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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에게 배워라

김건흡 칼럼

 
 

중국의 역대 황제 약 230여 명 중 유일하게 천년에 한번 나옴직한 제왕’이란 뜻의 ‘천고일제(千古一帝)’란 호칭을 얻은 청나라의 4대 황제인  강희제.. 그는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게 왕위를 유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오랫동안 천하를 통치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중국 지도자들조차 가장 본받고 싶어 하는 최고의 리더십을 발휘한 주인공이 된 것은 한 마디로 ‘피를 토할 정도로 노력하는 리더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1654년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의 3대 황제인 순치제.. 청나라는 태조 누루하치를 거쳐 태종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이어 치열한 전쟁 끝에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순치제가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나라의 틀을 잡아나갔다. 하지만 청 왕조에 닥친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시 만주족의 총 인구는 약 100만 명.. 군대는 일당백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기병군단인 팔기군 15만 명이 국력의 전부였다. 그런 청이 약 1억5000만 명의 명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명 말기 황궁에서 극성을 부린 환관정치의 폐해와 무능한 군주 그리고 이자성의 난 등 각처의 반란 등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 자금성에 들어온 만주족은 황실 일가족과 팔기군 15만 명, 그리고 몇 만의 만주족 백성이 전부였다. 정복은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대한 중원과 한족을 통치하고 군림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청 왕조의 고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황궁에서는 치열한 세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많은 개국공신과 종친인 친왕들의 세력화 등등 정세는 긴박했고 복잡했다. 이런 와중에 순치제는 가장 사랑했던 후궁의 죽음으로 모든 의욕을 잃고 정사마저 멀리했다. 그러다 천연두에 걸려 불과 2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순치제에게는 이복의 다섯 왕자가 있었다.  가장 총명했던 현엽이 황제의 위에 오른다. 바로 그가 강희제,. 당시 나이 일곱 살이었다. 강희제는 14세가 되었다. 당시 만주족 황실은 14세가 되면 직접 정사를 돌보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려는 강희제에게 네 명의 대신은 강력한 벽이었다. 강희제는 색니의 손녀를 황후를 맞아들여 권력집합체의 분열을 시도했다. 하지만 색니가 죽자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강희제는 오배와 정면 승부를 결정했지만 할머니인 효장태후가 만류하자 일단 힘을 기르는 데 전력을 집중했다. 1669년, 17세가 된 강희제는 드디어 거사를 단행한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전언을 오배에게 보내고 오배가 방심한 채 들어오자 무사들을 매복시켜 그를 잡은 것이다.  
내부 정비를 마친 강희제를 기다리는 것은 오배보다 더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들은 청의 개국 공신인 한족 출신 번왕으로 오삼계, 상가희 그리고 경충명이다. 이들 3명의 번왕은 각각의 영지에서 모든 권한과 사병, 그리고 재정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하며 청나라 안에 세 곳의 영토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을 제거해야 진정한 황제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상가희가 은퇴를 청원하며 아들에게 영토의 왕위를 세습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강희제는 은퇴는 허락하되 세습은 안 된다는 강한 원칙을 세웠다. 그러자 오삼계를 주축으로 세 번왕은 반란을 일으켰다.  강희제는 강한 결의와 집중력을 발휘해 토벌을 결정, 무려 9년간의 전쟁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세 번왕의 기세가 올랐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청의 관군을 제압, 강희제로 하여금 수도를 옮길까 고민하게까지 만들었다. 내분이 일어나는 것을 본 외지의 소수 이민족과 명나라의 복권을 꾀하는 세력의 움직임까지 심상치 않았다. 강희제의 고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강희제는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해 점차 승기를 잡아나갔다. 이때 강희제가 세운 전략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반란군에게 강하게 응전을 했지만 항복을 하면 모두 용서하고 재산과 목숨을 보존해주는 정책을 동시에 실행한 것이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점차 명분과 세력을 잃어가던 삼번의 반란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강희제에게 항복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 강희제는 이른바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33년간의 태평성대인 ‘강건성세’ 시대를 열기 위한 정치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만주어는 기본이되 전국 통치를 위한 한족어 공부를 시작했다. 