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하고픈 일, 원하는 직업 갖는게 최고죠”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서는 종종 “장래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 늘상 칠판에 올라오는 희망 직업은 이랬다. 대통령, 판사, 검사, 장군, 과학자... 권위주의 시대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권력 서열과 같은 희망직업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적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맹목적인 희망 직업이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지금은 전통적인 직업군 외에 연예인, 스포츠맨, 디자이너 같은 새로운 전문직이 부와 명예와 보람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꿈의 직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세상이 됐다. 그 옛날 우리들의 부모세대가 어린 시절엔 가수나 영화배우는 곡마단 사람들이나 하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지만 ‘강남스타일’ 말춤으로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싸이는 이미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가수로 월드 아이돌 스타가 된지 오래다. 한국 엄마들의 자녀교육을 위한 열성은 세계를 놀라게 한다. 그 열정은 가히 유태인도 울고 가게 만들 수 있다. 캐나다에 들어오는 많은 민족 중 ‘자녀 교육’이 최대목적인 민족은 아마 한국인이 단연 수위를 차지할 것으로 짐작된다. 자녀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캐나다에 와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인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캐나다의 추위를 녹이고도 남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임산부들에게 태어날 아기의 희망직업을 묻는 질문에 법조인, CEO, 운동선수, 연예인, IT 전문가라는 직업군이 거명된 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투영된다고 보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캐나다 거주 한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본보는 지난 9일부터 19일까지 GTA 거주 11학년~대학4학년 한인 학생과 부모 86명을 무작위 추출해 장래 희망직업에 관해 전화설문을 실시했다. 어떤 직업을 갖길 원하는가? 부모와 자녀에게 각각 ”미래 희망 직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부모 응답자들은 ▲ 자녀가 희망하는 직업(65%) ▲ 전문직(33%)으로 답변했으며 전문직 중에서는 ▲ 교사(34%) ▲ 의사(13%) ▲ 엔지니어(13%) ▲ 과학자(13%) ▲ 변호사(7%) ▲ 기타(20%)로 세분됐다. 한편 자녀 응답자들은 ▲ 전문직(61%) ▲ 사무직(24%) ▲ 성직자(7%) ▲ 개인사업(4%) ▲ 기타(4%)로 답변했으며 전문직 중에서는 ▲ 교사(17%) ▲ 패션디자이너(13%) ▲ 변호사(10%) ▲ 컴퓨터 엔지니어(10%) ▲ 의사(7%) ▲ 회계사(7%) ▲ 엔지니어(7%) ▲ 수의사(6%) ▲ 기타(23%)로 세분됐다. 명예와 돈이 한꺼번에 보장되는 일명 ‘사’자로 불리는 판검사, 변호사, 의사는 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에 본인을 포함한 일가친척이 자랑스러워하는 직업군이지만 이 또한 임용직인 판검사를 제외하고 자격증에 의한 변호사와 의사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다고 보고 있다. 예전처럼 큰 돈을 만지지 못하고 월급쟁이 변호사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많고 의사들도 대학병원 전문의가 아닌 이상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생겼다. 반면에 뜨는 직업으로는 싸이 같은 연예인, 김연아 같은 운동선수가 시대의 우상으로 떠올라 많은 청소년들이 앞다퉈 되고 싶어하고 있다. 일단 스타가 되면 평생 다 쓸 수 없는 돈과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데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곳 캐나다는 어떨까? 캐나다의 ‘3대 철밥통’은 보통 TTC 운전자, Canada Post(우편국) 직원, 교사를 들고 있다. 우편 배달부 직원중엔 유난히 나이가 든 사람들이 많다. 한번 들어가면 본인이 더 좋은 직장을 찾아 나서거나 은퇴 연령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강제로 내쫓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교사도 마찬가지. 대학교와 교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온 교사지망생이 교육청 사이트에 교사지원서를 접수시켜도 결원이 생기기 전에는 부를 일이 없고 결원이 생긴다 하더라도 엄청 쌓여있는 지원서류 중에 내 것이 선택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적 연결망을 통한 추천을 받았을 경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청년실업문제는 이곳 캐나다라고 예외가 아니다. 토론토 대학 유수한 학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도 취직하지 못해 집에서 놀고 있는 청년 실업자가 즐비한 무한경쟁 시대를 감안하면 이제는 전통적인 직업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를 반영한 창조적인 직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로 선택시 중요 요소 “미래 직업을 포함한 진로 선택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부모는 ▲ 적성(34%) ▲ 자녀의 선호도(21%) ▲ 안정성(17%) ▲ 소득(11%) ▲ 전망(9%) ▲ 사회적 인정(2%) ▲ 기타(6%)를 꼽았으며, 자녀는 ▲ 적성(58%) ▲ 전망(16%) ▲ 소득(11%) ▲ 사회적 인정(2%) ▲ 기타(13%)를 들었다. 