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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직결된 행위…무슬림 한 달간 금욕 생활

종종 인간은 종교를 통해 육신의 본능을 제어한다. 이는 인간이 신에게 철저히 종속된 존재임을 인지하고, 육체의 쾌락을 통제해 신앙의 깊은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열심이다. 현재 무슬림은 이슬람의 성월인 라마단(3월 10일~4월 9일)을 보내고 있다. 이 기간 무슬림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을 한다.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고 성관계 등 행동에도 철저한 금욕 생활을 감내한다. 과연 인간은 일시적인 금욕 행위를 통해 종교가 내포한 영원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까. 지난 10일부터 시작된 무슬림들의 라마단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이슬람의 토대는 코란이다. 천사 가브리엘은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첫 계시를 줬다.   무슬림은 금식의 행위를 통해 이를 기념한다. 그 기간을 라마단(Ramadan)으로 일컫는다.   라마단은 ‘불에 탄다’는 의미다. ‘라미다(Ramida)’에서 파생했다. 이 기간에 금식을 통해 죄를 불에 태워 없애겠다는 종교적 다짐이 담겨있다.   개신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구원은 행함을 통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대속의 개념을 믿고 고백할 때 비로소 은혜로 받는 게 구원이다.   반면, 이슬람은 다르다. 믿음과 행함으로 살다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     무슬림에게 믿음은 6가지다. 알라, 천사, 경전, 선지자, 숙명,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한 믿음이다.   여기에 행함이 있어야 한다. 5가지다. 금식, 성지순례, 기도, 구제, 고백이다.   라마단은 행함의 요소 중 하나인 금식에 집중하는 기간이다. 단순한 금식, 금욕이 아니다. 그들에겐 구원과 직결된 행위다.   개신교는 이 기간 무슬림을 자극하는 행위 등 자제를 촉구한다. 그만큼 무슬림에겐 민감한 시기다.   가능하면 침도 삼키지 않고 향수 등도 뿌리지 않는다. 그 시간에 코란을 읽고, 기도에 매진한다. 욕구를 억제하고 알라를 더 깊이 아는데 모든 신경을 쏟아붓는다.   전국 최대 개신교단인 남침례교(SBC) 산하 국제선교위원회(IMB)도 ‘기독교인이 라마단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라는 글을 게재했다.   IMB 마이크 에덴스 목사는 “개신교의 금식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십자가 사역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의 행위는 구원을 받는 데 있어 그 어떤 것도 더하지 못한다”며 “단, 무슬림에게 금식은 복종, 행위 등을 통해 (신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갈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에덴스 목사는 “라마단 기간 동안 무슬림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영적인 것에 대해 대화할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개신교 측에서 대화의 기회로 삼자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슬림은 라마단 기간에는 모욕을 당해도 같은 방법으로 모욕을 주지 않는다. 구제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에 도와주고 용서하는 데 힘쓴다. 이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다른 종교를 존중할 줄 안다면 열린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라마단은 이슬람의 율법 학자들이 정한다. 이슬람력 8월의 종료와 함께 새달의 개시를 알리는 초승달을 육안으로 관측해 발표하면서 날짜가 정해진다. 즉, 라마단은 초승달이 떠오른 것이 확인되는 순간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한 달 뒤 초승달이 다시 떠오르면 라마단은 끝난다.     무슬림은 내부적으로 라마단 기간을 통해 결속을 다진다. 이 기간에는 전 세계 모든 무슬림이 금식을 추구한다. 형제애를 느끼고 모두가 알라 앞에서 평등하다는 의식을 되새긴다. LA한인타운내 버몬트 애비뉴 인근 이슬람 사원에도 라마단 기간 동안 수많은 무슬림이 드나드는 이유다.     이스라엘 정부조차도 라마단 기간을 인정한다.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 중심부에는 ‘황금 사원’이 있다. 이곳은 이슬람의 3대 성지중 하나다. 무슬림은 황금 사원 장소를 무하마드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로 믿고 있다. 이로 인해 특히 라마단 기간만 되면 수십만 명의 무슬림이 황금 사원을 찾는다.     이스라엘 전시 내각은 라마단 기간 무슬림 기도자들의 방문을 허용키로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황금 사원 주변에 수천 명의 경찰도 배치했다. 전시 중에 자칫 이슬람의 성지에서 유혈 충돌이 발생할 경우 중동의 화약고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스라엘 정부 라켈라 카람손 대변인은 “(라마단 기간) 이스라엘 내 모든 장소에서 종교의 자유를 강력히 보호하겠다”고 발표했다.   라마단의 마지막 날은 ‘Eid al Fitr(이드 알 피트르)’라고 불린다. 금식을 끝내며 축제를 벌이는 날이다. 이날은 무슬림에게는 종교적 명절과 같다. 가족, 친구 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무슬림 공동체만의 기쁨을 누린다.   반면, 라마단은 올해 기독교의 사순절 기간과 일부 겹쳤다.   김종일 아신대(ACTS) 중동 연구 교수는 칼럼을 통해 “라마단은 전 세계 십수억 명이 넘는 무슬림의 명절 기간”이라며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분명 필요한 부분이며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 없이는 지혜롭고 올바른 복음 전파가 어렵다”고 조언했다.   한편, 세계기독교연구센터(CSGC)에 따르면 무슬림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20억 명에 이른다. 세계 전체 인구의 약 25% 정도다. 오는 2050년에는 28억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퓨리서치센터도 2010~2050년 사이 무슬림 인구 증가율은 무려 73%로 크리스천 증가율(35%)보다 두 배 이상 높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무슬림 라마단 금식 구원 금욕 사순절 LA 로스앤젤레스 미주중앙일보 장열 종교 이슬람 이슬람 사원

