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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민용순 UC어바인 미술과 교수, 아시안 이민자 정체성 탐구

아시안 이민자의 정체성을 탐구해온 한인 작가 민용순(사진) 교수가 지난 12일 LA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 70세.   LA현대미술관의 앤 엘레굿 디렉터는 14일 성명을 통해 “수년간 자문위원으로 봉사하며 지혜와 관대함, 협력 정신을 보여준 민용순 선생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라며 고인의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사망 전까지 UC어바인 명예교수이자 LA현대미술관 예술가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고인은 1953년 한국 부곡에서 태어났다. 1960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고인은 UC버클리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81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고인은 1980년대 말 미국에 아시안 미술가들의 정체성을 견인한 작가이자 미술을 매개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주의 미술가이자 전시기획자로 이름을 떨쳤다.     초기작 ‘자기 만들기’(1989)는 미국 내 소수자였던 아시안 이민자의 왜곡된 정체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가리는 것으로 이민자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반영했다. 1993년부터 UC어바인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전 세계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2002년 제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저기: 이산의 땅’ 전시 프로젝트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 및 심포지엄에 참여하고 기획했다.       그는 이민 1세와 2세 작가들이 창작한 디아스포라 미술을 소개하고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여성 작가들의 정체성 활동에 관심을 쏟았다. 고인도 한복, 보따리 등 한국 여성과 관계되는 고유의 모티브를 활용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인뿐만 아니라 아시아 정체성으로 시각을 확장한 퍼포먼스 설치작품을 구상했으며, 한국 내 외국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삶과 추억 민용순 어바인 아시안 이민자 아시안 미술가들 민용순 uc어바인

2024-03-14

[독자 마당] 자매들의 여행

해가 갈수록 평범한 것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훗날엔 지금 이 순간도 몹시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다.   십여년 전 푸르던 시절을 공유하는 네 자매와의 해외여행은 축제처럼 들뜨고 설레었다. 아침에 눈 뜨며 시작된 우리의 수다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졌다.   저마다의 말투, 표정, 몸짓을 보니 아득히 먼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이 떠오르고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되살아났다. 중년 이후에는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사람이 그리워진다는데 그것은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추억이 없기 때문 아닐까?   어느새 50 전후의 나이들이 되어 흰머리와 얼굴 주름이 생겼지만 부모와 자식, 남편보다 더 긴 세월 함께 가는 깊고 질긴 인연이 아닌가 싶다.   미풍이 부는 해변, 밀려오는 파도, 길게 뻗은 야자수, 이국적 음식들…. 함께했던 모든 시간은 내 가슴에 바닷속만큼이나 깊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 하였다. 요즘도 자매들은 카톡방에 그때 사진을 올리며 그리워한다. 지금보다 풋풋하고 팽팽했던 얼굴들이다. 반가움에 문자 주고받으며 추억에 잠긴다.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의 촉감, 살랑거리는 나뭇잎, 물속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겨울에 먹는 야채와 과일을 햇볕에 말리면 맛과 풍미가 더해지듯 옛 기억들도 되돌아보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진다. 나이 들수록 몸은 사막처럼 건조해지고, 땅이 갈라지듯 주름이 지고, 건망증은 심해지지만 아직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많다.     ‘희로애락 생로병사’의 고달픈 인생길,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 짜증 나고 의욕 상실에 빠졌을 때 자매들과의 동행은 무척이나 즐거운 힐링의 시간이었다.     그때 충전했던 힘과 생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또 한 번의 타임아웃이 하고 싶어진다. 손선애 / 리버사이드독자 마당 자매 여행 얼굴 주름 가도 추억 희로애락 생로병사