여기서 부모와 자녀 공통으로 적성을 가장 중요한 선택요소로 삼았지만 이에는 어느 정도 인식론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망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 소득이나 전망, 안정성 같은 경제적인 논리보다는 적성이라는 가치가 보다 더 고상할 것이라는 논리가 설문자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세대간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은 부모세대는 아무래도 자녀의 선호도 외에 안정성과 소득을 들어 경제적인 안정을 더 중요시하는 시각을 보인 반면에, 자녀세대는 전망과 소득을 들어 미래 지향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진로를 결정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행사하는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설문에는 ▲ 부모(52%) ▲ 또래 그룹(peer group)(35%) ▲ 미디어(10%) ▲ 멘토(3%)라고 답해 가장 활발하게 어울리고 있는 또래 그룹이 학생들의 진로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다르게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모의 영향력이 절대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진로상담은 부모 중 사회경험이 많은 ▲ 아버지 쪽(35%)보다는 늘 대화가 자주 이루어지는▲ 어머니 쪽(65%)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진로 관련 부모 자녀간 대화 “진로 문제와 관련해 부모와 자녀간 대화는 얼마나 하는가?”라는 설문에 응답자들은 ▲ 수시로(25%) ▲ 일주일에 두세번(13%) ▲ 일주일에 한번(10%) ▲ 한달에 한번(26%) ▲ 한달에 두세번(15%) ▲ 6개월에 한번(11%)으로 답변했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 캐나다 아이들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11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김수현(41 가명, 토론토)씨는 아들만 생각하면 속이 탄다. 천성이 착해서 부모말을 잘 듣고 밝게 대화도 잘하던 아들이 올해 들어 부쩍 말수가 줄어든 까닭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문을 쿵 닫고 들어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걱정스런 마음에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 김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함께 걱정하고 위로를 하던 해결방안을 찾던지 할텐데 방문을 잠그고 저렇게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정형호(50 가명, 뉴마켓)씨는 더 답답하다. 대학 2학년인 딸아이는 토론토 다운타운에 있어 얼굴 보기도 쉽지가 않다. 정씨는 “매주 한번 밑반찬과 생활 필수품을 준비해서 갖다 주는데 우리 역할은 배달부일 뿐이다. 딸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학업은 잘 해나가는지, 간호원이 되겠다는 꿈은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알길이 없고 나도 아는 것이 없으니 할 말이 없다.”고 답답한 마음을 내비쳤다. 이곳의 아이들은 집과 학교가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로부터 벗어나려고 일부러 기숙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하면 송기철(49 가명, 번)씨의 경우는 행복한 사람이다. 12학년 아들이 언제나 부모에게 학교생활과 미래 진로에 대해 궁금하지 않게 설명해주고 부모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송씨는 “영어도 잘 하지 못해 자녀와 문화단절과 소통부재를 은근히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들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수시로 부담없이 대화에 참여해줘 고맙고 믿음직스럽다.”며 대견하게 생각했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는 미래 진로와 학업성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단해야 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사춘기 자녀는 인생의 단계에서 탐색기(exploration stage)에 놓여있기에 학교수업, 봉사, 레저,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흥미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미래에 자신에게 적합한 진로를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자녀와 부모가 진로와 진학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의견교환과 조언을 하면서 멘토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일상에 치이다 보면 터놓고 대화할 시간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 늘 마음을 어둡게 하기 마련이다. 진로문제는 자녀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문제인 만큼 더 늦기 전에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 모든 문제와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끄집어 내놓고 해결방안을 머리 맞대고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녀에게 기대하는 학력 자녀에게 기대하는 학력수준을 묻는 설문에 응답자들은 ▲ 4년제 대학교(68%) ▲ 대학원 이상(14%) ▲ 전문대(7%) ▲ 고등학교(2%) ▲ 모르겠다(2%) ▲ 상관없다(7%)로 답변했다. 