2024-03-11

[등불 아래서] 너는 행복자로다

남가주 지역의 산들이 눈으로 덮였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목련은 꽃을 피웠다. 올해도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봄은 소매를 붙잡는 겨울을 뿌리치고 오지 않는다. 봄은 겨울의 손을 잡고 온다. 단단해진 땅도 앙상해진 가지들도 모두 잡고 온다. 차가운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고통과 함께 황홀한 봄은 온다. 봄은 행복하다.   지치고 메마른 앙상한 가지를 품었기에 봄은 행복하다. 그리고 여기 아픈 가시가 돋아나 자신마저도 찌르는 우리를 뿌리치지 않고 가슴에 안아 따스한 싹을 틔운 우리의 봄이 있다. 이 봄은 아픈 우리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봄이다. 행복한 봄, 행복한 사람, 예수님이다.   윤동주의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이 행복한 아들로 아버지는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가시가 돋아난 우리를 안으셨기에 행복하시다. 성령님은 앙상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기에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밖에 모르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바늘도 꽂히지 않는 단단한 내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에 괴롭지만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겨울을 뿌리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홀로 영광과 존귀를 모두 받으시며 행복하실 분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수치를 품으셨다. 존귀가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품으셨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의를, 그의 모든 지혜를,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그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행복을 가졌으니 말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하기에 아프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하기에 힘들다. 무례하지 않아야 하기에 고통이고, 시간의 터널을 버텨야 하기에 고독하다. 무시당하기도 하기에 억울하다.     그래도 우리는 겨울을 뿌리치지 않는다. 아파하는 가시들을 예수님과 함께 품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 지르는 추운 가지들을 싸맨다. 끝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이 이길 것 같다. 불의는 배부르고, 거짓은 칭송을 받는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이 행복하셨던 그 길을 간다. 자신에게 말해 본다. 그래, 행복하게 가자.   우리 안에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홀로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를 품으셔서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주의 구원을 너와 같이 얻은 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이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신 33:29)."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행복자 남가주 지역 주의 구원 자기 목숨