2024-03-05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1 열정이기도 하였고 집착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리움은 무어라고 말해도 다 맞고, 또 다 틀리다 말에도 온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온도가 있다 그 온도에 따라 시들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길을 걷는 것이 때로 허망한 생각이 들 때 서로의 동선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말의 온도나 사람의 온도는 마을 골목 끝까지 퍼지고 나는 그곳에 집 한 채 지으려 매일 잠을 설쳤다 쌓다가 허물어 내린 기억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발 뻗으면 닿을 만큼 불편한 집을 지었다 사람들은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살아갔다 살아가려면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혀를 차며, 목적은 다른 세계의 숨겨진 길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뭐라든 겨울 문턱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 이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많은 것을 버려야 하기에 왜 그렇게 서둘러 갔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무대를 등진 힘없는 관객일 뿐 버리고도 함께라는 대단한 의미는 찾지 못했다 호수는 언제나 잔잔한 물결로 다가오고 노을처럼 꺼져가던 불꽃이 타오르기도 하였다 그 불꽃 보듬으며 살아야 하는 이유 하늘이라도 끌어내려 파랗게 변해가는 새벽 지은이의 속삭임이 들릴 듯한 짙은 안개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그것으로 큰 창이 호수로 향한 작은 집을 짓는다 손이 아닌 머리로 발을 뻗을만한 집을 짓는다 집을 짓는 시간 내내 사람들은 잠들었고 별들은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집을 짓는 재료는 제일 단단한 것으로 부서지지도 또 낡아지지도 않는 기억이라는 무게를 사용하기로 한다 꿈이라는 가능한 큰 창문을, 날마다 열고 닫을 희망의 문을 또한 짓기로 한다 평안의 따뜻한 지붕을 얻었으면 좋겠고 내 몸같이 피어나기를 원했던 자유의 뒤란엔 철마다 꽃씨를 뿌리기로 한다 그러나 내게는 없어도 좋을만한 슬픔과 아픔의 순간 또한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싶다 떠난 곳을 뒤돌아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였고 꼭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지나간 후회도 있다 세상이 달라지는 줄도 모르고 이방인의 삶은 채 바퀴였다 쉼 없이 달려왔다 잠시 멈춰 선다 때로 동굴로 도망치기도 하고 뜬금없이 몰두하다 길을 잃을 때도 있었다 후회는 하지 않겠다 다만 시끄러운 시선을 떠나 얼마 남지 않은 추억하기 그리고 꿈꾸기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궤렌시아     3 나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던 소리, 귓전에 가까이 들린다 반가움에 한숨으로 달려갔다 수평선으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소리 자갈 위를 낮게 안으며 밀려온다 이내 모래가 소리의 끝을 잡고 따라 나간다 수백 광년의 빛으로 만들어내는 윤슬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미시간 호 수에 떠다니는 소리의 입자들 둥글고 가는, 깊고 높은 음들이 모여 넓은 호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가득하다 한 손을 높이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모든 악기 소리를 멈추게 한다 이어지는 피아노의 선율 건반 위를 춤추듯, 튀어 오르다 미끄러지는 10개의 손가락 숨이 멎는다 하늘의 소리 카덴차 긴 여행길에 맞이하는 나만의 시간에 빠져든다 언덕 가득 눈발이 옆으로 부는 바람에 춤추듯 날린다 흔들리던 나의 평형감각이 돌아왔다 별빛을 주워, 윤슬을 담아, 반짝이는 조약돌을 모아, 피아노의 맑고 청아한 하늘의 소리를 역어 집을 짓는다 호수를 향해 큰 창이 있는, 커피 팟이 딸린 작은 키친과, 좁은 계단을 오르면 퀼트 조각 이불을 덮은 침대가 있고, 누우면 밤 하늘 별들이 반짝이는, 팝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추억 소리 카덴차 악기 소리 소리 자갈

