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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흡 칼럼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전쟁은 참혹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사람들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겨준다. 그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전쟁, 아 끔찍한 전쟁이여!”라고 탄식했나 보다.   서로마 멸망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타던 동로마제국도 결국은 쇠퇴하면서, 영토는 점점 줄어들고 군사력도 약화되었다. 15세기 초에 동로마제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인이었던 동로마제국은 비록 콘스탄티노플 부근을 겨우 영유하고 있을 정도로 쇠락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만은 난공불락을 자랑할 만큼 견고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이 기독교의 손아귀에 있는 한 오스만 제국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성채만 남은 유럽의 최대도시를 함락하든지, 고사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위 3년째에 들어가는 1453년 1월, 술탄은 신하들을 불렀다. 그는 역대 술탄들이 하지 못한 일을 주문했다. 바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그는 병력을 준비했다. 정규군 8만 명, 비정규군 2만 명, 도합 10만의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오스만의 전 함대를 불러모았다. 두 달 후인 3월에 어마어마한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에 닻을 내렸고, 지상병력이 금각만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집결했다.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진을 치고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4월 6일, 청동대포가 포문을 열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황제의 지휘 아래 수도 방어에 들어갔다. 비잔틴 측의 병력은 황제 휘하의 병력 5천 명,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지원한 외국인 2천 명 등을 합쳐 7천 명에 악간 모자랐다. 7천의 병력이 10만의 대군을 맞게 된 것이다. 성벽만 무너지지 않으면, 식량만 충분하다면 버틸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 성은 4차 십자군에 의해 두 번 함락되기 앞서 1000년 동안 숱한 적들을 방어해 낸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하지만 오스만이 끌고 온 청동대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첫날 공격에 육지쪽 카라시우스문 근처 성벽이 허물어졌다. 비잔틴군은 곧바로 무너진 곳을 보수했다.     해상 방어는 금각만 입구에는 쇠사슬이 처져 있는데다 건너편 갈라타 지역에 베네치아 해군이 버티고 있어 오스만군은 성채 남쪽만 포위하고 있었다. 몇 척 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와 제노바 해군은 오스만 해군을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만만할 것 같았던 콘스탄티노플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방어군에 의해 굳건히 유지되었다. 보름 동안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술탄은 대담한 계획을 밀어붙였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금각만으로 밀어 넣어 성을 포위한다는 계획이었다. 술탄은 해협에서 금각만에 이르는 도로를 닦았다. 도로 위에 철길을 놓고 거대한 받침대를 제작해 쇠바퀴를 달았다. 그 위에 무거운 선박을 실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들이 이끄는 77척의 선박이 높이 70미터의 언덕을 넘어 금각만으로 내려왔다. 콘스탄티노플 시민은 물론 제노바 병력도 모두 대경실색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금새 금각만이 육지에서 끌려온 오스만의 선박에 의해 장악되었다.   농성 40일이 지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소규모의 수비대는 계속되는 전투에 기진맥진했고 난공불락의 성채는 오스만 군의 포격으로 사방이 허물어졌고, 성벽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렸다. 로마누스 문 근처에  있는 망루 4개가 무너져 내려앉았다. 게다가 나머지 수비군들은 내부 분열과 불화로 더욱 약화되었다.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 2000여 명의 용병을 지휘한 사람은 제노바 출신의 유스티니아니라는 용병대장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이 가시화되었을 때부터 그는 황제와 더불어 전군을 시찰하고, 훈련을 감독했다. 하지만 치열한 공방전 중에 부상을 입은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황제가 이를 목격하고 소리쳤다.“경의 상처는 경미하다. 위험이 급박하여 경이 필요한 마당에 어디로 물러간단 말이냐?”유스티니아니는 벌벌 떨면서 말했다. “소신은 하나님께서 투르크 인들에게 열어주신 바로 그 길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5월 28일, 패배를 예감한 황제와 시민들은 함께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5월 29일 자정, 이슬람 군은 수륙 양면으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오스만 포병은 전선에서, 갤리선에서, 교량 위에서 사방으로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무적의 예니체리 부대가 밀어부쳤다.