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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밀당이 필요했던 여행

운동을 싫어하는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호텔 방에서 뒹굴며 책만 읽다 오곤 한다. 몸을 움직이는 건 다 노동이라 생각해서 남들이 여행을 간다고 하면 “고생문이 훤하다”라고 김을 빼는 편이었다.   다리 관절 수술을 한 데다 평발이어서 오래 걷질 못하는 불편함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공항에선 휠체어 서비스를 받고, 크루즈 배에선 스쿠터를 빌려 탈 수 있어서 그나마 수월했다.   항구에 정박한 후 선택 관광을 할 땐 보행 거리가 짧은 가장 낮은 단계의 옵션을 택해야 한다. 이번 여행은 ‘무엇을 보지 않을까’를 결정해야 하는 희한한 여행이었다. 나의 몸 상태를 고려 않고 건강한 이들처럼 관광에 욕심을 내다간 큰일을 치를지 모르기에 말이다. 꼭 볼 것만 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는 내 마음의 밀당이 필요했다.   남들이 박물관 전시실을 돌아볼 때 나는 중간에 빠져나와 밖의 벤치에서 햇볕을 쬐며 사람구경을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낯선 나라의 공기와 풍광을 홀로 즐기는 시간도 참 좋았다.   각 나라 사람이 뒤섞인 여행지에서 호리호리한 남편은 일본인으로 보고, 나를 중국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리가또” “셰 셰 ” 를 화답하느라 추임새처럼 써보며 웃었다.   크루즈의 마지막 날, 요코하마에서 온천 도시 아타미로 갈 때 신칸센을 탔다. 히까리호는 정말 빨랐다. 올해가 신칸센이 생긴 60주년이라며 기념 스티커를 준다. 그에 비해 KTX는 올해가 20주년이다. 일본의 고속 열차는 대한민국보다 40년이 앞섰다. 최근의 IT기술은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하나, 공공 서비스나 공중도덕과 배려는 아직 일본이 앞선듯하다. 국민소득이 높다고 다 선진국인 것은 아닐 것이다.   대만과 일본을 거쳐 모든 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에 도착했다. 광고에 안내방송까지 신경 안 써도 다 이해되는 모국어의 나라. 타이밍이 딱 맞게 유럽여행을 떠난 동생 집이 비어서 호텔 대신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다만 현지에서 개통한 전화가 없어 약간 불편했다. 무엇이든 실명 인증을 해야 해서 음식이나 물건을 미국 전화로 주문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우버택시는 미국의 계정과 연계되어서 택시 타기는 편했다.   선인들은 여행을 ‘글자 없는 책’이라는 뜻으로 ‘무자지서(無字之書)’라 불렀다. 여행은 길에서 하는 독서라는 뜻일 터이다. 가져간 두 권의 책을 읽고 여행도 했으니 “독서로 혜안을 얻고 여행에서 개안한다” 는 멋진 중국속담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한 달가량 긴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이 대견하다. 여행길에 부축하느라 수고한 남편에게 절이라도 해야 할까 보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밀당 여행 이번 여행 휠체어 서비스 독서로 혜안

