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환영받지 못하지만 떠날 수도 없어"…10년째 '골목 노숙' 윤애복씨

LA 한인타운의 한글 간판들은 한인들에게 민족적 동질감을 안겨준다. 한인 노숙자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가와 사우스 카탈리나 스트리트 인근 한 골목에는 윤애복(65) 씨가 맨바닥을 매트리스 삼아 살고 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외진 골목이 그녀의 거처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찌른다. 페트병, 폐지, 버려진 가구 등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대변 때문에 걸음을 떼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역설적이지만 이 골목은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이다.       주변 업주들에 따르면 윤 씨는 이곳에서 10여 년째 살고 있다. LA시의 노숙자 담당 공무원들이 윤 씨에게 셸터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캐런 배스 LA 시장이 주도하고 있는 ‘인사이드 세이프’ 프로그램을 수행 중이다.노숙자들을 셸터나 모텔 등으로 옮기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한 공무원이 윤 씨에게 “임시 거주지로 옮기겠느냐”고 물었다. 윤 씨는 잠시 고민하다가 느릿한 말투로 “들어가고 싶다. 그런데 이미 여섯 번이나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고 대답했다.   유창하진 않았지만 윤 씨는 어느 정도 영어로 의사를 표현했다. 이 공무원은 좀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한국어 통역이 필요하느냐”고 되물었다.    곧바로 한국어 통역사와 연결됐다. 공무원은 통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셸터로 입소할 의향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윤 씨가 한국어로 “들어가겠다”고 답변하자, 그곳에 있던 다섯 명의 공무원들이 곧바로 윤 씨의 옷과 소지품 등을 두 개의 큰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모텔로 옮기기 위한 준비였다.   윤씨가 갑자기 자신이 옮기게 될 셸터의 위치를 물었다. 한 공무원이 “이곳에서 6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 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음이 돌변한 윤 씨를 보며 공무원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재차 모텔로 가자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윤 씨는 더 완고하게 제안을 거부했다.   노숙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이주시킬 수 없다. 시정부 규정 때문이다. 윤 씨는 쓰레기 가득한 그 골목길에 다시 혼자 남아야 했다.   취재팀은 조심스럽게 “왜 모텔로 들어가지 않느냐. 6마일이 너무 멀어서 그러느냐”라고 물었다. 윤 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난 여기가 좋다. 다른 곳은 싫다”고 했다.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윤 씨가 다른 곳으로 가길 원하는 이들은 또 있다. 골목길 인근의 업주들은 윤 씨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인 업주는 취재팀에 “윤 씨가 제발 다른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이 업주는 “윤 씨가 아무 데나 대소변을 보니까 악취가 진동하고, 손님들도 너무 불편해한다”고 했다.     윤 씨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 업주는 화가 난 듯 문을 열고 나가더니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업주는 윤 씨를 향해 “제발 여기를 떠나. 죽더라도 여기서 죽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어”라며 냉혹한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하지만 윤 씨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길바닥만 응시하고 있다. 윤 씨 앞에는 한참 전 누군가가 전해준 듯 차갑게 식은 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윤 씨는 가장 익숙하다고 느끼는 골목이지만 정작 이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중식당을 운영하는 박은경 씨는 “가끔 윤 씨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항상 이곳으로 다시 온다”며 “노숙자들은 한 번 정착한 곳을 집처럼 생각하는지, 떠나도 다시 돌아오는 것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물론 냉정 이면에는 인정도 공존한다. 일종의 연민이다. 박 씨는 “나도 솔직히 윤 씨가 너무 싫지만 그래도 몇 번 윤 씨에게 음식을 전해준 적도 있다”며 “손님 중에는 식사를 한 뒤, 음식을 따로 투고해서 윤 씨에게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중년의 한인 남성이 윤 씨에게 다가와 식사를 했는지 물었다. 온종일 굶었던 윤 씨는 따뜻한 떡국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 남성은 윤 씨에게 20달러짜리 지폐 한장을 건넸다. 윤 씨는 그 돈을 들고 식당 문 앞에서 서성였다. 순간 종업원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지폐를 건넸던 남성이 윤씨 대신 “떡국을 투고해달라”고 부탁하자 종업원은 그제야 주문을 받았다. 10분 정도 후 다시 문밖으로 나온 이 종업원은 “좀 넉넉하게 담았다”며 윤 씨에게 음식을 건넸다.   떡국을 받아 든 윤 씨는 그 자리에서 한국어 무가지를 찾아 바닥에 깔았다. 단순히 음식 받침 용도는 아니다. 음식을 먹던 그녀가 갑자기 신문에 적힌 날짜를 가리키면서 요일을 물었다. 윤 씨에게 한국어 신문은 한인타운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연결고리다.   윤 씨는 배척 속에서도 안도감을 느끼는 아이러니 속에 살아가고 있다. 한인타운 외진 골목에 숨겨진 현실이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2월 20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장열·김영남·김상진 기자한인홈리스시리즈 한국어 통역사 골목길 인근 한인 노숙자

