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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

오늘은 6·25가 발발한 지 72년이 되는 날이다. 72년 전, 김일성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남침하므로 3일만인 28일 서울이 함락되었고 같은 날 새벽 2시 30분, 국군이 한강대교를 임의 폭파하면서 대부분의 시민이 적 치하에 버려졌고 이승만과 그 일당은 부산으로 옮겨 피신했다.
 
3년 뒤 1953년 7월 27일, 휴전되었지만 국군 62만, 유엔군 16만, 민간인 250만 명이 사망하고 남북한 총인구의 절반이 넘는 1800만 명이 피해를 보았다는 참담한 기록을 남겼다. 그뿐 아니다. 무려 1000만 명이 전쟁통에 가족 친지와 생이별 당한 채 70년을 한숨과 눈물로 이제나저제나 하며 만남을 기다리다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필자의 장인, 장모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전쟁 전 두 분은 남한 땅이었던 개성, 정확하게 지금의 판문점이 있는 개풍에서 사셨다. 두 가정은 꽤 큰 인삼농장을 경영하는 부농이었고 담 하나 사이를 둔 이웃으로 사시며 양가 어른들끼리 혼인이 약조된 가운데 교제를 이어가던 사이였다.
 
사건의 발단은 6·25 발발 보름 전에 일어났다. 장인 부친께서 무엇을 감지하셨는지 20살 청년 장인을 불러 얼마간의 돈이 든 전대를 내미시며 서울 친척 집으로 피신해 있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보름 후 6월 25일, 오전 9시 개성이 함락되었고 정오에는 동두천, 포천의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전해 듣는다. 급한 마음에 우선 고향 땅으로 가기로 한다.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서울과 개성을 잇는 국도를 따라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이미 도로는 피난민으로 아비규환이다. 모두의 발걸음을 그슬러 북으로 향하는 장인을 보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눈길이었으나 개의할 여유조차 없었다.
 
반나절을 달려 절반 길인 금천 근방에 도달하였는데 갑자기 자전거가 도로 위에 멈춰섰다. 비포장도로를 마구 달리다 보니 체인이 끊어지는 낭패가 생긴 것이다. 할 수 없이 자전거를 끌어 갓길에 세운 채 끊어진 체인을 연결해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소용없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무더위 속에 망가진 자전거와 씨름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OO 오빠 아니냐?’며 달려와 목에 매달려 울먹이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이 무슨 하늘의 도움이냐’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피난대열 속에 있던 그리운 어머니와 두 남동생, 18살의 약혼자와 형제, 자매들이 우연히 장인을 발견한 것이다. 한참 후 장인의 북상 의지를 확인한 가족들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말리고 나섰다. 장남으로 지금 만난 가족을 팽개치고 자기 뜻만 고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싶어 발길을 돌린 것이 부친에게 너무 불효였다며 지난 70년을 안타까워하시며 사신다.
 
이산의 아픔은 장모님도 마찬가지다. 양부모와 형제 대부분을 북에 두시고 남동생 한 분만 대동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30여년 전 캐나다의 어떤 단체를 통해 남동생 소식을 전해 듣고 일 년에 한두 번 서신 교환이 있었지만 ‘친애하는 김일성 동지 덕분에 잘 먹고 잘산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러다 2004년 필자가 평양을 방문하면서 안내원의 주선으로 남동생 아들 며느리를 만나 약간의 돈과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장인 장모님은 고향방문단의 일행으로 개성을 찾았지만 통제로 인해 결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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