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뉴욕주 축제에 씨름·태권도 첫 데뷔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펼쳐진 뉴욕주의 오랜 전통 축제에 한국의 무예인 씨름과 태권도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지난달 26일부터 2주 동안 시라큐스에서는 지난 180년 동안 이어온 뉴욕주의 대표적인 축제인 ‘2023 뉴욕주 페어( 2023 New York State Fair)’가 개최됐다.   올해 행사에는 뉴욕주 북부 지역의 주민들은 물론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캐나다 지역의 주민들까지 대거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특히 올해 행사에는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 문화와 스포츠 등을 소개하기 위해 아시안 빌리지(Asian Village) 섹션이 마련돼, 다수의 아시안 문화 예술 체육 단체들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뉴욕대한씨름협회 김상현 회장의 주선으로 한국의 천하장사 출신인 이태현 용인대 교수와 학생들, 나정훈 뉴욕 스테이트 체육회 겸 ‘AGAPE Black Belt Center’ 관장과 태권도 시범단이 참가해 씨름 시범과 경기 및 태권도 시범을 펼쳤다.   뉴욕대한체육회는 “업스테이트 뉴욕에서 개최돼 캐나다 등에서까지 8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리는 뉴욕주 페어에 씨름과 태권도가 소개된 것은 뉴욕시, 롱아일랜드, 뉴저지 지역을 벗어나 뉴욕주 북부 지역까지 한국의 문화가 전달된 기회였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또 뉴욕대한체육회는 씨름과 태권도에 이어 앞으로 더 많은 한국의 문화와 체육이 뉴욕주 페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종원 기자뉴욕주 페어 뉴욕대한체육회 뉴욕대한씨름협회 김상현 회장 AGAPE Black Belt Center 나정훈 관장 이태현 용인대 교수 뉴욕 스테이트 페스티벌 아시안 빌리지

2023-08-31

“유행 안 타는 클래식 청바지로 승부”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한인 청바지 업체 ‘저스트 팬메코(Just Panmaco Inc.)’는 LA자바시장에서 2세 경영 체제가 안정화된 몇 안 되는 회사다. 세계한인체육회총연 정주현 회장이 창업한 저스트 팬메코는 8년전부터 큰딸 크리스틴 정씨가 대를 이어 운영해오고 있다. 정씨가 가족사업에 뛰어든 계기와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들어봤다.   -회사 소개를 해달라.   “저스트팬메코는 1983년에 부모님이 설립하신 여성 청바지 전문 업체로 현재는 ‘저스트 블랙 데님(Just Black Denim)’, ‘JBD’, ‘저스트USA(Just USA)’ 등 3개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브랜드별 특성이 있나.   “저스트 블랙 데님은 프리미엄 라인으로 18세~45세 여성 고객층이 대상이다. 허리 사이즈와 바지 길이도 다양해 다양한 체형의 여성들이 입을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가격은 70~100달러다. JBD는 주요 고객층이 16~24세로 유행에 민감한 고객인 만큼 청바지뿐만 아니라 청치마, 재킷 등 다양하고 트렌디한 의류를 판매하고 있다. 가격대는 68~78달러선이다. 저스트USA는 40대 이상의 연령층을 상대로 하고 있으며 가장 저렴한 가격이지만 양질의 데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의류는 온라인으로 구매 가능하며 유명 여성 의류 사이트인 ‘룰루스(Lulus)’ 등 부티크에서 판매되고 있다.”   -청바지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부모님이 미국에 이민을 오신 1980년대에는 ‘리바이스’ 말고는 경쟁 브랜드가 없었다. 부모님은 한인이 하는 청바지 브랜드가 경쟁력이 있을 거라 믿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저스트팬메코는 장인 정신을 살려 전통적인 데님을 만드는 방식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역 판매상들과의 관계 유지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항상 우리만의 새로운 청바지 패턴을 만들고 있다.”   -가업을 잇게된 계기는.   “보스턴 칼리지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마케팅을 배웠다. 마케팅에 관심이 있어 유명 의류 브랜드 타미힐피거, 케이트 스페이드, 푸마 등에서 인턴을 하면서 전통적인 마케팅 방법을 배웠지만, 대기업에서 내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이후 부모님의 일터이자 내 고향인 LA로 내려와 가족사업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저스트팬메코에서 마케팅 및 세일즈의 부사장을 맡고 있다. 회사 마케팅의 대부분은 ‘입소문’으로 부티크에 납품 시 소문을 타고 구매한다. 또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마케팅도 사용 중이다.”   -향후 포부는.   “현재 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하여 빠르게 제작하고 유통하는 ‘패스트패션’이 유행이지만 저스트팬메코는 클래식하고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의류를 만드는 게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잃지 않고 더 우수한 퀄리티를 내보이는 게 현재 나의 목표다. 또 환경이 민감한 문제인 만큼 친환경적인 소재를 사용하며 지속 가능한 소재를 연구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고객들이 맞춤복을 입은 것처럼 더욱 다양한 사이즈를 제공할 계획이다. 가장 가까운 커뮤니티가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한인 커뮤니티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김예진 기자 kim.yejin3@koreadaily.com크리스틴 차세대 차세대 시리즈 저스트 블랙 just black