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맞닿는 꼭지점 부분의 성문이 뚫리면서 이슬람 군이 성내로 밀려왔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병사들과 함께 오스만 군을 향해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며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황제의 신음소리가 들렸다.“내 머리를 베어줄 기독교인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산채로 이교도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의 갑옷을 벗어 던진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는 이윽고 혼전 속에서 어느 이름 모를 병사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시신은 시체 더미 속에 묻혔다. 그가 죽자 수비군의 저항은 끝났다. 콘스탄티노플은 약탈당했고 그 와중에 약 4,000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렇게 농성 53일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메흐메드 2세는 성 소피아 사원에서 나와 황량한 궁전으로 향했다. 그는 마냥 승리의 환희에 취해 있을 수가 없었다. 처참하게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위대함은 덧없는 것이라는 우울한 상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페르시아의 시에 나오는 시의 한 귀절을 읊었다. “거미가 황궁에 집을 지었도다. 부엉이가 아프라시압(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왕)의 탑에서 야경의 노래를 불렀도다.”동로마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문명의 승리를 기념해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메흐메드의 명령에 따라 동방교회의 본산인 성 소피아 사원은 회교 사원으로 개조된다. 그리고 192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계승한 터키 공화국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이스탄불은 470년간 가장 위대한 이슬람 세력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한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최후는 흥망성쇠 생로병사의 순환 고리를 갖는 인간사의 종말과 비유된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도 같았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옛 로마의 광휘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흥망성쇠를 거스를 수 없던, 외롭고 처절하게 결사항전하는 신민들의 절망적인 모습에선 시공을 뛰어넘은 인간적 비애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 동로마제국의 몰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스만투르크의 강력한 군사력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극심한 내부분열과 지도자들의 무능. 안보불감증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5세기 비잔틴과 21세기 한국의 상황이 완전히 들어맞을 순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적 심리적 차원의 교훈은 똑같다.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김지민 기자김건 칼럼 콘스탄티노플 성벽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콘스탄티노플 최후

2023-03-02

강희제에게 배워라

    중국의 역대 황제 약 230여 명 중 유일하게 천년에 한번 나옴직한 제왕’이란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란 호칭을 얻은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 그는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게 왕위를 유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오랫동안 천하를 통치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조차 가장 본받고 싶어 하는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한 주인공이 된 것은 한 마디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력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1654년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의 3대 황제인 순치제.. 청나라는 태조 누루하치를 거쳐 태종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이어 치열한 전쟁 끝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나라의 틀을 잡아나갔다. 하지만 청 왕조에 닥친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만주족의 총 인구는 약 100만 명.. 군대는 일당백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기병군단인 팔기군 15만 명이 국력의 전부였다. 그런 청이 약 1억5000만 명의 명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명 말기 황궁에서 극성을 부린 환관정치의 폐해와 무능한 군주 그리고 이자성의 난 등 각처의 반란 등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 자금성에 들어온 만주족은 황실 일가족과 팔기군 15만 명, 그리고 몇 만의 만주족 백성이 전부였다. 정복은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한 중원과 한족을 통치하고 군림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청 왕조의 고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황궁에서는 치열한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개국공신과 종친인 친왕들의 세력화 등등 정세는 긴박했고 복잡했다. 이런 와중에 순치제는 가장 사랑했던 후궁의 죽음으로 모든 의욕을 잃고 정사마저 멀리했다. 