2024-03-04

한인들 애용 골프장 로열비스타 문닫는다

남가주 한인 골퍼들의 단골 골프코스 중 하나인 ‘로열비스타 골프 코스(Royal Vista Golf Course.사진)’가 끝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로열비스타 골프 코스 측은 오늘(29일)까지 영업하고 이후 해당 부지에 주택과 공원 개발 공사가 진행된다고 밝혔다.   1963년에 문을 연 로열비스타는 사우스, 이스트, 노스의 총 27개 홀(65에이커)을 가진 코스로 2010년 데이비드 이, 전해식, 강창근씨 등이 참여한 한인 투자그룹 ‘RVGC 파트너스’가 800만 달러에 운영권을 매입해 관리하면서 한인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2009년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주택 개발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2015년엔 한 건설회사가 주택개발을 위해 나섰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주민들은 개발이 이뤄질 경우 골프장 인근이라는 특색이 사라지고 당시 인근 주택들의 가격 하락을 불러올 것이라며 전방위 반대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로열비스타는 2016년까지의 초기 계약 기간에도 운영상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부터 이스트 코스가 있는 대지의 주인이 단독주택, 콘도, 아파트 등 크게 다섯 가지 형태로 구성된 500여 가구 규모의 주택 단지 개발에 관심을 보였고, 주거지 건설에 큰 관심을 보인 롤랜드하이츠, LA카운티 등이 지원을 약속하면서 개발 플랜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최종 업데이트된 로열비스타 주택 개발안(Royal Vista Residential Project)에 따르면 이스트 코스 이외의 공간에는 현재처럼 자연이 유지되면서 공원 또는 산책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개발 플랜은 한국어(https://royalvistaresidential.com/ko/)로도 확인할 수 있다.   LA카운티는 올해 1월 5일까지 약 2개월 동안 실시한 환경 조사를 통해 이번 개발 계획은 기본적으로 환경 악화를 불러오지만 주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운티 정부의 환경 조사 결과는 롤랜드하이츠 도서관, 월넛 도서관, 다이아몬드바 도서관에 각각 비치되어 있으며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   한편 한인 투자그룹이 운영해온 이유로 로열비스타는 LA동부와 오렌지카운티 뿐만 아니라 LA 인근에서도 많은 한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골프장을 근거로 여성클럽 등 다수의 한인과 중국계 골퍼 모임도 활발해 오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 한인 클럽 회원은 “10년 넘게 회원들과 함께 운동하며 친목을 다져온 곳인데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니 안타깝고 서운하다”며 “논의를 통해 다른 곳으로 모임을 옮기는 방법을 찾아볼 것”이라고 전했다. 최인성 기자 ichoi@koreadaily.com영업 추억 로얄비스타 코스 로얄비스타 주택 주택 개발

2024-02-28

[삶과 추억] 공립학교 한국어 교육 발전에 헌신

오렌지카운티의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진 옥스퍼드아카데미에 한국어 붐을 일으켰던 한인 교사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한인 교육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한인 교육자들에 따르면 옥스퍼드아카데미 한국어 교사 데이비드 김(한국명 김재민·사진)씨가 지난달 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53세. 김씨는 5년 전부터 디스크 증세로 고생해왔으며, 작년부터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에 전념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정은 남가주 한인 교육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학생들이 대입 지원 시 혜택받을 수 있도록 ‘외국어국가시험(NEWL·이하 뉴얼)’ 한국어 시험을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UC로부터 학점 계산에 사용되는 ‘가중 학점(Weighted GPA)’ 과정으로 승인을 받아냈다.     뿐만 아니라 정규 공립학교 한국어 교사들에게 뉴얼시험을 한국어 AP과정 대안으로 제시해 한국어 교육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옥스퍼드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사용하는 온라인 자매학교 ‘케임브리지 버추얼 아카데미’를 개설할 때도 한인 학생들에게 등록 기회를 더 제공하도록 한국어 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학교 발전에도 기여했다.     주말에는 일본계 교회에서 부인 아키코 김씨와 함께 청소년 사역자로 봉사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한인교육자연합회(IKEN) 김성순 회장은 “주중에는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주말에는 일본계 교회에서 청소년들을 지도해온 훌륭한 교사였고 집에서는 노부모를 모시고 살던 훌륭한 아들이었다”며 김씨를 추모했다.   이어 김씨의 가족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를 돕기 위해 고펀드미를 통해 기금모금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의 아내가 지난달 말 개설한 고펀드미에는 현재까지 1만5200여 달러의 후원이 이뤄졌다.     김 회장은 “한국어 전파를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그분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줬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한편 옥스퍼드아카데미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오는 3월 8일 오후 3시쯤 학교 앞에서 김 교사의 사망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 예정이다.   ▶고펀드미: https://gofund.me/db2ac640 장연화 기자삶과 추억 공립학교 한국어 옥스퍼드아카데미 한국어 한국어 교육 한국어 ap과정