굳이 한자를 몰라도 되는 황제의 위치였지만, 직접적인 통치를 원했던 그는 언어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스승은 명나라 마지막 과거시험의 장원급제가인 제세였다. 당시 명나라 출신 학자들은 청왕조를 철저히 무시했다. 고염무, 황종희, 이곽 등 당대의 한족 유학자들은 청왕조의 부름도 거역했고 특히 이곽은 강희제가 친히 7번이나 찾아가 도움을 청했을 정도로 도도한 태도를 보였다. 강희제는 한편으로 명나라의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이를 한족에게 맡기기도 했고 인재 발굴을 위한 과거시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첫 번째 과거시험에는 한족이 한 명도 응시하지 않는 등 한족의 인재들로부터 마음을 얻는 데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고심 끝에 우선 천하의 인재를 얻고 민심을 얻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주접’이란 비밀통신조직을 만들어 관리의 부패와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탄압을 보고받고 이를 시정하는 일을 시행했다. 강희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절제와 청빈한 생활의 모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나라 시절 궁궐에는 무려 1만여 명이 넘는 환관과 궁녀들이 있었는데 대규모 조정 작업을 거쳐 400여 명만 남겼다. 심지어 강희제의 침전을 시중드는 내관의 숫자도 10여 명으로 줄였다.
강희제의 리더십이 가장 돋보이는 개념은 ‘국궁진력(鞠窮盡力)’의 정신이다. 이 말은 삼국시대 촉의 재상이던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피를 토하면서 올렸던 〈후출사표〉에 나오는 글귀이다. 즉 국궁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진정 몸을 굽혀‘최선을 다해 모든 힘을 쏟아 붓는다’라는 뜻이다. 사실 제왕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신하의 입장에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쓰기에 적합한 것이다. 당연히 강희제의 신하들도 이 점을 지적했지만, 강희제는 “나는 하늘의 신하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 당신들은 퇴근해 잠시 쉴 수도 있고 은퇴하면 손자와 다정하게 놀 수도 있지만 나는 단 하루도 쉴 수가 없는 제왕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속마음을 피력했다.  또한 “제왕이 오늘 한두 가지 일을 미루어 놓으면 내일 한두 가지 더 미루어야 할 일이 생긴다. 그러므로 단 한 가지도 오늘 할 일은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강희제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궁극적인 이유는 ‘인재 발굴이었다. 그는 세상에는 수많은 인재가 있지만 그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고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쓰기 위해서는 ‘우선 군주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지식과 안목 그리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한족과 만주족은 물론이고 서양의 선교사 출신 중에서도 인재를 발굴해 측근에 두고 재주를 펼치게 한 것이다.  이런 자세로 무려 61년 동안 청나라를 통치하자. 당연히 나라는 더욱 융성하고 백성의 삶은 즐겁게 변해갔다.  
하지만 강희제의 마음을 어둡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만주족과 한족의 진정한 통합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거대한 한족의 문화에 만주족의 문화가 흡수되는 통합이 이루어지겠지만 지도자 그룹에서만이라도 강희제는 마음을 여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 첫 번째 조치로 궁중이나 귀족 그리고 지도자 그룹에서도 만주어가 아닌 한자를 쓰게 했다. 일단 언어적인 통합의 길을 연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같은 자리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강희제는 ‘향음주례’ 시  반드시 만주족과 한족이 함께 할 것을 명했다. 서로 살아온 전통이 다르고 그로 인해 조상신을 숭배하는 방법이 같지 않은 두 민족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조치였다. 반발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강력하게 이를 제압하고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을 네 가지로 분류해 한 상에 올릴 것까지 지시했다.  강희제의 재위 61년은 그가 미리 쓴 유서격인 〈고별상유〉에 나오는 글귀처럼 치열한 자기와의 투쟁이었다.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후대에 우환을 남긴다”는 말과 함께 하루하루 온 힘을 다해 정사를 돌보았던 마음을 남겼다. 어쩌면 강희제는 앞으로 섬김과 소통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이뿐이랴. 우리 같은 필부도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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