2024-10-27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한미동맹 70년, 이승만 혜안이 옳았다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우남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다. 하지만,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 권좌에서 쫓겨난 ‘독재자’이기도 하다. 그는 한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지만, 한편에서는 “친일파들을 중용해 민족정기를 흐렸다.”고 그를 비난한다. 그는 애국자였지만, 좌파로부터는 “미국에 붙어 단정(單政)  수립에 앞장선 분단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도 공산화되어 북한처럼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묶였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구한말부터 형성되어 온 문명개화의 꿈을 국가 차원에서 실현한 개화파 지식인 이승만의 공이다.     작가 복거일은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남은 평생 ‘협박’을 하고 산 사람이었다. 그분은 협박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내 말을 반박해 봐라. 못하겠으면 선택하라. 나를 꺾기 위해 큰 비용을 치를 것이냐, 나와 협력할 것인가, 나를 밟고 갈 것인가.’그는 미국 사람들에게 잘 통했다. 미국인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산이 빠른 문화다. 대표적인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남과 타협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미군 장성들이 흔들렸다. 그는 대만의 경우처럼 제주도로 옮기는 척하며 미국을 협박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는 질량이 매우 큰 분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첫째, 1950년 10월 1일을 기해 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것이다.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이양한 이승만은 유엔군이 북진을 망설이자 작전지휘권을 행사해 버린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1989년 펴낸 회고록 〈군과 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했다.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다른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53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사망하자 3월 28일 북한과 중국측은 부상포로 교환에 동의하는 동시에 다시 포로 교환문제를 다루자고 제의해 왔다. 부상포로 교환협정 조인을 이틀 앞둔 1953년 4월 9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게 ‘협박성 서한’을 보냈다. 중국군의 한국 잔류를 허용하는 휴전협정을 체결하려 한다면 한국은 압록강까지 북진힐 용의가 있는 나라를 제외한 모든 우방의 철수를 요구하며 미군이 계속 한국에 머무르고 싶으면 공군과 야포, 함포지원만 해주고 후방에 남아도 좋지만, 한국에서 철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은 문맥도 난폭하고 내용도 퍽 과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키고 무마시키려고 곧 답장을 보냈다.”고 썼다. 이런 ‘협박’은 가진 것이 없는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이 즐겨 써왔던 수법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즈음 방한했던 닉슨 부통령은 이승만의 외교지략과 지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승만은 휴전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실리를 얻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으로서는 큰 손해인 ‘선물’을 한국에 안기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또 다른 돌발행동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닉슨 부통령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승만을 만난 닉슨은 “한국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전쟁이 재발할 경우 유엔군은 한국을 돕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유엔군은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는 아이젠하워의 협박 서한을 전달했다. 이승만은 친서를 훑어보고 눈 한번 깜빡하지 않으며 “잘 쓴 편지군요.”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닉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법’이다. “한국의 단독행동과 관련된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한미군사동맹은 이승만의 소신과 집념의 산물이다. 미국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전쟁이 재발하면 16개 참전국 군대가 돌아온다’고 약속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립서비스를 믿고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은 공산화를 의미한다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프린스턴대 동문들과 조지워싱턴대 동문들을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을 내세우고 그 의지를 전격적인 반공 포로 석방으로 보여주며 미국을 압박했다.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무에 충실해야 하고 그 책무의 이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날카로운 혜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미동냉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지난 70년의 우리 역사는 이승만의 혜안이 옳고 또 옳았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으로서 기능해 왔다     군사동맹은 전쟁억지를 위해 존재한다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산 교훈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이웃 나라의 힘에 굴복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더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거나 이웃 나라보다 강한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어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소련 연방 해체를 맞이하여 독립했을 때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나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조건으로 핵무기를 러시아에 양도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핵무기를 뺀 재래식 군사력 기준으로 세계 6위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이니 아무 탈 없을 것 같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여 있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 안보를 100% 확보하기 어렵다. 한미군사동맹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요청인 것이다.     지난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행사에서 박민식 보훈처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한 민족이 두 나라로 나뉘어, 북한은 세계 최빈국이 된 것에 반하여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국가가 된 것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친미, 반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이승만 대통령이 자리 잡고 있다.     김지민 기자한미동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혜안 아이젠하워 대통령