2024-02-13

[삶과 추억] 외롭고 지친 이들 위로한 사역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이하 마가교회)를 이끌어 온 채동선(사진) 전도사가 15일 오전 4시 48분 카이저병원에서 별세했다. 62세.   유가족에 따르면 고인은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다 암이 간 등으로 전이돼 숨을 거뒀다.   고인은 생전 마가교회를 LA와 오렌지카운티 두 곳에 개척해 전도 활동에 앞장섰다. 지난 22년 동안 마가교회를 이끌며 이민생활 가운데 외롭고 힘겨움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고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내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30대 때 사업실패와 우울증에 시달린 뒤 신학에 매진해 마가교회를 개척했다.     고인은 지난해 1월 신년말씀 집회 때 “우리의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평소 “내 묘비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하나님이 용서한 자’라고 적고 싶다.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드러내는 자로 살고 싶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총신에서 헌법과 교회사를 가르친 채기은 목사의 손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한 채정민 목사의 증손자다. 유가족으로는 아내가 있다. 고인 장례 일정은 현재 협의 중이다.     ▶연락처: (626)786-1814 김형재 기자삶과 추억 사역자 위로 생전 마가교회 예수 그리스도 이하 마가교회

2024-01-15

[삶과 추억] 한국 과학기술 발전 헌신…이동전화 기술 첫 상용화

서정욱(사진)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 11일(한국 시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서 전 장관은 한국의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일평생 헌신해왔다. 특히 한국에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방식의 이동전화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평소 “초근목피와 보릿고개라는 말이 회자하던 때, 나라를 부흥하는 데 과학기술자로서 참여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과학과 공학을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40년간 과학기술자로서 공직 생활에 몸담았던 이유다.   서 전 장관은 박정희부터 김대중까지 총 6명의 대통령과 함께했다. 그가 과학기술부 장관에 오른 건 김대중 정부 2기 때 일이다.   그는 칠순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취미로 무선을 애호하던 한 소년이 과학 기술을 천직으로 삼아 어느덧 고희를 맞이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서 전 장관은 늘 인재 양성을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공직 생활 이후에는 KAIST 강의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매번 메모 습관을 강조했다. 서 전 장관 역시 늘 수첩과 볼펜을 가지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또 적었다. 그의 메모 습관은 집필 활동으로 이어졌다.   서 전 장관은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저술가였다. 논문은 물론이고 10여편의 책을 집필했다. 생전 “한국의 미래는 글쓰기에 달려있다”며 “글을 잘 쓰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었다.   그는 1957년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부임해 생도들을 가르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텍사스 A&M 대학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한 후 1970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에 참여, 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이동통신 사장, 초당대학교 총장, 한국과학기술원 원장, SK텔레콤 부회장 등을 지냈다. 상훈으로는 황조근정훈장(1992년), 국민훈장 동백장(1986년) 등이 있다.   서 전 장관은 부인 이정숙 여사와 사이에 3녀를 뒀다. 미주중앙일보 진성철 경제부장의 장인이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13일(한국 시간) 오전 10시 30분이다.  ▶연락:(02) 3410-3151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삶과 추억 과학기술 이동전화 총장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부 장관 한국 과학기술

2024-01-11

[삶과 추억] 초창기 한인 보이스카우트 대부, 김진해 대장

미주 한인 보이스카우트의 대부인 김진해(사진) 278대 대장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최초의 한인지역대(777)를 조직해 활동하는 등 한인 보이스카우트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가 배출한 이글 스카우트만 100명이 넘는다.     고인은 1973년부터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시작해 서울연맹 이사까지 역임한 후 1987년 미국에 이민을 왔다.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아내의 신병치료가 목적이었다.     고인은 힘든 이민생활에서도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지속하다 10년 전 일선에서 물러났다. 한국에서 14년, 미국에서 26년 등 40년을 한인 보이스카우트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런 공로로 지난 2012년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으로부터 무궁화 금장을 전수하기도 했다. 고인은 평소 “보이스카우트 정신은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슬하에는 동욱, 동준, 정연씨 3남매를 두고 있으며, 장남 동욱씨는 애틀랜타 제일은행 행장, 차남 동준씨는 프라미스원뱅크의 행장이다.     장례식은 12월 13일(수) 애너하임에 있는 힐겐펠드(Hilgenfeld) 장의사(120 E. Broadway Anaheim, CA 92805)에서 오전 10시 엄수된다.             류정일 기자 ryu.jeongil@koreadaily.com추억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 한인 보이스카우트 보이스카우트 활동

