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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아! 다부동

김건흡 / MDC시니어센터 회원

다부동은 대구에서 불과 20㎞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으로 유학산과 팔공산 사이의 큰 골짜기다. 당시 다부리와 유학산은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피아(彼我) 공방의 화포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었던 곳이다. 
 
그해 1950년 8월 1일부터 9월24일까지 55일간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피아 모두 2만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부동 전투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 외에도 경찰, 학도병, 노무병, 지역주민 등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남침을 받은 이래 50여 일 동안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은 이곳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밀고 밀리는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처음으로 적의 막강한 주력에 패배를 안겨주며 반격의 계기를 마련했다. 끝까지 대구를 사수했던 다부동 전투는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해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였다. 유엔군의 작전은 어떻게든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1950년 8~9월 낙동강 전선에는 김책 전선 사령관 휘하의 북한군 1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고, 이에 맞서는 한국군은 5개 사단, 미군은 3개 사단이었다. 신속하게 부산까지 밀고 가서 전쟁을 끝내라는 김일성의 재촉을 받고 있던 북한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미군 사이에 처절한 결전이 벌어졌지만, 북한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컸다. 이 어려운 상황을  국군 1사단은 잘 버텨냈다. 
 
북한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정한 8월 15일이 가까워지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사단이 맡은 전선 전부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이즈음 북한군 105 전차사단은 새로 보급받은 전차 21대를 모두 대구 공격 사단에 투입했다. 화력이 약한 데다 전차를 갖지 못한 1사단으로선 중대한 고비였다. 백선엽 장군은 상부에 거듭 증원을 요청했다. 미 8군사령부도 1사단의 절박함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다.  
 
8월 15일은 그야말로 위기의 절정'이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사단의 모든 정면은 서로 몸으로 뒤엉키는 백병전(육박전) 양상이 됐다. 적과 너무 가까이 대치해 소총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밤낮으로 계속됐다. 고지 곳곳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지옥도가 전개된 것이다. 8월 16일 왜관 일대에 6·25 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융단폭격이 실시됐다. 이보다 앞서 8월 14일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의 1사단 정면에서 3·13·15 사단 등3개 사단으로 중앙돌파를 기도하고 있었다.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도착했다. 1개 전차 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그리고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 전투는 중요했다.  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1연대 1대대가 기선을 제압당해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미 1 기병사단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8군 사령부에 철수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에 백선엽 장군이 후퇴하는 병사들 앞으로 달려갔다.  
 
"모두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 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후퇴할 곳이 없다. 더 밀리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가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이렇게 말하고 그는 돌격 명령을 내린 채 선두에 서서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이에 병사들도 사단장의 뒤를 따라 돌격했고 대대는 삽시간에 고지를 탈환했다. 8월 21일 다부동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고, 8월 22일 전세가 드디어 국군과 미군 측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고지 아래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야 했던 12연대가 드디어 유학산 정상의 적을 섬멸하고 고지를 탈환한 것이었다.  
 
다부동 전투 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포격과 폭격으로 산은 한 껍질 벗겨져서 풀 한 포기 살아남은 게 없었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진동하는 적의 시체를 쌓아 방벽을 삼았고 적의 시체에 걸터앉아 밥을 먹었다. 
 
포탄이 터지면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의 살점과 창자가 범벅되어 사방으로 튄다. 밥 먹다가도 그것을 뒤집어써야 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나뭇가지에 시체의 창자가 걸려 있기도 했다. 주먹밥을 받으면 순간 똥파리가 새까맣게 달라붙어 먼저 먹는다. 그래도 파리를 쫓아가며 그 밥을 먹어야 했다. 핏물이 괴인 계곡물을 마셨고 오줌도 마셨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조지훈 시인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전투 현장의 끔찍했던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690여 명이, 국군과 미군은 3500여 명이 전사했다. 부상자까지 더해 남북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캄캄한 밤에 지척의 거리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쳤다. 어둠 속에 비명이 절규했다.
 
다부동 전투는 전세를 바꿨다. 북한군의 기세를 꺾었다. 북한군은 다부동 패전으로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했다. 반면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고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전쟁은 역전됐다. 
 
낙동강 방어선의 정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만일 국군과 미군이 인민군에 의해 돌파당했다면 임시수도인 대구가 곧바로 함락되었을 것이고,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였을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남은 것은 미군의 철수였다.  
 
결국 이 다부동 전투는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아낸 결정적인 전투였다. 병력 8000명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기적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유엔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후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했고, 1·4 후퇴 뒤엔 서울을 최선봉에서 탈환했다.  
 
한국 사람 중 11월 23일이 고 백선엽 장군 탄생 101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 군인 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는 페이스북에 “오늘(11월 23일)은 백선엽 장군이 태어난 지 101주년 되는 날”이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 보여주신 리더십, 조국을 위한 일생의 헌신과 끝없는 전우애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중공의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을 함께 지켜낸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백선엽 장군이 100세로 별세했을 때 청와대와 민주당은 애도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국군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도 조문하지 않았다. 집권 세력은 그가 일제강점기 20대 초반 나이에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반역자’로 몰고 갔다. 그런데 백악관과 국무부, 전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모두 애도 성명을 냈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 ‘위대한 군사 지도자’라는 최고의 헌사를 바쳤다. 마땅히 우리 정부가 해야 할 말을 외국이 대신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외국의 사랑과 우정은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의 101번째 생일도 유엔사가 대신 챙겨주었다.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이 올해 처음으로 ‘국군 포로’ 문제를 포함했다. 반면 문 대통령이 김정은을 세 번이나 만났지만 ‘국군 포로’를 언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보훈처는 6·25 영웅 포스터에 국군 아닌 중공군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누구의 희생 덕분인가. 부끄러울 뿐이다. 대한민국은 71년 전의 다부동 전투를 잊었는가. 이승하 시인은 그의 ‘우리들의 유토피아’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아들아, 너는 아느냐. 다부동 그날 산 허물어져 하늘 뚫리어 네 할아버지 혼령조차 혼비백산했는가. 무덤은 어디서고 찾을 수 없었다. 아들아 너는 볼링 앨리 (다부동을 가리킴) 그날 대낮 같던 밤의 부르짖음을 상상할 수 있느냐…”
 
그로부터 71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다부동을 잊고 있다. 호국의 영웅들이 푸대접을 받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누가복음 19:40) 조그만 산마을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온 산하가 젊은이들의 피로 물들이고,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늘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그 황폐했던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조국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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