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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흔적 지우고 별이 되기를

자식이 제일 무섭다. 4월 초부터 봄방학이라서 뉴저지 사는 딸네가 어린 손주 둘 데리고 온다는 문자가 왔다. 한 달 전부터 큰 손님 맞는 것처럼 부산을 떤다. 달력에 도착하는 날과 떠나는 날짜에 동그라미 쳐놓고 쓸고 닦고 버리고 치우고 집 안팎 정리하느라 난리다. 혹시라도 나이 들어 찌질하게 사는 모습으로 비쳐 맘 상해 할까 봐 건강한 척, 잘 사는 척, 아무 걱정 없는 척, 표정관리도 한다. 애들이 어린 탓에 반나절이면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건대 나 홀로 깔끔 떨며 왜 정리정돈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둥지 떠난 자식은 남이다. 안 보면 그립고 왔다가 떠나갈 때 더 고마운 손님이다.   눈 뜨면 나는 집안 곳곳을 정리정돈 한다. 주변이 흐트러지면 머릿속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해 하루가 뒤죽박죽된다. 당일 일정에 맞는 옷을 골라 정성 들여 단장한다. 오랫동안 화랑을 경영하며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도 주눅 들지 않는 복장을 하는 게 버릇이 됐다. 십 분이면 출동할 준비가 돼 있다. 내가 누구라고 잘난 척 하며 떠벌리는 것보다 보이는 대로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감동과 찬사는 공짜가 아니라 준비와 노력의 결실이다.       사실은 사업이나 남의 눈 때문에 부산을 떠는 것은 아니다. 거울 속 비치는 내 모습이 허술하고 흐트러지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긍심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자부심은 다른 사람이 긍정적으로 여기거나 칭찬할 때 당당하며 뿌듯한 마음을 가질 때 생긴다. 자부심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자긍심은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보람이나 행복한 감정일 때 생긴다. 자긍심의 출발은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자식은 거울 속 부모를 보고 자란다. 이제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볼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수다 떨고 동정을 바라기보다 당당하고 멋진, 진솔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설 시간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연민과 동정이다. 자식들이 슬퍼하는 일이다. 주름진 얼굴과, 사그라져가는 동력과 굳어져 가는 사고의 밑바닥을 지켜보며 슬픔에 젖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보게 될 내일이 두렵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가구와 그림, 소장품들을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판매될 작품이 아니면 정리하느라 큰 고생을 한다. 연극은 막이 내리면 다음 극을 준비하지만, 인생은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난다. 소품은 정리되고 흔적은 지워진다.     나이 탓인지 좋은 일보다 아픈 소식을 자주 듣는다. 고교 동창은 저녁 잘 먹고 와인 한잔 마시다가 그냥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두 해 넘게 의식 불명으로 요양병원에 있다가 다행히 휠체어 타고 다니며 말할 수 있게 됐다. 친구의 시계는 2년을 멈추었다 다시 충전됐다. 인생의 시계는 때가 되면 멈춘다.   나는 매일 떠나는 연습을 한다. 참하고 우아하게 죽는 연습을 한다. 자식들 어깨에 무거운 짐짝 남겨 주지 않으려고 매일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하며 산다.  벌써부터 나이 타령하며, 힘없다고 지금 안 하면 나중에는 정말 더 힘들어 못 하는 때가 온다. 흔적은 적게 남기고, 때 묻은 흔적은 지우고, 자식들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에 슬픔 대신 빛나는 새벽 별이나 작은 점으로 남아있기를.   이기희 / Q7 Editions 대표·작가이 아침에 흔적 지우 자식들 어깨 크리스티 경매 머릿속 생각

