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검은 백조의 위기
영어 블랙 스완(Black Swan)의 우리말 번역 ‘검은 백조(白鳥)’는 모순에 가깝다. 그래서 존재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상 획기적 사건들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미국의 9·11 테러,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으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까지 예기치 못한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다.예견할 수 없었고 당연히 존재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건들을 검은 백조, 즉 블랙 스완이라고 한다. 월가에서 일하다 철학 에세이스트로 전향한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2008년 월가의 위기를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탈레브는 그의 저서 『블랙 스완』을 통해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는 정규분포상의 현상들보다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아웃라이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매년 조금씩 수익을 쌓아가던 기업도 CEO의 사소한 실수, 회계부정의 발각, 시장 상황의 급변으로 하루아침에 망하곤 한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최근 위기관리(Risk Management)를 일상적인 경영관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취급한다.
역사의 변곡점은 합리적 예측을 거부한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검은 백조의 등장도 자세히 보면 전조가 있게 마련이다. 단지 이런 전조를 무시하기 때문에 검은 백조의 출현으로 충격을 받고, 그 폐해도 심각한 것이다.
검은 백조의 등장으로 참혹한 전쟁의 폐해를 우리는 겪었다. 1949년 7월 신성모 국방장관은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그해 말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 의해 타이완으로 쫓겨 갔다. 1946년 국민당 장제스(張介石) 군대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의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당연히 장제스의 군대가 마오쩌둥의 군대를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군의 군사지원을 받고 있던 국민당 군대는 430만명이었고 공산당 군대는 128만명에 불과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1949년 12월 타이완 망명의 길로 내몰았다. 이걸 보고도 공산당 김일성의 침략의도를 간과했다가 이듬해 6·25라는 검은 백조의 출현을 맞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또 하나의 검은 백조의 출현이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독립 당시 핵탄두 1804개, 대륙 간 탄도 미사일 176기, 전략 핵 폭격기 40대를 보유한 세계 3대 핵보유국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해빙 무드에 따라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등이 1994년 부다페스트 협약을 통해 1996년까지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로 넘겨주어 폐기하는 데 서명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야욕은 크림반도의 일부를 점령하더니 결국 우크라이나 본토를 침략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부다페스트 협약을 주도했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이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한 것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백조는 희다고만 생각하다가 검은 백조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전에 빌 게이츠는 신종 바이러스의 전 세계 확산 위기를 경고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검은 백조의 출현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코로나 위기가 발생하자 빌 게이츠가 바이러스를 확산시킨 게 아니냐고 음모론을 제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아사망률 추세를 보고 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던 프랑스의 인구역사학자 에마뉴엘 토드(Emmanuel Todd)가 최근 일본 학자들과 대담한 내용을 일본에서 출간한 『노인지배국가 일본의 위기(老人支配國家 日本の危機)』를 보면, 그는 코로나 사태로 세계화의 물결이 패배를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경제선진국인 프랑스조차 세계화로 마스크 공장 같은 단순한 제조업 기반이 붕괴하여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자 마크롱 정부가 우왕좌왕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글로벌 밸류 체인에서 보호주의 현상이 나타나면 경제선진국도 꼼짝없이 위기 대응을 못 해 쩔쩔매게 만든다. 그러면서 토드는 미국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일본은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세계질서가 요동치고 트럼프 이후 새로운 미국이 등장하면서 세계화보다 각자도생이 현실화되고 있다. 백조는 모두 희다고 생각하며 북한도 따뜻한 햇볕을 쬐면 문을 활짝 열 것이라고 기대했던 우리도 핵보유국이 된 북한이라는 검은 백조의 출현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시진핑 주석 3연임 이후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장이 등장하면서 최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뿐 아니라 주일, 주프랑스, 주필리핀 등 많은 나라 중국대사들의 거친 언사는 또 하나의 검은 백조 출현의 전조는 아닌지? 심각한 지정학적 위기가 검은 백조가 되어 다가오고 있을 때 모두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염재호 /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