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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온통 영어 범벅인 대한민국

장소현 시인, 극작가

장소현 시인, 극작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너무 많다. 나라 밖을 떠돌며 산 세월이 너무 길다 보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미국에 산 지가 47년이나 되었고, 한국에 살 때 10년 넘게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런데도 나는 영어를 거의 못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매우 부끄럽다! 그보다는 창피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후회막급이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미국 땅에 살면서, 줄기차게 ‘노 잉글리시 피플’로, 세종대왕님 은총에 매달려 생존했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하고, 뻔뻔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서울시 나성구’ 코리아타운이 없었으면 못 살았을 것이다. ‘서울시 나성구’ 코리아타운이라는 오아시스 덕에 미국이라는 사막 생활을 당당하게 살아낸 것이다. 미국 땅 남의 골목에 한글 문패 걸어놓고, 당당하게 ‘영어 불능 선언’을 하고 한글로 글을 써서 그렁저렁 먹고 살았다니, 생각해보면 참 슬프게 웃기는 일이다.
 
인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후회가 크고 아쉬움도 많다. 영어를 잘했으면 제법 출세해서 펄펄 날았을지도 모르는데, 영어 학교에 다니고, 하루에 영어 단어 하나씩만 외우며 살았으면 영어 귀신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그냥 한국에 살았으면 영어 때문에 열 받는 일 따위 없이 편했을 텐데, 뭐하러 이민은 와가지고 생고생인가라는 후회도 살짝 든다.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한국에서 살아도 영어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영어를 모르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일간 신문에 얼마 전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해야만 하는 현실을 비판한 기사다. 생활환경이 온통 영어 범벅이고,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영어를 유창하게 잘해야 하고, 그러니 어려서부터 영어 공부에 목을 매야 하는 기묘한 현실….
 
그런 시각으로 한국의 현실을 살펴보면, 일상생활에서 한국말처럼 쓰이고 있는 영어가 너무도 많다. 텔레비전 드라마, 뉴스, 연예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는 모르는 영어들이 당연하게 쓰인다. 아,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영어를 이렇게 잘했나?
 
가령, ‘와이프’라는 영어가 ‘아내’라는 우리말을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한 지 오래다. 아내란 ‘집안의 태양’이라는 깊은 뜻을 지닌 좋은 말이다. 집사람, 안사람 등도 정겨운 호칭인데, 요즘 한국 사람들은 ‘와이프’라는 낱말을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린 사례는 열거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많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의 걱정이 크다.
 
물론, 반대의 의견도 없지 않다. 온 국민이 이처럼 영어 공부에 전력투구로 매달려 전념하니, 한국의 국제 경쟁력이 막강해지고, 세계화의 앞날이 밝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정말 그럴까? 해방 80년이 되어가도록 일본어의 찌꺼기도 아직 청산하지 못했는데, 영어가 이렇게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게 내버려 두면 어쩌자는 건지 아찔하다. 이건 머리칼 노랗게 염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따위의 꼰대 잔소리를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어 벙어리’ 미국 시민인 내 신세를 변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언어는 정신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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