그러다 천연두에 걸려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순치제에게는 이복의 다섯 왕자가 있었다.  가장 총명했던 현엽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 바로 그가 강희제,. 당시 나이 일곱 살이었다. 강희제는 14세가 되었다. 당시 만주족 황실은 14세가 되면 직접 정사를 돌보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려는 강희제에게 네 명의 대신은 강력한 벽이었다. 강희제는 색니의 손녀를 황후를 맞아들여 권력집합체의 분열을 시도했다. 하지만 색니가 죽자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강희제는 오배와 정면 승부를 결정했지만 할머니인 효장태후가 만류하자 일단 힘을 기르는 데 전력을 집중했다. 1669년, 17세가 된 강희제는 드디어 거사를 단행한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전언을 오배에게 보내고 오배가 방심한 채 들어오자 무사들을 매복시켜 그를 잡은 것이다.   내부 정비를 마친 강희제를 기다리는 것은 오배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청의 개국 공신인 한족 출신 번왕으로 오삼계, 상가희 그리고 경충명이다. 이들 3명의 번왕은 각각의 영지에서 모든 권한과 사병, 그리고 재정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며 청나라 안에 세 곳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을 제거해야 진정한 황제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상가희가 은퇴를 청원하며 아들에게 영토의 왕위를 세습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강희제는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안 된다는 강한 원칙을 세웠다. 그러자 오삼계를 주축으로 세 번왕은 반란을 일으켰다.  강희제는 강한 결의와 집중력을 발휘해 토벌을 결정, 무려 9년간의 전쟁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세 번왕의 기세가 올랐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청의 관군을 제압, 강희제로 하여금 수도를 옮길까 고민하게까지 만들었다.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본 외지의 소수 이민족과 명나라의 복권을 꾀하는 세력의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았다. 강희제의 고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강희제는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해 점차 승기를 잡아나갔다. 이때 강희제가 세운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반란군에게 강하게 응전을 했지만 항복을 하면 모두 용서하고 재산과 목숨을 보존해주는 정책을 동시에 실행한 것이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점차 명분과 세력을 잃어가던 삼번의 반란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강희제에게 항복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 강희제는 이른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33년간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 시대를 열기 위한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만주어는 기본이되 전국 통치를 위한 한족어 공부를 시작했다. 굳이 한자를 몰라도 되는 황제의 위치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를 원했던 그는 언어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스승은 명나라 마지막 과거시험의 장원급제가인 제세였다. 당시 명나라 출신 학자들은 청왕조를 철저히 무시했다. 고염무, 황종희, 이곽 등 당대의 한족 유학자들은 청왕조의 부름도 거역했고 특히 이곽은 강희제가 친히 7번이나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정도로 도도한 태도를 보였다. 강희제는 한편으로 명나라의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이를 한족에게 맡기기도 했고 인재 발굴을 위한 과거시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과거시험에는 한족이 한 명도 응시하지 않는 등 한족의 인재들로부터 마음을 얻는 데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고심 끝에 우선 천하의 인재를 얻고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주접’이란 비밀통신조직을 만들어 관리의 부패와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탄압을 보고받고 이를 시정하는 일을 시행했다. 강희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제와 청빈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나라 시절 궁궐에는 무려 1만여 명이 넘는 환관과 궁녀들이 있었는데 대규모 조정 작업을 거쳐 400여 명만 남겼다. 심지어 강희제의 침전을 시중드는 내관의 숫자도 10여 명으로 줄였다. 강희제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이는 개념은 ‘국궁진력(鞠窮盡力)’의 정신이다. 이 말은 삼국시대 촉의 재상이던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피를 토하면서 올렸던 〈후출사표〉에 나오는 글귀이다. 즉 국궁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진정 몸을 굽혀‘최선을 다해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라는 뜻이다. 사실 제왕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쓰기에 적합한 것이다. 당연히 강희제의 신하들도 이 점을 지적했지만, 강희제는 “나는 하늘의 신하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 당신들은 퇴근해 잠시 쉴 수도 있고 은퇴하면 손자와 다정하게 놀 수도 있지만 나는 단 하루도 쉴 수가 없는 제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피력했다.  