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의가 실종된 사회
오래전에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실존 인물이었던 타고난 사기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역)는 수려한 외모와 달변을 무기 삼아 항공기 조종사, 의사, 변호사 등을 사칭해 가며 종횡무진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꼬리가 길어 그만 들통 나고 만다. 그의 출중한 수표 위조기술에 감복한 연방수사국(FBI)은 종내 그를 임시직원으로 고용하기에 이른다. 홀로 외롭게 지내는 아버지를 찾아가 함께하던 뭉클한 장면도 생각난다.몇 해 전 월스트리트를 발칵 뒤집어 놓은 희대의 금융 사기 사건을 떠올린다. 증권 브로커로 크게 성공한 버나드 메이도프는 한때 나스닥의 이사장까지 지낸 경력을 가진 매우 신망 있는 금융 중개인이었다. 소위 ‘폰지 사기(Ponzi Scheme)’로 알려진 그의 상품에 위탁된 돈이 무려 600억 달러에 달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카리스마적 능력을 갖고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점차 개인 숭배적인 컬트를 형성해 나가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또한 타인을 최면하거나 세뇌하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끝을 보기 마련이지만 불행히도 개중에는 사후의 세습 체계까지 마련하는 강력한 통치력(Governance)을 보이는 성공적(?)인 사례도 있다.
요즘 대선을 앞둔 한국 정국은 페어플레이에 입각한 건설적인 정책 대결보다는 난무하는 치졸한 네거티브 공방으로 온통 시끄럽다. 국가의 장래를 위하고 국민 삶의 질적 향상에 역점을 둔 비전 있고 유능하며 정의로운 후보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현실에서 정의의 개념 자체가 애매할 때가 있다. 정의는 실추되고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어떤 모습이 정의롭게 사는 것이며 그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정의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인가?
예를 들자면 허다하겠지만 아래에 몇 가지를 곁들여 본다.
4명이 탄 배가 난파되어 망망대해에 표류한 지 19일이 지났다. 배고픔으로 죽기 직전에 이른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그중의 병든 한 사람을 잡아먹기로 했다. 일종의 공리주의적 사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실화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묻게 한다.
이마누엘 칸트는 선의의 거짓말도 부도덕하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살인자의 추적을 피해 내 집에 숨어 있는 친구의 뒤를 쫓아온 살인자가 친구의 소재를 나에게 묻는다. 이때 살인자에게 사실대로 고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로 둘러댈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과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질의 유전자를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자를 상대로 한 단종 수술이 공공연히 자행되기도 했다. 각종 비인간적인 인권 침해 행위는 총체적 사각지대(死角地帶)에 놓이고 정의는 완전히 실종된 상태였다.
정의란 무엇인가. 힘 있는 자가 편리하게 부르짖는 상대적인 개념인가, 아니면 절대적 진리의 길인가. 이 같은 도덕적 철학적 문제들에 관련해 인류는 영원히 일치된 견해를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내다본다. 정의라는 개념은 주관적인 것이며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정의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라만섭 / 전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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