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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끝이 보이는 언덕에서

-은퇴 하던 날

‘이제 어쩔 것인가 /  아쉬워 뒤돌아본들
 
흘러간 것은 / 잡을 수 없는 걸/
 
나 있을 자리 아니라고/
 
내 자리 마음에 들지 않아/
 


탈출을 꿈꾸고/ 자유를 갈망했는데
 
막상/ 떠나려니 넘치는 아쉬움/
 
낙엽 밟히는 가을 길에/
 
눈물처럼 떨어지네.’
 
하던 사업을 정리하면서 잠시 마음이 허전하여 써본 글이다. 가게에 몸은 잡혀있지만 마음이라는 형상은 자주 몸에서 빠져나와 먼 곳을 멋대로 방황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오늘도 운전대에 앉아 갈 곳을 무심히 지나쳐버렸다.
 
아, 내가 왜 이럴까? 다시 말머리를 돌려 목적지에 갔지만 나의 마음 내 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헤매다가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지켜야 할 일정을 이탈해 버리고 백일몽이나 꾸며 한가로이 유유자적할 처지도 못 되는 형편인데, 어쩌자고 마음은 몸 가는 곳에 함께 가주질 않는지 모르겠다.
 
삶에 지쳐 숨 막히던 혼이 틈새를 엿보다가 쏙 빠져 도망쳐 버리는 탓일까, 남보다 더 먹고 더 길게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 세끼 입에 풀칠이나 하면 될 것을….
 
이 나라에 산지 반평생 꽤 오래되었는데 항상 무엇에 쫓기듯 바쁘고 어쩌다 한가한 시간을 만나면, 내가 이래도 돼? 스스로 반문할 때가 있다.  
 
긴장의 연속, 삶의 경주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지난날들, 하루라도 방심을 하면 삶의 대열에서 나만 낙오자가 되고 인경이 울려 성문이 닫히면 나만 못 들어갈 것처럼 불안·초조 했었다. 오십여 년을 이 땅 한 모퉁이에서 끊임없이 허덕이며 지나온 날들이 돌아다보니 지금은 오히려 짧게 느껴진다.  
 
정녕 이젠 수고롭고 바쁜 시절은 다 보냈구나.
 
언제 신록의 봄이 왔다 갔는지, 여름이 어느새 왔는지, 풀꽃 향기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미쳐 느끼거나 만져보지 못한 자연을 이제야 여유롭게 감상해도 될 때가 온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렌다. 어깨에 짊어졌던 배낭 같은 책임, 의무를 벗어 던지고 지는 저녁 해를 보려 바닷가를 서성여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지점까지 온 것 같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허전해지는지 모르겠다. 힘차게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정거하면 그 반동으로 킥 쓰러지는 현상일까? 아니라면 매일 반복적으로 하던 일을 놓는 허전함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에스크로 회사에 가서 사인하고 돌아서는 마음이 허전했지만, 시원했었다.
 
많은 것을 하고 싶던 지난날들, 좋아하는 소설도 읽고, 촉촉이 봄비 나리는 날, 추녀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세면서 향기로운 커피잔에 모차르트를 담가 보는 낭만을 미루고 살아왔다. 한적한 시간 사업체에 앉아 눈을 감으면 모처럼 이어지는 영감(靈感))의 줄을 툭툭 끊어버리던 손님들, 지나간 추억 속에서나 만나 봐야겠지.  
 
오늘 아침 한국서 보내오는 월간 문학잡지가 도착했다. 첫 장을 여니 파란 신록의 사진과 함께 미당의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백양나무가 뻗어있는 오솔길과 연녹색 나뭇잎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 난 이제 자유랍니다. 삶의 무서운 경쟁을 끝냈답니다. 애지중지 사랑하는 자식들도 잘 키워서 저희가 원하는 세상으로 내보냈습니다. 마음껏 저 오솔길을 걸어도 시간이 날 속박할 수 없을 터, 백양나무 껍질에 시를 써놓고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끝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흩날리는 길 먼지를 뒤집어써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보며 오랫동안 못 보던 친구를 찾아 점심을 함께해도 시간에 쫓길 일도 없을 것입니다. 스케줄이라는 강박관념조차 힘을 못 쓸 것이니까….’
 
‘Retirement’ 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은퇴, 은거, 퇴직, 은거하는 것, 외딴곳, 벽촌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 나는 이제 은거하는 삶을 살 것이다. 흐드러지게 단풍이 진 산록에서, 청풍명월 산정에서, 펄펄 끓는 열대 사막 온천에서 나만의 삶을 산들 그 누가 탓할까. 겁날 게 없다.
 
돌이켜 보면 감사한 세월이었다. 역병에 시달림도 안 받았고, 식구들 모두 건강하게 제할 일 다 하고, 부자는 못돼도 그럭저럭 잘 살았다. 그런데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왜? 나는 그대 떠난 강가에 홀로 남겨진 빈 배처럼 끝없는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제3의 삶이 시작되는 것에 대한 불안인가?  
 
지난날들이 아득한 전생이라면, 지금은 고요한 아침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남아있는 날들을 더 알차게 보람되게 살기 위하여, 언덕에 서서 저문 하늘에 떠오르는 달빛도 바라보고,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동 가숙 서 가숙 자유를 누리며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도록 살아야겠다. 

김명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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