2024-12-26

“우리는 6피트 땅 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LA 한인타운의 한 평온한 주택가에는 냉혹한 현실이 숨겨져 있다. 아이롤로 스트리트와 11가 인근, 하얀 목조 주택 뒤로 수북이 쌓인 물건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암묵적으로 전하고 있다.     꽃무늬 셔츠와 야구 모자를 쓴 노숙자 전명오(65) 씨는 자신만의 보물 창고를 갖고 있다.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선글라스 하나를 보여줬다. 전 씨는 “이게 얼마짜리로 보이나. 400~500불 정도 될 것”이라며 “누가 훔친 물건인데 내가 산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만의 보물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우리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방금 좋은 자전거가 하나 들어왔는데 관심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자전거, 전기 스쿠터, 골프채, 고급 여행 가방 등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비싼 물건만 있는 건 아니다. 그릇, 빈 술병, 낡은 소파 등 잡동사니도 널브러져 있다.     전 씨의 보물 창고가 있는 이곳은 한 한인이 소유한 주택이다. 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노숙자 셸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엔 전 씨와 같은 노숙자가 20여 명이 살고 있다. 전 씨는 “이 물건들은 모두 파는 것”이라며 “훔친 물건들이라서 팔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여기서 구매자를 찾아주는데, 일종의 암시장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는 1975년에 미국에 왔다. 영어 구사에 큰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전 씨는 자신을 포함해 이곳의 노숙자 모두를 “6피트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6피트’는 사람이 묻힐 때 관이 놓이는 깊이다. 노숙자들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생의 바닥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인터뷰를 하면서 셸터의 내부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갑자기 민머리의 한인 남성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지금 뭐 하는 거냐. 사진을 왜 찍는 거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전 씨가 곧바로 막아서면서 “내 사진을 찍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당장 덤빌 듯 화를 냈던 이 남성은 전 씨의 말 한마디에 조용히 셸터로 들어갔다. 전 씨는 이곳에서 나름 ‘실세’인 듯했다. 전 씨가 갑자기 왼쪽 팔을 들어 흉터를 보여줬다. 그는 “한인타운의 갱단이 이렇게 한 것”이라며 “길거리에 살면서 여러 번 칼에 찔렸다”고 했다.     전 씨에게 한인타운은 모순적인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보물들을 찾기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당에 널린 장물들을 우리에게 자랑하던 그는 한인타운 치안의 현주소와 노숙자들이 겪는 실질적인 어려움들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전 씨는 “경찰은 싸움이 나도 우리가 노숙자인 것을 알면 그냥 가버린다”며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개입하지 않으려 하고 노숙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않기 때문에 노숙자들은 더 비인간적으로 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베벌리힐스 같은 동네는 돈이 많으니까 신고하면 경찰도 바로 오고 통제가 되는데 한인타운은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현실은 역설적으로 그가 한인타운을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 씨는 “특히 한인들은 한인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흉기 같은 걸 들고 있어도 쫓아내거나 신고하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같은 민족이니까 연민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 씨는 노숙자가 되기 전 핸디맨으로 일했다. 그가 노숙자로 전락한 건 6년 전 일이다. 마약에 손을 대면서 그의 인생도 ‘6피트’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수년간 거리와 셸터를 오간 경험을 토대로 현재 시정부 노숙자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 씨는 “소셜 워커들이 이곳을 가끔 방문하는데 정리가 잘된 거실만 보고 간다”며 “진짜 우리가 사는 모습은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니까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을 내린다”고 말했다.   전 씨에게 한인타운은 비참한 보물섬과 같다.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12월 20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취재 = 장열·김영남 기자 사진= 김상진 기자한인홈리스시리즈 전명호 한인 노숙자 la 한인타운 보물 창고

2024-12-25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