2023-11-27

[삶과 추억] 미국서 '한국식품 알리기'에 열정

해태 USA의 정정우(사진) 대표는 쌀과 이웃을 사랑했던 ‘따뜻한 사나이’였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은 물론 한인들이 모이는 행사장마다 반드시 한국 제품을 들고 나타났던 정 대표. 그를 기억하는 한인들은 뒤늦게 연신 아쉬움만을 내놓는다.     언론사를 방문해서도 항상 쩌렁쩌렁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망설임 없던 정 대표의 모습을 이젠 추억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74학년, ROTC 16기로 1983년 한국 해태상사에 입사해 1996년 해태 USA 주재원으로 큰 꿈을 품고 도미했다. 해태 USA를 독립 법인으로 키우며 별세 전까지 대표직을 수행했고, 노심초사 한국의 좋은 식품들을 미국 시장에 소개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의 노력과 한류 덕에 이제는 주변 아시안 커뮤니티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해태 제품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11시에 숙환으로 별세(향년 68세)한 그에게 유족은 부인 장태숙씨와 아들 정한얼·딸 정나리씨, 자부 김혜림씨와 손주 정수아양·정수혁군이 있다.   장례식은 오는 17일(화) 오전 11시 LA한국 장의사에서 엄수될 예정이며, 같은 날 오후 2시 30분 포레스트 론(Forest Lawn Hollywood Hill)에서 하관식이 예정되어 있다.   ▶연락:(818)939-3110, (818)618-4797 최인성 기자삶과 추억 미국 한국식품 한국식품 알리기 한국 해태상사 la한국 장의사

2023-10-03

[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LA의 보름달

  추석(9월29일)이 다가옵니다. 독자님들께 꽉 찬 보름달을 선물합니다.     사진은 ‘캐논 EOS 5D Mark4’ 바디에 400mm  렌즈로 찍은 LA상공의 보름달입니다. 사람 눈에는 보름달이 노랗게 보이지만 기계인 카메라의 렌즈로 보면 회색으로 보입니다.   추석은 이민자에게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미국에서는 보름달을 ‘풀문(Full moon)’ 또는 ‘블루 문(Blue moon)’이라고 합니다. 보름달은 매달 두 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블루 문은 두 번째로 뜬 달을 일컫는 말입니다. 달의 색깔과는 무관합니다.     미국에서 추석에 보는 블루 문은 우리 정서의 보름달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보름달은 우수와 고독, 슬픔을 상징합니다.     반면, 이민자의 기억 속 추석 보름달은 블루 문이 아닌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지만, 이민생활 가운데 명절은 그저 기억 속의 추억으로 박제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민자에게 미국의 보름달은 추억, 그리움, 아련함입니다.     고국은 미국보다 하루가 빠릅니다. 달 역시 고국보다 하루 늦게 LA 하늘에 뜹니다. 다음 주 금요일은 추석입니다.  그날 저녁 LA하늘에 걸린 보름달은 두 개로 보일지 모릅니다. 고향보다 하루 늦게 뜨는 보름달은 고국의 부모, 형제, 친구들의 얼굴을 담아서 하늘에 뜰 것입니다.     추석을 추억하며 눈물이 흐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젖은 눈에 보름달은 두 개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나는 추억을 품은 달, 또 하나는 힘겨운 이민자의 고달픈 삶을 품은 달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으시길 바랍니다. 상진 사진부장 kim.sangjin@koreadaily.com김상진 기자의 포토 르포 보름달 추석 보름달 추억 그리움 반면 이민자

