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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글을 통해 남긴건 깊이 있는 울림…김영애 작가 별세

미주 지역 수필가인 김영애(사진) 작가가 지난 13일 오후 11시 47분 별세했다. 73세.   김영애 작가는 평생 글로 삶을 기록해왔다. 지난 7월 출간된 다섯 번째 수필집 ‘포인세티아’는 그의 문학 여정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35편의 수필을 담았다. 일상과 사회를 깊이 있는 시선으로 풀어냈다.   김 작가는 이화여대 간호대를 졸업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근무하다 지난 1978년 도미했다. 이후 글쓰기를 시작했다. ‘수필시대’, ‘수필세계’를 통해 등단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김 작가는 수필집 ‘몸 연꽃 피우기’, ‘사각지대의 앵무새’ 등을 펴냈다. 그의 글은 일상의 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일평생 글을 통해 남긴 건 깊이 있는 울림이었다. 숨겨진 아픔과 약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포인세티아’에서는 ‘억울한 미투의 고발’을 떠올리게 하는 사연을 전했다.   그는 서울문학 오늘의 작가상, 무원 문학상, 경희 해외 동포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글쓰기는 곧 그의 삶이었다. 김 작가는 생전 글쓰기를 “언어에 혼을 입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유족으로는 두 딸과 아들이 있다. 장례 예배는 내달 11일 오후 2시 30분 ‘올드 노스 처치(Old North Church)’에서 진행된다.   ▶연락:(323) 979-1512   ▶올드 노스 처치(Old North Church):6300 Forest Lawn Dr,. LA, CA 90068 정윤재 기자삶과 추억 김영애 별세 김영애 작가 올드 노스 old north

2024-12-17

추억의 정화 오징어, 그래 이 맛이야!

40년 전통, 안주의 지존! 그때 그 맛, 단짠단짠 중독성 있는 오리지널 레시피의 '정화 오징어 세트'가 중앙일보 '핫딜'에 입고돼 화제다.     간단한 맥주 안주로는 물론 입이 심심할 때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정화 오징어는 총 6개의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핫 오징어(35g)'는 쫄깃한 오징어에 적당히 화끈하게 매운 양념을 더해 매콤하게 구워냈다. ▶담백한 맛과 버터의 고소한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해오징어 버터구이(35g)'는 고소한 풍미가 가득하다. ▶맥반석에 껍질째 구워 더 담백하고 쫄깃한 '맥반석 오징어(35g)'는 오징어의 감칠맛을 살려 어떤 소스와도 잘 어울린다. ▶불고기 양념을 만난 오징어의 참맛을 보여주는 '불고기 통오징어(55g)'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불고기 양념과 쫀득한 통오징어의 환상적인 조화를 자랑한다. ▶껍질째 구워 더 부드러운 단짠단짠 '맥반석 통오징어(55g)'는 구수한 맛은 물론 맥주 한 잔을 절로 부르는 맛 그 자체이다.     '치맥' '피맥'도 좋지만 맥주 한 잔에 간단히 곁들이기로는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콤한 오징어만 한 게 없다.     추억의 정화 오징어는 중앙일보 '핫딜'에서 6개 맛에 2개 랜덤 맛이 추가된 총 8종 구성을 43달러에 만나볼 수 있다.   ▶문의:(213)368-2611   ▶상품 살펴보기:hotdeal.koreadaily.com핫딜 오징어 추억 정화 오징어

