은 변명이라고 욕할 것 이고, 어차피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출소해서 미국으로 오던 날 외국인보호소에서 박범계(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만났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했다던데.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다만 박 의원이 'MB도 적폐청산 대상'이라고 해서 나도 동의한다고 했다. 만약 청문회가 열린다면 증인으로 참석해 증언할 의향이 있다고 말해줬다." -박 의원의 말에 동의한 이유는. "MB가 비리의 원조이고 그로 인해 검찰이 현재 '정권의 눈치만 보는 쓸모없는 청산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LA공항에 도착해 기자들에게 1주일내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다.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한 적 없다. 다만, 기자들이 계속 따라오는 바람에 마중 나온 가족들이 내게 다가오지 못해서 '1주일 안에 연락하겠으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고 했을 뿐이다." -앞으로 기자회견을 하지 않을 생각인가. "난 기자회견을 싫어한다. 차라리 한두 사람과 인터뷰하는 것이 더 편하고 효과적이다." -줄곧 MB가 BBK의 실소유주라고 말해왔다. 그동안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증거가 있나. "당연히 있다. 그리고 MB와 관련된 국정조사가 열린다면 그때 공개할 의향이 있다. 하지만 내게 공개할 것을 강요하지 말라. 나를 비난만했던 대한민국 국민에게 난 아무런 의무가 없다. 국정조사 역시 하건 말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다. 국민들이 하기 싫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 -MB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1999년 초쯤이다. MB의 집사라고 알려진 김백준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대단하신 분이 한번 만나기 원한다'고 했고, 만나기로 한 곳이 MB가 소유했던 영포빌딩이었다. 약속시간인 아침 7시30분쯤 가서 회의실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MB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날 보자 활짝 웃으면서 인사했다. 인터넷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여, 난 인터넷으로 금융사업을 하는 회사를 설립 하는 아이디아를 제공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터넷종합금융회사' 설립을 추진하게됐다." -왜 MB측에서 당신에게 먼저 연락했다고 생각하나. "당시 언론에 내가 '연봉 24억을 버는 증권맨'으로 보도됐다.(1999년 2월12일자 매일경제는 그가 '270억원의 순익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방송에도 나오고 유명세를 얻었던 때다. 그리고 당시 내가 일하던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의 감사직을 외환은행쪽 사람이 맡았는데, 그 사람과 MB의 집사 김백준이 친했던 모양이다. 김백준이 당시 내 투자 실적이 사실인지를 확인했다고 들었다." (이후 BBK 설립부터 검찰 기소까지 과정은 이후 다른 기사에서 소개한다.) -빨리 한국에 가서 조사받지 않고 3년간 연방구치소에 있었던 이유는. "이명박 및 다스가 미국에서 소송을 걸었다. 이명박이 전략적 선택을 잘했다. 한국으로 가면 그 소송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한국으로 송환된 날 검찰청 앞에 내리면서 '와우(Wow)'하고 웃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 모습으로 김경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LA다운타운 연방구치소에서 3년 6개월 간 갇혀있다가 처음 외부로 나온 날이 한국에 송환된 날이다. 공항으로 이송돼 비행기에 탔는데, 좌석이 아니라 승무원들이 쉬는 공간인 '벙커'로 날 데려갔다. 그 좁은 공간에서 10여 명의 법무부 직원들과 13시간 내내 갇혀있었다. 용변도 제대로 못보고 밥도 부실했다. 공항에 내려 검찰청으로 가는 동안에도 나를 태운 밴이 고속으로 곡예운전을 해 멀미도 심했다. 그러다 검찰청 앞에서 내려 차고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기자들이 와서 이게 뭔가하고 어이 없어 나온 말이다." -본지를 통해 가장 알리고 싶은 진실은. "난 내가 겪은 대로 진실을 말할 것이다. BBK 사건에 대해 언론은 편한 대로 원하는 대로 보도했고,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말해봤자, 대한민국 국민들은 날 욕하고 비난할 테지만, 상관없다. 듣기 싫다면 (기사를) 읽지 않으면 된다." ☞ 어떻게 취재했나 취재는 김경준이 보낸 이메일로 시작됐다. 그가 LA에 도착한 지 9일만인 지난 7일이었다. 내용은 '묻고 싶은 질문이 어떤 것인지 말해달라'는 영어로 쓴 한 문장이었다. 취재 의도를 설명한 기자의 답신에 그는 전화를 걸어 '만나겠다'고 했다. 11일 처음 만나 17일까지 4차례 LA한인타운 모처에서 인터뷰했다. 첫날은 녹취나 메모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식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취재 방향과 기사 형식, 분량 등을 놓고 조정을 해야했다. 김경준은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었기 때문에 왜곡된 보도를 경계했다. 그래서 본인이 화자로 증언하는 방식을 택하되 취재 기자가 기본적인 팩트는 확인하기로 했다. 첫 기사는 4차례 인터뷰 내용을 축약하고 이메일 추가 질문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전체 녹취 파일은 7시간 30분 정도, 글로는 A4용지 90여 페이지 분량이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17-04-23

