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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복수는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윤재현 전 연방공무원

윤재현 전 연방공무원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활짝 열리고, 장총의 까만 세모꼴 총창이 들어왔다. 그 뒤에 인민군이 서 있다. 나를 힐끗 보더니 군화를 신은 채 저벅저벅 방으로 들어와서, 벽장문을 열어보았다. 그다음, 양복장의 서랍을 열고 그 뒤에 간격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총창으로 종이 천장을 몇 번 찔러본 다음 밖으로 뛰어나갔다.
 
때는 1951년 정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고 다시 북한군의 천하가 되었다. 그들은 노동당원과 가족을 죽인 반공청년단원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북한군 선발 부대는 몽금포에서 멀지 않은 우리 마을을 어망을 치듯 포위하고 수색했다.  
 
당시 나는 열여섯 살 소년이었다. 그날 아침 동네 분위기가 어수선함을 느꼈다. 불안했다. 우선 볏단을 방에 들여놓고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그때 북한군이 들어온 것이다. 새끼를 꼬지 않고 내가 벽장에 숨거나 방에서 서성거렸다면, 아마 총살되거나, 체포되어 연행되었을지 모른다. 어디서 그 임기응변의 기지가 나왔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손이 도와주었다.  
 
황해도 일대 특히 신천·재령 지역에서 많은 노동당원과 가족이 학살당했다. 유엔군이 들어오기 전 우익, 즉 반공 청년들이 봉기를 일으켜 인민군·내무서원들과 전투를 벌였다. 전방에서 고지의 주인이 몇 번 바뀌듯 좌익과 우익의 충돌로 엎치락뒤치락 치안과 공권력이 바뀌었다. 주도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북한은 양민 학살이 미군의 소행이라며 박물관을 세우는 등 반미 선동을 하지만, 그것은 미군이 아니라 지주와 지식층, 그리고 반공청년단이 한 소행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도 마찬가지다. 유엔군의 북상으로 인민군이 후퇴한 다음 노동당원과 가족을 색출해 공회당에 억류했다. 그런데 이후 유엔군의 후퇴로 우익은 공황 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했다.  
 
이민 오기 전 서울에서 반공 청년당원이었던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무고한 노동당원 가족까지 처형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보복이 두려워서.”  
 
가자지구에서의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으로 무고한 팔레스타인 주민이 3만 명 가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신천·재령에서도 거의 비슷한 숫자가 학살당했다. 유엔군이 북상하자 좌익이 후퇴하면서 일부 지주, 지식인, 성직자들을 학살한 것이 보복전의 발단이 되었다.  
 
가자지구 전쟁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음악 공연장을 습격해 1200여 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고 240여 명을 인질로 잡아간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25배 이상으로 보복을 가하고 있다.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지 못하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고 했다. 남북한 위정자는 이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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