2023-04-0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흔적 지우고 별이 되기를

자식이 제일 무섭다. 4월 초부터 봄방학이라서 뉴저지 사는 딸네가 어린 손주 둘 데리고 온다는 문자가 왔다. 한달 전부터 큰 손님 맞는 것처럼 부산을 떤다. 달력에 도착하는 날과 떠나는 날짜에 동그라미 쳐놓고 쓸고 닦고 버리고 치우고 집안팍 정리하느라 난리방구통이다. 혹시라도 나이 들어 찌질하게 사는 모습으로 비쳐 맘 상해 할까 봐 건강한 척, 잘 사는 척, 아무 걱정 없는 척, 표정관리도 한다.  애들이 어린 탓에 반나절이면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건 데 나홀로 깔끔 떨며 왜 정리정돈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둥지 떠난 자식은 남이다. 안 보면 그립고 왔다가 떠나갈 때 더 고마운 손님이다.   눈 뜨면 나는 집안 곳곳을 정리정돈 한다. 주변이 흐트러지면 머리 속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해 하루가 뒤죽박죽 된다. 당일 일정에 맞는 옷을 골라 정성 들여 단장한다. 오랜 동안 화랑을 경영하며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도 주눅들지 않는 복장을 하는 게 버릇이 됐다. 10분이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출동할 준비가 돼 있다. 내가 누구라고 잘난 척 하며 떠벌리는 것보다 보이는 대로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감동과 찬사는 공짜가 아니라 준비와 노력의 결실이다.   사실은 사업이나 남의 눈 때문에 부산을 떠는 것은 아니다. 거울 속 비치는 내 모습이 허술하고 흐트러지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긍심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자부심은 다른 사람이 긍정적으로 여기거나 칭찬할 때 당당하며 뿌듯한 마음을 가질 때 생긴다. 자부심은 타인으로부터 온다. 자긍심은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보람이나 행복한 감정일 때 생긴다. 자긍심의 출발은 자신이다. 스스로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자식은 거울 속 부모를 보고 자란다. 이제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볼 시간이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수다 떨고 동정을 바라기 보다 당당하고 멋진, 진솔한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설 시간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연민과 동정이다. 자식들이 슬퍼하는 일이다. 주름진 얼굴과, 사그러져가는 동력과, 굳어져 가는 사고의 밑바닥을 지켜보며 슬픔에 젖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바라보게 될 내일이 두렵다.     화랑을 경영하는 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가구와 그림, 소장품들을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 판매 될 작픔이 아니면 정리하느라 큰 고생을 한다. 연극은 막이 내리면 다음 극을 준비하지만 인생은 단 한번의 공연으로 끝난다. 소품은 정리되고 흔적은 지워진다.   나이 탓인지 좋은 일보다 아픈 소식을 자주 듣는다. 고교 동창은 저녁 잘 먹고 와인 한잔 마시다가 그냥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두 해 넘게 의식 불명으로 요양병원에 있다가 다행히 휠체어 타고 다니며 말할 수 있게 됐다. 친구의 시계는 2년을 멈추었다 다시 충전됐다. 인생의 시계는 때가 되면 멈춘다.   나는 매일 떠나는 연습을 한다. 참하고 우아하게 죽는 연습을 한다. 자식들 어깨에 무거운 짐짝 남겨 주지 않으려고 매일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하며 산다.     벌써부터 나이 타령하며, 힘 없다고 지금 안 하면 나중에는 정말 더 힘들어 못하는 때가 온다. 흔적은 적게 남기고, 때묻은 흔적은 지우고, 자식들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에 슬픔 대신 빛나는 새벽 별이나 작은 점으로 남아있기를.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흔적 지우 자식들 어깨 크리스티 경매 editions 대표