2024-03-04

[이 아침에]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옛날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멕시코 바하캘리포니아의 오지마을로 안토니오를 찾아 나섰다.  그는 25년 전부터 시작된 우리 의료봉사에 10여년 간 동역자로 충실히 동참했었다.  그 당시 그곳의 유일한 소식 전달 매체였던 AM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일정이 소개되면 100km 떨어진 먼 거리를 달려와 열정적으로 현지 전도사의 역활을 했던 동역자였다.     전도사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의 돈독한 신앙심과 열정을 보고 전도사 역할을 맡겼다.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집 황토 마당 한구석에 판자로 벽을 만들고 천막으로 지붕을 한 열악한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세월 속에 장년으로 성장한 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옛날 12세의 어린 나이에 골수암으로 죽어 가던 그들의 언니를 정성껏 보살펴줬던 우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환대의 표정이 역력했다. 함께 예배를 보자고 우리를 교회 안으로 인도했다.     한여름이지만 통풍도 되지 않는 열악함에도 마을 교인들이 경건하게 성경 구절을 읽으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강단 앞에는 울며 엎드려 통성기도를 드리는 한 중년여성과  2명의 소년이 있었다. 일행 중 한 부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부인의 눈물이 더 많았다. 뒷좌석에  있던 소년이 말없이 눈물을 닦으라며 계속 휴지를 갖다 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많은 의미와 느낌이 교차했을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통풍도 안 되는 곳에서 찬양하며 성경을 읽으며 차분하고 경건하게 진행되는 예배에, 우리의 마음도 숙연해지고  경건해졌다. 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있는 마지막 구절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이는 신의 사랑을 구현하고 모든 저속한 욕망에서 정화된 사랑, 모든 것을 감싸는 자애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들 여성 세 명의 눈물은 순수한 사랑으로 잉태된 감정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25년 전 의료봉사 초창기 봉사단원의 가족과 같이 농장 농부들의 생활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던 소아과 의사 부인,회계사 부인이 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보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대우할 수 있나요?” 그 당시 누가 더 많이 울었는지, 누구의 손수건이 더 젖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아름다운 눈물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이 그간의 힘든 봉사를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은퇴 후에 생활할  바닷가  휴식 공간을 찾아 떠났던 여행이었지만 이들의 눈물을, 또 원주민들의 경건함을 보면서 어려움 없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들과  같이 생활 속에서  같이 어울리며 휴식을 가져야겠다고. 열악한 현지 내과의사에게 필요한 외래진료소와 내가 사용할 침실 건축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눈물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어울릴 수 있다는 기대에 삽질에 힘이 실린다. 최청원 / 내과의사이 아침에 여성 구원 이들 여성 의료봉사 초창기 전도사 교육

2022-10-04

[열린광장] 사랑과 구원의 밧줄

일본의 천재 작가 아꾸다가와 류노스께가 쓴 소설 ‘구모노 이도(거미줄)’ 는 인간의 양면성을 잘 보여준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매우 맑고 조용한 어느 날,  옥황상제가 극락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다.  옥황상제가 걸음을 멈춘 다음, 연못을 가득 채운 구슬같이 아름다운 연꽃 사이로 문득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이 극락의 아래는 바로 지옥이었는데, 거기엔 간따다란 죄인이 옥황상제의 눈에 띄었다. 이 간따다는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깊은 숲속을 거닐다가 작은 거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보고 밟아 죽이려다 “거미의 목숨도 목숨인데...”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거미를 살려준 일이다.     옥황상제는 연꽃 위에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은빛 거미줄을 걸고 있는 것을 보고 간따다를 살려줄 생각으로 은빛 거미줄을 잡아 아득히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내려보냈다. 이때 지옥의 웅덩이에서 무심코 위를 쳐다본 간따다는 극락세계로부터 어둠을 뚫고 은빛 거미줄  한 가닥이 자기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 거미줄에 매달려 올라가면 지옥에서 빠져나와 극락세계까지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간따다는 재빨리 이 거미줄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 보고 깜짝 놀란 간따다!  자기가 매달린 줄에 거미떼처럼 다른 죄인들이 매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야 이놈들아!  이 거미줄은 내꺼야!  모두 썩 내려가지 못할까!” 이렇게 소리 지르는 순간,  붇잡고 있던 거미줄이 딱 끊어지면서 간따다는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옥황상제는 흉악범이지만 거미 한 마리를 살려 준 사랑의 마음씨도 지닌 간따다를 살려주려 했었지만, 끝내 미움의 포로가 되고만 간따다는 옥황상제가 내려준 ‘구원의 밧줄’을 놓치고 만 것이다.   이 옥황상제의 ‘구원의 밧줄’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과 미움이 대위법처럼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천사가 되기도 하고 해롭다고 생각할 때는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도 미움도  마음 속에 지닌 채,  그냥 체념하고 살아가기 마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 고 성서는 말한다.  제 자식일지라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미워하게 되는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이건 시쳇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 성서 구절은 매우 깊은 뜻을 말해주고 있다. 곧, 부모가 자식을 미워할 때,  그것은 정말로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미워한다고 할 때, 이것은 정말로 자식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식이 하는 말과 행동이 미운 것이다. 이 말과 행동이 바뀌게 될 때 자식에 대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많은 사람은 간따다처럼 실제로 살인죄는 저지르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살인을 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사는 삶이 ‘사랑의 천사’ 쪽인지 아니면  ‘미움의 노예’ 쪽인지를  살피면서 사는 것이 슬기로운 일일 것이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열린광장 사랑 구원 은빛 거미줄 이때 지옥 연꽃 사이

