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최초로 과학자라 칭해진 것은 여성?
과학자라는 말 생긴 지 200년 안돼
여성을 존중했던 철학자 휴월이
과학자 서머빌을 칭해 지은 말
서머빌, 성 차별을 멋지게 극복
그 전에는 과학자들을 ‘자연철학자’ 또는 그냥 ‘철학자’라 부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men of science’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란 말인데, 남자를 의미하는 ‘men’으로 모든 사람을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 말해본다면 과학을 하는 선비라고 할까? 사실 그 당시 대부분 과학자들은 남성이었고, 말 까지 그랬으니 여성 과학자들의 소외감은 한층 더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반면 ‘scientist’라는 단어는 남녀 구별을 두지 않으므로 그런 폐단이 없다.
그런데 성별을 가리지 않는 단어가 생기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다. 과학자라는 그 말을 지어낸 사람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지질학, 철학 교수를 역임하고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했던 휴월(William Whewell)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를 제안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문헌은 그 당시 저명했던 여성 과학자 메어리 서머빌(Mary Somerville)의 책에 대하여 쓴 서평이었다. 그 글을 보면 휴월은 처음에 서머빌을 훌륭한 ‘person of science’라고 어색하게 일컬었다. 그 여자를 ‘man’이라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머빌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여자 아이들은 정규적 교육을 시키지 않던 시대에 태어난 그는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놓치지 않았다. 라틴어와 수학을 독학으로 깨쳤고, 관심을 보여주는 친척 어른들이나, 남자 형제들을 가르치러 온 가정교사 등 여러 사람들에게 학업에 대한 도움을 청했다. 첫 남편을 일찍 잃고 결혼한지 3년만에 혼자가 된 그는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면서 고등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다행히 남편이 남긴 유산 덕분에 큰 경제적 염려는 없었다. 이 시기에 독창적인 연구 결과도 발표하기 시작한 서머빌은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여기저기 저명한 과학자들과의 친분도 생겨났다.
그렇게 성 차별의 그늘에서 과학을 하기 시작한 서머빌은 1812년 나이 30이 갓 넘었을 때 재혼을 하게 된다. 두번째 남편은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한 학구적인 의사였는데 아내의 지적 재능을 알아보고 학자로서 활동하도록 격려하였다. 이제 서머빌은 실험도 하기 시작했고 광학에 대한 논문을 왕립학회 학회지에 싣는 성과를 올렸다. 또 그는 그 당시 천문학과 수학의 최고 대가였던 라플라스의 천체물리학 서적을 불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단순한 번역을 넘어서 그 어려운 학문의 내용을 쉽게 풀어 설명하면서 더욱 풍부하게 보충하는 창의적인 일을 해 내었다. 그 성과로 인하여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렇게 연구 업적을 쌓은 서머빌은 대중 과학 서적도 쓰기 시작했고, 1834년에 처음 출간된 『물리과학 분야들의 상호 연관성』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물리학, 천문학, 광학, 열역학, 음향학, 지질학, 화학 등 여러 분야에서 나온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알기 쉽고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었던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휴월은 ‘과학자’라는 신조어를 언급했던 것이다. 서머빌의 마지막 저서는 물질의 미시적 구조에 관한 것이었고, 그가 거의 90세가 되었던 1869년에 출간되었다. 그 직전 1868년에 정치철학자 밀(John Stuart Mill)이 주동하여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청원서를 영국 국회에 제출했는데, 서머빌의 이름은 그 청원자 명단에 제1번으로 당당히 올라 있었다.
그런데 서머빌 여사가 과학자라는 호칭을 불러일으킨 그 이야기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휴월이 그 말을 제안했던 문맥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과학의 통합이었다. 각각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를 칭하는 말들은 따로따로 있었으나, 모든 분야의 과학자를 총칭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서머빌의 책은 여러 과학분야를 섭렵하고 분야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주었기에 휴월은 그 점을 칭찬하는 말을 하면서 ‘과학자’라는 일반적 단어를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서평에서 여성 과학자에 대해 보여준 휴월의 시각은 진지하고 각별했다. 이런 훌륭한 책을 쓴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하면서, 여성 학자가 많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고는 남성의 사고보다 명료하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여성들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만 사고는 그와 분리해서 논리적으로 하는 반면, 남성들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정당화 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 것이다. 좀 궤변 같기도 하지만 200년 전의 인물에게 현대적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리라. 남녀간의 차이를 진지하게 생각해 준 휴월, 또 그가 무척 존경했던 서머빌. 그들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과학자라는 개념이 탄생했던 것은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고, 세계적 문화 유산의 일부이다.
장하석 /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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