2023-04-20

[이 아침에] 덤으로 얻은 삶을 기념한 여행

2013년 1월에 남편의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받았다. 남편의 콩팥을 바로 옆 수술실에서 전달받아 목숨을 건진 일이 이젠 추억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벌써 10년, 당시의 심정으론 일 년만 더 살아도 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 덤으로 산 세월이 10년이라니 기적 같다. 그걸 기념하여 남편이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식 수술을 받고 나선 투석을 받지 않게 되어 삶이 무척 간단해졌지만, 기운도 없고 면역력도 없는 상태로 하루 한 움큼씩 약을 먹는 평생 환자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감사한 일이다. 이승과 저승이 어찌 비교 가능한 곳이겠나 말이다.   매일매일 사는 것이 조금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긴 해도 죽음을 예상하거나 기대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나도 이런 큰 수술이 없었다면 막연하게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살았을 것이다.멀리 사는 동창들과 혈족들의 성원과 보살핌, 마치 우렁각시 같았던 도움의 손길들과 중보 기도의 힘을 생각하면 삶은 내 의지로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긴 여행은 부담스러운데 신장을 떼어주고도 평생 옆에서 간병인 노릇을 하는 남편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녀왔다. 파나마 운하를 보는 15박 16일의 중남미 크루즈였다. 기항지에서 외출하여 현지 투어를 결정할 땐 내 체력에 맞는 걸 고르느라 고민해야 했다. 못 갈 경우엔 가져간 책도 읽고 배에서 빌린 스쿠터를 타고 크루즈 안 마을을 속속들이 구경 했다.   스페인 왕실이 후원한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미국과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15세기 무역 중심으로 부상한 콜롬비아는 나라가 부강해지자 외세의 침입을 받게 되고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나라를 지킨 흔적이 남아있다.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나비효과가 결국 10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니 흥미롭다.   수주일이 걸리던 뱃길이 파나마운하가 만들어지면서 반나절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크루즈 배 한 척이 꽉 끼일 정도의 좁은 운하를 빠져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3단계로 수위를 조절한다는데, 그런 신기술의 공사가 1903년에 시작되었다는 게 신기하다. 구한말 하와이로 향하는 최초 이민선 갤릭호가 1903년에 떠나지 않았던가?   ‘독서는 앉아서의 여행이고, 여행은 길에서 하는 독서이니 독서는 지식이고 여행은 사색이다. 독서로 혜안을 얻고 여행에서 개안한다’. 이런 흐뭇한 글귀가 있다. 앉아서 하는 여행인 독서만 하다가 서서 하는 독서인 여행을 했으니 삶이 무척 풍성해진 기분. 곳간에 쌀 들인 듯 넉넉한 마음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기념 여행 독서로 혜안 스페인 왕실 파나마 운하

2023-02-06

[이 아침에] 덤으로 얻은 삶을 기념한 여행

2013년 1월에 남편의 신장을 기증받아 이식수술을 받았다. 남편의 콩팥을 바로 옆 수술실에서 전달받아 목숨을 건진 일이 이젠 추억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벌써 10년, 당시의 심정으론 일 년만 더 살아도 원이 없을 것 같았는데 덤으로 산 세월이 10년이라니 기적 같다. 그걸 기념하여 남편이 몇 달 전부터 계획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식 수술을 받고 나선 투석을 받지 않게 되어 삶이 무척 간단해졌지만, 기운도 없고 면역력도 없는 상태로 하루 한 움큼씩 약을 먹는 평생 환자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감사한 일이다. 이승과 저승이 어찌 비교 가능한 곳이겠나 말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좋다는 이승에 살고 있으니.   매일매일 사는 것이 조금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긴 해도 죽음을 예상하거나 기대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나도 이런 큰 수술이 없었다면 막연하게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살았을 것이다. 게으른 내게 정신 번쩍 들게 한 사건이었고, 남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멀리 사는 동창들과 혈족들의 성원과 보살핌, 마치 우렁각시 같았던 도움의 손길들과 중보 기도의 힘을 생각하면 삶은 내 의지로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긴 여행은 부담스러운데 신장을 떼어주고도 평생 옆에서 간병인 노릇을 하는 남편의 도움으로 무사히 다녀왔다. 파나마 운하를 보는 15박 16일의 중남미 크루즈였다. 기항지에서 외출하여 현지 투어를 결정할 땐 내 체력에 맞는 걸 고르느라 고민해야 했다. 못 갈 경우엔 가져간 책도 읽고 배에서 빌린 스쿠터를 타고 크루즈 안 마을을 속속들이 구경 했다.   스페인 왕실이 후원한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2년 미국과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15세기 무역 중심으로 부상한 콜롬비아는 나라가 부강해지자 외세의 침입을 받게 되고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나라를 지킨 흔적이 남아있다. 스페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나비효과가 결국 10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고 하니 흥미롭다.   수주일이 걸리던 뱃길이 파나마운하가 만들어지면서 반나절로 단축되었다고 한다. 크루즈 배 한 척이 꽉 끼일 정도의 좁은 운하를 빠져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3단계로 수위를 조절한다는데, 그런 신기술의 공사가 1903년에 시작되었다는 게 신기하다. 구한말 하와이로 향하는 최초 이민선 갤릭호가 1903년에 떠나지 않았던가?   ‘독서는 앉아서의 여행이고, 여행은 길에서 하는 독서이니 독서는 지식이고 여행은 사색이다. 독서로 혜안을 얻고 여행에서 개안한다’. 이런 흐뭇한 글귀가 있다. 앉아서 하는 여행인 독서만 하다가 서서 하는 독서인 여행을 했으니 삶이 무척 풍성해진 기분. 곳간에 쌀 들인 듯 넉넉한 마음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기념 여행 독서로 혜안 스페인 왕실 파나마 운하

