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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참전비 준공식과 노병의 눈물

 ‘재향군인의 날(Veterance Day)’과 6·25 유엔참전용사 추모일’이었던 11일 풀러턴의 힐크레스트 공원에서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비’ 준공식이 뜻깊게 거행됐다.  
 
이번 기념비 건립의 의미는 크다. 첫째 의미는 미국 내에서 관이나 또는 군 관계 조직의 주도가 아니라 순수 민간인, 일반 시민, 특히 한인들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기념비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사자 전원, 3만6591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라는 점이다.  
 
세번째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없었던 남가주 지역에 한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날 준공식에 예비역 해병으로 나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미해병 참전용사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브라운이라는 올해 90세의 노 해병은 네바다주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1950년 샌디에이고의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해병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6월 25일 한국전이 터지자, 급히 편성된 ‘해병 제1임시여단'에 소속돼 한국전에 파병됐다. 그의 나이 그때 18세였다. 낙동강 교두보 방어작전에서 싸우다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로 제1해병사단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자 모(母) 부대인 제1해병사단에 복귀해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제1착으로 월미도 탈환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후 인천탈환 전투, 서울 수복작전을 마치고 다시 함정을 타고 원산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하고, 또 10배의 적에게 포위 당해 전멸 위험에 처했던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세계 전사에 가장 유명한 '승리의 후퇴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과소평가하며, 계속 북진을 독촉했다. 하지만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계곡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이미 미 해병사단보다 10배가 넘는 중공군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꽹과리와 피리를 불며 야간에만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해병들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더욱이 영하 30-40도의 추위가 더 문제였다. 계속 동사자가 나오고, 화기 및 각종 장비들이 얼어붙어 작동이 잘 안 됐다.  
 
그러나 뛰어난 리더십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로 해병제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중공군 제9병단에게 3개월간 전선에 나올 수 없도록, 큰 타격을 주면서 무사히 흥남으로의 철수작전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북한 자유민을 남으로 탈출시킬 수 있게 했다.  
 
이때 스미스 사단장이 기자에게 한 명언이 남아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브라운 해병은 장신호 전투에서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거의 죽을 뻔한 부상도 당했지만 용케도 살아남아 이날 풀러턴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치열했던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명단을 5개의 별모양 비석에서 찾아보면서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참전비 건립은, 그날 브루스 휘태커 풀러턴 시장이 말한 것처럼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는 전쟁'이 되게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민족임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도 일조할 것이다. 앞으로 미국 각 지역에 한인들의 주도로  참전용사 기념비가 계속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김택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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