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변화를 요구하는 캠퍼스 시위
1960년대와 70년대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는 미국 학생 운동의 전환점이었다. 1964년 교내 표현의 자유 제한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UC버클리 학생들의 시위가 반전 시위로 이어졌고, 1970년 5월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 승리를 위해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한 후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학생 4명이 주 방위군 총격에 숨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반전 시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전국 900여 개 대학에서 400만 명 이상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16개 주 21개 대학에 주 방위군이 투입됐다.
친팔레스타인 시위의 핵심 역할을 한 컬럼비아대 역시 저항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혼돈과 혁명의 시대’로 불리는 1968년 베트남전 반대 시위 때는 학생들이 캠퍼스 건물 5곳을 점령했고 700여명이 체포됐다. 1984년에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하며 투자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가자 지구 전쟁 반대 시위의 공통점은 젊은 세대의 평화에 대한 열망, 인권 의식 및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한 반대 등이다. 시위 참여 학생들이 교내에 캠프를 만들고 경찰이 이를 강경 진압한 것 또한 유사하다. 다른 점은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광범위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던 반면,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는 전국적이지만 캠퍼스에 국한됐다는 점이다.
약 50여개 대학에서 벌어진 시위 가운데 컬럼비아대와 UCLA가 이런 양상을 가장 잘 보여줬다. 컬럼비아대에 지난 4월17일 처음 캠프가 세워질 때만 해도 시위가 그렇게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날, 미노슈 샤피크 총장이 경찰 투입을 요청해 텐트를 철거하고 시위대를 체포한 것이 확산의 도화선이 됐다. 2주 후에는 캠프가 더 커지고 학생들과의 협상에 실패하자 경찰이 재투입돼 시위대를 진압했다.
같은 날 밤 서부에서는, 친이스라엘계 집단이 UCLA시위대를 3시간 동안이나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나중에 출동한 경찰은 친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해산하고 학생들을 체포했다.
경찰의 무력 진압에 대한 반발도 많다. 컬럼비아와 UCLA 교수진은 총장 견책과 사임을 요구하고 있으며, UC 계열 조교 및 연구원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은 파업을 결의했다. 시위 참가자에 대한 대학들의 징계 수위도 높아 정학, 기숙사 퇴거, 기말 고사 응시 불허 등의 처분을 내렸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대학가의 친팔레스타인 시위에는 부정적인 여론이 더 높다. 역사적으로도 대학생 시위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높지 않다. 더욱이 이번 친팔레스타인 시위는 반유대주의와 폭력 세력(하마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대학 측이 강경 진압을 결정한 배경에는 이스라엘 지지 정치인들과 대학 후원자들의 압력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연방의회 증언 후 사임한 하버드와 펜실베이니아 대학 총장도 이런 압력에 굴복한 결과다.
학생들은 시위를 통해 기존의 불합리한 정책과 규범에 도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이념적 균열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의로운 정책 방향이 제시되기도 했다. 캠퍼스는 사회적 변화의 산실로 지속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이번 시위 또한 미국의 가자 지구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윤리적 차원에서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은 역사의 몫이다.
정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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