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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재소자와 함께 흘린 눈물

형님, 아제들이 어디서 닭을 잡아 와 요리를 할 때 나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 주고 얻어먹곤 했습니다. 좋게 말해 ‘닭서리’를 해 온 것이었습니다. ‘서리’ 중에는 참외서리, 수박서리, 호박서리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시절이 어수선하니 너희들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해 경북 문경의 집성촌으로 갔습니다. 그해에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얼마 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서울, 평양, 심지어 도쿄에서 공부하던 친척들도 그곳으로 모였습니다. 그중에는 징집을 당해 군에 입대한 인척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친척들이 밤엔 서리 판을 벌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런 ‘닭서리’를 하다 잡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즉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겠지요.  
 
미국에 정착해 아이들 잘 키우며 이런저런 혜택을 받고 살다 보니 많은 것을 빚지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어느 분으로부터 교도소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신원조회 등의 절차를 마치고 1998년 교도소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연방 교도소에서 말씀을 전하며 “한국에서 닭과 수박·참외 훔쳐먹고 50여 년 전에 미국으로 도망와 지금 여러분과 이렇게 있다”고 말하자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숨겨진 죄’가 왜 없겠습니까?‘  사법 기관에 적발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여러분은 형기를 마치면 다 죄의 해결함을 받으실 분들입니다. 교도소 형제자매들의 솔직한 간증은  나도 얼마든지 그런 죄와 가까이 있었고, 저지를 기회가 스쳐 지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배가 끝나면 교도소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오래 교도소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한 재소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송됐다 제가 사역을 하는 교도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책에 나를 만났던 날짜와 내 이름을 써 놓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며 성경책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목사라도 재소자들과의 신체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도 모르게 그 형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올라오는 눈물이 빰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도 함께 울었습니다. 물론 교도관이 멀리서 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헤어져 그는 수감자 방으로,  나는 프리웨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나 사이에서 누구이신가요?

변성수 / 교도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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