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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되살려야 할 장인정신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예술 각 분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인간 예술가를 겁주는 세상이다.   예술과 인공지능을 연결지어 생각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술과 정신, 형식과 내용의 문제다. 예술과 기술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미학의 근본적 주제다. 인공지능에는 마음이나 정신이 없으므로,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 예술가와 비교할 수 없다는 식의 친절한 설명도 뒤따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 예술가들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걱정이 나온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물론 반대의 긍정적 의견도 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많이 줄어들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말로 인간이 인공지능을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내 생각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이쯤에서 쟁이, 장인정신 같은 우리 전통의 가치관을 진지하게 되새겨보면, 많은 부분이 명확해질 것 같다.   길게 말할 것 없다. 석굴암 본존상, 에밀레종, 금관, 미륵반가사유상, 고려청자 같은 작품과 그것을 만든 이들을 떠올리면 된다. 기술과 정신이 완벽하게 하나로 승화된 위대한 문화유산들….   오늘날의 ‘쟁이’라는 낱말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개구쟁이, 심술쟁이, 욕심쟁이, 겁쟁이, 욕쟁이 등 좋지 않은 행동거지나 버릇을 일컫는 말이다. 예술 쪽에서도 환쟁이, 글쟁이, 풍각쟁이 등 낮춤말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로부터 우리 사회는 쟁이를 높이 대접하지 않고 낮잡아보며 하찮게 취급했다. 선비 사회가 빚어낸 편견인데, 그런 사고방식이 오늘날까지 내려왔다. 이어서 현대화 바람이 불고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시대가 되면서, 장인에 대한 푸대접이 심해진 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오늘날 예술하는 사람들을 쟁이라고 부르면 모욕으로 느끼며 화를 낸다. 예술가, 작가, 아티스트라고 높여 불러야 만족한다. 예술가가 되어야지 기능공이나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의 말씀도 많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고 공부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 쟁이, 장인정신, 장인 기질 등은 근본적 의미를 갖는 말이다. 기술과 정신세계에서 두루 어느 경지에 오른 예인(藝人)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옛 장인들은 결코 단순한 기술자나 기능공이 아니었다. 삶과 기예를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고, 숭고한 정신세계, 철저한 완성도를 함께 갖춘 예인들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예술’ ‘예술가’라는 말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낱말이다. 예술이라는 낱말은 현대화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걸 아무런 저항감 없이 그냥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가라는 말 이전에 장인, 쟁이라는 낱말이 있었고, 여기에 인공지능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본질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장인 정신을 매우 안타까워한 일본의 방송인 에이 로쿠스케는 “나는 장인(匠人)이라는 것을 직업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에는 귀천이 있다”라고 말했다. 기술이나 직업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말, 참 무서운 말이다.   인공지능의 솜씨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감탄스럽다. 하지만 감동이 없다. 바로 이 지점, 감탄과 감동 사이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과 인공지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이….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장인정신 인간 예술가들 장인정신 장인 예술과 인공지능

2023-09-14

또 골프장서 ‘카트 털이’…수풀에 숨었다가 훔쳐가

한인 회원을 다수 보유한 오렌지카운티 지역 유명 회원제 골프장인 로스코요테스 컨트리클럽에서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달 30일 라하브라 지역 웨스트릿지 골프장에서 발생한 카트 털이 사건〈본지 4월 4일자 A-3면〉에 이어 일주일 만에 두 번째다.   이 골프장의 한 회원은 “4일 오후 12시 30분쯤 레이크 7번 홀에서 골퍼들이 플레이하는 동안 절도범들이 멀리 세워져 있던 카트로 다가가 가방 안에 있는 귀중품을 가져가는 사건이 발생했다”며 “절도범은 수풀 속에 숨어 있다가 몸을 숙이고 몰래 접근했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피해액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사건 내용은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통해 로스 코요테스 컨트리클럽 소속 여성 회원들에게 전달됐다.     메시지에는 “이 일을 경찰에 리포트 할 것”이라며 “플레이를 하면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이와 관련, 본지는 로스 코요테스 컨트리클럽 측의 사건 경위를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5일 오후 2시 현재 답변을 받지 못했다.   최근 골프 카트 털이 사건이 계속 발생함에 따라 한인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지난달 30일 웨스트릿지 골프장에서도 한인 7명이 지갑 등을 카트에 두고 골프를 즐기다가 절도범들로부터 현금을 도난당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털린 돈이 전부 약 2500달러 정도”라고 주장했다.   골프 전문가들은 ▶귀중품이나 현금 등은 골프장에 가져오지 말 것 ▶골프장 탈의실의 사물함 비밀번호 등이 노출되지 않도록 할 것 ▶라운드 도중 골프 카트를 항상 시야에 들어오는 가까운 곳에 둘 것 ▶화장실 이용 등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워야 할 경우 일행 중 1명은 골프백 등이 방치되는 상황을 막을 것 ▶차량 뒷좌석 등 눈에 보이는 곳에 클럽 등을 놓지 말 것 등의 주의사항을 알렸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골프 카트 최근 카트 회원제 장인 한인 회원