2023-01-19

[기고]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1867년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헨리 슈어드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러시아령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당시 여론은 “자원도 없고 온통 얼어붙은 황무지를 뭐 그리 비싼 값에 사는가?”라면서 반대가 많았다. 매입을 주도한 슈어드를 향해 ‘슈어드의 얼음상자(Seward’s icebox)’ ‘북극곰 정원(polar bear garden)’이라고 조롱했다. 당시 알래스카의 주요 수익원이었던 모피의 경우, 러시아인들의 남획으로 19세기 중반 이미 알래스카 해달은 멸종 위기 단계여서 말 그대로 단물이 빠진 상태였다. 그러니 ‘다 빨아먹은 오렌지(sucked orange)’라고 했다. 그러나 알래스카는 지하자원의 보고였다. 금부터 석유까지 별의별 자원이 나왔다. 특히 석탄은 그 매장량이 세계 1위다. 그 뿐만 아니라 전략적, 지정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냉전으로 대립을 하게 되면서 알래스카는 군사 기지의 요충지로 최전방 기지가 되었다. 윌리엄 슈어드라는 위대한 한 사람이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미국을 군사, 경제 등 모든 분야의 대국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이었음에 틀림없다.   지난 14일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5돌이었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 애국심은 한국을 세계 경제사에서 최단시간에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로 만드는데 초석이 되었다. 6·25로 폐허가 된 세계 최빈국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박 대통령을 빼놓고는 불가사의한 일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 미만의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그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세계화를 이룩하였다는 것은 지도자의 혜안과 각고의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과 비교해도 80년이나 뒤떨어진 나라였다.   박 대통령은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또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고 말하며 ‘오직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로 뼈아픈 결정을 내리며 탄광근로자와 간호사의 서독파견, 남미 농업이민, 월남파병, 원양어장 개척, 현대건설 해외진출, 한·일 국교 정상화 등 대외 지향적인 국가경영진로를 확정해 나갔다.   1964년 12월 차관교섭 차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에게 에르하르트 총리는 독일이 프랑스와 화해 협력하는 것처럼 한국도 일본과 협력할 것을 권고하며 “모두가 지난 과거사이니 자기들처럼 한국도 일본과 손잡고 경제발전을 꾀하면 돕겠다”고 진심어린 권고를 했다. 박 대통령은 치욕적인 한·일관계를 감내하며, 한·독정상회담에서 독일이 담보 없이 2억5000만 마르크(당시 약 4770만 달러)를 주기로 하여 최초의 재정차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한·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이 건설되어 한국경제 고도성장을 이끈 대표적인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처음부터 야당은 반대했고, 추가 파병에는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 및 정부 일부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 반대의 큰 이유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사단을 뺀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 측과 수차례의 회담을 거쳐 남·북 간 대치에 대응할 수 있는 한국군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 등 14개항의 사전보장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월남파병으로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 경제발전과 군사기술 및 군장비 현대화에 기여했다.   경부고속도로도 야당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물론 공업발전을 가속화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축적된 경험과 기술력을 통해 건설 산업의 발전을 기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이나 알래스카를 사들인 윌리엄 슈어드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지금도 이런 혜안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기고 지도자 혜안 러시아령 알래스카 박정희 대통령 월남파병 원양어장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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