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사랑을 담은 공간
‘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작가이자 건축가인 그는 10여년간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약하면서 ‘기억을 담은 건축’을 소재로 사람들의 추억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공간을 꿈꾸며 새로운 의미의 공간을 제시한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품 있고 역사성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집 우편함에 ‘저는 건축가입니다. 당신의 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시면 연락 바랍니다’라는 노트를 적어 넣는다. 그렇게 그는 파리의 저택 주인들로부터 답장을 받아 초대된 자리에서 그 집에 간직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그동안 인터뷰와 자료수집을 마친 후 8년 만에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다. 건축가이면서 작가인 그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으로 탄탄하게 엮어간 아주 특별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다. 건축물이 단지 건축가로서 건축물을 짓고 이득을 남기는 사업 이상으로 그 공간에 사랑을 담고 키우고 전달하는 인간다움의 터전임을 일깨워 준다. 사랑하는 마음을 공간에 담아내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한층 매력적이다.
작가는 빛과 기억이라는 경이로운 설계로 실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건축가인 주인공은 평범한 직장인의 봉급으로는 살 수 없는 파리에 있는 시테 섬의 유서 깊은 저택을 자신이 건축가이기에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집을 계약하기 위해 집주인을 만나러 스위스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간다. 그 요양병원은 부서진 중세 수도원을 개축해 지은 건물로 독특한 매력이 있고 우연하게도 그가 방문한 날에 기이하고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어두컴컴한 오래된 건물에 압도적인 빛의 향연이 펼쳐지며 건물에 감춰져 있던 비밀의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건축가였던 아버지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여기저기 남겨 놓는다. 아들도 이제는 나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고 시간이 없다. 스위스에 있는 요양병원과 시테 섬의 저택에 숨겨진 비밀은 건축가가 아니면 밝혀낼 수 없는 전문적인 추론이 필요했고 결국 주인공은 건축가로서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치열하고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비밀을 밝혀낸다.
작가가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으로 설정한 아버지, 프랑스와 왈처는 전쟁 후 보상금으로 이 저택을 구매한 후 집 밖에서 떨고 있는 그 집 전 안주인인 아나톨을 가엽게 여겨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준다. 남편과 두 아이를 잃고 그녀 자신도 화재로 불구가 된 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그녀를 사랑으로 돌봐주고 그녀에게 이 집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집안의 구조를 하나씩 개조해 나간다. 누군가 갓난아이를 그 집 앞에 버리고 가자 이 둘은 그 아이의 부모가 된다. 얼마 후 아나톨은 죽고 5년 후 친모가 나타나자, 프랑스와는 그 집을 모자에게 남겨주고 떠난다. 그 당시 5살이었던 아들, 피터는 아버지가 자신과 엄마를 버렸다고 평생 원망하며 살아온 터였다. 이제 모든 비밀은 이 건축가에 의해서 밝혀졌고 오해를 풀게 해준 피터는 이 건축가에게 그 집을 주려고 하자 ‘이 집은 내 집이 될 수 없고 피터 당신에게 주어진 집입니다. 당신 아버지 프랑스와의 사랑이 온 집안 전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고 그 집을 떠난다.
처음에 주인공은 평범한 인간적인 욕심에서 그리고 건축가란 자만심에서 낡고 허술한 집을 저렴한 가격에 사들여 스스로 하나씩 자신의 힘으로 고쳐나갈 계획이었다. 그에게 건축가는 하나의 직업일 뿐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공간이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그 공간에 사랑과 아픔, 관심과 성실, 기억 등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된다. 공간에 영혼을 담아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 아닐까. 건물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라면 그 건물 안을 채워 넣는 일 또한 우리 몫이 아닐까.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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