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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한인회, 그레이스 유 구명 나선다

아들 엘리엇 챈(Elliott Chan)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된 뉴저지 거주자 그레이스 유의 구금 기간이 늘어남에 따라 뉴저지한인회(회장 아드리안 이)가 구명운동 전면에 나설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뉴저지에 기반을 둔 유씨의 구명에 더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뉴저지한인회의 공식 활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수렴한 데 따른 것이다.   22일 한인 커뮤니티에 따르면, 그간 뉴저지 일각서 제기된 그레이스 유 구명위원회 활동 주체의 모호성을 해결하고자 뉴저지한인회가 전면에 나선다. 그간 한인 커뮤니티에 소홀하다는 평을 받은 현 집행부가 정당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수년째 구금된 한인의 사연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지속해서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특히 필 머피 뉴저지주지사 등 뉴저지 기반의 정치인과의 접촉을 위해선 뉴저지의 공신력 및 대표성을 띤 뉴저지한인회로서의 역할이 더 적합하다는 일각의 주장도 이 같은 결정의 이유가 됐다.   현재 그레이스 유 구명위원회는 곽호수 한인단체장연합회장 등을 중심으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에 뉴저지한인회도 힘을 보탠다.   기존 구명위 임원진을 통한 인맥에 기댄 활동이 아닌 대표성을 띠는 한인회 차원서의 공식 활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진 데 따른 것이다.   한인단체장연합회는 다음달 중 타민족을 모아 새로 정해질 유씨의 심리일에 맞춰 법원 앞 집회를 준비한다.   기존 구명위 간사단은 한인단체장연합회의 운영위원장 등의 직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이는 구명위 활동 초반 서명운동이나 한인 모집에 간사단의 인맥이 필요했던 것이 종료된 데 따른 자연스러운 절차라는 게 복수의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그레이스 유 구명위 측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꾸준히 뉴저지한인회에 대표성을 기반으로 한인을 위한 활동 전면에 나서달라고 요구했다”며 “지난 5월에도 유대현 가족대표와 이 회장을 만나 뉴저지한인회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했다.   유 대표는 “지난해 구명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뉴저지한인회에 도와달라고 했다”며 “누가 도와주든 고마운 일이고, 뉴저지 사법시스템에서 벌어진 일이니 뉴저지 단체가 도우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 회장은 지난 1월 임기를 시작했으며, 그레이스 유 보석 관련 심리는 이달 17·18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검찰 측 요청으로 재차 연기된 상태다. 강민혜 기자 kang.minhye@koreadailyny.com뉴저지한인회 그레이스 뉴저지한인회 그레이스 구명위원회 활동 구명위 활동

2024-07-22

한인 여성 유선민 씨 구명운동 확산

“검찰이 와서 데리고 갈 때만 해도 선민이는 곧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간 아이가 1년이 넘게, 자녀들 둘을 두고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억울하기 그지 없습니다. 출산 전에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사랑으로 아이를 낳은 엄마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지난해 뉴저지주 리버에지에 거주하며 3개월된 신생아 아들(쌍둥이 중 한 명)을 폭행 살해했다는 어이없는 혐의를 받고 수감중인 한인여성 유선민(미국 이름 그레이스 유 챈.사진)씨의 어머니 유영선 씨는 “평소 남의 일로 생각했던 일이 벌어져 가족들 모두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라고 한탄했다.       2일 중앙일보 뉴저지 사무실을 방문한 유 씨의 아버지 유재우 씨와 어머니 유 씨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러가지 의료적으로 어려움을 갖고 있었고 ▶매우 낮은 체중으로 출생 후에도 약한 신체 상태를 유지했고 ▶신생아가 갑자기 호흡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진행된 여러 차례의 응급처치가 무리였을 수 있고 ▶사망의 직접적인 증거가 밝혀지지 않는 등의 여러가지 상황을 설명하며 유선민 씨의 기소와 수감이 극히 부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유재우 씨는 딸이 어린 시절 미국에 와서 평화롭고 행복한 보통 집안에서 성장한 뒤 뉴욕주립대에서 교육학을 공부해 교육자로서 성실하게 살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평범한 엄마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어머니 유 씨는 “선민이는 뉴욕시 빌딩국 전기 기술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매우 가정적인 중국인 남편과 결혼해 자녀들을 사랑으로 낳고 키웠고, 지난해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에도 쌍둥이 아들을 위해 모유를 준비해 전해줄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했다”며 “억울한 누명을 쓴 한인 엄마를 가족의 품으로 빨리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유 씨가 체포 수감된 뒤 곧 진실이 밝혀져 석방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수감 생활과 재판이 길어지자 최근 한인사회는 사촌오빠인 유대현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전 회장, 정신호 뉴저지부동산협회 초대이사장 등을 중심으로 구명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구명운동에 나섰다.   유 전 회장은 “선민이가 백인이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소수계인 한인들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구명운동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유 씨 구명운동은 구명 사이트인 체인지 닷 오르그(https://www.change.org/p/justice-for-wrongly-incarcerated-new-jersey-mother?recruiter=43475604&recruited_by_id=c6442510-6a46-0130-a8c5-3c764e044e9e&utm_source=share_petition&utm_medium=copylink&utm_campaign=petition_dashboard)를 중심으로 전개돼 1주일여 만에 2500명이 서명했고, 현재 뉴욕·뉴저지 한인사회 20여 개 주요 단체 주요 인사들이 합류하면서 점점 확산되고 있다. 구명위원회 활동과 서명 관련 문의는 201-835-7230.   박종원 기자 park.jongwon@koreadailyny.com유선민 그레이스 유 챈 유선민 씨 구명운동 확산 유선민 씨 구명위원회 유대현 정신호 뉴욕뉴저지 구명위원회 유재우 유영선

