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태극기와 트럼프
6·25 참전용사 시골집 정원서
태극기와 트럼프 깃발 펄럭
미국 사회의 다양성 재확인
이곳에 있는 하버드대 역시 진보적 성향의 대학이다. 한 지인은 1970년대 하버드 영문과가 마오주의(Maoism)의 요람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미·중 갈등이 이념 대립으로까지 번진 현 상황에서 들으면 놀랄 일이지만 당시에는 별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영문학 세미나 중에 마오쩌둥을 인용하면 뭔가 고상해 보이는 분위기였다고도 했다.
필자는 일본 학자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학 6년을 포함해 10여 년 미국 생활을 했지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얼마나 ‘대표성’이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따로 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저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다 진짜 미국’이란 식의 자동인식에 안주한 것은 아니었던가.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발언이 나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내 아파트 이웃인 베로니카는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갖고 있다. “공화당이 득세하는 텍사스주를 봐라. 치안이 안 좋으니 다들 호신용으로 총을 차고 다니며 카우보이 짓을 하고 있다. 우리 매사추세츠는 안전하다”는 식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주위에 이런 사람들과 살고 있으면 나도 정서적으로 ‘친 민주당’파가 되기 싶다. 그게 ‘정상적인 미국 사회’라고 나의 뇌는 간단하게 ‘상황 정리’를 하고 은연중에 주입시킨다. 그런데 큰일이다. 지금 민주당이 지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의 트럼프가 우세하다. 주변 미국인들도 ‘트럼프 시즌 2’ 가능성을 서서히 현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건 정상이 아니지.” 요즘 주변 미국인들로부터 듣는 말이다.
‘정상이 아닌 미국’을 실제로 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5월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주 시골을 방문했다. 시골길을 지루하게 운전하는데 뭔가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차를 후진해 확인해 보았다. 태극기였다. 미국 시골 마을 집 정원에 태극기가 꽂혀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해졌다. 아마 6·25 참전용사 가족일 것이라고 속으로 짐작하면서, 동행한 가족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집 주인에게 인사나 할 작정으로 내렸다. 내려보니 정원에 태극기 이외에 다른 깃발이 하나 더 꽂혀 있었다. 트럼프 이름이 적힌 깃발이었다. 발이 얼어 붙었다. 미국 시골 마을에서 목격한 태극기와 트럼프기의 조합이 만들어낸 생경함은 그날 하루 종일 나의 마음에 혼란을 주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 순박한 미국 노인은 트럼프에게서 무슨 희망을 발견했을까. 나름대로 상상과 유추를 해 보았지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온 미국은 20여 년 전 유학생활을 했을 때 알던 미국 사회가 분명히 아니다. 이런 형용하기 어려운 이질감과 불안감은 미국 대선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금 더욱 확연히 느껴진다. 그래서 최근 지인의 권유로 전직 의원, 백악관 관리, 교수, 언론인, 여론조사 전문가가 참여하는 대선 스터디 모임에 참석했다. 여러 차례 모임에 나가면서 얻게 된 결론은 이번 선거가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될 것이란 점이다. 시중에는 이런 자조적 농담이 돌고 있다. “민주당 후보 중에서 트럼프에게 질 수 있는 유일한 후보가 바이든이다. 공화당 후보 중에서 바이든에게 질 수 있는 유일한 후보가 트럼프다. 그런데 이번에 이 둘이 맞붙게 되었다.” 민주주의 모범국이라는 미국에 와서까지 ‘비호감’ 선거를 보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지만 눈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이 그렇다.
미국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모임에 나가면서도 아이오와 시골 마을에서 부닥쳤던 생경함의 근원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알고보니 그들 역시 현 상황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성적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풀어보려는 장으로 이런 모임을 활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버드에 와서 새삼 절실하게 느끼는 건 미국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이다.
‘진짜 미국’을 찾는 여정은 하버드의 강의실을 넘어 아이오와의 시골길을 찾아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성현 / 조지HW부시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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