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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코로나가 남긴 시간들

"지난 몇달 남짓 틈틈이
책을 읽고 전시회도 가고
인문·예술의 바다를 헤엄치니
육체는 묶였으나 영혼의
자유를 누리는 느낌이 들었다"

새해가 되었건만 코로나 팬데믹이 3년째로 접어 들면서 전 인류가 깊은 시름에 빠진 듯하다.  
 
인간은 코로나를 퇴치하기 위해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방역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변이하며 저항하고 있다. 수시로 들어오는 뉴스의 톱은 코로나가 차지하고 있고 나도 언제 그 희생자가 될 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산다고 하기보다 유폐된 가운데 숨만 쉬고 있는 기분이다. 이 숨 막히는 상황이 언제 끝날 것인가?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다. 한국도 미국처럼 코로나와의 싸움은 치열하기 매한가지라 활동에 여유를 더 가질 처지도 못됐다. 친한 친구들도 맘 놓고 만날 수 없었고 친척 집 방문도 꺼리게 됐다. 방구석에 콕 박혀 사는 날이 대부분이라 그 스트레스가 폭발 직전이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후배가 연락을 해 조심스럽게 만났다. 코로나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고받던 중 그녀는 우울한 감정을 책을 읽으며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무심히 듣고 넘겼는데 얼마 후 그 후배를 다시 만났을 때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왔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었다. 학창 시절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어서 대충 내용은 알고 있었기에 읽어 봤다고 했더니 다시 읽어보라고 했다. 처음 손에 잡았을 땐 엄두가 안 났다. 700여 페이지나 되는 데다가 아기자기한 로맨스도, 스토리의 빠른 전개도 없었다. 그야말로 방대한 해양소설의 느슨한 상황 설정이 초입부터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내 인내심에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고 이 책을 건네 준 후배의 성의도 있고 해서 보름간 이를 악물고 끝까지 정독을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멜빌의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해양소설이 주는 인간의 비극적이고 굽히지 않는 투쟁을 새삼 감동으로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 대한 자그마한 승리를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배석규 저 ‘대몽골 시간여행’을 가볍게 읽고 최근에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라틴어 수업’도 읽었다. 라틴어 수업은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를 역임했던 한동일 교수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서강대학에서 강의했던 초.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과 로마 유학 시절의 경험, 공부의 어려움 등 삶의 면면을 담은 책이다. 명강의로 입소문이 나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내가 머물렀던 용인에는 ‘백남준 아트 센터’가 있다. 집에서 몇 정거장 전철을 타고 가서 4~5분 거리에 있는 그곳에는 그의 ‘비디오 아트 숲’과 조형물 등 그의 작품과 기록물들, 그가 생전에 작품을 창작한 뉴욕 스튜디오의 일부를 재현한 공간도 있어 그의 작품 세계를 감상하기 좋은 장소였다. 그곳을 방문하고 나서 좀 더 멀리서 열리고 있는 미술 전시회까지 관심을 돌려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곽훈의 ‘이중섭 미술상 수상 기념 전시회’와 삼성동에 있는 마이 아트 뮤지엄의 ‘샤갈 앤 바이블 특별전’을 관람했다.  
 
지난 12월 24일에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박수근 기획전 ‘봄을 기다리는 나목’도 살펴보며 눈에 익은 그의 작품과 고달팠던 시기에 살았던 그의 생애도 한 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었다. 특히 박수근 작품은 멀리 양구 그의 고향에 있는 기념관까지 가지 않아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림을 감상한 후에는 덕수궁 경내를 산책하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맛보기도 하고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도 걸으며 아름다웠던 옛 추억을 회상했다.  
 
덕수궁에서 나와 명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휘황찬란한 명동거리를 지나 유서 깊은 명동성당에 들렀다. 성모상에 촛불 봉헌도 하고, 성당 안에 들어가 지난 1년 코로나 속에서도 무사히 보내게 해 주심을 감사드리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린다고 기도했다. 성당에서 나와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책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나 피곤하지도 않았고 뿌듯하고 충만한 행복감으로 가득 찬 하루였다.    
 
지난 몇 달 남짓 틈틈이 책을 읽고 전시회도 다니고 하면서 인문, 예술의 바다를 헤엄치다 보니 비록 내 육체는 묶였으나 영혼의 자유를 맘껏 누리는 느낌이 들었다. 코로나에 억눌려 갇혔다고 생각된 내 일상이 새로운 지평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결국 팬데믹이 나를 성장시키는 좋은 시간을 만들어 준 셈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재앙이 축복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자연이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간들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탄소 배출량이 감소하여 공기가 깨끗해졌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곳에서는 동물들이 한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올해는 임인년 검은 호랑이 해다. 호랑이는 무섭고 사나운 존재의 상징이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다. 코로나 구렁텅이에 빠져 있어도 나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내 영혼이 다시 도약하는 길을 찾아야 하겠다. 그래서 지금도 서가를 뒤적이고 전시회 정보도 검색한다. 영화나 연주회, 연극 등은 밀집된 장소에서 오래 머무는 게 자신이 없어 아직 도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내 인내심과 용기를 시험할 또 다른 기회를 갖기 희망한다.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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