2024-12-0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추억의 항아리 껴안고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옆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중략)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 ‘오래된 가을’ 중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떠나간다. 무성한 초록으로 아름드리 서 있던 나무들도 찬란한 옷을 벗고 하나 둘 흩어진다. 낙엽은 아침 이슬로 눈물을 감추고 밟힐 때마다 바스락 신음 소리 내며 작별을 서두른다. 계절은 등을 돌이며 빛바랜 정원에 추억의 꽃 씨 한 알 떨어트린다.     묵은 것들은 농익은 맛을 낸다. 상큼하진 않지만 감칠 맛으로 다가온다. 겉절이는 풋풋하고 신선한 맛을 내지만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 추억의 정원에는 오래 되고 빛이 바랜, 콤콤한 냄새 나는 해묵은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로 양념을 강하지 않게 해 담근다.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나는데 오래 숙성 저장 할수록 맛있고 깊은 맛을 낸다. 추억의 창고에 묵은지가 많은 사람의 하루는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다. 묵은지는 일반 김장김치보다 조금 짜게 담궈야 긴 겨울을 버틴다. 인생의 짠 맛, 신 맛, 험한 맛을 많이 본 사람은 엄동설한을 버틸 힘과 용기를 얻는다.     너무 빨리 숙성된 김치는 금방 신맛이 나지만 묵은지는 서서히 오랜 기간 발효되기 때문에 시어지지 않는 게 특징이다. 짧은 시간 한 방에 날리는 성공은 쉽게 사그러들지만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삶은 묵은지처럼 오래 지속된다. 묵은지 배추는 속이 덜 차고 푸른 잎이 많으며 단단한 것으로 골라야 한다. 사는 게 마음에 덜 차고 적게 가져도 늘 푸른 잎새로 마음 단단히 먹고 살면 묵은지처럼 깊은 맛을 낼 수있을까?     김장은 배추를 소금물에 담군다는 침장(沈藏)에서 나왔는데 김장으로 바뀌게 됐다. 김치는 침채(沈菜)에서 유래됐는데 딤채→김채→김치로 변형을 거듭했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며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 돼 죽고,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마지막으로 죽는다. 김장 담그는 일은 다가올 험난한 엄동설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익숙한 손 맛으로 오래된 정원에서 해묵은 추억의 불씨 하나 지피는 일이다. 난로가에서 톡 톡 튀는 밤톨 까먹던 유년의 시간으로 연어처럼 거슬러가는 일이다.   오늘이 허전한 그대여. 계절의 끝자락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그대여! 사무치게 그리운 날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묵은지로 남아있는 추억의 항아리를 꺼내 보세요. 못 견디게 힘든 날만 열어보세요. 너무 자주 열어 보면 그 아름답던 날들이 빨리 시어질지 몰라요. 추억의 항아리는 우거지로 단단히 덮어 땅 속 깊이 묻어 두세요. 찹쌀 풀 섞은 물에 고춧가루와 고추씨를 개고 멸치액젓 다진 마늘과 생강 소금을 넣듯 생의 모든 슬픔과 기쁨, 황홀한 추억들 모두 담아 꼭 꼭 봉해 묻어 두세요. 외로울 때면 오래된 정원에서 은근하게 잘 익은 묵은지 항아리 꺼내 빛바랜 어제를 이지러지게 껴안아 주세요.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항아리 추억 묵은지 항아리 일반 김장김치 추억들 모두

2024-11-05

[이 아침에] 추억의 옛 가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운동하거나 산보를 하며 노래 듣기를 좋아하셨다. 허리에 워크맨을 차고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옛노래를 헤드폰을 끼고 듣곤 하셨다. 카세트는 30분 한 면이 다 돌고 나면, 테이프를 바꿔 끼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한번 충전에 몇 시간이고 중단 없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아이팟을 여동생이 사 드렸는데, 그 자그마하고 생소한 기기가 불편하셨던지 얼마 후에는 다시 워크맨으로 돌아갔다.     20여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한창 유행하던 해바라기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지인이 CD를 선물하겠다고 했다. 한데 그때 내 차에는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카세트테이프를 사달라고 했다.     그 후 장만한 차에는 CD를 6장 넣고 들을 수 있는 CD플레이어가 있었고, 지금 타는 차에는 USB를 꽂아 노래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요즘은 블루투스로 스마트 폰을 연결하여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전화기에 담을 필요도 없다.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 연결해서 듣는다.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모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연결해서 들을 수도 있다.     요즘 미국 음원 사이트에는 웬만한 한국노래는 다 있다. 최근에 애플 뮤직에서 ‘추억의 옛 가요’ 음반을 찾았다.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같은 옛 노래가 원곡 그대로 들어 있다. 아버지가 즐겨 듣고 부르시던 노래다.     내가 ‘세시봉’의 노래를 즐겨 듣던 무렵, 아버지는 나이 든 가수들이 등장하는 가요무대를 즐겨 보곤 하셨다. 재미없는 노래를 지그시 눈을 감고 듣는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지곤 했었다.     음악은 취향이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다를 수 있지만, 대개는 젊은 시절 들었던 노래, 또는 이와 유사한 성격의 노래를 즐겨 들을 것이다. 나 역시 7080 노래를 즐겨 듣는다. 하지만 최근 발견한 ‘추억의 옛 가요’도 이제 즐겨 듣는 플레이 리스트에 올려놓고 가끔 한 번씩 듣곤 한다.     처음 이 음반을 듣던 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내 몸은 이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리워서, 지난 세월이 아쉬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50-60년 전에 들었던 노래가 전해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     봄날 파랗게 싹을 틔워 나오던 새싹이 어찌 가을을 알고 낙엽을 알겠는가.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비바람을 겪어야 다가올 가을을 예감할 수 있을 터.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어 온갖 호사를 누린 사람이나, 허름하고 소박한 삶을 산 사람이나, 결국 가을이 되면 다 비슷한 길에 들어선다.   옛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추억하고, 지금은 사라진 이들을 생각하고, 내게도 다가올 마지막 잎새를 기다린다. 가을은 그렇게 깊어 간다.  고동운 / 전 가주 공무원이 아침에 추억 가요 노래 듣기 음원 스트리밍 cd 플레이어

