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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영혼 속에 담긴 추억

60여년의 세월. 시공을 뛰어넘어 내 꿈속으로 찾아온 사람, 이민호. 그 아이는 내 중학교 때 한반 짝꿍이다.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학교는 불에 타서 변해 국방색 천막에서 공부를 했다. 우리 둘은 키가 작아서 그 아이는 5번, 나는 6번 교실 맨 앞쪽 선생님 강단 앞에 앉아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장에서 전사해서 어머니와 어린 누이동생과 셋이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시장통에서 떡 장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부 시간에 공책이 없어 선생님 말씀만 듣곤 했지만, 시험을 치면 늘 상위권으로 머리가 명석했던 것 같다.
 
미술 시간에 그림 그리기 시험을 쳤는데 나는 학교 뒷산에 올라가서 풍경화를 그렸고 민호는 백지를 냈다. 미술 선생님은 전쟁 중에 한쪽 눈을 잃어 의안을 하고 있어 철이 없던 우리는 개눈깔이라고 깔깔댔다. 미술 시험에 백지를 냈으므로 응당 선생님의 불호령을 듣고 꿀밤을 맞았다. 민호는 꿀밤을 맞으면서 “선생님, 저는 토기와 거북이 경주 그림을 그렸는데 토끼는 너무 빨리 뛰어 도화지 밖으로 나갔고 거북이는 너무 느려 아직 도화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과 우리는 조선시대 학자인 오성과 같은 지혜로운 답변에 할 말을 잊었던 기억이 새롭다.  
 
선생님은 그의 명답을 듣고 얼굴에서 노기를 풀고 “이놈아, 그러면 이쪽 도화지 끝에 토끼 꼬리를 그리고 저쪽 끝에는 거북이 머리를 그렸으면 꿀밤은 안 맞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영어책을 살 수 없는 가정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상상 밝은 모습이었다.  새로 나온 영어책을 나에게 빌려 읽더니 레슨(Lesson)1 부터 레슨(Lesson) 26까지 다 외어 버렸다고 했다. 하루는 내가 물었다. “시험 때 100점을 맞을 수 있을 텐데 왜 80점 정도만 맞니?” 그의 대답 한번 걸작이다. “다 아는 문제인데 다 맞추면 재미가 없단다.”  
 
어느 날 떡 장사 하는 어머니가 다른 일이 었어 민호에게 떡 모판을 맡기고 가셨는데 늘 굶주려 배고프던 시절 첫 마수걸이로 떡 판돈 10환을 여동생에게 주고 떡을 사 먹었다. 배가 고팠던 동생도 그 10환을 오빠에게 다시 주고 떡을 사 먹고…. 결국 그 10환 가지고 서로 실컷 배부르게 떡을 사 먹은 탓에 떡 모판은 텅 비어 있었고 종일 떡 판 돈은 달랑 10환만 남았다. 어머니가 돌아왔을 때 기막힌 일이 아닌가. 떡 장사 밑천을 다 털어먹은 오누이는 엄마한테 실컷 얻어맞고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한다.  
 
고시에 합격했다고 뛸 뜻 기뻐하며 나에게 달려와 힘들었던 옛이야기를막걸리로 목 추기며눈물반웃음반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한 후 학벌이 안되어서 한동안 발령을 못 받아마음고생 하다가 경상도 지역의 궁벽한 지역으로 발령을 받고 판사를 하더니 하루는 나를 찾아와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훌쩍 떠나갔다.  동부 명문대학에서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유명한 법대에서 청빙을 받아 금의환향, 곧 귀국하겠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그런데 한국 유학생이 필라델피아 고속도로에서 교톻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의 귀국을 기다리던 나는 그가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공부해 오늘에 이르렀는데 노모에게 효도 한번 못하고 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닌가. 나는 하늘은 왜? 착하고 훌륭한 이들을 먼저 데려가는지 신에게 묻고 싶다. 세상에 악의 무리를 먼저 없애야 옳거늘 늘 반대의 결과에 울화가 치민다.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인가? 신은 정녕 존재하는가?
 
그런데 까맣게 잊고 살았던 추억 속의 이야기 보퉁이를 그것도 60여 년 전의 이야기를 꿈길로 찾아와 왜 풀어놓고 갔을까? 오래전에 고인이 된 사람인데…. 알 길이 없다.  
 
노모가 손꼽아 기다리는 고향에 끝내 돌아가지 못한 길잃은 영혼이 타국에서 외로움에 옛날 학교 짝궁 친구가 미국에 사니까 나를 찾아와 옛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한 세상이 참으로 덧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꽃 한 번 못 피우고 그것도 타국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친구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이 글을 남긴다. 

이산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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