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비자유 속에서 살아가기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새로운 언어, 사물, 세계가 몹시 낯설어 힘들어지는 순간이 온다. 이 때문에 나는 자신을 지키는 방편으로 책을 몇 권 챙겨간다. 수많은 유적지와 예술작품을 단번에 해독하지 못하고, 이미지에 압도되며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비틀거릴 때 현실감각을 되돌려주는 것은 책이다.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탐험하는 책이라도, 신기하리만큼 그것은 내면과 대면하게 만든다. 얼마 전 나는 열흘간 그리스로 떠났다. 여행지에서는 그 나라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가장 좋지만, 사전 준비로 그리스 비극과 미술책을 읽은 터라 고민이 됐다. 이럴 때 대안은 숙제로 남아 있던 책을 읽는 것이다. 올해 들어 넉 달 동안 내가 읽었던 작가는 블랑쇼, 바르트, 베케트인데 이들은 모두 한 작가의 이름을 반복해서 언급했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다. 나는 김창석 번역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 11권)를 갖고 있었고, 10여 년 전 읽으려고 두 번 시도했다가 1권을 넘기지 못했다. 마침 소설가 김연수가 어느 지면에서 자신이 프루스트를 읽으려다 부딪힌 좌절을 털어놔 나름 위로가 됐지만, 이것은 ‘가짜 위로’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패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어물쩍 다른 사람의 경험까지 끌어다가 마치 그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치부하고 넘어가기 때문이다(프루스트의 경우는 분량). 그러던 중 조지 스타이너의 비평집을 읽는데, 그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프루스트가 없는 내 인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토록 뛰어난 비평가의 삶을 빚은 작가로 또다시 언급됐기에 최신 판본인 김희영 번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전 13권)를 샀고, 여행 가방에 1, 2권을 담았다. 독서 행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비(非)자유적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기다. 운율법에 속박되면 뛰어난 시어가 나오듯이, 한 가지에 구속되면 놀라운 집중력이 발휘된다. 비행기와 숙소에서 다른 어떤 선택지 없이 나는 오직 프루스트만 읽어야 했다. 19세기 파리 사교계와 귀족들의 세세한 관습에 현대의 시민인 나는 가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라는 거대한 세계를 향한 마음이 그 어떤 것도 방해물로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10여 년 전의 나는 간데없이 이 책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독자는 늘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다. 내가 어떤 검증된 거대한 세계에 섣불리 몸 담그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세계의 문제라기보다 나 자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수많은 외부 세계에 시선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이 거절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거부당하는 쪽은 우리다. 프루스트의 책 1권을 조금 읽은 사람들은 늘 홍차에 적셔 먹은 마들렌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언급하고, 좀 더 전체적인 틀을 논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기억’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근대 역사의 면면, 침윤하는 현대성, 알록달록한 계급사회의 풍속, 예술과 미학에 대한 비평적 관점, 반유대주의, 사랑과 동성애, 신경증의 발견, 언어의 변질, 기후와 공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우는 시대 상황까지 모두 담고 있어 결코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다. 이 커다란 세계에 들어선 나는 솔직히 말해 이제야 독자의 자격을 얻은 것 같다. 그 전에 읽은 책들은 이 자격증을 얻기 위한 관문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해 깨달은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허가증과 자유를 손에 쥐려면 반드시 ‘비자유’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고는 습관과 버릇의 결을 재정돈할 수 없다. 일상에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요소는 사방에 있어 ‘자유’와 ‘의지’(의욕)라는 말로 꾀기에 우리는 구심력을 갖기가 무척 어렵다. 구석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독자만이 커다란 세계를 얻는다. 거기에는 포기된 수많은 세계가 있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하나둘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나만 접한 것이 아니어서 수많은 인생 선배가 표식을 남겨둔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누구나 볼 수 있어도 그 넓고 깊은 세계로 들어갈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샛길이 많을 뿐 아니라, 얼마 안 가 뒤돌아 나올 만큼 우리의 성정은 늘 성마르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책을 읽어온 뒤 비로소 최근에야 나는 독자의 역량을 조금 갖췄다고 느낀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전집의 7권을 읽기 시작하려는 지금, 이 힘을 유지해주는 것은 새벽과 밤, 주말이라는 ‘시간’임을 안다. 시간은 결국 공간을 만들어낸다.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기억 속, 마음속 공간. 거기서 자아는 하나의 통합된 상을 갖게 되고, 삶이 연장되는 것은 단순히 길이를 늘이는 게 아니라 수직의 깊이를 얻는 것임을 알아차린다.마음 읽기 어려움 재정돈 외부 세계 마음속 공간 자유적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