2022-09-25

[이 아침에]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옛날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멕시코 바하캘리포니아의 오지마을로 안토니오를 찾아 나섰다.  그는 25년 전부터 시작된 우리 의료봉사에 10여년 간 동역자로 충실히 동참했었다.  그 당시 그곳의 유일한 소식 전달 매체였던 AM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의 일정이 소개되면 100km 떨어진 먼 거리를 달려와 열정적으로 현지 전도사의 역활을 했던 동역자였다.     전도사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그의 돈독한 신앙심과 열정을 보고 전도사 역할을 맡겼다.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본 마을 사람들의 안내로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집 황토 마당 한구석에 판자로 벽을 만들고 천막으로 지붕을 한 열악한 교회 건물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세월 속에 장년으로 성장한 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옛날 12세의 어린 나이에 골수암으로 죽어 가던 그들의 언니를 정성껏 보살펴줬던 우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환대의  표정이 역력했다.  함께 예배를 보자고 우리를 교회 안으로 인도했다.     한여름이지만 통풍도 되지 않는 열악함에도 마을 교인들이 경건하게 성경 구절을 읽으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강단 앞에는 울며 엎드려 통성기도를 드리는 한 중년여성과  2명의 소년이 있었다. 일행 중 한 부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부인의 눈물이 더 많았다. 뒷좌석에  있던 소년이 말없이 눈물을 닦으라며 계속 휴지를 갖다 주고 있었다.     그들의 눈물 속에는 많은 의미와 느낌이 교차했을 것이다. 무더운 날씨에 통풍도 안 되는 곳에서 찬양하며 성경을 읽으며 차분하고 경건하게 진행되는 예배에, 우리의 마음도 숙연해지고  경건해졌다. 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있는 마지막 구절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이는 신의 사랑을 구현하고 모든 저속한 욕망에서 정화된 사랑, 모든 것을 감싸는 자애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들 여성 세 명의 눈물은 순수한 사랑으로 잉태된 감정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25년 전 의료봉사 초창기 봉사단원의 가족과 같이 농장 농부들의 생활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던 소아과 의사 부인,회계사 부인이 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보고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인간을 이렇게 대우할 수 있나요?” 그 당시 누가 더 많이 울었는지, 누구의 손수건이 더 젖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아름다운 눈물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이 그간의 힘든 봉사를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은퇴 후에 생활할  바닷가  휴식 공간을 찾아 떠났던 여행이었지만 이들의 눈물을, 또 원주민들의 경건함을 보면서 어려움 없이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들과  같이 생활 속에서  같이 어울리며 휴식을 가져야겠다고. 열악한 현지 내과의사에게 필요한 외래진료소와 내가 사용할 침실 건축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눈물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어울릴 수 있다는 기대에 삽질에 힘이 실린다. 최청원 / 내과의사이 아침에 여성 구원 이들 여성 의료봉사 초창기 전도사 교육

20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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