2023-07-04

"두 명의 독재자가 나를 키웠다"…평양서 자란 흑인 자서전 화제

평양에서 살았던 흑인 여성이 자신의 드라마틱했던 인생을 책으로 펴냈다.   아프리카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막내딸인 모니카 마시아스(51)의 이야기다.   뉴욕포스트는 13일 ‘평양에서 온 흑인 소녀: 나의 정체성을 찾아서(Black Girl from Pyongyang: In Search of My Identity)’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마시아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마시아스는 대통령의 딸로 태어났지만, 쿠데타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후 여섯 살 때 평양으로 망명, 16년간 북한에서 김일성 가족의 보호 아래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두 명의 잔인한 독재자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전 세계가 ‘두 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게 됐을 때 충격을 받았다”며 “나는 미국이 북한을 파괴하려는 사악한 나라라고 믿으며 자랐다”고 말했다.   두 아버지는 친부인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와 김일성을 뜻한다.   책에는 마시아스의 어린 시절 기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가 비로소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살 때 유학생 신분으로 중국 베이징에 여행을 갔을 때다. 평양에서만 살던 마시아스가 처음으로 북한 외 지역을 가본 것이 그때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와 김일성에 대한 서구의 평가를 알게 됐을 때 그야말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정체성마저 흔들렸다”며 “나는 그때부터 가능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시아스는 지난 2004년 12월 뉴욕으로 이주했다. 퀸즈 지역에서 아파트를 구하고 유치원 교사 등으로 일을 했다. 물론 살면서 체험해보니 북한에서 배웠던 대로 자본주의에 대한 맹점도 일부 이해는 됐다.   그는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도 모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됐다”며 “어떤 대화를 나누든 항상 돈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미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사람들은 마시아스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색안경을 끼고 보는 듯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때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그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다.   마시아스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정원의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숙제는 했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며 “김일성 역시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항상 미소를 짓고 우리에게 배움을 멈추지 말라고 따뜻하게 조언해주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결국 마시아스는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울타리를 넘어 두려움을 극복하고, 경멸의 대상이라고 배워왔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중요했다”며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선한 마음으로 교류하고 서로 알아갈 때 존중과 이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전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사설 자서전 black girl 흑인 소녀 my identity

2023-04-14

[등불 아래서] 닳아버린 흔적이 있는가

오래전이지만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일 중 하나는 넓은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였고 그중에 같아 보이는 차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만든 차들이 경합을 벌이는 곳이니 당연했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같은 모양에 색깔까지 비슷했던 차에 익숙했던 사람에게는 꽤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놀란 일도 주차장에서 생겼다. 여전히 개성 만점의 차들이 빈틈없이 주차해 있었고 엉뚱하게 타이어가 눈에 들어왔는데 모든 타이어가 똑같은 검정이었다. 그렇게나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는 시대에 빨강이나 노란 타이어가 없었다. 갑자기 낯설었고 그래서 놀랐다.   위에 얹혀가는 자동차는 모두 달라도, 길과 직접 부딪히는 타이어는 눈에 안 띄는 같은 색이다. 그렇게 보니 마치 세상이 다 변해도, 묵묵히 변하지 않고 험한 길과 싸워주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개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니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검은색이다. 타이어는 고무로 되어있지만, 그 강도를 높이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탄소 가루인 ‘Carbon Black’과 합성해야 하고 그래서 검은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잘난 화려한 세상 속에서 차와 그 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길을 간 것이 아닌가.   그 평생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봐도 그렇다. 사실 타이어는 옛날 수레바퀴처럼 나무 살과 바퀴를 링으로 묶어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이다. 영어로 하자면 ‘tie’ 죽 묶는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타이어의 험난한 일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여러 일화를 만들어 냈다. 그중 많이 알려진 것이 자동차에서 가장 피곤한(tired) 곳이기에 타이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엔진이 제일 피곤하긴 하지만, 험한 길과 매일 부닥치며 살아가니 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런 험한 길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이어다. 아마도 그에게 남는 것은 닳아버린 상처 자국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엔진에 연결돼 있는 한 나아갔다. 마치 신자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고난 중에도 나아갈 수 있듯이 말이다. 비록 울더라도 나아간다. 예수님의 흔적이 남는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타이어를 보면서 참된 신자를 찾는 것이 안타깝지만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타이어는 닳아도 검은색이다. 고집스럽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신자가 그리운 것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흔적 사실 타이어 옛날 수레바퀴 carbon black