또한 “제왕이 오늘 한두 가지 일을 미루어 놓으면 내일 한두 가지 더 미루어야 할 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도 오늘 할 일은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강희제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궁극적인 이유는 ‘인재 발굴이었다. 그는 세상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지만 그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쓰기 위해서는 ‘우선 군주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지식과 안목 그리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한족과 만주족은 물론이고 서양의 선교사 출신 중에서도 인재를 발굴해 측근에 두고 재주를 펼치게 한 것이다.  이런 자세로 무려 61년 동안 청나라를 통치하자. 당연히 나라는 더욱 융성하고 백성의 삶은 즐겁게 변해갔다.   하지만 강희제의 마음을 어둡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만주족과 한족의 진정한 통합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거대한 한족의 문화에 만주족의 문화가 흡수되는 통합이 이루어지겠지만 지도자 그룹에서만이라도 강희제는 마음을 여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첫 번째 조치로 궁중이나 귀족 그리고 지도자 그룹에서도 만주어가 아닌 한자를 쓰게 했다. 일단 언어적인 통합의 길을 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같은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강희제는 ‘향음주례’ 시  반드시 만주족과 한족이 함께 할 것을 명했다. 서로 살아온 전통이 다르고 그로 인해 조상신을 숭배하는 방법이 같지 않은 두 민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치였다. 반발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강력하게 이를 제압하고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을 네 가지로 분류해 한 상에 올릴 것까지 지시했다.  강희제의 재위 61년은 그가 미리 쓴 유서격인 〈고별상유〉에 나오는 글귀처럼 치열한 자기와의 투쟁이었다.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후대에 우환을 남긴다”는 말과 함께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정사를 돌보았던 마음을 남겼다. 어쩌면 강희제는 앞으로 섬김과 소통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이뿐이랴. 우리 같은 필부도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김지민 기자강희제 김건 제압 강희제 이때 강희제 황제인 순치제

2022-03-23

김건흡 칼럼 나이듦의 지혜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다. 또 한 살 먹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노라면 문득 낯설게 느껴진다. 이게 내 얼굴인가. 노년의 저 깊고 견고한 주름. 지난 시간에 의하여 그 부드러움을 박탈당한 저 메마른 얼굴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표정은 무엇인가. 저 무력하고 완강한 침묵. 이 세상에 대하여 일체의 발언권을 박탈당한 듯한 저 ‘벙어리 됨’속에는 어떤 호소가 숨어있는가.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 외롭거나 불쌍한 노인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도 늙어가고 있고, 또 주변에서 노인 소리를 들으면서 비롯된 강박관념이랄까. 행복한 노인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마음까지 비추는 거울이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퍽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 앞에서 누구나 자신만만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거울을 멀리한지도 오래 되었다. 나도 노인 소리 들으면서부터는 사진 찍기가 싫다. 공개되어야 할 사진을 찍기는 더욱 싫다. 두렵기조차 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을. 육체의 나이를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든 정신의 성숙도 함께 꾀해서 나이 들어 진실로 지혜롭고 멋진 노인이 되어야 하리라.     지난 2018년 국내에서 개봉된 후지하라 켄지 감독의 〈인생 후르츠〉는 우리에게 '노년'의 삶에 대한 방식을 일깨워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일본의 배우 키키 키린이 내레이션을 한 영화는 할머니의 흙 예찬론으로 시작된다. 90세 할아버지 슈이치와 87세 할머니 히데코. 두 사람의 나이를 합하면 177세. 65년을 함께 산 노부부는 집 텃밭에서  50여 가지 과일과 70여 가지 채소를 가꿔 식탁에 올리고 이웃과 나누며 살아간다. 노부부는 숲으로 둘러싸인 15평 규모의 아담한 삼나무 단층집을 짓고 50년째 살고 있다.     슈이치 할아버지는 ‘조종실’이라고 부르는 작업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기록 마니아답게 자잘한 일상부터 논문, 설계도 같은  작업의 기록까지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는 매일 평균 10통의 손편지를 직접 써서 보낸다. 단골 생선가게 주인에게까지 덕분에 잘 먹었노라는 감사 편지를 생생한 그림까지 넣어 보내기도 한다. 히데코 할머니는 요리, 뜨개질, 베틀 짜기까지 공을 들여야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손녀에게  손수 음식을 만들어 보내고, 또한 공들여 키운 먹거리를 아낌없이 주변에 나눈다.   노부부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태풍으로 마을이 수몰되자 정부에서는 고지대에 뉴타운을 조성하는 계획을 세운다. 뉴타운 건축 책임을 맡게 된 슈이치는 야산이었던 그곳의 녹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도시를 계획한다. 