2023-03-28

[이 아침에] 지우고 다시 그리기

세월을 낚을 수 없다. 지울 수도 없다. 세월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사랑도 아픔도 깍지 낀 슬픔도 세월 속으로 떠내려간다. 떠나는 시간 속에 상처는 아물지만 상처의 흔적은 파편으로 떠돈다. 상흔은 바닷가 조개껍질이나 강가에 밀려난 젖은 나무가지로 남는다. 억겁을 지나도 사랑은 등푸른 물고기로 퍼득이고 상처는 슬픈 밤 올려다 보는 별똥별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김광균의 시 ‘데생’)   ‘시는 하나의 회화다’라는 시론으로 김광균은 주지적이고 시각적인 작품을 통해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회화시는 시각적 심상에 의존하며 화자의 주관적 정서 표출을 절제한다.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초보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데생(dessin)이다. 채색화는 좀 잘못 그려도 하늘은 파란색, 붉은색은 꽃, 초록은 잎으로 식별되지만 데생은 단색이라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데생, 즉 소묘는 드로잉으로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단색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통 흑연 연필, 목탄, 콩테, 먹, 잉크 등을 사용한다. 목탄은 나무 따위의 유기물을 불완전 연소시켜서 만드는데 참숯은 갈참나무·굴참나무· 물참나무· 졸참나무를 태워서 만든다. 콩테(Conte)는 흑연이나 목탄을 갈아서 밀랍이나 점토와 섞어 압축해 만드는데 단가가 싸고 경도를 조절할 수 있어 널리 사용된다.     미술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 ‘피카소반’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평하게 했다. 캔버스에 삐딱하게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이 ‘피카소’ 작품처럼 대작이라 생각한다. 물감을 잘못 칠해 걱정하는 아이들에겐 “그림은 언제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단다. 물감이 마르면 위에 덧칠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격려한다.     드로잉이나 수채화, 파스텔화는 지운 흔적이 남아 그 위에 다시 그리기 힘들지만 유화나 아크릴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따른다.     무얼 그릴지 몰라서 망설이는 애들에겐 화랑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게 한다. “저거 똑같이 그려도 되나요?”라고 묻는 질문엔 대답은 한결 같다. “물론이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단다. 저 그림보다 네가 더 잘 그린다고 선생님과 약속하면.” 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가 캔버스에 자기만의 명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제일 어렵다. 있는 대로 사는 것이 쉽고도 어려운 것처럼. 흉내 내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생긴 대로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다. 아무리 열심히 남 흉내를 내도 나는 그 사람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사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내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힘든 어제를 지우고 내일의 그림을 그리면 졸작이든 대작이든 내 몫의 인생이 펼쳐진다. 두려워 말자. 잘못 그리면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다. 가슴이 부르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작가이 아침에 지우 그림 그리기 목탄 콩테 깃발도 능금나무

2022-03-18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지우고 다시 그리기

세월을 낚을 수 없다. 지울 수도 없다. 세월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사랑도 아픔도 깍지 낀 슬픔도 세월 속으로 떠내려간다. 떠나는 시간 속에 상처는 아물지만 상처의 흔적은 파편으로 떠돈다. 상흔은 바닷가 조개 껍질이나 강가에 밀려난 젖은 나뭇가지로 남는다. 억겁을 지나도 사랑은 등 푸른 민물고기로 퍼득이고 상처는 슬픈 밤 올려다 보는 별똥별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 먼 -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김광균의 ‘뎃상’   ‘시는 하나의 회화다’라는 시론으로 김광균은 주지적이고 시각적인 작품으로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회화시는 시각적 심상에 의존하며 화자의 주관적 정서 표출을 절제한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뎃상(소묘)이다. 채색화는 좀 잘못 그려도 하늘은 파란색, 붉은색은 꽃, 초록은 잎으로 식별되지만 뎃상은 단색이라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뎃상(Dessin) 즉 소묘(素描)는 ‘Drawing’으로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단색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통 흑연 연필, 목탄, 콩테, 먹, 잉크 등을 사용한다. 목탄(木炭)은 나무 따위의 유기물을 불완전 연소시켜서 만드는데 참숯(Charcoal)은 갈참나무• 굴참나무• 물참나무•졸참나무 등을 태워서 만든다. 콩테(Conté)는 흑연이나 목탄을 갈아서 밀랍이나 점토와 섞어 압축해 만드는데 단가가 싸고 경도를 조절할 수 있어 널리 사용된다.   미술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 ‘피카소반’ 학생들에게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평하게 했다. 캔버스에 삐딱하게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이 ‘피카소’ 작품처럼 대작이라 생각한다. 물감을 잘못 칠해 걱정하는 아이들에겐 “그림은 언제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단다. 물감이 마르면 위에 덧칠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격려한다. 드로잉이나 수채화, 파스텔화는 지운 흔적이 남아 그 위에 다시 그리기 힘들지만 유화나 아크릴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따른다.   무얼 그릴지 몰라서 망설이는 애들에겐 화랑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게 한다. “저거 똑같이 그려도 되나요?” 묻는 질문엔 대답은 한결같다. “물론이지.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단다. 저 그림보다 네가 더 잘 그린다고 선생님과 약속하면.” 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가 켄버스에 자기만의 명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제일 어렵다. 있는 대로 사는 것이 쉽고도 어려운 것처럼. 흉내내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생긴 대로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다. 아무리 열심히 남 흉내를 내도 나는 그 사람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사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내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힘든 어제를 지우고 내일의 그림을 그리면 졸작이든 대작이든 내 몫의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두려워 말자. 잘못 그리면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다. 가슴이 부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황칠을 해도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지우 목탄 콩테 갈참나무 굴참나무 깃발도 능금나무

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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