2024-10-30

[삶과 추억] 45년간 사랑 실천한 목회자, 고 이종범 목사

샌디에이고 기독교계의 큰 별이 졌다.   샌디에이고 영락장로교회의 담임목사(1979~2005)로 청빙을 받은 1979년 이후 45년간 지역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겸손과 헌신으로 이웃들을 섬겼던, 이종범(사진) 목사가 지난 9월11일 운명했다. 향년80세.   고인은 2005년 비기독교 지역에 대한 선교 사명을 갖고 당시 기독교 불모지였던 우즈베키스탄에 들어가 7년이나 비밀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곳 당국으로부터 선교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강제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2012년 샌디에이고로 돌아와 은퇴한 고인은 양로원과 너싱 케어 등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인들과 환자들을 위해 매주 예배와 집회를 인도해 왔으며 통역이 필요한 이웃들과 노인들을 위해 병원과 민원업무 등을 도맡아 처리해 주기고 했다. 온화한 성품으로 이웃들에게 곁을 내주며 사랑을 실천해 왔던 목회자로 기억되고 있다.     고인은 대광고등학교와 숭실대학을 나왔으며 한국장로교단 통합 측에서 안수를 받았고 한경직 목사의 비서로 사역을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과 남가주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 이종범 목사의 장례예배가 오는 10월12일 오전 10시 글렌아비 메모리얼 파크(3838 Bonita Rd. Bonita)에서 올려진다.     ▶연락처:(619)772-7043삶과 추억 목회자 이종범 이종범 목사 한경직 목사 샌디에이고 기독교계

2024-10-08

[삶과 추억] 한국인 최초 히말라야 등정 도전 산악인 송윤일씨 별세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했던 송윤일(사진)씨가 지난 28일 오전 11시 별세했다. 향년 88세.   유가족에 따르면 그동안 LA지역에서 살던 송씨는 요양원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송씨는 지난 1962년 경희대산악회 히말랴아 다울라기리2봉 원정대(대장 박철암) 소속으로 2명의 대원들과 함께 한국 산악인 역사를 새로 썼던 인물이다.   당시 송씨가 대원들과 함께 히말라야 원정에 나섰던 날은 광복절이었다. 송씨는 본지와의 인터뷰〈본지 2016년 1월16일자 A-11면〉를 통해 당시 다울라기리의 눈 쌓인 모습을 회상하기도 했다.   송씨는 평양에서 나고 자랐다. 중학교 때 송씨는 한국 전쟁을 겪으며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이후 서울에 정착했다.     광성고등학교에서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1958년 경희대학(당시 신흥대학)에 입학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송씨는 당시 7명의 친구들과 함께 산악회를 만들엇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게 된 계기였다.   산을 오르 내리기 시작하면서 도전에 대한 열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산을 오르고 싶었다. 히말라야 등정을 그때부터 계획했다.    물론 그 당시 히말라야에 대한 정보는 전무했다. 등산 장비와 자금도 부족했다. 남대문시장을 뒤져 군용텐트 2개를 사고 침낭 15개를 사서 뜯은 뒤 방한점퍼로 만들어 히말라야로 향했다.   물론 정상정복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송씨는 히말라야 원정의 초석을 만든 영원한 기록을 갖게 됐다. 이를 발판 삼아 후배 산악인들이 이후 히말라야를 정복했다. 그 이후에도 송씨는 1993년 단장으로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했다.   송씨가 LA에 온건 지난 1999년이다. 이후 미주 지역 한인 산악회 모임 등을 다니며 산에 대한 이야기, 등정 노하우 등을 전하며 후배들을 키웠다. 도전 정신을 갖고 산을 오르내리던 그는 이제 인생의 무대에서도 내려왔다.    송씨의 장례 미사는 오는 11일 오전 10시 그레고리성당에서, 하관 예배는 이어 홀리크로스 묘지(하관예배)에서 진행된다. 유족으로는 2남(석근. 택근), 1녀(원경)가 있다.    ▶연락처:(818) 307-6366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히말라야 추억 히말라야 등정 히말라야 원정 등정 도전