하지만 젊은 건축가의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밀집형 아파트로 채워진 뉴타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슈이치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300평의 땅을 샀다. 그로부터 50여 년, 과일 50종에 채소 70종을 키우며 그곳을 자연으로 꾸렸다. 그리고 뉴타운 단지 뒤의 민둥산에 도토리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가꿨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 차근차근 천천히.’     농작물이 잘 자라려면 흙이 좋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지론은 아파트 단지 속  뉴타운에 숲을 만들기 위해 지난 50년의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의 건축론으로 이어진다. ‘집은 삶의 보석상자여야 한다’영화에 소개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정의다. 할아버지에게 보석상자로서의 집은 ‘자연친화적’인 안식처다. 그의 꿈은  결국 개발에 밀려났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시간을 모아서 50년 동안 자신의 꿈을 심었다.     슈이치가 평생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반려자인 히데코가 있었기 때문이다. 월급이 4만 엔이던 시절에 70만 엔짜리 요트를 사겠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던 아내 히데코다. 영화가 시작할 때 그녀의 나이 87세, 그 세대의 여성들이 그러하듯 그녀 역시 남편을 받들고  순종하는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전형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히데코의 삶이 그저 전근대적 여성의 숙명적 삶이라고만 여겨지지 않는다. 〈인생 후르츠〉가 2018년 서울국제음식영화제에 초빙 받을 정도로, 매 끼니 밥을 먹는 남편을 위해 죽순 덮밥에서부터 생딸기 케이크, 푸딩에 이르기까지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건 '의무'의 경지를 넘어선다.     슈이치는 뉴타운 건설 과정에서 건축가로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 좌절하여 뜻을 꺾는 대신, 그 이후 50년에 걸쳐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자신과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이면 도시 전체가 다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주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아내 히데코 역시 가족에게 좋은 것이 곧 자신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지만 자신은 단출한 토스트 한 조작으로 한 끼를 대신하는 알뜰함도 잃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해온 부부. 하지만 장어덮밥을 먹고 잠든 남편 슈이치는 다음 날 눈을 뜨지 않았다. 아내는 담담하게 남편을 보낸다. 대신 오래도록 남편의 영정 앞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마련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 90살이던 남편처럼 90살이 된 아내, 지난 65년 동안 남편과 함께했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늘 남편의 뜻을 따라 살던 아내에게 지금의 삶은 때로는 덧없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코는 다시 의연하게 살아간다. 슈이치는 갔지만 그의 꿈은 자연친화적인 병원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살아왔듯 삶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 그건 영화 속 대사처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다큐를 찍던 중 저세상으로 떠난 슈이치 할아버지에 이어 히데코 할머니도 얼마 후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에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들린다. 영화는 노부부를 통해 현명하게 나이 들어가는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숨넘어갈 듯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에게 속삭이듯 삶의 지혜를 이야기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고.   최선을 다하는 노인의 삶은 아름답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에 대해 더욱 완숙해지고,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이 들고 늙는 그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완숙이 없이 육체만 늙어버린 상태이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진실로 싫어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외형의 주름살이나 구부러진 허리가 아니라, 아직도 다스리지 못한 욕망을 덕지덕지 내보이며 생리적 연치만 내세워 심술을 부리는 그런 노년의 상태일 것이다. 집안에도 그렇고, 나라에도 그렇고, 진정한 어른이 건재하고 사랑과 활기에 찬 노인이 계시는 곳은 눈부실 것 같다. 한 살을 더했다. 가만히 시를 음미해 본다.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김지민 기자김건 칼럼 할아버지 슈이치 슈이치 할아버지 노인 소리

2022-02-16

김건흡 칼럼 저건 아닌데