2023-08-02

'이철수씨 사건 무죄 변론'…유재건 전 의원 별세

    미국 유학 중 살인 누명을 쓴 재미교포 이철수씨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끌어낸 혜천(惠泉) 유재건(柳在乾) 전 의원이 한국시간으로 1일 오전 9시24분께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5세.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 연세대 정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77년 캘리포니아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1989년 연방정부 지역사회변호사로 일했고, 1982∼1990년 LA에서 법률사무소를 경영했다.      고인이 이철수씨 사건에 뛰어든 것은 변호사 시험 공부를 하던 1977년. 이씨는 1973년 6월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갱단 간부 피살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체포된 뒤 1973년 6월 1급 살인죄로 종신형이 선고됐고, 교도소 복역 중이던 1977년 자신을 살해하려는 백인 갱단을 정당방위로 맞서다 살해했다며 제2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한국인 청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청소년그룹이 무죄 운동을 펼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새크라멘토 유니언지' 기자였던 이경원씨가 당시 고인과 함께 사건을 파헤치면서 전기를 맞았다.    고인은 이씨를 면담한 뒤 1차 사건이 잘못됐음을 확신하고 1977년 '이철수 구명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때부터 재판 서류 등을 샅샅이 뒤져 이씨가 7가지 위헌적 재판 절차의 희생양이었음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이경원씨의 폭로 보도가 이어지고 일본인 3세 야마다 란코씨 등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대대적으로 가세한데다 유명한 인권변호사 레너드 와인글래스씨가 무료 변론을 맡았고 이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한인들이 성금 20만 달러를 모으는 등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소수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1982년 9월 3일 무죄 평결이 내려지고 제2의 사건도 1983년 사형판결을 무효화함으로써 이씨는 교도소에서 풀려났고,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소수민족 연대 승리로 기록됐다. 고인은 2009년 사건 기록을 담은 책 '함께 부르는 노래'를 펴냈다.    고인은 1990년 귀국한 뒤 1993년까지는 'MBC 시사토론', 1993∼1995년에는 'KBS 1TV 심야토론'을 진행했다.    1995년 경기고 동기생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고, 원외 부총재로 임명됐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출마가 유력했지만, 지역구(서울 성북갑) 출마를 선언해 1997∼1999년 총재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김대중 총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도 지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고, 2003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3선 의원이 됐다. 2006년초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된 정세균 의원의 뒤를 이어 열린우리당 임시의장을 맡기도 했다.    2009년 한국유스호스텔연맹 총재, 이후 세계유네스코협회연맹 회장을 지냈다. 연세대 1학년 때인 1956년 소련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대학교 친구인 이만섭(1932∼2015) 전 국회의장과 함께 학도의용군을 결성한 공로로 2006년 헝가리 십자중훈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김성수씨와 사이에 2남1녀(유승영·유수화·유대현)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에 마련됐다. 5일 오전 발인을 거쳐 미국 서부에 있는 추모공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 02-3410-6917이철수 유재건 이철수 구명위원회 무죄 평결 무죄 판결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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