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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외래 병동의 추억

“한 환자는 영어 못하는  
간호사를 두었다고  
의사한테 불평을 했다  
그럴 때면 숨고 싶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호사의 일터는 다양하지만 외래병동은 나의 적성에 맞는 곳이었다. 그때는 매일 뜀박질치듯 몸으로 부딪치며 숨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하루하루였다.  
 


미국 정식간호사 시험을 패스하고 잡은 첫 일터가 LA ‘메디컬 센터’ 외래병동이었다. 그곳에서 7년을 일하고 UC어바인 대학병원에 정착했다. 그곳 역시 외래병동이었다. 내 간호사 후반기 25년 동안 수퍼바이저를 하다 은퇴한 것이 삶의 원동력이 됐다.    
 
1976년이었다. 첫딸이 면역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정부의 보조를 받아 의사를 볼 수 있는 저소득층 환자 병동에 갔다. 의사와 대화 중에 간호사 자리가 있다고 해서 어려운 인터뷰 후에 자리를 잡았다. 딸을 낳고 직장을 잡아야했지만 나의 영어가 짧아서 받아주는 병원이 없었다. 이곳이 내 외래병동 생활의 첫 번째 인연이 되었다. 대다수 환자가 흑인들이었고 스패니시를 쓰는 멕시칸이 그 뒤를 이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거의 같은 계통 사람들이었다.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흑인 특유의 영어발음은 알아듣기 쉽지 않다. 언어소통이 어려웠다. 어떤 환자는 영어 못 하는 간호사를 두었다고 의사한테 대 놓고 불평을 했다. 그럴 땐 어디라도 숨고 싶었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끔 전화가 걸려오면 나는 딴 방에서 환자를 돕는 척 어기적거리긴 했지만 등에선 진땀이 났다. 누가 그 전화를 대신 받든지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외래병동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는 인간 박물관이다. 생김새가 다르듯 습관과 성격도 달랐다. 매번 그들 요구를 다 들어줄 순 없었지만 최선은 다했다. 간호사들 중에는 필리핀 간호사가 많았다. 그 나라는 한때 미국의 영향하에 있었던 덕분에 액센트가 좀 이상해도 영어는 잘한다. 그들의 단결력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 시집살이란 말이 실감났다. 소수민족끼리지만 먼저 자리 잡은 그들 텃세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게다. 힘든 환자의 간호는 한국 간호사에게로 떠밀기 일쑤였으니까.  
 
힘들었던 일과였지만 외과 전문의사이자 원장이던 닥터 터너와 함께 일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어가 서툰 것과 수줍음이 많지만 일은 열심히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한 환자가 터너와 예약을 잡아 달라고 했다. 그날은 환자가 너무 많으니 다음날로 하자고 내가 말했다. 화가 난 그가 닥터 터너한테 나를 나쁜 간호사라며 화풀이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와의 예약은 큐가 책임자입니다. 큐의 말대로 하세요.” 닥터 터너가 말했다. 그때 내 이름이 ‘큐’였다. 그 후로는 내가 영어를 잘못한다거나 본인 마음대로 예약시간을 잡아 달라고 떼를 쓰는 환자가 없어졌다. 그는 내게 영어를 잘할 수 있는 방법과 발음 교정 심지어는 우리 여행 때 첫딸 베이비시터도 해주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점심시간이면 닥터 터너는 이곳저곳 미국 음식점에 나를 데리고 갔다. 운전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주색 캐딜락 차를 타고 다녔는데 정말 멋지고 안락했다. 그 당시 우리는 차가 한 대뿐이어서 아침에 남편이 나를 직장으로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딸을 한인교회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 후 일을 갔다. 저녁이면 일을 마친 남편이 역순으로 한 명씩 픽업을 해서 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매일 서서 일한 탓에 다리에 알통이 생겼다. 힘든 나날이었으나, 내가 일을 잘하니 한국 간호사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간호과장으로부터 요청을 받았다. 나는 한국 간호사 친구 두 명을 찾았다.
 
남미 니카라과에서 온 간호과장 릴리한테 그들을 소개해서 함께 일했다. 릴리는 일곱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사는 이혼녀였다. 그녀가 이사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사는 아파트 3층을 소개해줬다. 사람들은 직장 상사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은 좋지 않을 거라고 충고했다. 그래도 영어가 달렸던 나를 취직시켜줘서 입이 트여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기에 상관치 않았다.  
 
릴리는 언제나 외로워했다. 그러면서 얼마간 닥터 터너와 애정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들통이 난 즉시 그녀는 우리 병동에서 해고 당했다. 그 후 나는 우리 세 아이들을 위해 다른 스케줄 파트로 옮겼다. 금, 토, 일 3일간 주말에만 일하는 곳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그 병원이 팔려 자동 해고됐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잠시 쉬다 UCI 대학병원 외래병동에 자리를 얻었다.  
 
내 마지막 근무지인 대학병원은 큰 병원이었지만 한국 환자를 위한 전문 통역사가 없었다. 베트남과 중남미 환자는 병원에서 고용한 전문 통역사가 있었다. 그게 부러워 나는 간호사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시간을 쪼개 봉사자로 나섰다. 병원 응급실, 암병동, 방사선실 등 한국어 통역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어떤 날은 내가 간호사인지 통역사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종일 통역을 하러 병원 전체를 누비고 다닌 날도 있었다. 응급실에서 한인 환자가 숨진 날은 일이 끝난 후에도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 가족과 함께 밤을 새우며 지킨 적도 있었다.    
 
어릴 때 환자를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보듬어 주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미국의 외래병동에서 언어소통의 불편함으로 상처를 받는 환자들을 도와주었는데 은퇴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에서 부탁이 오면 거실 전화기 앞에 앉아 3자 통화를 한다. 나이팅게일을 꿈꾸던 어릴 적 시절과 노인이 된 지금 그 나눔의 숲속에서 나는 잔잔한 행복을 누린다.

김규련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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