2023-09-22

[우리말 바루기] ‘소라색’엔 소라가 없다

바닷가엔 소라들의 슬픈 얘기 있어요./ …바닷가에 여름 가고 가을이 와도 쓸쓸한 백사장엔 소라만 외롭답니다~.   1980년대 활동했던 배따라기의 ‘바닷가엔’이라는 노래 가사다. 여름날 바닷가의 추억을 소라의 슬픈 얘기에 비유하고 있다. 이처럼 소라는 바다와 여름날 추억을 연상케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간직한 ‘소라’는 어감도 좋아 연예인 이름이나 가게 등의 명칭으로 널리 쓰인다.   ‘소라색’도 많이 사용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라색은 어떤 색깔일까? 인터넷에 올라 있는 소라색 옷을 보면 모두 하늘색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하늘색을 소라색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바다의 소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녹갈색이다. 하늘색이 아니다. 그럼 왜 하늘색을 소라색이라 부르게 됐을까?     ‘소라색’이 ‘하늘색’이 된 연유는 다른 데 있다. 하늘색의 한자어는 ‘공색(空色)’이다. 여기에서 ‘공(空)’자만 떼어내 일본어로 읽으면 ‘소라(そら)’가 된다. 따라서 ‘소라색’은 일본말 ‘소라(そら)’에 한자어 ‘색(色)’이 붙은 것이다. 즉 ‘소라(そら)+색(色)’의 구조로 일본말과 우리말이 결합한 어중간한 형태다. ‘소라색’은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소라색이 아니라 하늘색이라고 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소라색 소라 여름날 바닷가 여름날 추억 연예인 이름

2023-09-12

[삶과 추억]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박사 별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로 활동했던 이상현(사진) 박사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박사는 세계적 석학이자 한인 1세대 신학자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박사는 지난 1980년부터 31년간 이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계미국인프로그램(AAP)도 개설했다. 미국 신학계에서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이민 신학’ 등의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에 뉴저지로 유학을 왔다. 이후 우스터대학교를 졸업,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호프칼리지에서 교수를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존 보울린 학장은 “이상현 박사는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던 세계적인 학자였다”며 “그의 유산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그가 양성한 목회자와 학자 등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상현 박사의 장례식은 오는 15일 오후 3시 뉴저지 지역 킹스톤장로교회(Kingston Presbyterian Church)에서 열린다.   ▶문의:(609) 334-9097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삶과 추억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이상현 박사