그래도 대학교 이상은 나와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82%나 이르는 걸 보면 캐나다 역시 대학졸업 학력이 취업에 기본적인 조건으로 대두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인 청년들에게 물어보면 캐나다에서도 4년제 대학교 졸업증명서(degree)와 2~3년제 전문대학 졸업증명서(diploma)는 엄연히 다르게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다. 학력을 한참 초월하는 출중한 능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닌 한, 어느 정도 분야별 기본 학력은 필요한 것 또한 현실이다. 반면에 16%의 응답자는 전문대 졸업 정도의 학력이면 충분하고 심지어 고등학교 졸업 학력이라도 무방하다는 태도를 보여 매우 진취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캐나다 취업 싸이트를 보면 고위 관리자급을 채용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졸 또는 동등한 학력 정도만 요구하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더구나 특별한 기술과 기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은 대학교의 일반적인 학과보다는오히려 전문대학의 실용적인 학과 졸업장이 훨씬 유리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대학교 졸업 후 취업문을 뚫지 못하는 학생들이 종종 새로운 적성을 찾아 전문대학에 다시 다니는 사례가 심심찮게 눈에 띄곤 한다.. 정보통신사회는 능력이 학력을 이기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을 중퇴했지만 창조적 자본주의의 주창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고졸 학력에 머물렀지만 “IT업계의 판도는 아이폰 이전과 아이폰 이후로 나누어진다.”는 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가장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CEO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점수와 명문대학과 스펙을 중요시하는 풍토에서는 절대로 잡스같이 철학과 중퇴한 IT기업 CEO가 나오기는 힘들다. 갓 대학을 졸업한 한인 청년들이 주류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고 시급(時給) 노동자로 전락해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토론토 대학 유수한 학과를 나와도 취업이 안되는 이유는 기업체가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실습 경험을 충분히 쌓지 못해 제대로 된 검증과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캐나다는 실무 경력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학창시절 기업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가 실무지식과 경험을 축적한다면 높은 취업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한국 진출 의지 “한국에 가서 직업을 구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설문에 응답자들은 ▲ 한국에 가지 않겠다(48%) ▲ 캐나다에 자리잡고 기회가 되면 한국에 갈 수도 있다(21%) ▲ 한국에 가겠다(19%) ▲ 모르겠다(12%)로 답변했다. 흥미로운 점은 중학교 2학년 이전에 이민온 세대는 캐나다에 정착해 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이고 있는 반면에 중학교 3학년 이후 고학년에 이민온 세대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의욕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2세 중에서도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세대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으로 진출할 기회를 찾고 싶어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캐나다에서 학창시절을 포함해 대부분의 인생을 산 한인 1.5~2세들이 캐나다에 정착하고 주류사회 지도층에 될수록 많이 진출해야 복합다문화 민족으로 구성된 모자이크 사회 캐나다에서 당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경제력에 맞춰 한국계 대기업체나 연예계 진출을 노리는 청소년이 상당수 존재하는 현상을 체감할 수 있다. 자녀 교육과 희망직업을 되돌아 본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궁극적인 목표가 “인성교육 차원을 넘어 아이가 행복하게 사는데 기반이 되며 동시에 적성과 소질에 맞아 성취감을 갖고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가장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부모일수록 자녀가 기대에 못미치거나 비뚤게 나가면 미칠 듯이 화가 나는게 보편적인 한국 부모들 심정이다. 하지만 새끼 거위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리를 곧추세우고 사납게 대드는 어미 거위처럼 내 자녀만큼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이 교육 현장의 왜곡을 불러올 수도 같다. 부모는 자녀에게 의미있는 타인이자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며 사고 및 행동에 피드백을 주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부모와 자녀가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한 대화 통로를 형성하는 것이 청소년의 진로에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성진 기자 jean@ck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