2024-08-30

[문예 마당] 슬픔과 함께 고향의 추억 속으로

어릴 적 친정아버지가 꾸민 서재에는 보물단지 책상 하나가 있었다. 큰오빠가 이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 연유로 고등학생이던 나의 두 사촌 오빠가 교대로 우리 집의 그 책상에서 공부하다 가는 날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 오빠의 아들들이었다. 그런데 큰집의 막내아들인 오빠는 서울대에 들어갔고 작은집의 오빠는 후기 대학에 합격했다. 최근 큰집 오빠의 부음을 작은집 올케로부터 들으며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올케는 남편이 장례식에서 서럽게 울더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고인이 된 오빠는 자기 형처럼 유명한 농대를 졸업했지만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잘 난체도 열등의식 같은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다.     큰 외갓집은 어머니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양자로 들어오신 삼촌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1928년은 딸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어머니는 그 삼촌과 공동명의로 논밭 조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있었지만 나는 큰 외사촌 언니와 오빠를 좋아했다. 시청 근처인 광산동에서 외삼촌은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오래 운영했다. 그리고 외삼촌 댁 이층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면 초중고생 사촌들이 모였다. 차례로 교자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오빠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유명회사에 지원했지만 잘 안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빠는 결국 외삼촌처럼 자전거 대리점을 양동 상가에 차렸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결혼했다. 올케는 우리 동네 이웃의 착한 딸이라며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당시 올케도 나처럼 교사여서  퇴근길에 오빠네 가게에 들러 올케랑 이야기도 종종 나누며 정도 들었다. “아가씨, 오셨수?”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고향에 가면 꼭 하루 자고 싶은 그 다정한 오빠와 올케네 집.     얼마 전 한국의 한 지인이 나에게 공진단을 보내준다기에 대신 그 오빠에게 선물해 달라고 했다. 오빠는 그때 간암 투병 중이어서 본인이 먹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공진단을 보내준 지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갔었다고 한다.     오빠의 병환 중에 가끔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최근 내가 병원에 다니느라 잠시 소홀했더니 그사이에 별세한 것이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잘 있냐, 애 아빠 잘 계시냐”고 말했던 오빠였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예쁜 동생아, 좋은 글 많이 써라”였다.  보고 싶은 오빠, 우리가 모르는 고민 다 떨구시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구려. 최미자 / 수필가문예 마당 고향 추억 어머니 오빠 막내아들인 오빠 오빠네 가게

2024-08-29

[독자 마당] 모내기의 추억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한국 어린이들의 모내기 체험 영상을 봤다. 그들은 고운 색깔의 옷에, 허벅지까지 오는 빨간 장화를 신고 모내기를 했다. 나는 그들이 신고 있는 긴 장화에 눈길이 가면서 옛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날 무렵 초등학교 3~4학년 때 모내기를 다녔던 곳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논에 이르면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리고 저벅저벅 걸어 논에 들어갔다. 어른들이 양쪽에 서서 밧줄로 라인을 만들면 우리는 그 앞에 일렬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 왼손에 모종을 잡고 오른손으로 조금씩 떼어 무논에 꾹꾹 꽂아 넣었다.   누군가 “좋았어”라고 외치면 한 발씩 뒤로 물러섰고 줄도 옮겨졌다. 이런 방식으로 모내기는 계속 진행됐다. 이렇게 무논은 파랗고 아름다운 푸른 농원으로 변했고, 그 모습을 보는 우리도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은 거머리가 다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질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거머리는 징그럽다. ‘그때 우리에게도 장화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그때 모내기 현장이 그리워진다. 모내기를 자주 했던 까닭인지 지금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되풀이하면 연습이 된다. 우리 생활에서도 옷 만들기, 책 읽기 그리고  글 쓰기 등도 마찬가지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사랑도 계속 연습을 한 후에 실행에 옮긴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 부단히 연습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원만한 관계를 위해 모내기하듯 다양한 방식으로 연습한 후 이를 실행에 옮긴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영순·샌타클라리타독자 마당 모내기 추억 신고 모내기 모내기 체험 그때 모내기

2024-06-11

[이 아침에] 추억의 ‘99센트 온리 스토어’