   나는 해병이다.  나는 해병대에서 장교로 5년간 복무한 후 1967년 6월 대위로 전역했다. 나는 믿는다.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강한 훈련이 강한 군대를 만든다. 이것이 해병이다.     며칠 전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보았다. 군기 빠진 후배들에 대한 어느 해병의 애정 어린 질타였다. 내가 해병이어서 그럴까. 관심 깊게 읽었다.     “어제 지하철 건대역 입구 부근에서 전투복 입고 건들대던 한 후배 일병을 보고 그 패기(?)에 놀랐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하는데 부대가 얼마나 흘렀으면 저리도 군기 빠진 모습으로 부대 밖을 당당히(?) 활보한단 말입니까. 또 며칠 전에는 길거리에서 탈모한 채 뒷짐 지고 배회하던 후배를 봤는데 요즘 선임 간부님들은 뭐 하는 겁니까. 원래 해병대 출타 때는 타군이나 민간인들에게 최고로 보이도록 몸도 햇볕에 그을리고, 몸도 다부지게 단련하고, 두발도 와일드하게 바싹 깎고, 정복 각(角)도 손이 베일만큼 다리고 A급으로 준비한 후 각종 인계사항 숙지 후 밖에서도 부대 안에서와 다름없이 약간 거칠고 악기로 가득 찬 눈빛과 잔뜩 기합 든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 실망스럽습니다. 예전 군대와 달리 맥 빠지고 군기 빠진 행태가 전군 공통이라 하지만, 그래도 해병대만은 딴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타집단과는 달리 해병대는 도전하는 자들만 받아서 거칠게 단련하다 보니 긴 교육훈련도, 힘든 훈련도 내무생활도 모두 ‘해병대’라는 긍지 하나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의 군기 빠진 모습을 보면 좀 화가 납니다..”   요즘 선거철이다 보니 각당 후보들이 단골로 찾아가는 곳이 해병대다. 이재명 후보도 해병대를 찾았다. 그런데 이 후보가 여기서 또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이 후보는 최근 경기도 김포시 해병대 2사단 방문 당시 사단장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할 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장면이 언론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이 후보는 군 관계자들과 달리 군복 상의 옷깃을 세운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통령은 국군 최고사령관인 군통수권자다.  빨간 명찰의 해병대 방한복을 입고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사단장 연대장과 걸어가는 모습은 대선후보의 품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몇 년 전 인기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유시진 대위는 “군인은 늘 수의를 입고 산다. 이름 모를 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죽어갈 때, 그 자리는 무덤이 되고 군복은 수의가 된다. 군복은 그만한 각오로 입어야 한다.”고 말했다.   군인에게‘입수보행’은 절대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규칙이다.  군인복무규율은 군인이 군복 차림으로 걸을 때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입수), 모자를 벗거나(탈모), 음식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취식)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군복 차림으로 입수ㆍ탈모ㆍ취식 보행은 3대 금기 사항이다. 국군통수권자가 되겠다는 분이 어떻게 이런 기본수칙 하나도 몰랐을까. 주위에서 참모들은 뭘 했단 말인가. 당연히 온라인상에서 누리꾼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군대 다녀온 남성들은 이 후보의 ‘입수보행’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했다.   “병역미필이라 몰라서 그렇다 치자,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감히 주머니에 손 못 넣지.”     “군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신성한 ‘국방’을 상징하는데 군복을 입고 저런 자세에 저런 표정이라니 군인에 대한 기본존중이 보이지 않는다. 군 미필이어서 몰랐다 해도 주머니에 손을 넣을 생각을 하는 게 놀랍다.”   한 네티즌은 “군대 갔다 온 사람이면 군복 입고 주머니에 손 넣고 걸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이라며 “그 분은 입수보행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이 후보가 군 미필자여서 ‘입수보행’이 금기 사항이란 걸 모르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 후보는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군 면제를 받았다. 다른 네티즌은 “군 면제 후보가 군복 입고 입수보행을 하니 더 안 좋게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 후보의 해병대 방문 논란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미담 제조기로 불리는 유명 배우 정우성은 최종 학력 미달로 군 면제를 받았다. 2017년 11월 30일 정우성은 당시 주연이었던 영화 '강철비' 개봉 홍보 인터뷰 중 사격 자세를  취해달라는 리포터의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정우성은 건네받은 물총을 자신의 오른쪽 얼굴에 갖다 대고 오른쪽 눈을 가늠좌에 최대한 가까이 붙였다. 이 모습이 사뭇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정우성은 주변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명한 자세”라며 “아시는 분은 알 것이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과연 정우성은 이 후보의 입수보행에 대해서도 "유명한 자세"라며 풍자할까. 정우성이 언급한 ‘유명한 자세’는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격 장면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 2007년 12월 전방 부대를 방문했을 때 소총 사격 자세를 취한 적이 있다. 이때 이 전 대통령은 어깨에 붙여야할 개머리판에 얼굴을 갖다 대 많은 군필 남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던 정우성은 2016년 11월 영화 ‘아수라’ 단체 관람 행사에서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호기있게 소리치는 등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수차례 드러내왔다. 공교롭게도 정우성 주연의 영화 '아수라'는 배경이 되는 가상 도시 ‘안남시’의 명칭 등 일부 소재가 성남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다.     