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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다음 선택도 ‘무조건 마라톤’

준비 끝!
 
엊그제는 코스를 미리 돌아보고 시간까지 재 보았다. 편하게 47분 걸렸다. 이 정도면 괜찮은 기록! 실전에서 약간의 긴장과 노력이 더해지면 시간 단축도 가능해 보였다.
 
출발 시간은 오전 8시, 장소는 마을 레크리에이션 센터. 시작 1시간 전인 7시에 센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름 서두르며 부산을 떨었지만 넓은 주차장은 이미  많은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넉넉지는 않았지만 변두리에 좁은 자리 하나 찾아 홍수로 불어난 옛고향 개울물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조심 차를 비집어 넣었다.
 
기억도 아스라한 27~8년 전. 생전 처음 가슴에 자랑스러운 번호표 달고 달리기 시합에 나갔던 때 이야기다. 달리기가 이날의 중심 행사이긴 했지만 조기축구, 약식음악회, 어린이 그림 전시회, 그리고 남아서 사용치 않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고 싼 가격으로 넘겨주는 거라지 세일도 함께 열려 이 날은 모두 어울려 하루를 즐기는 마을 축제였다.  
 
LA동북부 알함브라와 사우스 패서디나가 만나는 곳의 조그만 동네 엘세레노(El Sereno). 주민의 90%이상이 라틴계인 곳이다. 그 당시 나는 그곳에서 10년 정도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었고 주민 대부분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곳에서는 매년 5월 중순 일요일에 작은 규모의 10㎞ 단축마라톤이 열리고 있었다.
 
데이비드라고 했던가? LA경찰국 소속인 30대의 라틴계 경찰 서전트가 주최하고 있었다. 그 자신 달리기를 좋아해 LA마라톤을 비롯해  크고 작은 대회에 열심히 출전하는 마라톤 마니아였다. 나에게도 신발 등 복장에서부터 뛰는 자세, 각종 대회 정보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 있어서 달리기는 고등학교 때 우연한 기회에 ‘나도 조금은 재능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대학입시, 군과 직장생활 그리고 이민으로 이어지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대로 잊히고 말았다.
 
언제까지나 짙은 녹음의 계절만 계속될 것 같던 내 인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나이가 50대 초에 접어들자 건강은 조금씩 불편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외동아들의 대학 졸업 후 좌표를 잃고 헤매던 허전한 마음을  달래줄 새로운 관심거리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이 마라톤이다. 이후 마라톤을 향한 나의 사랑과 집착은 내 몸과 마음 구석구석을 변화시키며 나를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게 했다.
 
마음은 벌써 많은 사람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안타깝게 기다리는 시작 시간은 왜 그리도 느리게 오는지. 아무튼 시간은 흐르기 마련,  드디어 8시가 되어 출발 선상에 모두 정렬했다. 질세라 나도 당당히 젊은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멀리 마운틴 윌슨 산정 주위 하늘엔  하얀 솜을 펼쳐 놓은 듯 여기저기 흰 구름이 한가롭게 산책을 하고 있었고 물오른 풀과 나무,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새들의 합창, 그리고 센터 내 넓은 잔디광장에서 품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봄의 기운은 내 눈과 코를 간지르며  부풀대로 부픈 내 마음을 한껏 하늘 높이 치켜 올려주고 있었다.
 
시작 총소리와 동시에 나도 모르게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120여명의 건각 중 유일한 아사아계로.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출발 2.3분은 무리 없이 속도를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뒤이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줄줄이 따르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숨이 가쁘고 다리 움직임이 둔해지고 대열에서 자꾸 뒤처지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돌 때쯤엔 종아리와 허벅지에 쥐가 나서 걷기도 뛰기도 힘든 상태가 반복되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도 이럴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절름거리며 희미한 기억 속에 결승선을 통과하고는 그대로 정신을 놓고 뻗어 버렸다. 앰뷸런스까지 동원되는 난리를 치면서. 마음을 비우지 못한 어리석음의 처절한 결과였다. 기록은 52분을 넘기며 연습 때 보다 5분이나 더 걸렸다.
 
나는 이 실패한 달리기가 내 삶의 여정을 빼닮았다는 걸 발견했다. 나 자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는 자책이 뒤따랐다. 자신에 대한 무지와 산과 같은 욕심,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 등으로 생각 없이 일을 벌여놓고, 밀어붙이고 무모하게 돌진하다 깨지고 부서져서 얼마나 아파했던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마라톤 시작으로 모든 게 저절로 달라지진 않았지만 경기에 나가는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경기운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좀 더 일찍 마라톤을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그랬다면 내 삶도 좀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마라톤을 통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해 승리하는 걸 배웠고, 이웃을 배려하고 서로 돕고 사는 따뜻한 마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무리하면 후에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 요령이나 편법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쉬운 지름길은 없다는 것 등을 알게 됐다.
 
타인을 의식하는 순간 내 페이스를 잃고 망쳐버린 경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달리기경기나 인생살이나 경쟁은 결국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닐까?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모든 과정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다.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노력하면 한 만큼 정확히 보상이 따르는 마라톤!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힘들 땐 ‘내가 왜 이 무참한 짓을 하고 있지?’ 하고 불평하다가도 끝나면 바로 다음 경기를 생각하며 가슴 설렌다.
 
익숙해 질만 하면 헤어지고 멀어지게 되는 게 인간사라고 하지 않던가. 의지만 있으면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던 마라톤도 내 인생의 늦은 계절의 문턱 앞에서 주춤거린다.
 
늦게나마 낭비 없이 알찬 삶을 살 수 있었고 마음껏 열정을 태우며 역동적인 승리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건 모두 마라톤 덕분이었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잘한 선택이었어’ 하며  나 자신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새로운 삶이 다시 주어진다면 다음 선택도  ‘무조건 마라톤’ 이다.

박명근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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