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와 두번 만나 ‘BBK 그림’ 완성했다
'김경준의 주홍글씨'BBK를 말한다 #3
리츠칼튼 호텔로 옮겨 점심 하며
"사업계획 짜서 다시 보자" 약속
두 번째 미팅서 사업 추진 합의
MB 첫해 흑자 및 상장기업 원해
"사업 위해 정치 은퇴" 약속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난 현대건설 회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이명박이라고 해요."
김백준이 '대단한 분'이라고 했던 MB가 자기를 소개했다. 나도 지난 2년간 한국에서 해온 일들을 설명했다.
사실 첫인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대단하신 분'을 만난다고 했는데 당시 MB는 선거법 위반혐의로 의원직을 잃은 상황이었다. (96년 4월 총선 출마 당시 MB는 법정선거비용 9500만 원보다 8400만 원을 초과지출한 혐의로 기소돼 의원직을 자진 사퇴했다)
지금 그날을 돌아보면 불행하게도 대화를 할수록 그와 잘 맞는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그의 사업 제안이 매력적이었다. MB는 인터넷 관련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닷컴 창업 열풍이 막바지였던 때다. 난 금융회사를 하고 싶다고 했고, 그렇다면 금융+인터넷 회사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합의'가 그날 이미 이뤄졌다.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져 4시간을 넘겼다. 이야기 도중 리츠칼튼 호텔 일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까지 함께 먹었다.헤어지면서 MB는 사업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달라고 했다. 자금은 얼마가 필요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다음에 만날 때 함께 의논하자고 했다.
지금까지도 MB측은 나와의 첫 만남이 2000년 이후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99년 4월 세운 BBK와 본인이 아무 상관없다는 알리바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99년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내가 다니던 회사와의 소송건이다. MB와의 첫 만남 이후 나는 환은스미스바니에서 퇴사할 결심을 했다. 문제는 내가 받아야할 성과급이다.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청구액은 21억8000만 원에 달했다. 그 소송 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동아일보 99년 3월26일자 '잘나가는 증권맨 "성과급 21억 달라")
8개월간 소송 끝에 합의하고 18억 정도를 돌려받았다. 재판까지 가도 승소할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소송에 연루되는 것을 MB는 싫어했다. MB와 첫만남의 날짜까지 기억할 순 없지만, 상식적으로 이런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모두 지어낸 얘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첫 만남 이후 1주일쯤 뒤 다시 영포빌딩에서 만났다. MB와 김백준이 기다리고 있었고, 난 동료 한 명과 함께 찾아갔다. 훗날 BBK 사건이 터진 뒤 언론에 오르내린 모든 자회사들과 각각의 역할은 이미 그날 두 번째 미팅에서 결정됐다. 아직 회사 이름은 미정이었지만 BBK, LKe뱅크, ebk뱅크 등 설립과 기존 상장회사를 인수해 우회상장하겠다는 계획까지.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이해하기 힘든 일반인들을 위해 큰 그림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MB가 내게 원한 사업 목표는 크게 3가지였다. 인터넷 회사를 세우고, 첫해부터 흑자를 내서, 상장기업으로 만들자고 했다. 그 목표 아래서 난 세부계획을 짰다. 인터넷 기반 회사 중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회사가 가장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소프트웨어 회사(후에 LKe뱅크)를 지주회사로 그 아래 각각의 금융 거래를 실제 할 수 있는 자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투자자문 회사, 증권회사, 협력은행, 보험회사까지 4개 자회사 기둥을 만드는데 합의했다.
지주회사를 금융회사가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로 내세우기로 한 배경은 투자회사의 고객관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 금감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기도 했다. 물론 사업 계획이 편법이라는 것은 MB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MB의 목표대로 인터넷 회사가 첫해부터 흑자를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흑자를 만들 수단으로 투자자문 자회사를 먼저 만들어야 했다. 그게 BBK다. 투자자문 회사는 펀드만 모으면 운영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에 시작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사업 계획을 설명한 뒤 사업자금 500억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회사들의 인허가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금감원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MB는 걱정 말라고 했다.
마지막 요구조건을 꺼냈다. "회장님, 사업을 하시려면 더이상 정치는 하시면 안됩니다." 그는 이미 정치에서 은퇴를 했고 당연히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돌아보면 그 약속은 정반대로 현실화됐다.
일단 밑그림이 그려지자 MB는 하루빨리 사업을 진행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MB에겐 걸림돌이 있었다. 선거법 위반 혐의다. 그러면서 본인이 본격적으로 사업 전면에 나서는 시점은 그 이듬해인 2000년부터라고 했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에 단행한 일명 '밀레니얼 사면'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두 번째 만남 후 한 달도 채 안돼 4개 자회사 중 첫 회사를 만들었다. 이름을 BBK로 정했다. 나중에 언론들이 내가 회사명을 내 동료였던 오영종(미국명 Bob)과 내 아내 이보라, 내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지었다고들 했다. 사실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퍼스트네임을 회사 이름으로 짓겠는가. 그저 의미 없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던 단어였다. 어차피 나중에 지주회사를 만들고 지분을 정리하면 바꿔야 할 이름이었다.
BBK를 일단 보통 회사로 설립됐고, 그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본금 5000만 원은 내 돈을 넣었다. 나중에 검찰이 BBK와 MB가 연관되어 있지 않고 내가 만든 회사라고 한 주장의 근거가 여기 있다. 하지만, 내가 BBK를 세운 것은 MB와 합의한 전체 큰 그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을 뿐이다.
또 환은스미스바니에서 퇴사한 뒤 미국 국적자인 나는 당장 체류신분이 필요했다. 비자를 얻기 위해 일단 회사부터 세웠어야 했다. BBK를 만들면서부터 사업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MB의 영향력'은 실제로 존재했다.
사무실이 필요하다 했더니 서울 중구 한복판 삼성생명빌딩의 17층 전층의 75%를 얻을 수 있었다. 자본금 5000만 원 짜리 이름 뿐인 회사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MB의 이름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BBK 사건수첩
밀레니얼 사면
김대중 정부는 2000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각종 사범 3만647명에 특별 사면을 단행했다. 98년 3·13사면(552만여명)과 93년 3·6사면(4만900여명)에 이어 3번째로 큰 규모이며 광복절 사면으로는 최대규모였다. 96년 15대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피선거법이 박탈된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전 의원도 사면됐다. MB를 비롯해 이때 사면복권된 선거사범은 총 382명이다. 당시 같은당 소속 홍준표 전의원도 그중 한명이다.
정리=정구현 기자 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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