이리나‘99센트 온리 스토어(99 Cent Only Store)’는 좋아하는 가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이 가게 단골손님이었다. 하루는 작은 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일이 있었다. 비누로 깨끗이 씻기고 연고도 바르고 마지막엔 그 당시 한창 인기 있었던 TV 아동용 애니메이션 여자 주인공 도라 디 익스플로러가 선명하게 프린트된 반창고를 붙여줬다. 조금 깊은 상처여서 쓰라리고 아팠을 텐데 도라를 좋아해서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딸은 도라가 새겨진 반창고를 모든 인형의 팔과 다리, 얼굴에 붙여주었다. 인형이 아파서 붙여줬다며 안쓰럽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그리 비싼 반창고도 아니고 딸이 좋아해서 아기자기한 동물 그림이 그려진 반창고를 몇 개 더 샀다. 딸은 한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99센트 온리 스토어’에서 파는 많은 품목 중 딸은 스티커를 제일 좋아했다. 꽃 그림, 동물 그림, 위니 더 푸 캐릭터, 헬로키티 등 크고 작은 스티커는 항상 사는 물건이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이들은 으레 내 핸드백에 먼저 눈길을 줬다. 스티커를 핸드백에서 꺼냈을 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환한 미소, 웃음소리 때문에 아이들이 싫증 낼 때까지 샀다. 벽과 유리창, 의자 다리에도 스티커를 붙여서 한동안 우리 집은 인형의 집처럼 스티커로 치장됐다.   주로 생필품을 파는 곳이지만 의외로 선물용품, 공구류, 애완동물 용품, 미용 보조식품 등과 무슨 용도로 쓰는 제품인지 모르는 물건도 의외로 많다. 아이들 학교에서 내주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99센트 온리 스토어’를 찾곤 했다.     어떤 선생님은 창의력을 발휘하는 프로젝트를 요구해서 여느 가게에서는 팔지 않는 재료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에 먼저 들러서 아이디어를 얻고 그에 걸맞은 물건을 사고 크래프트 가게인 마이클스에서 나머지 필요한 재료를 사서 프로젝트를 끝내곤 했다. 이렇게 만든 프로젝트는 아이들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도 저렴한 가격으로 동심을 부풀리는 가게가 있었으면 했는데, 그런 ‘99센트 스토어’가 사업 부진으로 모든 매장의 운영을 중단하고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금리와 물가도 올랐지만 무엇보다도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못내 서운해서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가게 안에 있는 텅 빈 선반을 보니 내 마음이 다 휑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던 때가 생각난다. 좋아하는 스티커를 손에 꼭 쥐고 사달라며 나를 보고 씩 웃던 모습이 그립다. 이제 가게는 없어졌지만, 거기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추억은 내 마음에 연전히 고이 담겨있다. 이리나 / 수필가이 아침에 스토어 추억 온리 스토어 선물용품 공구류 캐릭터 헬로키티