2023-09-0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바람이 갈비뼈 치고 달아나면

마음이 허하면 그 때가 그리워진다. 사는 것이 옹골차지 못하고 빈틈이 생기면 속이 빈 것처럼 허전해진다. 수목들은 한여름 찌는듯한 더위와 폭우에도 악다물고 잘 버텨냈다. 코발트빛 하늘 높이 뭉게구름이 목화꽃처럼 흩날리고 한줄기 스쳐가는 가을바람이 심장을 찌르고 달아난다. 며칠째 마음에 송송 구멍이 났다. 시나브로 떨어지는 마른 꽃잎에 울적해지고, 스쳐가는 그대 눈빛처럼 초록을 잃어가는 잎새들은 쓸쓸하다. 이유도 사연도 없이 그냥 잠시 시계를 멈추고 싶은 날. 안간힘 쓰며 헤어나려고 바둥대지 않고 ‘구름에 달 가듯이’ 살기로 한다. 천번 만번, 죽을 때까지 생각해도 답을 찿을 수 없는 생의 의미를 찿으려 애쓰지 않고 강물 따라 바다로 흘러갈 작정을 한다.     유년의 바다에는 떠있는 지푸라기도 그립다. 망아지처럼 뛰놀던 날들, 그 시절에 먹었던 음식들이 생각난다. 마음이 공허해지면 무엇인가 채우고 싶어지는 것일까. 갈피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날엔 바싹하고 고소한 돈까스가 추억의 쟁반 위에 떠오른다.     ‘돈까스’는 나의 소울푸드(Soul food)다. 내 영혼의 동반자다. 건강식 먹는다고 보통 때는 안 해 먹지만 영혼의 돛단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징조가 보이면 서둘러 앞치마를 입는다. 양념에 살짝 잰 돼지고기에 밀가루로 옷 입히고 계란물 바른 뒤 빵가루 입혀 튀긴 뒤 새콤달콤한 소스 뿌리면 끝! 양배추 잘게 채쳐 곁들이면 생일 날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경양식식당 음식이 부럽지 않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진다. 배가 부르면 만사가 든든해진다. 소울푸드는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다. 음식은 단지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속에 추억과 사랑을 담고 있어 지친 삶의 원동력이 된다. 소울푸드는 상처 난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     영혼도 흔들리고 소리 없이 흐느낀다. 인생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고, 덫에 걸려 덧없이 흘러간다 해도 ‘그 때가 참 좋았지’ 하는 때가 온다.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을 뒤로 하고 비 오는 날 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면 유년의 기억은 빗방울로 눈물로 흘러내린다,   우리 아이들 소울푸드는 양념 안 바르고 튀겨 소스에 찍어먹는 닭날개 요리다. 우리 동네에만 있는 식당이다. 도착하기 전 미리 주문해 첫 식사메뉴로 수십개씩 후다닥 먹어치운다. 아들은 엄마 상봉보다 치킨 먹고 싶어 집에 온다고 너스레를 떤다.     소울푸드는 미국 남부에서 노예 제도를 통해 태어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 요리의 총칭이다. 남부에서 형성된 미국 흑인들의 식문화는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흑인들이 북부로 대거 이주해 미국 전역으로 전파된다. 흑인들의 식생활이 ‘소울 푸드’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60년대인데 당시 흑인들의 문화에 ‘소울 음악’등 ‘Soul’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것에서 유래한다.     소울푸드는 어머니 젖가슴처럼 따스하고 감미롭다. 세월에 묻혀 얼굴은 잊어버려도 혀끝에 맴도는 유년의 촉감은 영원히 남는다. 나이 들어도, 늙어도 어릴 적 즐겨먹던 입맛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연어는 민물에서 태어난 뒤 바다로 나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지만 다시 민물로 돌아와 알을 낳는다. 숨겨둔 일기장 속의 연애편지 꺼내보듯, 혀끝에 맴도는 추억의 단맛은 세월을 비껴간다. 다시는 싱그러운 그 하늘로 돌아갈 수 없다 해도, 가을 바다 떠도는 황금빛 잎새에서 유년의 고소한 맛을 떠올리듯, 아이들이 맞이할 무궁한 세월 속에 영혼의 맛을 기억하기를. 바람이 갈비뼈 치고 달아나는 허전한 날들이 오면.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갈비뼈 바람 경양식식당 음식 돈까스가 추억 며칠째 마음

2023-09-05

[삶과 추억] 최대 한인 경제인단체 성장 이끈 큰 어른…장우상 월드옥타 초대회장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초대 회장을 역임한 장우상 명예회장(사진)이 이달 초 세상을 떠난 사실이 뒤늦게 전해졌다. 향년 97세.   LA에 있는 유족들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16일 가족장을 치른 뒤 18일 본부 사무국 등에 별세 소식을 알렸다.   옥타LA 전·현직 회장들과 회원들도 본부 옥타의 연락을 받고 뒤늦게 별세 소식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월드옥타의 전신인 ‘세계해외교포무역인연합회’를 1981년 창립해 2년간 회장을 맡아 이끌었고, 이후 월드옥타가 68개국 143개 지회에 7600여 명의 회원을 둔 최대규모 재외동포 경제인단체로 성장하는데 ‘큰 어른’ 역할을 했다.   1970년 미국에 이민해 무역업을 시작한 고인은 ‘재미한인무역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1980년 회원들과 함께 세계 한인 무역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듬해 고국 수출상담회인 ‘서울교역전’에 참가한 16개국 101명의 한인 무역인을 중심으로 세계해외교포무역인연합회를 탄생시켰다.   초창기에는 정부 보조금 없이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협회를 운영하다가 1994년 상공자원부(현 지식경제부)에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하면서 재정이 나아졌고, 단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국산 섬유와 철강을 수입해 미국에 팔았던 고인은 65세 되던 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월드옥타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주면서 후임 회장들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쏟아냈다.   고인은 2021년 5월 열린 제22회 세계대표자대회 및 수출상담회 개회식 때도 온라인으로 참가하는 등 변함없는 ‘월드옥타 사랑’을 보여줬었다.삶과 추억 경제인단체 초대회장 장우상 명예회장 한인 무역인 세계 한인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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