2023-04-05

[살며 생각하며]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오늘은 6·25가 발발한 지 72년이 되는 날이다. 72년 전, 김일성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남침하므로 3일만인 28일 서울이 함락되었고 같은 날 새벽 2시 30분, 국군이 한강대교를 임의 폭파하면서 대부분의 시민이 적 치하에 버려졌고 이승만과 그 일당은 부산으로 옮겨 피신했다.   3년 뒤 1953년 7월 27일, 휴전되었지만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민간인 250만 명이 사망하고 남북한 총인구의 절반이 넘는 1800만 명이 피해를 보았다는 참담한 기록을 남겼다. 그뿐 아니다. 무려 1000만 명이 전쟁통에 가족 친지와 생이별 당한 채 70년을 한숨과 눈물로 이제나저제나 하며 만남을 기다리다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필자의 장인, 장모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전쟁 전 두 분은 남한 땅이었던 개성, 정확하게 지금의 판문점이 있는 개풍에서 사셨다. 두 가정은 꽤 큰 인삼농장을 경영하는 부농이었고 담 하나 사이를 둔 이웃으로 사시며 양가 어른들끼리 혼인이 약조된 가운데 교제를 이어가던 사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6·25 발발 보름 전에 일어났다. 장인 부친께서 무엇을 감지하셨는지 20살 청년 장인을 불러 얼마간의 돈이 든 전대를 내미시며 서울 친척 집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보름 후 6월 25일, 오전 9시 개성이 함락되었고 정오에는 동두천, 포천의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전해 듣는다. 급한 마음에 우선 고향 땅으로 가기로 한다.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서울과 개성을 잇는 국도를 따라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이미 도로는 피난민으로 아비규환이다. 모두의 발걸음을 그슬러 북으로 향하는 장인을 보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눈길이었으나 개의할 여유조차 없었다.   반나절을 달려 절반 길인 금천 근방에 도달하였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도로 위에 멈춰섰다. 비포장도로를 마구 달리다 보니 체인이 끊어지는 낭패가 생긴 것이다. 할 수 없이 자전거를 끌어 갓길에 세운 채 끊어진 체인을 연결해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소용없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무더위 속에 망가진 자전거와 씨름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OO 오빠 아니냐?’며 달려와 목에 매달려 울먹이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 무슨 하늘의 도움이냐’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피난대열 속에 있던 그리운 어머니와 두 남동생, 18살의 약혼자와 형제, 자매들이 우연히 장인을 발견한 것이다. 한참 후 장인의 북상 의지를 확인한 가족들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말리고 나섰다. 장남으로 지금 만난 가족을 팽개치고 자기 뜻만 고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싶어 발길을 돌린 것이 부친에게 너무 불효였다며 지난 70년을 안타까워하시며 사신다.   이산의 아픔은 장모님도 마찬가지다. 양부모와 형제 대부분을 북에 두시고 남동생 한 분만 대동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30여년 전 캐나다의 어떤 단체를 통해 남동생 소식을 전해 듣고 일 년에 한두 번 서신 교환이 있었지만 ‘친애하는 김일성 동지 덕분에 잘 먹고 잘산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러다 2004년 필자가 평양을 방문하면서 안내원의 주선으로 남동생 아들 며느리를 만나 약간의 돈과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장인 장모님은 고향방문단의 일행으로 개성을 찾았지만 통제로 인해 결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이야기 이야기 우리 장인 장모님 장인 부친

202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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