2024-05-06

엄마 손 잡고 함께 ‘추억 여행’ 떠나요

마더스데이에 선물도 좋지만, 어머니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가정의 달이자 마더스데이가 있는 5월을 맞아 가주관광청이 추천하는 가주지역 여행지를 소개한다.   ▶델마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세상 높이 날아오를수록 헌신했으니 어머니께도 창공을 날아다니는 멋진 경험을 선사해 드리자. 매직 어드벤처 벌룬 라이드(hotairfun.com)의 수석 조종사 데니 바렛은 샌디에이고 노스 카운티의 델마(sandiego.org/explore/things-to-do/beaches-bays/del-mar.aspx) 상공에서 열기구를 타고 날아오르면 “새로운 시각으로 스카이라인과 시원하게 탁 트인 태평양을 보게 될 것”이라며 열기구 체험을 강추했다. 새를 좋아한다면 야생 앵무새들의 보금자리인 델마의 프리 플라이트 버드 생추어리(freeflightbirds.org)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델마빌리지에는 중세 유럽에서 영감을 받은 튜더 양식의 건물에 자리 잡은 산책하기 좋은 레스토랑과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농산물 직거래 장터가 있다. 멋진 바다 전망을 즐기고 싶다면 어머니와 함께 제이크스델마(jakesdelmar.com)에서 브런치, 런치, 디너 타임을 가져보자.   ▶오하이 LA에서 90분 거리에 있는 토파 토파 산맥에 자리한 토니 오하이(ojaivisitors.com)에는 아트 갤러리와 픽시 귤 농장 외에도 많은 볼거리가 있다. 어머니가 독서를 좋아한다면 13만여권을 보유한 야외 서점인 바트 북스(bartsbooksojai.com)가 마음에 들 것이고 공예를 좋아한다면 피그(figojai.com)에서 엄선된 수제 공예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하이 올리브 오일 컴퍼니(ojaioliveoil.com)에서 농장 투어를 하고 어머니의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도록 럭서리한오하이 밸리 인(ojaivalleyinn.com)에서 따뜻한 히말라야 소금 스크럽 마사지 선물을 준비하자. 특히 더 팜하우스(ojaivalleyinn.com/farmhouse)에서 열리는 연례 마더스데이 브런치 행사에 참석해 보자.   ▶아발론, 카탈리나섬 도심을 떠나 섬에 가고 싶다면 샌페드로 또는 롱비치항에서 보트(catalinaexpress.com)를 타고 한 시간여 만에 쉽게 도착할 수 있는 카탈리나섬(catalinachamber.com)이 안성맞춤이다. 데스칸소 비치 클럽(visitcatalinaisland.com/dining/avalon/descanso-beach-club-dining)에서 푸른 태평양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도 있고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돼 바닷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보트 투어를 통해 오렌지색의 가리발디 물고기들을 만날 수 있다. 리글리 기념관 및 식물원을 방문해 남가주 토종 식물과 아발론 베이의 탁 트인 전망도 감상해 보자. 블루워터 그릴(bluewatergrill.com/locations/catalina-island)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아르데코 양식의 아발론 카지노 극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무비 타임도 가져보자.   ▶모스랜딩 중가주 샌타크루즈와 몬터레이 중간에 위치한 모스 랜딩(seemonterey.com/things-to-do/itineraries/moss-landing)에서 어머니에게 눈앞에서 회색 고래나 혹등고래가 바다에서 튀어나와 수면과 부딪히며 우렁찬 소리를 내는 박진감 넘치는 모습을 볼 기회를 선사하자. 블루 오션 웨일 워치(chttps://blueoceanwhalewatch.com)가 2~4시간의 고래 투어를 제공하기 때문에 항구의 아트 갤러리와 도자기 전문점을 둘러볼 시간이 충분하다. 초보자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카약 투어에 참여해 엘크혼슬라우(seemonterey.com/things-to-do/parks/elkhorn-slough)의 잔잔한 바다에서 노를 저어보자. 먹이를 먹고 장난치는 귀여운 해달과 하버 물개와 바다사자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필스 피시 마켓(philsfishmarket.com)에서 싱싱한 광어 타코를 맛보며 하루를 마무리하자.   ▶프리스톤 북가주 소노마 카운티의 서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목가적인 소도시 프리스톤(sonomacounty.com/cities/freestone)에서 하루, 이틀 머물며 어머니와 함께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자. 오스모시스(osmosis.com)의 삼나무 효소 욕조에 몸을 담그면 스마트폰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근육이 풀리면 와일드플라워 브레드(wildflowerbread.com)를 찾아가 장작불 벽돌 오븐에서 갓 구워낸 사워도우와비스코티를 맛보자. 프리스톤 아티잔 치즈(freestoneartisan.com)에서는 소노마 카운티 치즈 장인이 만든 수제 치즈도 맛 볼 수 있다. 도란 비치 지역 공원(parks.sonomacounty.ca.gov/Visit/Doran-Regional-Park)의 모래사장은 가족 피크닉을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다.   ▶네바다시티 새크라멘토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네바다시티(nevadacitychamber.com)에서는 가족들 뒷바라지에 바쁜 어머니들에게 여유로움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골드러시 마을은 진저브레드 빅토리아 양식의 주택과 느긋한 농장에서 식탁까지 이어지는 문화가 매력적이다. 트리츠(treatsnevadacity.com)에서루바브 또는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네바다시티 와이너리(ncwinery.com)에서 와인을 시음해 보자. 웨이워드 걸 크리머리(wheywardgirlcreamery.com)에서는 염소 및 버펄로 우유 치즈를 살 수 있다. 가주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거나 크리스털에르미타지(crystalhermitage.org)의 고요한 정원에서 만개한 각양각색의 꽃들도 감상할 수 있다.   박낙희 기자엄마 추억 가주지역 여행지 가주관광청 마더스데이 특집 로스앤젤레스 가주 미국 OC LA CA US NAKI KoreaDaily

2024-04-30

[삶과 추억] 나눔 실천의 삶 살아온 기업인

앨라이드 테크놀로지 그룹 창립자 및 고문인 이덕선(사진)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 이사장이 지난 11일 별세했다. 향년 84세.     이덕선 이사장은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이덕선 이사장은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시작, 1986년 앨라이드 테크놀로지 그룹(ATG)을 설립, 미국 국무부 전산망을 책임지는 기업인으로 성장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나눔은 결국 더 큰 결실을 맺는다'는 평소 철학에 따라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재단인 'Matthew D. & Katherine H. Lee Foundation'을 설립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왔다.   이러한 공로로 2004년 한국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에는 메릴랜드 주 정부가 수여하는 '최우수 기업 100대 경영자상(Top 100 Minority Business Enterprise's Business Legend Award)'을 수상했다.   또 인류에 공헌하는 글로벌 인재 양성을 염원하며 12년간 거액의 장학금을 후원해왔다. 지난 2022년 한국외대에는 장학금 100만 달러를 추가로 기탁해 이덕선 이사장이 출연한 장학금 총액은 40억 원에 달한다.   유가족으로는 아내 캐서린 이씨와 두 딸 소피, 퍼트리샤씨가 있다. 장례미사는 지난 13일 오전 11시 메릴랜드주 성 유다 성당에서 열렸다.   ▶연락:(301)946-8200삶과 추억 나눔 외대해외동문회 한국외대 해외동문연합회 이덕선 이사장 나눔 실천