이재명 후보의 해병대 방문 논란을 보면서  대학 졸업 후 진해 해병학교에서 간부후보생과정 훈련을 받을 때의 악몽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도 ‘입수보행’이 화근이었다. 입교식을 마치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어느 눈치 없는 후보생이 교내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다가 운 나쁘게 구대장의 눈에 띄었다. 그날 밤 후보생들은 팬티 차림에 완전무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여 정신이 쑥 빠지는 단체기합을 받았다. 군기잡기의 시작이었다. 연병장 구보로 탈진할 즈음 차가운 바닷물 속에 들어가 겨울철 냉수욕(?)을 마친 후 다시 연병장에 도열하여 이번에는 엉덩이에서 불이 번쩍 나는 ‘빳다’ 세례식을 치루었다. 차가운 바닷물로 경직되었던 몸은 금방 화끈해지면서 노글노글해졌다. 겨울철 바닷물이 외기 온도보다 더 따뜻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의 일이다. 해병대는 아련한 추억이다. 해병대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김지민 기자김건 칼럼 해병대 방한복 해병대 출타 해병대 2사단

2022-02-03

[살며 생각하며] 아! 다부동

다부동은 대구에서 불과 20㎞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으로 유학산과 팔공산 사이의 큰 골짜기다. 당시 다부리와 유학산은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피아(彼我) 공방의 화포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었던 곳이다.    그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피아 모두 2만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 외에도 경찰, 학도병, 노무병, 지역주민 등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남침을 받은 이래 50여 일 동안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은 이곳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밀고 밀리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적의 막강한 주력에 패배를 안겨주며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끝까지 대구를 사수했던 다부동 전투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해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였다. 유엔군의 작전은 어떻게든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50년 8~9월 낙동강 전선에는 김책 전선 사령관 휘하의 북한군 1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고, 이에 맞서는 한국군은 5개 사단, 미군은 3개 사단이었다. 신속하게 부산까지 밀고 가서 전쟁을 끝내라는 김일성의 재촉을 받고 있던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미군 사이에 처절한 결전이 벌어졌지만, 북한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컸다. 이 어려운 상황을  국군 1사단은 잘 버텨냈다.    북한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정한 8월 15일이 가까워지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사단이 맡은 전선 전부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이즈음 북한군 105 전차사단은 새로 보급받은 전차 21대를 모두 대구 공격 사단에 투입했다. 화력이 약한 데다 전차를 갖지 못한 1사단으로선 중대한 고비였다. 백선엽 장군은 상부에 거듭 증원을 요청했다. 미 8군사령부도 1사단의 절박함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다.     8월 15일은 그야말로 위기의 절정'이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사단의 모든 정면은 서로 몸으로 뒤엉키는 백병전(육박전) 양상이 됐다. 적과 너무 가까이 대치해 소총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밤낮으로 계속됐다. 고지 곳곳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지옥도가 전개된 것이다. 8월 16일 왜관 일대에 6·25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융단폭격이 실시됐다. 이보다 앞서 8월 14일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의 1사단 정면에서 3·13·15 사단 등3개 사단으로 중앙돌파를 기도하고 있었다.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도착했다. 1개 전차 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그리고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 전투는 중요했다.  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기선을 제압당해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미 1 기병사단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8군 사령부에 철수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모두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 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다. 더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가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이렇게 말하고 그는 돌격 명령을 내린 채 선두에 서서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이에 병사들도 사단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고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탈환했다. 8월 21일 다부동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고, 8월 22일 전세가 드디어 국군과 미군 측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고지 아래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했던 12연대가 드디어 유학산 정상의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한 것이었다.     