2022-05-09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블랙 호크(Black Hawk) - 3

그는 그 후 몬로 요새(Fortress Monroe) 감옥으로 보내져 몇주 동안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초상화로 그려지느라 머물러야만 했다. 1833년 6월 5일에는 여러 큰 도시를 순회하였으며, 뉴욕, 볼티모어, 필라델피아에서 상당한 군중들 앞에 세워 져야만 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갈 때에는 양상이 달라졌는데 디트로이트 같은 곳에서는 많은 군중이 그들의 형상에 목을 매달고 불을 태웠다.   1833년 포로 생활 말년에 블랙 호크는 정부 관리에 그의 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이것이 지방 기자에 의해 책으로 발간 되면서 미국 최초의 인디안 자서전이 되어 버렸다. 그의 저서는 당시 대단한 베스트 셀러였으며 현재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전리품 신세의 유람을 끝낸 후 블랙 호크는 부족으로 돌아갔고 Iowa River에서 나중에는 Iowa 남동쪽 드 모인 리버(Des Moines River) 근처에서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1838년 10월 3일 사망하였으며, 그의 친구 James Jordan이 그의 농장에 그를 묻어 주었다. 1839년 7월 그의 남은 유품은 해골과 함께 전시를 목적으로 James Turner가 몰래 가져갔다. 그러자 블랙 호크의 아들 Nashashuk와 Gamesett는 아이오와 주지사 Robert Lucas를 찾아갔는데, 그는 그들의 동의를 받고 버링톤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안전하게 보관키 위해 그 뼈를 수거해 Burlington Geological and Historical Society에 보관시켰다.   그 건물은 1855년 불에 탔으며 블랙 호크의 남은 유품은 파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뼈는 루카스 주지사가 버링톤의 내과 의사인 Enos Lowe에게 전달했으며, 그는 또 다시 친구인 Dr. McLaurens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하여튼 인부들이 Dr. McLaurens이 캘리포니아로 떠난 후 그의 집에서 뼈를 발견했으며, 버링톤에 있는 묘지에 묻었다.   “불멸의 인디안”이란 부제가 붙은 그의 동상은 Lorado Taft가 조각하였으며 일리노이주 오레곤 시에 있는 Rock River를 굽어보고 있다. 현재 블랙 호크는 비극의 영웅으로 알려졌으며 오늘날 수많은 기념물에 사용되고 있다. 도로, 스포츠, 학교등 여러 군데서 블랙 호크(Black Hawks)의 이름을 따서 사용하고 있다. 미국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Black Hawk War”는 개인적인 이름에서 딴 몇 안 되는 전쟁이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육상 금메달  2관왕인 Jim Thorpe가 자신이 블랙 호크와 직접 연계된 집안이라고 소송을 냈는데 그의 딸 Grace가 사실은 “천둥족(Thunder)”이 자기네와 직계이지만 블랙 호크와는 직계가 아니라고 그들의 정체성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블랙 호크는 그의 아버지에게는 영웅이었으며 그 딸은 아버지가 블랙 호크 가문의 하나로서 그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어주었다고  전하였다. 그 가족의 관한 혼란은 아마 그의 어머니 “샬롯데”가 파타와니 추장 Louis Vieux의 가문이란 데서 혼동이 온 모양이었다.   시카고 아이스하키팀인 블랙호크스는 Black Hawk 추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아이스하키팀의 첫 구단주 Frederic McLaughlin은 1차 대전 당시 86보병 사단 333 병기대대 지휘관이었는데 이 사단의 별명이 추장의 이름을 딴 “블랙 호크 사단”이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의 명예를 이어받아 블랙호크라고 아이스 하키팀 이름을 지었다. 미 육군의 UH-60 불랙 호크 헬리콥터도 이 추장의 이름에서 기인되었다.  미 육군은 종종 항공대에 인디안 이름을 붙이고는 한다. (hanprise@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black 블랙 블랙 호크 black hawks 현재 블랙