2024-04-14

[삶과 추억] 민용순 UC어바인 미술과 교수, 아시안 이민자 정체성 탐구

아시안 이민자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한인 작가 민용순(사진) 교수가 지난 12일 LA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70세.   LA현대미술관의 앤 엘레굿 디렉터는 14일 성명을 통해 “수년간 자문위원으로 봉사하며 지혜와 관대함, 협력 정신을 보여준 민용순 선생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고인의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사망 전까지 UC어바인 명예교수이자 LA현대미술관 예술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고인은 1953년 한국 부곡에서 태어났다. 196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고인은 UC버클리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고인은 1980년대 말 미국에 아시안 미술가들의 정체성을 견인한 작가이자 미술을 매개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주의 미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이름을 떨쳤다.     초기작 ‘자기 만들기’(1989)는 미국 내 소수자였던 아시안 이민자의 왜곡된 정체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가리는 것으로 이민자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반영했다. 1993년부터 UC어바인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전 세계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저기: 이산의 땅’ 전시 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 및 심포지엄에 참여하고 기획했다.       그는 이민 1세와 2세 작가들이 창작한 디아스포라 미술을 소개하고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여성 작가들의 정체성 활동에 관심을 쏟았다. 고인도 한복, 보따리 등 한국 여성과 관계되는 고유의 모티브를 활용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체성으로 시각을 확장한 퍼포먼스 설치작품을 구상했으며, 한국 내 외국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장연화 기자 [email protected]삶과 추억 민용순 어바인 아시안 이민자 아시안 미술가들 민용순 uc어바인

2024-03-14

[독자 마당] 자매들의 여행

해가 갈수록 평범한 것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훗날엔 지금 이 순간도 몹시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다.   십여년 전 푸르던 시절을 공유하는 네 자매와의 해외여행은 축제처럼 들뜨고 설레었다. 아침에 눈 뜨며 시작된 우리의 수다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저마다의 말투, 표정, 몸짓을 보니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떠오르고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되살아났다. 중년 이후에는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그리워진다는데 그것은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추억이 없기 때문 아닐까?   어느새 50 전후의 나이들이 되어 흰머리와 얼굴 주름이 생겼지만 부모와 자식, 남편보다 더 긴 세월 함께 가는 깊고 질긴 인연이 아닌가 싶다.   미풍이 부는 해변, 밀려오는 파도, 길게 뻗은 야자수, 이국적 음식들…. 함께했던 모든 시간은 내 가슴에 바닷속만큼이나 깊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 하였다. 요즘도 자매들은 카톡방에 그때 사진을 올리며 그리워한다. 지금보다 풋풋하고 팽팽했던 얼굴들이다. 반가움에 문자 주고받으며 추억에 잠긴다.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의 촉감, 살랑거리는 나뭇잎, 물속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겨울에 먹는 야채와 과일을 햇볕에 말리면 맛과 풍미가 더해지듯 옛 기억들도 되돌아보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이 들수록 몸은 사막처럼 건조해지고, 땅이 갈라지듯 주름이 지고, 건망증은 심해지지만 아직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많다.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고달픈 인생길,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짜증 나고 의욕 상실에 빠졌을 때 자매들과의 동행은 무척이나 즐거운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때 충전했던 힘과 생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또 한 번의 타임아웃이 하고 싶어진다. 손선애 / 리버사이드독자 마당 자매 여행 얼굴 주름 가도 추억 희로애락 생로병사

