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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지우고 다시 그리기

이기희

이기희

세월을 낚을 수 없다. 지울 수도 없다. 세월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사랑도 아픔도 깍지 낀 슬픔도 세월 속으로 떠내려간다. 떠나는 시간 속에 상처는 아물지만 상처의 흔적은 파편으로 떠돈다. 상흔은 바닷가 조개 껍질이나 강가에 밀려난 젖은 나뭇가지로 남는다. 억겁을 지나도 사랑은 등 푸른 민물고기로 퍼득이고 상처는 슬픈 밤 올려다 보는 별똥별로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 먼 -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김광균의 ‘뎃상’
 
‘시는 하나의 회화다’라는 시론으로 김광균은 주지적이고 시각적인 작품으로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회화시는 시각적 심상에 의존하며 화자의 주관적 정서 표출을 절제한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이 뎃상(소묘)이다. 채색화는 좀 잘못 그려도 하늘은 파란색, 붉은색은 꽃, 초록은 잎으로 식별되지만 뎃상은 단색이라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뎃상(Dessin) 즉 소묘(素描)는 ‘Drawing’으로 형태와 명암을 위주로 단색으로 그린 그림이다. 보통 흑연 연필, 목탄, 콩테, 먹, 잉크 등을 사용한다. 목탄(木炭)은 나무 따위의 유기물을 불완전 연소시켜서 만드는데 참숯(Charcoal)은 갈참나무• 굴참나무• 물참나무•졸참나무 등을 태워서 만든다. 콩테(Conté)는 흑연이나 목탄을 갈아서 밀랍이나 점토와 섞어 압축해 만드는데 단가가 싸고 경도를 조절할 수 있어 널리 사용된다.
 
미술학교를 운영하며 어린이 ‘피카소반’ 학생들에게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자평하게 했다. 캔버스에 삐딱하게 그려도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이 ‘피카소’ 작품처럼 대작이라 생각한다. 물감을 잘못 칠해 걱정하는 아이들에겐 “그림은 언제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단다. 물감이 마르면 위에 덧칠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격려한다. 드로잉이나 수채화, 파스텔화는 지운 흔적이 남아 그 위에 다시 그리기 힘들지만 유화나 아크릴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이 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따른다.
 
무얼 그릴지 몰라서 망설이는 애들에겐 화랑에 있는 작품들을 감상하게 한다. “저거 똑같이 그려도 되나요?” 묻는 질문엔 대답은 한결같다. “물론이지.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단다. 저 그림보다 네가 더 잘 그린다고 선생님과 약속하면.” 아이는 눈빛을 반짝이며 쪼르르 달려가 켄버스에 자기만의 명작을 그리기 시작한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가 되는 순간이다.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게 제일 어렵다. 있는 대로 사는 것이 쉽고도 어려운 것처럼. 흉내내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생긴 대로 내 방식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이다. 아무리 열심히 남 흉내를 내도 나는 그 사람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사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남편도 자식도 친구도 내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힘든 어제를 지우고 내일의 그림을 그리면 졸작이든 대작이든 내 몫의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두려워 말자. 잘못 그리면 언제든지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다. 가슴이 부르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황칠을 해도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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