2022-01-27

[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블랙 호크(Black Hawk)– 1

인디안 블랙 호크는 시카고 프로 아이스하키 팀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미국에서는 NHL(National Hockey League) 프로 하키 게임 인기가 대단한데 블랙호크는 여러 번의 우승으로 시카고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NHL은 미국과 캐나다 각지에 연고지를 둔 31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년 9월 하순 개막하여 경기를 치르며, 이듬해 4월부터는 플레이오프에 돌입하여 6월에 열리는 스탠리 컵 결승에서 우승 팀을 가린다.  특히 캐나다는 하키 종주국답게 경기가 있는 날이면 미국까지 관중이 대거 몰려와 응원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NHL은 신년 맞이로 매년 1월 1일이면 도시를 바꿔가며 실내에서 하는 게임을 야외로 바꿔 특별 경기를 갖는다. 금년은 미네아폴리스 야구장에서 개최 되었는데 화씨14도(섭씨 -10도)임에도 불구하고 입장료 300불을 내가며 4만명 만석을 이뤘다. 작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쉬고, 재작년에는 텍사스 달라스 커튼보울 미식 축구장에서 하였는데 날씨가 따듯한 도시라 그런지 무려 8만명이 몰렸다. 아이스하키는 다이나믹한 게임으로 블랙 호크의 용맹성이 잘 드러난 운동이다.   블랙 호크는 1767년 오늘날 Rock Island라고 불리우는 일리노이 주 Rock River 강변에 있던 소케누크(Saukenuk)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크족은 여름 동안은 그 마을에서 옥수수를 재배하고 겨울에는 사냥을 위해 미시시피 강을 건너곤 하였다. 블랙호크는 소크족 가운데 위대한 추장이었던 “천둥(Thunder)”이란 이름을 가진 “나나마키”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비록 그가 모든 부족이 선출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부족 추장은 안되었지만 전투 추장으로 인정되어 전쟁에 자주 참가했고 15살에 이미 적을 살해한 경험이 있으며 18세가 되기 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도 갖고 있었다.   블랙 호크는 소크족 전투 추장으로 있으면서, 아메리카 원주민 땅을 미국 정부에 양도하는 것에 반대했다. 특히 그는 선대(先代)인 콰시콰메(Quashquame) 추장이 1804년 내용도 제대로 아는 것 없이 소크족과 팍스족을 대표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인디안 땅을 미국에 양도한다고 당시 인디애나 준주(準州)의 주지사인 윌리암 해리슨(William Harrison)과 얼떨결에 협정을 한 것은 일종의 사기술이라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블랙 호크와 그 부족은 선대의 추장이 전체 회원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았으며, 그를 협상 대표자로  뽑은 적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근처에 세워진 미국군 메디슨 요새를 쳐들어 갔는데 그것이 그가 미국을 상대로 한 첫 작은 전투였다.   1812년은 영국이 불란서의 나폴레옹을 평정하고 여력이 생겨 그동안 괘씸하게 독립을 한 미국과 전쟁을 한바탕 한 해였는데, 당시 영국의 모피상 디킨스 대령은 오대호를 중심으로 작전을 수행 중인 영국을 위해 위스콘신 주 그린베이 근처에 상당한 인디안 세력을 모았다. 디킨스가 모은 인디안은 포타와토미, 호천크, 키카푸, 그리고 오타와 족이었다. 200여명의 소크족 전사들도 소집했는데 이때 블랙 호크에게 영국군의 명예 준장 계급을 달아주면서 그린베이에 모인 모든 인디안을 지휘하는 명령권을 부여하였으며, 비단 깃발과 훈장 그리고 영국군으로부터 선의의 동맹군이 되었다는 증서를 전달하였다. 그 증서와 깃발은 전쟁 후 20년이 지나발견되었다.     전쟁동안 블랙 호크와 그의 전사들은 이리호(Erie)의 경계선에서 영국의 헨리 프록토 육군 소장과 함께 여러번 전투를 하였다. (hanprise@gmail.com)    한홍기한홍기의 시카고 에세이 black 블랙 블랙 호크 인디안 블랙 전투 추장

2022-01-1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