2024-03-0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1 열정이기도 하였고 집착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리움은 무어라고 말해도 다 맞고, 또 다 틀리다 말에도 온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온도가 있다 그 온도에 따라 시들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 허망한 생각이 들 때 서로의 동선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말의 온도나 사람의 온도는 마을 골목 끝까지 퍼지고 나는 그곳에 집 한 채 지으려 매일 잠을 설쳤다 쌓다가 허물어 내린 기억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발 뻗으면 닿을 만큼 불편한 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갔다 살아가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혀를 차며, 목적은 다른 세계의 숨겨진 길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뭐라든 겨울 문턱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에 왜 그렇게 서둘러 갔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무대를 등진 힘없는 관객일 뿐 버리고도 함께라는 대단한 의미는 찾지 못했다 호수는 언제나 잔잔한 물결로 다가오고 노을처럼 꺼져가던 불꽃이 타오르기도 하였다 그 불꽃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 하늘이라도 끌어내려 파랗게 변해가는 새벽 지은이의 속삭임이 들릴 듯한 짙은 안개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그것으로 큰 창이 호수로 향한 작은 집을 짓는다 손이 아닌 머리로 발을 뻗을만한 집을 짓는다 집을 짓는 시간 내내 사람들은 잠들었고 별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집을 짓는 재료는 제일 단단한 것으로 부서지지도 또 낡아지지도 않는 기억이라는 무게를 사용하기로 한다 꿈이라는 가능한 큰 창문을, 날마다 열고 닫을 희망의 문을 또한 짓기로 한다 평안의 따뜻한 지붕을 얻었으면 좋겠고 내 몸같이 피어나기를 원했던 자유의 뒤란엔 철마다 꽃씨를 뿌리기로 한다 그러나 내게는 없어도 좋을만한 슬픔과 아픔의 순간 또한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떠난 곳을 뒤돌아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였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지나간 후회도 있다 세상이 달라지는 줄도 모르고 이방인의 삶은 채 바퀴였다 쉼 없이 달려왔다 잠시 멈춰 선다 때로 동굴로 도망치기도 하고 뜬금없이 몰두하다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겠다 다만 시끄러운 시선을 떠나 얼마 남지 않은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궤렌시아     3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던 소리, 귓전에 가까이 들린다 반가움에 한숨으로 달려갔다 수평선으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소리 자갈 위를 낮게 안으며 밀려온다 이내 모래가 소리의 끝을 잡고 따라 나간다 수백 광년의 빛으로 만들어내는 윤슬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미시간 호 수에 떠다니는 소리의 입자들 둥글고 가는, 깊고 높은 음들이 모여 넓은 호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가득하다 한 손을 높이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모든 악기 소리를 멈추게 한다 이어지는 피아노의 선율 건반 위를 춤추듯, 튀어 오르다 미끄러지는 10개의 손가락 숨이 멎는다 하늘의 소리 카덴차 긴 여행길에 맞이하는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언덕 가득 눈발이 옆으로 부는 바람에 춤추듯 날린다 흔들리던 나의 평형감각이 돌아왔다 별빛을 주워, 윤슬을 담아, 반짝이는 조약돌을 모아, 피아노의 맑고 청아한 하늘의 소리를 역어 집을 짓는다 호수를 향해 큰 창이 있는, 커피 팟이 딸린 작은 키친과, 좁은 계단을 오르면 퀼트 조각 이불을 덮은 침대가 있고, 누우면 밤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 팝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 소리 카덴차 악기 소리 소리 자갈

2024-03-04

한인들 애용 골프장 로열비스타 문닫는다

남가주 한인 골퍼들의 단골 골프코스 중 하나인 ‘로열비스타 골프 코스(Royal Vista Golf Course.사진)’가 끝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로열비스타 골프 코스 측은 오늘(29일)까지 영업하고 이후 해당 부지에 주택과 공원 개발 공사가 진행된다고 밝혔다.   1963년에 문을 연 로열비스타는 사우스, 이스트, 노스의 총 27개 홀(65에이커)을 가진 코스로 2010년 데이비드 이, 전해식, 강창근씨 등이 참여한 한인 투자그룹 ‘RVGC 파트너스’가 800만 달러에 운영권을 매입해 관리하면서 한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2009년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주택 개발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2015년엔 한 건설회사가 주택개발을 위해 나섰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주민들은 개발이 이뤄질 경우 골프장 인근이라는 특색이 사라지고 당시 인근 주택들의 가격 하락을 불러올 것이라며 전방위 반대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로열비스타는 2016년까지의 초기 계약 기간에도 운영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부터 이스트 코스가 있는 대지의 주인이 단독주택, 콘도, 아파트 등 크게 다섯 가지 형태로 구성된 500여 가구 규모의 주택 단지 개발에 관심을 보였고, 주거지 건설에 큰 관심을 보인 롤랜드하이츠, LA카운티 등이 지원을 약속하면서 개발 플랜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최종 업데이트된 로열비스타 주택 개발안(Royal Vista Residential Project)에 따르면 이스트 코스 이외의 공간에는 현재처럼 자연이 유지되면서 공원 또는 산책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개발 플랜은 한국어(https://royalvistaresidential.com/ko/)로도 확인할 수 있다.   LA카운티는 올해 1월 5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실시한 환경 조사를 통해 이번 개발 계획은 기본적으로 환경 악화를 불러오지만 주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운티 정부의 환경 조사 결과는 롤랜드하이츠 도서관, 월넛 도서관, 다이아몬드바 도서관에 각각 비치되어 있으며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한편 한인 투자그룹이 운영해온 이유로 로열비스타는 LA동부와 오렌지카운티 뿐만 아니라 LA 인근에서도 많은 한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골프장을 근거로 여성클럽 등 다수의 한인과 중국계 골퍼 모임도 활발해 오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 한인 클럽 회원은 “10년 넘게 회원들과 함께 운동하며 친목을 다져온 곳인데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니 안타깝고 서운하다”며 “논의를 통해 다른 곳으로 모임을 옮기는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고 전했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영업 추억 로얄비스타 코스 로얄비스타 주택 주택 개발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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