다부동 전투 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포격과 폭격으로 산은 한 껍질 벗겨져서 풀 한 포기 살아남은 게 없었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진동하는 적의 시체를 쌓아 방벽을 삼았고 적의 시체에 걸터앉아 밥을 먹었다.    포탄이 터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의 살점과 창자가 범벅되어 사방으로 튄다. 밥 먹다가도 그것을 뒤집어써야 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나뭇가지에 시체의 창자가 걸려 있기도 했다. 주먹밥을 받으면 순간 똥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먼저 먹는다. 그래도 파리를 쫓아가며 그 밥을 먹어야 했다. 핏물이 괴인 계곡물을 마셨고 오줌도 마셨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조지훈 시인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전투 현장의 끔찍했던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690여 명이, 국군과 미군은 3500여 명이 전사했다. 부상자까지 더해 남북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캄캄한 밤에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쳤다. 어둠 속에 비명이 절규했다.   다부동 전투는 전세를 바꿨다. 북한군의 기세를 꺾었다. 북한군은 다부동 패전으로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했다. 반면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고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전쟁은 역전됐다.    낙동강 방어선의 정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만일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면 임시수도인 대구가 곧바로 함락되었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남은 것은 미군의 철수였다.     결국 이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한국 사람 중 11월 23일이 고 백선엽 장군 탄생 101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군인 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는 페이스북에 “오늘(11월 23일)은 백선엽 장군이 태어난 지 101주년 되는 날”이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보여주신 리더십, 조국을 위한 일생의 헌신과 끝없는 전우애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공의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을 함께 지켜낸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백선엽 장군이 100세로 별세했을 때 청와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집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반역자’로 몰고 갔다. 그런데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모두 애도 성명을 냈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마땅히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말을 외국이 대신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외국의 사랑과 우정은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101번째 생일도 유엔사가 대신 챙겨주었다.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이 올해 처음으로 ‘국군 포로’ 문제를 포함했다. 반면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세 번이나 만났지만 ‘국군 포로’를 언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보훈처는 6·25 영웅 포스터에 국군 아닌 중공군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누구의 희생 덕분인가. 부끄러울 뿐이다. 대한민국은 71년 전의 다부동 전투를 잊었는가. 이승하 시인은 그의 ‘우리들의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아느냐. 다부동 그날 산 허물어져 하늘 뚫리어 네 할아버지 혼령조차 혼비백산했는가. 무덤은 어디서고 찾을 수 없었다. 아들아 너는 볼링 앨리 (다부동을 가리킴) 그날 대낮 같던 밤의 부르짖음을 상상할 수 있느냐…”   그로부터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다부동을 잊고 있다. 호국의 영웅들이 푸대접을 받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복음 19:40) 조그만 산마을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 산하가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이고,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늘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그 황폐했던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조국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김건 칼럼 사단 미군 국군 1사단 국군과 유엔군

202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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