이동연 대표 사기혐의 재판에…MB와 친분과시 1억원 사기

얼마전 LA로 귀국한 김경준씨의 누나 에리카 김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개시켜 준 것으로 알려진 이동연(65) 크리에이티브 글로벌 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 특수 2부(부장검사 김석우)는 이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다른 사람을 속여 1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 등으로 이씨를 불구속 기소했다고 12일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LA에서 의류제조업에 종사하던 1994년 이 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신앙간증을 위해 코리아타운을 방문했을 당시 자신의 집 별채를 숙소로 제공하면서 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조사에서 이씨는 이 전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며 피해자로부터 1억원을 뜯어내고 허위 공시를 하는 등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씨는 2008년 4~5월쯤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 테라메타 사무실에서 피해자 A씨에게 한 국유토지의 등기부등본과 지적도를 보여주며 "나와 함께하는 이모씨는 국가정보원 출신이며 청와대 비밀특보다. 때문에 국가정보원에 작업을 해 국가정보원 보유 토지를 수의계약에 의해 공시지가 상당액에 불하받게 해줄 수 있다"며 활동비 등 경비 명목 1억원을 송금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해 7월에는 상장법인 이티맥스가 감자결정이 이뤄지고 소액주주와의 분쟁으로 코스닥 거래가 정지되는 등 경영 어려움을 겪자 최대주주 B씨에게 "내가 대주주로 등재되면 투자를 받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나를 대주주로 등재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자신이 경영참가를 위해 주식 130억원 상당을 매입해 최대주주가 된 것처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2017-04-12

[뉴스분석] 김경준, MB 뒤흔들 결정적 증거 있나

10년 만에 미국에 돌아온 김경준(51)씨가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폭로를 예고했다. 그가 "1주일 이내에 공개하겠다"는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건 연루 증거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한국의 조기 대선과 맞물려 파장이 예상된다. BBK 주가조작 사건은 지난 2001년 김씨가 자신이 대표로 있던 투자회사 BBK를 통해 옵셔널벤처스라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회삿돈 380억 원을 횡령한 사건이다. 미국으로 도주했던 그는 2007년 11월 한국으로 송환되면서 "MB가 BBK의 실소유주"라고 주장했다. 당시 17대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김씨의 발언은 정치판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MB는 부인했고, 특검 역시 김씨의 단독범행으로 결론내렸다. 결국 2009년 김씨는 징역 8년에 벌금 100억 원을 선고받았다.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김씨는 줄곧 억울함을 토로했다. 옥중에서 그가 펴낸 자서전의 제목인 'BBK의 배신'에서도 심경이 드러난다. BBK 사건에 대해 특검까지 실시됐음에도 의혹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뇌관'들이 많기 때문이다. BBK 정관에 MB는 '최종 의사 결정자'로 명시되어 있고, 언론과 인터뷰에서조차 자신이 창업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김씨가 옵셔널벤처스를 인수하기 1년 전 세운 'LKe뱅크'라는 금융지주회사는 MB가 공동대표다. 또 LKe뱅크 설립 당시 MB가 투자한 30억이 BBK로 흘러갔다. 김씨가 주가조작에 이용한 MAF 펀드에도 LKe뱅크가 150억 원을 투자했다. 본인이 공동대표로 있는 회사의 투자금이 주가 조작에 사용된 것을 MB가 사전에 몰랐을 리 없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씨는 출소 후 미국으로 추방되기 전 박범계 의원을 만나 그 의혹을 규명할 '결정적 증거'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29일 LA국제공항에서 그는 그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당 집권 아래 차마 공개하지 못했던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죗값을 치렀고, 상대적으로 운신하기 편한 미국에서 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한국 정치권도 주목하고 있다. -------------------------------------------------------------------------------------------------- 공항 이모저모 가장 그리운 것은 'LA날씨' 10년 전 양복·구두 그대로 ○…29일 LA에 도착한 김씨의 얼굴에서는 세월이 읽혔지만,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은 10년 전 수감 당시 그대로였다. 2007년 11월 한국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압송될 당시 입었던 버튼 세 개짜리 양복이다. 버클 달린 구두도 똑같다. 구속 당시 영치했던 옷과 구두를 출소하면서 돌려받아 그대로 입고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10년 수감생활을 마친 김씨의 귀국짐은 단출했다. 카트에 실린 짐은 큰 가방 1개와 작은 가방 1개, 사과박스 2개 등 4개였다. 교도소에서 개인 소지품이 제한되는 점을 감안하면 짐의 상당량은 본인의 재판과정에서 그동안 모아온 BBK사건 관련 증거들일 가능성이 높다. ○…수감생활중 가장 그리웠던 것을 묻자 그는 "(LA의) 날씨"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4차례 거듭해 그리움의 대상이 가족임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10년동안 김씨의 모친 김영애씨는 팔순을 넘겼고, 누나 에리카 김씨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또 아내 이보라(47)씨 역시 검찰 수사를 받아야 했다. 딸 알렉산드리아(17)양은 아버지 없이 10대 시절을 보내야 했다. ○…공항에 마중 나왔다던 김씨 가족들은 취재진을 의식한 듯 김씨에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은 김씨와 가족의 상봉 장면을 화면에 담기 위해 김씨를 계속 뒤쫓았다. 그 바람에 김씨가 국제공항터미널을 나와 2개 터미널을 걷는 동안 10여 명의 취재진이 계속 뒤를 쫓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이어졌다. 김재라 인턴기자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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